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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주역 시즌 3

[내인생의주역시즌3] 이기려는 마음 없이 싸우기

by 북드라망 2024. 2. 7.

이기려는 마음 없이 싸우기

 

䷅ 天水訟(천수송)

訟, 有孚, 窒, 惕, 中吉, 終凶. 利見大人, 不利涉大川. (송, 유부, 질, 척, 중길, 종흉, 리견대인, 불리섭대천.) 
송괘는 진실한 믿음이 있으나 막혀서 두려우니, 중도를 지키면 길하고 끝까지 가면 흉하다. 대인을 만나면 이롭고 큰 강을 건너는 것이 이롭지 않다.

初六, 不永所事, 小有言, 終吉. (초육, 불영소사, 소유언, 종길.)
초육효, 다투는 일을 끝까지 하지 않으면 약간 구설수가 있으나 결국에는 길하리라.

九二, 不克訟, 歸而逋, 其邑人三百戶, 无眚. (구이, 불극송, 귀이포, 기읍인삼백호, 무생.)
구이효, 다툼을 이기지 못하여, 돌아가 도망가니, 그 마을 사람이 3백호 정도이면, 화를 자초하지 않으리라

六三, 食舊德, 貞厲, 終吉, 或從王事, 无成. (육삼, 식구덕, 정려, 종길, 혹종왕사, 무성.)
육삼효, 예전부터 해오던 일을 하며 먹고살아 가니, 올바름을 굳게 지키면 위태로우나, 결국에는 길하다. 혹 나랏일에 종사하여도, 공을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없다.

九四, 不克訟, 復卽命, 渝, 安貞吉. (구사, 불극송, 복즉명, 투, 안정길.)
구사효, 다툼을 감당하지 못하니, 돌아와 자신에게 주어진 본분에 나아가고, 마음을 바꾸어 편안하게 여기고 올바름을 굳게 지키면 길하다.

九五, 訟, 元吉. (구오, 송, 원길.)
구오효, 다툼에 크게 길하다.

上九, 或錫之鞶帶, 終朝三褫之. (상구, 혹석지반대, 종조삼체지.)
상구효, 혹 큰 띠를 하사받더라도, 하루아침이 끝나기도 전에 세 번 빼앗기리라.

 


‘공동체’라고 하면 흔히 떠올려지는 이미지가 있다. 아무런 불협화음도 없이 언제나 웃음꽃이 만발하는 곳. 한없이 서로를 배려하며 화목하게 지내는 곳. 아마도 이런 이미지에는 거칠다 못해 살벌하기까지 한 사회생활에서 벗어나고픈 로망이 담겨 있을게다. 하지만 로망은 로망일 뿐. 공동체 또한 불협화음에 삐거덕거리고, 불화로 몸살을 앓는다. 물론 사회생활에서 겪게 되는 일들과는 그 결이 완전히 다르기는 하지만 말이다. 

 



〈남산 강학원〉은 공부 공동체다. 단순히 책의 지식을 습득하고 글쓰기의 스킬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공부를 비전으로 함께 삶을 도모하는 곳이라는 거다. 나는 이 공동체에서 10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내가 겪은 공동체는 한 마디로 사건 사고의 퍼레이드였다. 오죽하면 ‘하나의 사건은 또 다른 사건으로 잊힌다’는 우스갯소리가 떠돌까. 연구실 이곳저곳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크고 작은 다툼들, 그리고 웃음꽃만큼이나 시도 때도 없이 피어나는 눈물꽃들. 이렇게 다툼이 일상다반사인 현실을 살고 있어서였을까. ‘천수송(天水訟)’괘가 눈에 들어왔다. 

 

‘송(訟)’은 다툼 혹은 송사를 상징한다. 해서 송괘(訟卦)를 처음 마주하게 되면 거기서 다툼이나 소송에서 이기는 법이 나올까 싶어 기대하게 된다. 하나 곧 보겠지만, 송괘의 도는 다툼에서 이기는 법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물론 송괘는 송사를 다스리는 법을 담고 있다. 하지만 ‘다스리는 것’과 ‘이기는 것’은 천양지차다. 바로 여기에 송괘의 묘미가 있다. 

 

우선 다툼이 일어나는 원인부터 알아보자. 송괘의 위에는 하늘이, 아래에는 물이 자리하고 있다. 하늘은 위를 향하고, 물은 아래로 흐르려 하니 가는 방향이 다름을 알 수 있다. 하늘과 물의 성격으로 좀 더 들어가 보면, 하늘은 ‘건(乾)’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 굳세고 강하다. 독일의 저명한 중국학자 리하르트 빌헬름은 ‘건’을 “빗겨감이 없이 앞으로 나아가려 드는 경향”으로, “그 움직임이 멈춰질 수는 있어도 후퇴는 없”는 기운으로 읽는다. 반면 물은 ‘감(坎)’의 성격을 띠고 있다. 감은 구덩이와 험난함을 뜻하며, 그런 만큼 함부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장애나 막힘의 기운을 상징한다. 뭔가 느낌적인 느낌이 오지 않는가. 한쪽은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려는 기운, 다른 쪽은 꽉 막힌 기운. 이 둘이 마주쳤으니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지사다. 

흔히 이야기되듯,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이치를 흔하게 이야기하는 만큼이나 쉬이 잊는다. 다툼이란 ‘건’ 혼자서도, ‘감’ 혼자서도 일으킬 수 없다. “강건하면서 장애가 없다면 다툼이 생겨나지 않고……막힘이 있고 또 강건하므로 다툼이 된다.”(정이천, 《주역》, 심의용 역, 글항아리, 182쪽) 사실 ‘건’의 기운 그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그냥 어떤 리듬, 또는 힘을 쓰는 특정 방식을 나타낼 뿐이다. 감 또한 마찬가지다. 문제는 건과 감이 위아래로 마주쳤다는 데 있다. 뚫고 나가려는 기운과 막아서는 기운의 마주침. 이 ‘마주침’이 다툼의 원인이다. 

이것이 송괘가 가진 다툼의 특징이다. 주역에는 다툼을 내포한 괘들이 많다. 가깝게는 군사와 군중을 상징하는 ‘사(師)’괘가 그러하고, 멀리로는 혁명을 나타내는 ‘혁(革)’괘가 그러하다. 그런 다툼들과 송괘가 다른 점은 그 싸움이 리듬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나아가려는 기운과 막힌 기운의 부딪힘! 하여 이런 다툼의 때에는 누가 옳은지 그른지, 혹은 누가 싸움의 원인 제공자인지를 따져 묻는 건 별 소용이 없다. 더욱이 송괘의 중심에는 ‘유부(有孚), 진실한 믿음이 있다’가 자리한다. 뜻의 진실함이 그 밑바탕에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하여 송괘는 이 진실한 뜻 위에서 서로 다른 리듬이 만들어내는 다툼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연구실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다툼들은 송괘와 맞닿아 있다. 연구실은 공동체인만큼 다양한 활동들이 펼쳐진다. 주방, 강감찬 TV, 강좌나 세미나 매니저 등등. 그리고 이 활동들에 꼭 따라붙는 또 하나의 활동이 있으니, 다름 아닌 ‘싸움’이다. 함께 활동을 하다보면 서로 의견이 갈라지는 경우들이 다반사다. 그런데 이때, 서로의 의견에 설득이 되지 않는 일이 생긴다. 내 생각이 더 괜찮아 보이는 거다. 물론 양쪽 모두 활동을 잘 해보고 싶다는 마음에서는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런 뜻의 진실성은 계속되는 어긋남에서 쉽게 잊힌다. 원래의 뜻은 사라지고, ‘내가 맞네, 네가 틀렸네’라는 논쟁이 오가고, 결국에는 감정이 상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 상할 대로 상한 기분은 묘하게도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다는 것을 확인받고픈 마음으로 이어진다. 송사의 마음이다. 

이런 일은 비단 연구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연인 간의 관계에서, 혹은 부부 관계에서, 혹은 부모·자식 간의 관계, 친구 관계에서 서로가 잘해보자고 했던 말과 행동이 일을 망쳐버리기가 부지기수다. 처음의 그 뜻은 잊히고, 서로의 리듬이 다르다는 것은 인지하지 못하고, 오로지 자기 생각이 관철되지 않는 그것에만 마음이 상하는 것. 결국 이런 다툼은 한쪽이 잘못했다고, 네가 맞았다고 무릎을 꿇고 나서야 끝이 나곤 한다. 이것이 다름 아닌 송사다. 송사라고 하면 법정이나 재판 같은 것을 떠올리기 쉽다. 물론 그것이 송사의 형태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송사의 마음자리다. 설령 그것이 법정 싸움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았더라도 옳고 그름을 따지며 기어이 내가 이겼음을, 그리고 네가 졌음을 확인받고 싶은 마음, 이렇게 끝장을 봐야 속이 풀리는 것. 이런 상황이 송사인 것이다. 

 



주역의 송괘는 바로 이런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다툼과 송사의 도를 나타내는 핵심을 꼽자면, ‘유부(有孚)’와 ‘종흉(終凶)’이다. 유부, 진실한 믿음이 있을 것. 종흉, 끝까지 가면 흉하다는 것. 이 둘이 송괘의 키워드다. 그리고 이 키워드들을 잘 담고 있는 것이 송괘의 첫 번째 효인, “初六, 不永所事, 小有言, 終吉. (초육, 불영소사, 소유언, 종길) 초육효, 다투는 일을 끝까지 하지 않으면 약간 구설수가 있으나 결국에는 길하리라.”가 아닐까 싶다.

초효는 다툼의 시작이다. 그 시작에서 주역은 말한다. 불영소사(不永所事), 길게 일삼을 것이 아니다! 바꿔 말해, 끝장을 보려 해서는 안 된다는 거다. 여기에서 ‘송(訟)’아닌 ‘사(事)’를 쓴 이유는 다툼의 초반이라 아직 소송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길게 일삼지 말라는 것은 지금의 다툼을 송사의 마음으로까지 이어지게 하지 말고 멈추라는 거다. 그리고 그렇게 멈추면 길함이 열린다는 것이다. 

송사의 마음, 그것은 상대를 반드시 이겨 먹겠다는 마음이다. 하지만 송사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송불가성야, 訟不可成也]. 소동파 선생님의 말씀대로, “어려움은 다툼에서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없는데, 또다시 다툼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서로의 부딪힘을 더욱 심하게 만들 뿐이다.”(소식, 『동파역전』, 성상구 역, 청계, 94쪽) 정말이지 그렇다. 송사란 반드시 한쪽은 이기고 한쪽은 지게 되어 있다. 싸움에서 진 쪽은 설령 겉으로는 이긴 쪽을 따르더라도, 마음에는 상대에 대한 미움, 나아가서는 원한의 감정을 지니게 되어 있다. 하여 송괘의 마지막 효인 상효는 송사의 끝이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上九, 或錫之鞶帶, 終朝三褫之.(상구, 혹석지반대, 종조삼체지) 상구효, 혹 큰 띠를 하사받더라도, 하루아침이 끝나기도 전에 세 번 빼앗기리라.” 정이천은 이 효의 의미를 이렇게 푼다. 설령 다툼을 잘해 이겨도, 다른 사람을 원수로 만들면서 얻은 것이니 편히 보존할 수 없다고. 

이처럼 송사의 끝에는 항시 불안과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그럼에도 함께 일을 도모하다 다툼이 일어나면 부지불식간에 지기 싫다는 마음이 올라온다. 왠지 내가 무시당하는 것 같고, 잘난 체하는 듯 하는 상대방도 꼴 보기가 싫고. 그럼 곧 내가 더 옳다는 생각이 마음을 차지하기 시작한다. 바로 이럴 때 이 마음을 접는 것.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함께 일을 도모했을 때의 그 진실한 마음자리를 지키는 것. 그것이 다툼의 시작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하여 연구실의 많은 다툼들은 자신에게 이런 질문들을 던지는 것에서 시작하곤 한다. 그래서? 그래서 내가 이기면 어떻게 되는 건데? 대체 그렇게 내가 옳은 것을 확인받아서 뭘 얻고 싶은 건데? 잠깐의 승리의 쾌감? 그게 정말 여기서 내가 얻고 싶은 건가? 그건 아니다. 내가 공부를 하는 이유, 공동체라는 관계성 위에서 살고 싶은 이유, 그건 좋은 배움을 일구고, 삶의 충만함을 열어가고 싶어서다. 그럼에도 왜 난 이토록 내가 맞았음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걸까. 하나라도 더 배울 수 있다면, 해서 삶의 길을 보는 눈이 좀 더 환해질 수 있다면, 그런 확인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더욱이 누구를 무릎 꿇게 하고 싶은 그 마음으로 어찌 배움과 충만함을 얻을 수 있을까. 

그제야 정신이 번쩍 난다. 내가 빠진 구덩이가 보이고 막힌 마음이 맑아진다. 그리고 알게 된다. 내가 반드시 이기고야 말겠다는 그 강폭한 건(乾)의 마음이 다름 아닌 나를 가로막는 막힘[坎]이었음을! 그리고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나의 진실한 마음[有孚]에 있음을! 이제 나를 무시한다고 여겨졌던 말들은 길을 찾기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들로 바뀐다. 잘난 체한다고 느껴졌던 상대에 대한 질시 역시 좀 더 좋은 길을 아는 친구를 곁에 둔 든든함이 된다. 그렇다. 공부에 대한 진실한 마음 위에서의 다툼은 결코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연인이나 친구 관계, 부부 관계, 부모·자식 관계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서로가 잘해보자고 시작한 일이 다툼이 되고 나아가 서로에게 마음의 상처만 주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처음의 그 뜻은 모두 잊히고, 서로에 대한 악감정만 남는 상황. 이겨도 찝찝하고 지면 처참해지는 이 싸움에 대한 송괘의 처방은 간단하다. 이기려 들지 말라! 처음의 그 진실한 마음을 붙잡아라! 

여기에는 주역의 근본 사상이 깔려 있다.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 낳고 낳는 것을 일컬어 역이라 한다.”(「계사전」) 낳고 살리는 것, 그것이 천지자연의 도(道)라는 것이다. 다툼과 송사의 도(道) 역시 이것 위에 자리한다. 만약 우리가 다툰다면, 그것은 무언가를 낳고 살리기 위해서다. 그러나 송사는 반드시 누군가의 기운을 꺾어버리고 짓밟게 되어 있다. 파괴의 마음, 그것이 송사인 것이다. 그리고 이 파괴의 힘은 고스란히 이긴 사람에게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 이것이 송괘 상효의 의미였다. 하여 다툼이 시작될 때 그것을 송사로 이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불영소사(不永所事)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송괘는 주역에서 여섯 번째로 등장하는 괘다. 이게 좀 묘하다. 주역은 크게 ‘상경’과 ‘하경’으로 나뉜다. 상경은 천지 만물이 펼쳐지는 순서를, 하경은 인간사가 펼쳐지는 순서를 보여준다. 그런데 송괘는 상경에서도 아주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하늘[건괘(乾卦)]과 땅[곤괘(坤卦)]의 기운이 섞이며 혼돈[둔괘(屯卦)]으로 시작된 우주가 어리석음[몽괘(蒙卦)]을 넘어 음식을 먹고 차분히 성장[수괘(需卦)]한다. 그리고는 떡하니 등장하는 괘, 그것이 다툼과 송사인 것이다. 서로가 친밀하게 협력한다는 ‘비괘(比卦)’는 이 송괘가 지나고 나서야 나온다. 어째서 이 우주에는 협력보다 다툼이 앞서서 나오는 것일까. 나의 짧은 공부로는 시원스레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그럼에도 조심스레 추론해보자면, 다툼이야말로 협력의 길을 열어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주역은 음(陰)과 양(陽)이라는 두 대립 되는 기운들을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이 대립은 부정적인 관계가 아니다. 천지자연의 모든 시공간은 이 대립 되는 것들이 함께 만나고 섞이면서 열린다. 무언가를 낳는 것도, 살리는 것도 대립 되는 기운들이 섞여야 가능해진다. 대립 없는 세상,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정체되어 어떤 변화도, 창조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주역이 말해주는 우주의 또 다른 이치다. 

송괘는 이런 대립의 때다. 진실한 뜻은 있으나 건과 감이 그 방향을 달리하고 있어 서로 부딪히는 상황. 바꿔 말해 이는 한 뿌리로부터 서로 다른 것들이 분화되어 나오면서 일어나는 대립이라 할 수 있다. 천지를 펼쳐나가는 길 위에서 서로 차이 나는 것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며 다투는 때. 공자는 바로 이 차이를 조화의 근본으로 보았다. 하여 말한다. “군자 화이부동, 소인 동이불화 (君子 和而不同, 小人 同而不和. 군자는 조화를 이루나 같아지지 않고, 소인은 같아지나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 『논어』, 「자로」 중)”라고. 서로 똑같은 것들 사이에는 생성도 변화도 그리고 친밀한 협력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다른 것들만이 그렇게 서로 다르기에 함께 길을 열어갈 수 있다. 

 



이처럼 송괘의 다툼은 차이나는 것들로의 분화이자, 이것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역동적인 상호작용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조화를 위한 조건이자 동력이 된다. 하지만 이런 대립이 송사가 되면 문제가 달라진다. 이제는 누구 하나는 죽어야 하는 게임이 된다. 생성이 아닌 파괴의 현장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하여 송괘는 주역의 여섯 번째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다툼은 꼭 필요하다. 그래야만 친밀한 협력이 가능하다. 단, 그것이 송사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한에서. 

연구실이 다툼들로 바람 잘 날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일 거다. 서로가 진정한 사우(師友, 스승이자 벗)가 되어가는 길 위에서 다툼은 피할 수 없는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 돌아보면 그렇다. 연구실처럼 함께 삶을 도모하는 관계가 아니라면 그렇게 다툴 일도 없을 거다. 적당히 좋은 게 좋은 거지하고 넘어가거나, 아니면 앞뒤 볼 거 없이 그냥 소송으로 문제를 해결해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공동체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적당히 보아 넘길 수도, 넘겨서도 안 되며, 그렇다고 원수가 될 수도 없는 거다.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함께 삶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다툼의 과정을 통과할 수밖에 없다. 좀 실망스러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현실인 것을. 다툼 없는 공동체는 환상이다. 아니, 그건 공동체가 시들어가고 있다는 징후다. 왜? 생각해보라. 아무런 차이들이 없는 공동체, 한 명이 말하면 모두가 그저 ‘네!’라고 말하는 획일화된 기운이 지배하는 공동체. 거기에 어떤 삶의 활력이 있을까. 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툼을 다스리는 지혜다. 이기려는 마음 없이 싸우기! 그 싸움의 기예가 공동체의 다툼을 삶을 살리는 변화로 만들어낼 것이다. 

 

글_근 영(글공방 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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