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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주역 시즌 3

[내인생의주역시즌3] 따름의 자유, 나의 천리를 따른다는 것(1)

by 북드라망 2024. 2. 14.

따름의 자유, 나의 천리를 따른다는 것(1)

 

 

䷐ 澤雷隨(택뢰수)
隨, 元亨, 利貞, 无咎 (수, 원형, 리정, 무구)
수괘는 크게 형통하니 바르게 함이 이롭고 허물이 없다.

初九, 官有渝, 貞, 吉, 出門交有功 (초구, 관유투, 정, 길, 출문교유공)
초구효, 책임을 맡은 것에 변화가 있으니 바르게 하면 길하고 문 밖으로 나가 사귀면 공이 있다.

六二, 係小子, 失丈夫 (육이, 계소자, 실장부)
육이효, 소인배에게 얽매이면 장부를 잃는다.

六三, 係丈夫, 失小子, 隨, 有求, 得, 利居貞 (육삼, 계장부, 실소자, 수, 유구, 득, 리거정)
육삼효, 장부를 따르고 소인배를 버리므로 민심이 따르고 구하는 것이 있어 얻으니 바르게 자신을 지키는 것이 이롭다.

九四, 隨有獲, 貞, 凶, 有孚, 在道, 以明, 何咎! (구사, 수유획, 정, 흉, 유부, 재도, 이명, 하구)
구사효, 민심이 따르는데 차지하려는 바가 있으면 올바르더라도 흉하다. 진실한 믿음이 있고 도리를 지키면서 명철하게 처신하면,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九五, 孚于嘉, 吉 (구오, 부우가, 길)
구오효, 아름다움을 깊이 믿으니 길하다.

上六, 拘係之, 乃從維之, 王用享于西山 (상육, 구계지, 내종유지, 왕용향우서산)
상육효, 붙잡아 묶어 놓고 또한 민심이 따르는 것을 동여매니, 왕이 서산에서 형통할 수 있었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 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한용운, <복종(服從)>)

 


시인은 복종을 좋아한다고 한다. 복종은 자유보다 달콤하고 행복하다고! 얼핏 들으면 무슨 이상한 소리인가 싶지만, 한 가지 전제만 있으면 된다. 복종하고 싶은 데 복종한다는 것. 문학적 수사도 아니고 모순도 아니다. 자유를 몰라서도, 자유가 없어서도 아니다. 이것이 복종이고, 이것이 자유다. 시인에게는 복종도 자유다.

복종하고 싶은 데 복종하기! 요컨대 진짜 복종의 자유가 여기에 있다. 나라를 빼앗겨 자유가 억압당하고 굴종이 강요되었던 시절에, 시인은 복종이야말로 강요될 수 없는 자유의 문제임을 이렇듯 간결한 언어로 갈파했다. ‘복종의 자유’ 선언문이라고나 할까. 멋지다. 시인의 복종은 절대적이어서 구차한 덧말이 필요없고, 자발적이어서 자유롭다. 복종이야말로 강요할 수 없다는 것. 나는 오로지 내가 복종하고 싶은 데에 복종하고, 그것이야말로 나의 자유이고 행복이라는 것. 뤼스펙!

<주역>의 隨(수)괘를 궁리하다 한용운 시인의 <복종>이 문득 떠올랐다. 다시 보니 놀라운 언어라는 생각이 든다. 복종이 자유라니! 수(隨) 즉 ‘따라감/따름’의 때를 가리키는 괘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라는 느낌적인 느낌. 따름이란 대개 목적어와 함께 쓰여 ‘무엇을 따르다’는 말로 쓰인다. 즉 어떤 대상에 이끌리는 행위이고, 그 자체로는 좋은 것이라고도 나쁜 것이라고도 할 수 없지만 확실히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행위는 아니다. 수동적이고 반응적인?

<주역>의 64괘 순서로 보면, 17번째 괘인 수괘는 18번째 괘인 고(蠱)괘와 한 쌍으로 묶어 ‘따르고(혹은 따라가서) 개혁하다’는 뜻을 이룬다. 고괘는 글자의 생김새부터 재미있는데 쟁반(皿) 위에 벌레들(蟲)이 득실대고 있다. 그릇에 담긴 음식이 벌레먹고 있는 것이어서 고괘는 썩은 것을 개혁하는 때를 의미한다. 두 괘의 관계로만로 보면 앞에 있는 수괘가 양이고 뒤에 있는 고괘가 음이니, 따라감이 있어야(혹은 따를 수 있어야) 비로소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따른다는 걸 단순히 뭔가에 이끌려 가는 수동적인 행위로만 생각했는데, 수괘에는 다른 의미의 따르는 도가 있다는 말일까. 수괘를 한 번 차근차근 살펴보자.

 



따른다는 걸 단순히 뭔가에 이끌려 가는 수동적인 행위로만 생각했는데, 수괘에는 다른 의미의 따르는 도가 있다는 말일까.
수괘의 풀네임 즉 정식(?) 괘명은 택뢰수(澤雷隨)다. 위에는 연못(택)이, 아래에는 우레(뢰)가 있고 이름[뜻]은 따라감(수)이라는 의미다. 연못에 잠겨있는 우레라는 말인데, 형상을 떠올려보면 좀 이상하다. 우레라면 보통 하늘에 있지 않나?(나는 지금 우르릉 쾅쾅 제우스의 번개를 떠올리고 있다). 아니면 최소한 대지를 진동시키는 지진 같은 것이거나!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인 수괘의 우레는 연못 속에 있다. 연못이라니 살짝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이를테면 승천해서 하늘을 날아다녀야 할 용(龍)이 아직 논밭에서 놀고 있다면 좀 모양 빠지는 거 아닌가? 명색이 용인데 말이다.(그런데 실제로 건괘 2효가 그렇다.^^). 하지만 택뢰수는 이름 그대로 형상을 그려보면 연못 속에 담겨있는 우레이다. 우레를 품은 연못? 상상력이 좀 더 필요해질 대목이다.

얼핏 보기엔 잘못된 만남 같지만, 사실 연못과 우레의 만남은 수괘의 ‘따라감’에 관한 중요한 뜻이 담겨있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상상해보자. 우레가 움직이고 연못이 출렁인다. 하늘에서 세상을 윽박(!)지르고 위세를 부려야 어울릴 것 같은 우레가 작은(상대적으로) 물 속에 담겨있는 셈이다. 보기에 따라선 우레의 굴욕 같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수괘에 보이는 우레와 연못의 관계는 강한 것이 스스로 유약한 것의 아래로 내려가 따르는 때에 관한 상징이기 때문이다.(수괘의 양강한 초효는 음유한 2효, 3효 밑으로 가서 따른다). 강한 것이 유약한 것의 아래로 기꺼이 내려가 따른다는 것. 왜? 때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주역>은 변화의 원리를 설명하는 책이지만 그 변화의 원리란 한 마디로 변화의 때[時]를 읽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주역>은 때를 읽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컨대 내가 점을 쳐서 택뢰수가 나왔다면(일단 효는 논외로 하고), 이 말은 내가 지금 따름의 때에 처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그런데 그 따름의 때라는 게 어떠한 것인지는 수괘의 여러 특성들이 설명하고 있다. 그 한 가지 특성이 강한 것이 유약한 것을 따라야 하는 때라는 설명이다. 이 말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따름의 의미를 낯설게 만든다. 우리에게 따른다는 말은 일차적으로 힘 등에 굴복되는 비자발적 상황 등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수괘는 바로 이 대목을 뒤집는다. 일단 강한 것이 스스로 낮은 자리에서 약한 것을 따른다고. 아니 그러한 때라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강하다는 것과 약하다는 것은 상대적인 관계일 뿐이다. 다시 말해 지금 나의 상황에서 나보다 강하고 약한 상대가 있을 뿐 절대적인 강/약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따름의 때라는 말은, 상대적으로 약한 상대를 따르라는 말에 방점이 있다기보다 좀 더 근본적인 질문에 닿아 있는 것이 아닐까. 이를테면 강한 것으로 하여금 스스로 유약한 것을 따르게 하는 그 따름의 도(이치)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일 수도 있다. 강한 것이어서 유약한 것을 따른 것이 아니라, 유약한 것을 따를 수 있기 때문에 강한 것이 아닐까. 앞에서 본 시인의 말을 잠시 다시 빌린다면 복종하고 싶은 곳에 복종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인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일까. 따라감의 때인 수괘는 크게 형통하다. 그리고 올바른 것이 이롭다. 그런데 이쯤 되면 또다른 의문이 생긴다. 때를 따른다는 건 어떻게 하는 걸까, 라는 문제. 시대의 대체적인 흐름을, 그러니까 시세를 따른다는 말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1960년대 이른바 ‘대약진운동’에 실패한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은 악명 높은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 명목상으로야 전근대 문화와 자본주의 문화를 비판한다는 것이었지만 이로 인해 어린 학생들로 구성된 ‘홍위병’들이 시세를 따라 중국 전역에 퍼졌다. 결과는? 심각한 세대간 단절과 회생불가능한 수준의 전통 파괴 등 사실상 문화대혁명은 실패했다. 만약 수괘의 따르는 도리가 단지 시세를 의미한다면 문화대혁명 시기의 이들 홍위병들은 그야말로 시세를 가장 잘 따른 이들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때를 따르는 것과 시세를 따르는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때를 따른다는 건 하늘의 이치 즉 천리(天理)를 따르는 것이다. 시세를 따른다는 건 그 시절의 분위기 같은 것일 수 있겠다. 시세와 천리가 일치될 수도 있겠지만, 시세가 곧 천리는 아니다. 그런데 천리는 또 뭔가. 천리라고 하면 추상적이고 어렵게 느껴질 것 같은데, 좀 더 쉬운 말로 하자면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남들이 옳다고 하니까 옳은 것 같아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행하는 것이다. 그럴 때라야 나는 강하더라도 기꺼이 유약한 것을 따를 수도 있고, 또 유약한 것을 기꺼이 따를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진정 강한 것이다. (2편에서 계속)

 

 

글_문성환(글공방 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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