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지곤, ‘서리’를 경계하는 마음
䷁ 重地坤(중지곤)
坤, 元,亨,利, 牝馬之貞, 君子有攸往. 先迷, 後得 主利. 西南得朋, 東北喪朋, 安貞, 吉. 곤, 원, 형, 리, 빈마지정. 군자유유왕. 선미, 후득, 주리, 서남득붕, 동북상붕, 안정, 길.
곤은 만물이 생겨나는 근원이고, 만물을 성장시켜 형통하게 하고, 만물을 촉진시켜 이롭게 하고, 만물을 완성시키는 암말의 올바름이니 군자가 나아갈 바를 둔다. 앞장서면 헤메게 되고 뒤따르면 항상된 도리를 얻을 것이니 이로움을 주관한다. 서쪽⦁남쪽은 벗을 얻고 동쪽⦁북쪽은 벗을 잃으니 편안히 여기고 올바름을 굳게 지켜야 길하다.
初六, 履霜, 堅氷至. 초육, 리상, 견빙지.
초육효,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이르게 된다.
六二, 直方大. 不習无不利. 육이, 직방대. 불습무불리.
육이효, 곧고 반듯하고 위대하다. 애써 익히지 않아도 이롭지 않음이 없다.
六三, 含章可貞, 或從王事, 无成有終. 육삼, 함장가정, 혹종왕사, 무성유종.
육삼효, 안으로 아름다움을 머금어 올바름을 지킬 수 있으니 혹 나랏일에 종사하더라도, 그 성공을 자기 것으로 하지 말고 끝마침이 있어야 한다.
六四, 括囊, 无咎无譽. 육사, 괄낭, 무구무예.
육사효, 주머니를 묶으면 허물이 없고 영예도 없으리라.
六五, 黃裳, 元吉. 육오, 황상, 원길.
육오효, 황색 치마이면 크게 좋고 길하다.
上六, 龍戰于野, 其血玄黃. 상육, 용전우야, 기혈현황
상육효, 용이 들판에서 싸우니, 그 피가 검고 누르다.
用六, 利永貞. 용육, 리영정.
용육, 오래도록 지속함과 올바름을 굳게 지키는 것이 이롭다.
영화 <기생충>은 곱등이가 득실거리는 반 지하를 배경으로 시작한다. 기택이네 가족은 주변 카페의 무료 와이파이를 찾아다니고, 피자가게 포장박스 접기 아르바이트로 겨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가난하기는 해도 여느 평범한 가족과 다름없는 모습이다. 그런데 영화는 놀랍게도 대학 증명서를 위조하고, 거짓말에 사기극까지 난무하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거기다 영화의 후반부는 기택이네에게 닥친, 기택이네가 저지른 참혹한 살인 사건의 현장으로 치닫게 되는데. 평범하게만 보였던 이들 가족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무심코 저지른 행동이 되돌릴 수 없는 상황으로 커지는 경우가 있다. 마침! 『주역』에는 작고 사소한 욕심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경계할 수 있는 효사(爻辭)가 있는데, 바로 중지곤(重地坤)괘의 초효다.
먼저 중지곤괘는 6개의 효가 모두 음(陰)으로 되어 있다. 『주역』에서 음(陰)은 차갑고, 정적이며, 수축하는 기운이다. 그래서 모든 효가 음으로만 되어 있는 중지곤괘의 괘상에서는 겨울의 서늘함이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마치 겨울의 초입을 알리기라도 하듯, 가장 낮은 자리인 초효(初爻)에는 ‘履霜’(리상) 서리가 내려 앉았고, 그것을 밟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중지곤괘의 ‘초효’는 『주역』을 이루는 386개의 효들 중 하늘과 땅에 가장 처음으로 등장하는 음효(陰爻)다. 음의 기운이 처음으로 천지(天地)에 나타나면서 서서히 응결되고, 응축되어 ‘서리’로써 만물(萬物)에 내려 앉는 것이다. 천지를 뒤덮은 얇은 이 서리는 우리 마음안에 조금씩 싹트는 ‘작은 욕심’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욕심은 아직 삶에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지는 않고 있지만, 음(陰)이라는 성질과 대비해서 볼 때 반드시 조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음의 성격은 약하고 유(柔)하기 때문에 어떤 것에 쉽게 미혹(迷惑)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욕심 그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그 욕심을 간과하고 합리시키는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 초효는 이 마음을 ‘서리’라고 표현하고 있다. 서리를 밟았을 때, 어떤 태도로 싹트고 있는 욕심과 타협하고 있는지 영화 <기생충>으로 돌아가 보자.
어느 날, 기택의 아들 기우에게 고액 과외 제안이 들어온다. 그러나 기우는 과외를 할 만큼의 학력 조건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동생 기정의 기가 막힌 포토샵 실력으로 명문 대학교 재학 증명서를 위조하게 된다. 기우는 가짜 대학 증명서를 들고 IT업계 CEO인 박사장네로 향한다. 그런 기우를 바라보며 아버지 기택은 “아들아 아버지는 네가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기우도 스스로가 대견한 듯 “아버지 저는 이게 위조나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전 내년에 이 대학 꼭 갈 거거든요. 뭐 서류만 좀 미리 뗐다고 생각하고 있어요.”라고 답한다.
짧은 시간 동안 어마어마한 장면들이 지나간다. 위조라는 것을 간단하게, 그것도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피시방에서 저지르는 기정의 행동이 놀랍기만 하다. 거기다 위조가 범죄가 아니라는 기우의 저 당당함은 대체 뭐란 말인가? 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그런 아들과 딸을 자랑스러워하는 기택의 모습이다. 보통의 아버지로서는 결코 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이다. “아들아! 넌 다 계획이 있구나!” <기생충>의 시그니처 대사인 기택의 말이 이들 가족에게 내려앉은 서리다.
내 삶에서도 이러한 서리를 밟은 적이 있었다. “사실 나도 다 계획이 있었다!” 신용카드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을 때, 카드사의 돈으로 신속하게 해결하고, 다음 달에 조금씩 절약해서 생활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내 계획과는 달리 신용카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쓰이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지갑 속에는 신용카드가 무려 5개나 불어 있었다.
신용카드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 데에는 돈의 맛을 일찍 알았던 것에 있었다. 사회 초년생일 무렵, 친구들에 비해 경제활동을 일찍 시작한 나는 지갑이 조금 ‘두둑’했다. 그러다 보니 밥이며, 술이며, 심지어 게임에 들어가는 비용까지도 전부 내가 계산했다. 거기다 회사에서는 사회생활을 잘~하고 싶은 마음에 사교적인 모임을 자주 가졌다. 시원~시원하게 카드를 내밀 때마다 남들이 나를 멋있게 바라봐 주는 그 달콤함을 맛볼 때, 돈을 쓰는 것이 가장 보람차다고 느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가지고 있는 돈으로만 생활해야 하는 체크카드가 한계처럼 여겨졌다.
OO카드에서 첫 신용카드를 만들었다. 더 이상 체크카드에 돈이 없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먹고 마실 때뿐만 아니라, 남들이 선호하는 가치에 맞게 옷이며 악세사리를 살 때에도 신용카드는 가격의 구애를 받지 않게 해주었다. 거기다 어쩌다 사고 싶은 물건이 조금 비싸더라도 ‘할부’라는 제도(?)가 크게 한 몫을 하기도 했다. 카드사의 돈으로 미리 결제를 하고, 다달이 분할로 갚는 이 간편함과 편리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입학할 학교라며 대학 증명서를 ‘위조’한 기우의 욕망과 ‘어차피 다음 달 월급으로 갚을 텐데 미리 좀 땡겨 쓴다고 무슨 문제가 되겠어?’라며 스스로 합리화하는 내 욕망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중지곤괘의 초효의 시선으로 봤을 때, 사실 신용카드를 무계획! 적으로 쓰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돈을 쓸 때 달콤한 욕망이 더 강렬했기 때문에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나의 이러한 삶의 모습이 내가 밟은 서리다. 이쯤 되면 서리를 밟고 난 다음에 오는 “堅氷地(견빙지)” 단단한 얼음에 이른다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서리를 밟았다는 것은 이제 곧 추운 겨울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다. 이 지점에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얇고 사소해 보이는 서리를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얇은 서리라고 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예상치 못한 겨울의 추위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기택이네가 박사장네서 겪은 끔찍한 사건은 ‘위조’와 ‘거짓말’이라는 서리로 시작된 겨울의 매서운 추위다. 동생 기정이가 죽고, 기택은 박사장을 죽인 살인자가 되어 캄캄한 지하실로 도피한다. 밝고 따뜻하게 느껴지던 영화 초반부의 장면과는 대조적으로 차갑고 어두운 분위기로 전환되는 장면들이 기택이네에게 닥친 ‘堅氷至’견빙지다. 기택이네에게 찾아온 겨울은 가난한 반지하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작고 사소한 욕심이 커지고 성대해져 범죄를 저지르도록 한 거짓과 탐욕에 있었던 것이다.
신용카드의 달콤함이 쌓이고 누적되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얼음’이 되어 버렸다. 그 당시 나의 한 달 수입은 150만 원 남짓이었다. 그런데 신용카드를 쓰고 나서부터는 매달 명세서에 찍힌 카드빚이 250만원이 넘는 것이었다. 다음 달도, 그 다음 달도 카드사에 돈을 갚고 나면 통장에 잔고가 남아있질 않았다. 결국 신용카드가 아니면 기본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마침내 가지고 있던 카드가 하나 둘 씩 정지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비 욕망과 남들이 부러워하는 달콤한 시선을 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멈추지 않고 다른 카드사에서 카드를 하나, 둘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빚을 빚으로 막는 악순환이 시작되었고, 내 삶은 카드빚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이렇듯, 얇은 서리가 단단한 얼음에 이르도록 알아채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초효는 중지곤괘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효(二爻)와 오효(五爻)에 비해 아직은 어리고 다소 서툰 시기에 속한다. 거기다 양(陽)의 자리에 음효(陰爻)가 왔기 때문에 자리(位) 또한 바르지 못하고, 주변에는 도와줄 수 있는 양효(陽爻)가 하나도 없다. 초효의 이러한 자질과 위치는 앞에서 말했듯이 쉽게 미혹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점에서 정이천은 중지곤괘 초효에 대해 “소인의 세력은 처음에는 미약하지만 성장하면 점차로 성대한 세력에 이르므로, 시작부터 경계했다.”(정이천, 『주역』, 글항아리, 102쪽) 라고 말한다. 신용카드에 미혹되어 빚과 파산이라는 堅氷地(견빙지)에 이르도록 알아채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음의 힘은 한 번에 뻗어나가는 양의 힘과는 달리, 약한 곳에서부터 시작해 점차 쌓이고 누적되어 드러나는 힘이다. 그렇기 때문에 금방 눈에 띄어 실수와 과실을 빨리 고칠 수 있는 양의 힘과는 달리 음의 힘은 쌓이고 잠식되고 난 다음이라야 실수와 과실을 고칠 수 있다. 나름 계획 있게 쓰고자 했던 신용카드의 사용이 파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알아챌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履霜(리상), 堅氷至(견빙지)’ 서리가 단단한 얼음으로 가는 이 필연성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자연의 이치다. 천지에 처음 서리가 내려앉았을 때, 머지않아 혹독한 추위가 닥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만 한 겨울을 조금이나마 지혜롭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주역』 점을 쳤을 때, 중지곤괘의 초효가 나온다면 내 마음에 내려앉은 작고 사소한 욕심을 살펴보고, 이 욕심이 얼음처럼 성대해지고 단단해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 이것이 중지곤괘의 초효가 알려주는 지혜다.
글_고영주(글공방 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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