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몽, 형식을 써서 방향을 틀어라!
䷃ 山水蒙(산수몽)
蒙, 亨.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初筮告, 再三瀆, 瀆則不告. 利貞. (몽, 형 비아구동몽, 동몽구아, 초서곡, 재삼독, 독즉불곡, 리정.)
몽괘는 형통하다. 내가 어린아이에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나를 찾는 것이다. 처음 묻거든 알려주지만 두 번 세 번 물으면 모독하는 것이다. 모독하면 알려주지 않으니 자신을 바르게 지키는 것이 이롭다.
初六, 發蒙, 利用刑人, 用說桎梏, 以往吝. (초육, 발몽, 이용형인, 용탈질곡, 이왕린.)
초육효,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는 초기에는 형벌을 가하듯이 엄격하게 하는 것이 이롭다. 그러고나면 속박하고 있던 차꼬와 수갑을 벗겨주어야 하니 그대로 나아간다면 부끄럽기 때문이다.
九二, 包蒙, 吉. 納婦, 吉, 子克家. (구이, 포몽, 길, 납부, 길, 자극가.)
구이효, 어리석음을 포용해주면 길하다. 부인의 말도 받아들이면 길할 것이니, 자식이 집안일을 잘하는 것이다.
六三, 勿用取女, 見金夫, 不有躬, 无攸利. (육삼, 물용취녀, 견금부, 불유궁, 무유리.)
육삼효, 이런 여자에게 장가들지 말아야 한다. 돈 많은 남자를 보고 자기 몸을 지키지 못하니 이로울 바가 없다.
六四, 困蒙, 吝. (육사, 곤몽, 린.)
육사효, 어리석음에 빠져 곤란을 겪게 되니 부끄럽다.
六五, 童蒙, 吉. (육오, 동몽, 길.)
육오효, 어려서 잘 알지 못하는 것이라 길하다.
上九, 擊蒙, 不利爲寇, 利禦寇. (상구, 격몽, 불리위구, 리어구.)
상구효, 어리석음을 쳐서 일깨워 주는 것이다. 도적이 되는 것은 이롭지 않고 도적을 막는 것이 이롭다.
‘어떻게 살아야 좋은 삶을 살 수 있을까?’ 군대를 전역하고, 항상 내 마음속에 품어온 질문이었다. 그때 당시 나는 사는 게 막막하고, 답답했다. 먹고 사는 게 힘든 것도 아니었고, 관계에서 불편함이 있었던 것도 딱히 아니었다. 단지,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 방향이 없다는 게 참 괴로웠다. 주역에서 말하는 몽(蒙) 괘의 때가 마침 그랬다. 몽은 ‘어린이의 어리석음’을 뜻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나이가 어리고, 지능이 낮다는 의미는 아니다. 산수몽(山水蒙) 괘의 형상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몽 괘는 산(山) 아래에서 샘물(水)이 솟아 나오는 모습이다. 처음 땅 밖으로 나온 이 물(샘물)은 어딘가로 흘러가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그 방향을 모른다. 선현들은 이렇게 방향 없이 흐르는 물을 관찰하여 ‘어린이의 어리석음’(蒙)이라 불렀다. 인생에서 새로운 국면이 펼쳐지면서, 방향을 몰라 갈팡질팡하는 이 몽매한 모습은 그 당시 나의 상황과 겹쳐서 보였다.
방향을 모르면 한 발, 한 발 나아가기가 무섭고 두렵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주역에서는 몽(蒙) 괘의 때를 형통(亨)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몽 괘가 방향을 잃은 상황이면서, 동시에 방향을 찾기 위해 동적으로 움직이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랬다. 이전까지는 내가 방향 없이 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았고, 주변에서 좋다고 하는 방식을 따라갔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좋은 삶을 살 수 있을까?’ 방향을 찾으려고 하는 순간, 그제야 나에게 방향이 없었다는 걸 인지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조금씩 나는 삶의 방향을 묻고, 찾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산다는 게 무엇이고, 좋은 삶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 것이다.
방향을 찾는 게 처음부터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라!’, ‘네 꿈을 펼쳐라!’라는 말들이 쏟아졌고, 또 한쪽에서는 ‘100세 시대, 노후를 대비하라!’, ‘안정적인 직장이 최고다’라는 말들이 쏟아졌고, 그리고 또 한쪽에서는 ‘창의적인 인재가 되어라.’, ‘그러면 연봉이 최고인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다’라는 말들이 쏟아졌다. “샘물이 비로소 나왔는데, 갈 방향을 알지”(『주역』, 정이천, 글항아리. 146쪽) 못하는 것처럼 쏟아지는 말들 속에서 내가 가야 할 길은 어디이고, 무엇이 좋은 방향인지 알 수 없었다. 이 말들 속에 내 존재가 꽉! 막혀버린 기분이었다.
그 상태로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주변을 살펴보는데 나 빼고 다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만 아무런 방향을 잡지 못한 것 같아 불안했다. 이 불안함을 잠재우려면 일단 스펙이라도 쌓아야 했다. 미래에 어떻게 쓰일지는 모르지만, 어떻게든 도움이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자격증을 따고 영어 공부를 했다. 그거라도 붙잡고 있어야 마음이 안정됐다. 하지만 그러한 일상이 나에게 충만함을 주기보다 무언가 허전하고, 부족한 느낌 그리고 스트레스를 주었다. 그래서 매일 밤 게임, 영화와 같은 오락거리가 필요했고. 허무하게 하루를 끝내는 게 아쉬워 습관적으로 새벽 늦게까지 유튜브 영상을 보다 잠들곤 했다. 그리고 이러한 습관은 결국 불면증까지 일으켰다.
어느 순간 이렇게 사는 것이 답답하고, 공허하다는 생각이 극에 달했다. 이렇게 계속 살다 가는 허무함의 늪에서 삶이 끝나버릴 것 같다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어떻게 살아야 좋은 삶을 살 수 있을지 그 방향을 찾아야 했고, 누군가에게 적극적으로 배워야 했다. 그래서 나는 일단 지방에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도서관을 오가며 매일 인문학책도 읽어 보고, 글도 끄적여 보면서 살았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고전을 읽고 쓰면서 그 속에서 얻은 지혜로 좋은 삶을 실험하고 만들어가는 ‘남산강학원’에 접속하게 되었다.
공부라고는 자격증과 성적을 위한 공부만 해보고, 나머지 시간은 게임에 빠져 지내던 나에게 고전을 읽고 쓰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처음에 어떤 고전 책들을 읽는데, 이 책이 정말로 ‘한글’로 이루어진 책이 맞는지 의심이 든 적도 있었고, 똑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읽어도 당최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 괴로웠던 적도 많았다. 하지만 내게 그런 괴로움보다도 고전의 문장 속에서 순간순간 마주치는 지혜의 말들이 주는 감동이 훨씬 컸다. 그렇기에 나는 읽고 쓰기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이 지혜가 나에게 좋은 선물이 되고 있다는 게 느껴졌고, 평생 이렇게 고전을 읽고 쓰면서 살면 누구보다 즐겁고 충만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방향을 찾지 못해 ‘어리석음’ 속을 방황하던 내게 새롭게 나아갈 방향이 생긴 것이다.
몽 괘에서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초기 단계는 가장 아랫자리에 있는 초육효에 해당한다. 초육효는 새로운 길로 이제 막 들어선 ‘초심자’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초심자일 때 단순히 ‘열심히’ 나아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고전을 열심히 ‘읽고 쓰면’, 고전을 통해 얻은 지혜로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좋은 삶을 살고 싶다는 의지를 아무리 세워도, 곧바로 그렇게 살아지는 건 아니었다. 욕망의 문제에 있어서는 특히 그랬다. 동서양의 여러 고전에서는 욕망에 끌려다니지 않는 삶, 욕망의 주인이 되는 삶이 좋은 삶이라고 이야기해주었지만, 나는 너무나도 쉽게 욕망에 끌려다니곤 했다. 치킨과 햄버거에 끌려다녔고, 편의점 음식과 과자에 끌려다녔다. 심지어 그것이 내 몸(아토피)을 헤치고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그랬다. 아토피는 목부터 가슴까지 번졌고, 진물까지 나왔다. 먹고 나면 후회도 많이 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것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중첩되어 온 나의 습관이자 패턴이었기 때문이다.
주역에서 초육효의 때에 “형벌을 가하듯이 엄격하게 하는 것이 이롭다.”라고 말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는데, 기존에 살아왔던 습관과 패턴들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마치, “차꼬와 수갑”이 채워진 것처럼 우리 몸을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놓는 것이다. 나에게 “차꼬와 수갑”은 자극적인 음식에 중독된 몸이었다. 중독에서 벗어나려 이것저것을 해보았으나 의지로는 한계가 있었다. 내 신체에 각인된 관성은 너무 강했기에, 잠시 잠깐 방심하는 순간 원래대로 되돌아가 버리기 일쑤였다. 그렇기에 “어리석음의 질곡”을 없애고 방향을 확! 바꾸려면, 개인의 의지보다 강력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형벌”을 사용하는 것(用刑)이다.
“형벌”이라고 하면 금지와 구속, 나를 강하게 억압하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초육효가 사용하는 형벌은 억압이나 구속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 삶에 있어 온갖 유혹들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삶의 형식’이라 할 수 있다. 나는 하루의 동선이 정말 짧고 단순하다. 도보 15분 거리의 집과 연구실을 오가는 것이 거의 전부다. 그런데도, 그 길 사이에는 햄버거 가게, 치킨 가게, 편의점…. 등 너무나도 많은 유혹이 있다. 그 길을 지나면 딱히 먹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습관적으로 또는 욕망에 이끌려 먹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이러한 패턴이 너무 괴로웠고 그리하여 연구실의 선배, 동료들과 함께 어떻게 음식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구체적인 형식과 지침이 만들어졌다. 지금 내가 특히 중독되어 있는 음식(치킨, 햄버거, 불닭볶음면)은 평생 먹지 않는다는 형식이 말이다. 평생이라니! 나에게는 정말 형벌과도 같은 말이었다. 처음에는 그러한 형식이 너무하다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삶의 방향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나를 그 형식 속으로 넣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선배들과 동료들은 내가 그 형식을 잘 지켜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눈과 귀가 되어 주었다. 이러한 형식의 힘은 아주 셌다! 매일 매일 올라오는 온갖 유혹을 단박에 떨쳐낼 만큼 말이다.
형식을 지켜나가면서, 내 삶에 왜 이런 형식이 필요한지 조금씩 이해하게 됐고 점점 변해가는 내 모습에 즐거웠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햄버거, 치킨, 불닭볶음면과 같은 자극적인 음식에 끌려다니지 않게 됐다. 그러면서 덕분에 자극적인 맛에 가려졌던 담백한 음식들 각각의 맛도 알게 되고, 또 담백하게 음식을 먹었을 때 몸이 가장 편안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아직도 욕망의 주인이 되는 삶,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공부와 수행이 필요하겠지만, 이렇게 중독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지금의 나’를 보고 있으면 신기하기만 하다. ‘중독된 음식을 끊겠다’라는 구체적인 형식과 그 형식을 견고하게 다져준 선배와 동료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만약, 내가 아무런 형식 없이 그대로 살아갔다면(以往) 초육효에서 마지막에 보여주는 것처럼 “차꼬와 수갑”에서 풀려나지 못한 채 어리석음을 부끄럽게(吝) 반복하면서 살았을지 모른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삶의 방향을 과감하게 틀어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이전에 살아왔던 패턴과 습관의 중력으로 방향이 잘 바뀌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우리는 보통 자신의 의지를 원인으로 삼는다. 그래서 오늘은 더 ‘열심히 해야지’, ‘잘해야지’라며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다짐해도 제자리에서만 맴돌기 마련이다. 몽 괘의 초육효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문제가 개인의 의지로는 되지 않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에겐 패턴과 습관을 바꾸어줄 강력한 형식과 틀이 필요하다! 그것만이 우리를 과거의 삶으로부터 떠나게 해주고 새롭고 자유로운 세계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글_문 빈(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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