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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듦리뷰

[나이듦리뷰] 공자와 빨치산, 그리고 노회찬

by 북드라망 2023. 9. 25.

공자와 빨치산, 그리고 노회찬

<공자세가> (사마천) & <아버지의 해방일지>(정지아)

 



호국영령과 민주열사라는 호명
지난 6월6일 현충일, 곳곳에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위국 정신의 높은 뜻”을 기리는 추념식이 있었다. 순국선열은 주로 독립운동가에게, 호국영령은 주로 6.25 전쟁 전사자에게 붙여지는 명칭이란다. 의문이 생겼다. 전쟁에 동원되었다가 속절없이 죽은 젊은이들이 호국영령인가? 이들이 국가를 ‘위해서’ 죽었나? 국가 ‘때문에’ 죽은 게 아니고? 독립운동가의 죽음도 그렇다. 그들도 한 때 사랑과 이별을 경험했을 것이고, 정파 투쟁 속에서(그것 없는 독립운동과 좌파운동은 없다^^) 동지들과 수없는 갈등도 겪었을 것이다. 확신과 회의 사이에서 흔들렸던 적도 여러 번이었을 것이고. 그러나 ‘순국선열’이라는 호명은 삶의 그런 다양한 측면들을 너무 납작하게 만들어버린다.

‘민주열사’도 다르지 않다. 몇 년 전, 노동운동 시절 동지 한 명이 암으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떴다. 50대의 이른 죽음을 안타까워 한 친구들이 추도식을 연다고 했다. 뒤늦게 부고를 접한 나도 애도의 마음으로 그 자리에 참여했다.

추도식은 고인의 약력 보고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공식적인 약력은 학생운동, 노동운동, 진보적 정당운동까지로 뚝 끊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고인은 운동권으로 산 세월보다 생활인으로 산 시간이 더 길었다. 그리고 그 세월은  영예롭기보다는 비루한 쪽에 가까웠다. 경제적인 이유와 성격 차이 등으로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정신없이 사고 치는 사춘기 아들에게 속수무책이었고,  보험 판매원이나 아파트 관리사무소 소장 같은 생계노동으로 하루하루가 고단하였다. 그 시절 우리 대화 주제는 더 이상 사회나 이념, 진보 같은 것이 아니라 먹고 사는 문제, 가족 간의 갈등,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세월이 자칭 ‘혁명 전사’로 살았던 20대 시절보다 더 많이 우리를 사람답게 만들어냈다고, 난, 늘 생각한다. 그런데 추도식 공식적 약력에 그 부분이 다 빠진 것이다.

이어졌던 추도사들. 어떤 사람은 그가 학생운동 시절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는지를 줄줄이 읊어댔다. 나는 거기 앉아서 수십 년 전의 서울대 학생운동의 ‘학림’, ‘무림’ 같은 계보를 듣고 있어야 했다.1) 다른 추도사도 비슷했다. 그들이 애도하고 있는 것이 한 인간의 애달픈 죽음인지, 아니면 박제화된 자신들의 이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나는 결국 추도식 중간에 나와버렸다. 그는 광주 5.18 민주 묘지에 묻혔다.
  


나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로 표상되는 그런 방식의 죽음에 의문을 품는다. 의인의 삶과 죽음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존경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다만 죽음에 대한 그런 규범과 호명이 죽음을 위대한 죽음과 그렇지 않은 죽음, 국가와 민족을 위한 값진 죽음과 그렇지 못한 죽음으로 위계화한다고 의심한다. 그리고 그런 죽음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청절지사(淸節之士)’ 백이 숙제, 더 정확히는 백이 숙제를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상징으로 만들어낸 공자에 이른다고 생각한다. 공자는 죽음에 대해 거의 말한 것이 없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논어>에서도 "아직 삶도 제대로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라고 말한 대목이 죽음에 대한 언급으로 유일하다. 하지만 나는 공자가 생물학적 죽음을 넘어 ‘역사적 죽음’을 사유한 최초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점에서 공자는 죽음에 대해 적게 말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수천 년간 우리 사회를 지배한 죽음의 어떤 형식 – 난 그걸 '죽음의 남성적 형식'이라고 부르고 싶다 –을 창안한 사람이다. 우선 백이 숙제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백이 숙제는 원망했을까? 공자는 원망하지 않았을까?
“백이 숙제는 원망했을까?” 이 질문의 계보는 복잡하다. 맨 처음 등장한 곳은 <논어>이다. 복잡한 정세 속에서 스승의 정치적 행보가 궁금했던 제자 자공이 공자에게 백이 숙제에 관해 묻는다. “백이와 숙제는 원망했을까요?” 공자의 답은, “인(仁)을 구하여 인(仁)을 얻었으니 또 무엇을 원망했겠는가?”(<논어> 술이)였다. 더러운 세상이 꼴 보기 싫어 수양산에 숨어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하다 굶어 죽었다는 옛이야기의 주인공들. 백이 숙제, 이 형제에 대한 공자의 평가는 명쾌하다. 올바른 삶을 추구했고,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죽었다, 무슨 여한이 있겠냐는 것이다. 당시 공자는 50대 후반이었음에도 여전히 결기가 넘친다.

그런데 400년 후 사마천은 『사기』 <백이전>에서 공자의 평가에 딴지를 건다. 사마천 자신은 공자와 달리 백이 숙제가 매우 비통한 상태였고, 사실상 세상을 원망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 근거는 백이 숙제가 남겼다는 ‘채미가(采薇歌)’이다.

 

저 서산에 올라 산중의 고사리나 캐자[登彼西山兮 采其薇矣].
포악함으로 포악함을 바꾸면서도[以暴易暴兮],
그 잘못을 알지 못한다[不知其非矣].
신농(神農)과 우(虞), 하(夏)의 시대는 가고[神農虞夏 忽然沒兮],
우리는 장차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我安適歸矣]?
아! 이제는 죽음 뿐이다[于嗟徂兮],
쇠잔한 우리의 운명이여[命之衰矣]!


그러면서 사마천은 왜 백이 숙제나 공자 제자 안연(顏淵)같이 훌륭한 인물은 굶어 죽거나 요절하고, 도척(盜跖)같이 무도한 인물은 떵떵거리고 살다가 천수를 누리고 죽는지 울분을 토한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백이 숙제에 깊이 감정이입하고 있는 사마천의 마음이다. 어처구니없는 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사기> 완성이라는 ‘대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궁형의 치욕을 받아들인 사마천의 회한과 원망! 백이, 숙제도 그랬으리라!

공자와 사마천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당나라 한유가, 송대에는 개혁파인 왕안석과 보수파인 소식이 동시에, 명대에는 주원장이, 청대에는 황종희 등이 이 백이 숙제 문제를 다룬다. ‘뜨거운 감자’ 같은 질문, 무도한 왕은 죽여도 되는가? 그 밑에서 신하 노릇을 해도 되는가? 혁명과 쿠데타는 정말 다른 것일까? 역적과 충신은 확연히 구별되는 것일까? 백이, 숙제 문제는 유가 정치의 이러한 핵심적 딜레마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내 관심은 백이 숙제도 아니고 유가 정치학의 딜레마도 아니다. 내 질문은 50대 후반에는 백이 숙제가 원망하지 않았다고 본 공자가 과연 70대가 되어서도 자신의 평가를 유지했을까, 라는 점이다. 평생을 헌신했지만 도(道)로 다스려지는 세상, 즉 인간다움(仁)과 서로에 대한 존중(禮)이 살아있는 세상은 오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은 더 무도해졌다. 그런 세상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 공자는 정말, 어떤 회한도 어떤 원망도 없었을까?

 

 

죽음을 역사화하다
알다시피 유가의 비전은 ‘국가 안정과 세계 평화(治國平天下)’이고 그것을 위한 그들의 에토스는 세상 누구보다 먼저 근심하고 다른 사람보다 나중에 즐긴다는 ‘선우후락(先憂後樂)’이다. 따라서 유가 지식인은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국정에 참여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출세 자체가 목표일 수는 없다. 열심히 인품을 닦다 보면 이름이 저절로 문밖을 나가 향기가 퍼지듯 퍼질 것이며, 그렇게 명성이 높아지면 요임금이 순임금을 발탁하듯, 주 문왕이 강태공을 발탁하듯, 어진 임금이 그를 등용할 것이고, 이제 그 임금과 함께 세상의 모든 백성을 새롭게 하여 태평성대를 만들면 되는 것이다.2)  유가 지식인의 정체성은 이런 식으로, 즉 유가 상상계 거울 속의 자아 이상을 통해 구성되었다.

공자도 마찬가지다. 열다섯 때 학문에 뜻을 두고 쉬지 않고 자신을 갈고닦았고3), 자신이 유능해지지 못할까 봐 걱정했지, 남들이 알아주지 않을까 봐 걱정하진 않았다.4)  어느덧 삼십을 넘긴 공자. 사마천의 <공자세가>에 따르면 공자는 이즈음 전국구 인물이 된 것 같다. 이웃 제나라 경공이 공자를 찾아와 역사와 정치에 관해 묻기도 하고 멀리서 제자가 되겠다고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논어>의 문장으로 말하면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하니, 서른쯤엔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즉 멀리서 벗(제자)들이 찾아와 일종의 ‘공자 스쿨’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 무렵 공자는 누구든 자신을 등용한다면 일 년 이내에, 늦어도 삼 년 안에는 확실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5)

그러나 공자는 34세에 첫 구직활동을 시작한 이래 쉰이 넘도록 취직하지 못한다. 공자의 눈이 높았던 것인지 위정자 쪽에서 공자를 부담스러워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둘 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다 51세에 고향 노나라에서 비로소 벼슬에 오른다. 역시 <공자세가>에 따르면 처음에는 중도재(中都宰), 그다음에 사공(司空), 그다음엔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서울시장에서 시작하여 건설부 장관으로 승진하고, 다음에는 법무부 장관 겸 국무총리가 되어 평생의 소망이었던 치국의 경륜을 펼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광의 시절은 너무 짧았다. 공자는 55세에 다시 고향을 떠나 14년을 떠돈다. 한편으로는 유세(遊說)의 길, 다른 한편으로는 정처 없는 유랑의 길이었다. 이 과정에서 공자는 ‘상갓집 개’ 같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고6), 접여(接輿)라는 은둔자에게 무도한 세상에서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는 충고를 듣기도 하고7), 또 다른 은자에게는 자기 힘으로 노동하지도 않고, 오곡도 구분하지 못하면서, 대의명분에 사로잡혀 세상을 떠도는 자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한다.8)  공자가 다시 고향에 돌아온 것은 그의 나이 69세, 죽기 4년 전이었다.

이제 공자는 더 이상 세상에 대한 희망을 품지 않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도 깨닫는다. 그뿐만 아니라 아들 공리(孔鯉)가 50세의 나이로 병들어 죽고, 아들보다 더 사랑했던 제자 안연도 40세에 요절하고, 평생 친구처럼 의지한 제자 자로가 위나라의 내전 과정에서 처참하게 찢겨 죽는 일을 겪어야 했다. 안연이 죽었을 때는 하늘이 자기를 버린다고 슬퍼했으며 자로가 죽었을 때는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이 참척(慘慽)의 고통 속에서 늙은 공자는 어떤 심경이었을까? 사마천은 공자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공자 또한 병이 들어 자공을 불렀다...“사(賜)야, 어찌 이리 늦게 오느냐?”라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크게 탄식하면서 “태산이 무너지려나 보다. 대들보가 내려앉으려나 보다. 학식을 지닌 이가 죽으려나 보다”라고 노래를 읊었다. 또 눈물을 흘리면서...말했다.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고, 근본으로 삼을 만한 것도 없구나. 하나라 사람들은 동쪽 계단에 관을 놓고 염을 하고 주나라 사람들은 서쪽 계단에 관을 놓고 염을 하였으며 은나라 사람들은 두 기둥 사이에 관을 놓고 염을 하였다. 나는 어젯밤 꿈에서 두 기둥 사이에 관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나의 조상은 은나라 사람이다” 공자는 이 일이 있고 나서 7일 후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가 공자 나이 73세이며, 노나라 대공 16년(기원전 479) 4월 기축일이었다.”(사마천, <공자세가>, 예문서원, 116쪽)

 

공자는 원망했을까? 아닐까? 한편에서는 “하늘이 날 버렸다”9)와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다”라는 탄식과 원망이 보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라는 다짐이 보인다.10) 원망하는 현실의 감정과 원망해서는 안 된다는 군자의 규범. 이 속에서 공자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나를 알아주는 것은 하늘”일 것이라 자기 협상, 결국 “역사가 기억할 것이다”라는 죽음에 대한 도식이다. 생전 불우(不遇)했던 삶을 사후 죽음의 역사화를 통해 그 정당성을 보장받는 방법. 공자는 죽어도 죽지 않는(不朽) 죽음의 발명자이다. 공자는 말년에 <춘추>를 지었고, 자신이 쓴 노나라 역사책 <춘추>를 제자들에게 나눠주면서 "후세의 사람들이 나를 아는 것은 <춘추>를 통해서이고 나를 비판하는 것도 역시 <춘추>를 통해서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비장한 죽음이 아니어도 괜찮지 않을까?
수천 년 후 루쉰은 유가의 도덕적 명분주의를 철저히 해체하는 작업을 한다. ‘인의’, ‘도덕’, ‘충절’은 그것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식인(食人)’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광인일기>) 특히 『새로 쓴 옛날 이야기(故事新編)』라는 역사소설 속에서 과거의 성인, 군자들을 재해석한다. 그 중 <고사리를 캔 이야기采薇)>가 백이 숙제 다시쓰기이다.

첫 장면은 주 문왕, 서백창이 만든 양로원이다. 그곳에서 태평하게 살던 백이와 숙제는 어느 날 문왕의 아들 무왕이 자신이 섬기던 은나라 임금과 그의 애첩을 죽이고 쿠데타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두 형제는 망설인다.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무왕의 나라에서 계속 살아야 하는가, 아닌가? 결국 양로원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뿐 아니라 더 이상 주나라의 음식은 먹지도 말고 주나라의 물건은 가지지도 않기로 한다. 우여곡절 끝에 수양산으로 들어선 형제, 그런데 수양산은 좋은 산이었지만 마을과 가까워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그건 마을 사람들이 산에 있는 열매와 뿌리, 먹을만한 산채들을 이미 다 따가서 남아 있는 게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다가 발견한 고사리. 이건 배고픈 두 형제에게는 천상의 맛이었다. “그날부터 그들은 날마다 고사리를 뜯었다. 처음에는 숙제 혼자 뜯고 백이는 삶았다. 나중에는 백이도 건강이 좀 나아진 느낌이 들자 함께 뜯으러 나섰다. 조리법도 다양해졌다. 고사리탕, 고사리죽, 고사리장, 맑게 삶은 고사리, 고사리 싹탕, 풋고사리 말림….” 결국 그 지역 고사리를 싹쓸이했고 고사리는 이제 찾기 힘들게 되었다.

게다가 이 형제에게 결정적인 현타가 오는 사건이 생겼다. 어느 날 동굴을 찾아온 마을의 젊은 여인이 형제가 고사리를 먹는 걸 보고 묻는다. “왜 이렇게 변변찮은 걸 드세요?” 백이가 대답했다. “우리는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기 때문에….”, 그러자 그 여자는 “잠시 냉소를 짓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하늘 아래 임금의 땅이 아닌 곳이 없다고 했는데, 그럼, 고사리는 임금의 것이 아니냐고? 문왕의 법도가 사라졌다면서 양로원을 떠나 수양산으로 온 그들에게 문왕의 법도가 담긴 시경의 이 구절, “무릇 하늘 아래 임금의 땅이 아닌 곳이 없다(溥天之下 莫非王土)”를 들이민 것이다. 결국 “마지막 말에 가서는 날벼락을 얻어맞은 듯 놀라 정신이 아득해”진 이 두 형제는 결국 수치심이 사로잡혀 고사리도 먹지 못하고 굶어 죽는다. (루쉰, <고사리를 캔 이야기>, 349쪽, 『새로 쓴 옛날이야기』, 루쉰전집 3권, 그린비)  더 이상 충절의 상징 백이 숙제는 없다. 위선과 허세에 쩐 무능한 가부장적 할배들이 있을 뿐이다. 

 

2017년 8월2일 한 예능의 장면. 길 가다 초등생을 만나 강호동이 어떤 사람이 될 거냐고 물었고, 옆의 이경규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대답하자, 바로 이효리가 "뭘 훌륭한 사람이 돼? 그냥 아무나 돼"라고 대답한다. 이건 이후 '짤'로 인터넷에 널리 퍼진다.


루쉰이 (유가의) 명분을 해체하기 위해 이처럼 독한 유머를 구사했다면, 소설가 정지아는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좌파의) 명분으로 회수될 수 없는 일상의 파편들을 따뜻한 유머를 통해 재구성한다. 빨치산 아버지의 죽음과 삼일간의 장례식장의 풍경을 그리는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전직 빨치산이었고 이십 년 가까이 감옥살이했으며 출소 후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초짜 농부가 되었지만 죽는 날까지 사회주의자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았던 주인공의 아버지는, 빨치산다운 비장한 죽음이 아니라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한다. 블랙 코미디 혹은 시트콤 같은 이런 장면들은 이 책 곳곳에 넘쳐나는데 내가 거의 데굴데굴 굴렀던 에피소드는 다음 두 가지였다.

대학생 딸이 담배를 피운다는 것을 알고 당황한 늙은 빨치산 부모들. 어떻게든 그런 현실을 부정하려고 하는 어머니의 유체 이탈 화법 (“야는 진작에 끊었어라…. 호기심에 한 번 태워본 것이제..”)에 벼락같이 호통 치는 아버지의 사회주의 화법. “넘의 딸이 담배 피우면 못된 년이고, 내 딸이 담배 피우면 호기심이여? 그것이 바로 소시민성의 본질이네! 소시민성 한나 극복 못헌 사램이 무신 헥맹을 하겄다는 것이여!” 저자 말대로 환갑 넘은 빨갱이들이 자본주의 남한에서 무슨 혁명을 하겠다고 담배 하나에 소시민성 극복 운운하는 것이었다. (이건 블랙코미디^^)

또 다른 장면. 그 남부군 출신 빨갱이 할멈이 도당출신 빨치산이었던 죽은 남편의 화장터 앞에서 부부 잠자리를 떠올리며 후회한다. "아이, 쫌 대줄 것을 그랬어야...그때는...무신 헥멩가가 고것 한나 못 참는가 싶고이" 그러자 중년의 빨치산 딸은, 그 이야기를 듣고, 화장장 앞에서 "입술을 앙다물며 웃음을 참았다" (이건 시트콤?!) 그리고 빨치산의 딸은 생각한다.

"오십 년 가까이 살아온 어머니도 아버지의 사정을, 남자의 사정을 이제야 이해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나 또한 그러했다. 아버지는 혁명가였고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그 전에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고 연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남편이고 나의 아버지였으며, 친구이고 이웃이었다.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 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 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249쪽)

  


노회찬을 그리워하며
2018년 7월13일, 나의 노동운동과 진보정당 시절의 동지이고 선배이고 스승이었던 노회찬이 죽었다.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조롱거리였던 그의 죽음. 영화 <노회찬 6411> 에서 그의 오랜 동지 한 명은 이렇게 말한다. “아는 것과 하는 것, 겉과 속이 일치하는 드문 사람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불일치가 생긴 거예요. 그 불일치를… 목숨으로 바꿨죠.” 그러나 아이를 보살필 사람이 없어서 진보정당에서 칼퇴근해야 했고, 칼퇴근해야 해서 ‘복지부동(伏地不動)’의 자세로 일할 수밖에 없었고,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오욕과 오해를 밥 먹듯이 먹으면서 살아왔던 나는, 그의 마지막 선택이 남성적이고 운동권적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은 늘 지리멸렬하고 치욕은 삶의 불가피한 조건이고 생은 명분과 이념을 초과하는 것이 아닐까? 이분법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해보자면 그의 죽음에 공명하고, 그의 날 선 결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주로 남성이었다. 내 주변의 숱한 여성들은 오히려 “그런데, 그게(4000만원 불법 정치자금 수수) 정말 죽을 일이야?”라고 묻고 있었다.

 

2014년 2월 11일 파지사유에서 강의 중인 노회찬


글을 마무리해야 하는 이 시점에서야 난 내가 무엇을 쓰고 싶었는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공자도 루쉰도 아니고 노회찬이었다. 그의 죽음이었다. 그가 그렇게 죽지 않고 살아서 치욕을 견뎠더라면 어땠을까? 그가 진보정당의 다른 동지들만큼이나 그의 아내이자 가장 가까운 동지, 김지선을 생각했다면 어땠을까? 살아남아 이념과 명분을 뛰어넘는 좌파적 삶의 다른 경로를 보여줬다면 어땠을까? 한편으로는 그리움 한편으로는 아쉬움. 조만간 <노회찬 평전>이 나온다고 하는데 그곳에서는 노회찬의 죽음이 어떻게 다루어졌을까? 그가 선택한 죽음의 방식에 대한 평가를 괄호치고 그의 삶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우리가 '그'의 죽음, '그런' 죽음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글_문탁(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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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무림, 학림은 당시 운동권 내의 계파이다. 무림과 학림은 5.18 민주화운동 직후인 1980년 후반기부터 혁명운동의 방향을 둘러싼 사상투쟁을 벌였는데 무림은 ‘현장 준비론’을, 학림은 학생운동의 ‘선도적 투쟁론’을 주장하였다.

2)“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대학>의 도는 타고난 자신의 밝은 덕을 밝히는데 있어, 나아가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는 것이며, 지극한 선에 이르도록 하는 데 있다/ <대학> 1장)

3)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세상에 자립하였으며, 마흔 살에는 미혹되지 않았고 쉰 살에는 천명을 알았으며, 예순 살이 되어서는 귀로 들으면 그대로 이해가 되었고, 일흔 살에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논어>, 위정)

4)子曰: "君子病無能焉, 不病人之不己知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자기가 능력이 없음을 걱정하지,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않는다." /<논어>, 위령공)

5)子曰: "苟有用我者, 朞月而已可也, 三年有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등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일 년이 지나면 그런대로 괜찮아질 것이고 삼 년이 지나면 성취가 있을 것이다." / <논어>, 자로)

6)孔子適鄭 與弟子相失 孔子獨立郭東門 鄭人或謂子貢曰 “東門有人 其顙似堯 其項類皋陶 其肩類子產 然自要以下 不及禹三寸 累累若 <喪家之狗>” (공자가 정나라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과 서로 헤어져 공자 혼자 외곽 성의 동문 밑에 서 있었다. (공자를 찾아 헤매던) 자공에게 정나라 사람이 일러 말하길 “동문에 한 사람이 서 있는데...헐벗은 모습(累累)이 마치 상갓집 개와 같았습니다.” / <사기>, 공자세가)

7)楚狂接輿歌而過孔子曰: "鳳兮鳳兮! 何德之衰? 往者不可諫, 來者猶可追. 已而! 已而! 今之從政者殆而!" (초나라의 미치광이 접여가 노래를 부르며 공자 앞을 지나가면서 말했다. "봉황이여! 봉황이여! 어찌하여 그대의 덕을 쇠퇴하게 만드는가? 지나간 일이야 돌이킬 수 없지만 닥쳐오는 일은 아직 늦지 않았다네. 그만두게나! 그만두게나! 오늘날의 위정자들은 위태롭다네!" / <논어> 미자)

8)子路從而後, 遇丈人, 以杖荷蓧. 子路問曰: "子見夫子乎?" 丈人曰: "四體不勤, 五穀不分, 孰爲夫子?" 植其杖而芸. 子路拱而立. 止子路宿, 殺鷄爲黍而食之, 見其二子焉." (자로가 공자를 수행하던 도중 뒤에 처져서 가다가 한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지팡이로 삼태기를 메고 있었다. 자로가 "선생께서는 우리 선생님을 보셨는지요?" 하고 묻자 노인은 "사지를 부지런히 놀리지 않고 오곡을 분별하지 못하는데 누가 선생이란 말이오?"라고 하고는 지팡이를 땅에 꽂아놓고 김을 매었다. /<논어>, 미자)

9)“噫! 天喪予, 天喪予!” (아,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 <논어>, 선진)

10)子曰: "莫我知也夫!" 子貢曰: "何爲其莫知子也?" 子曰: "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其天乎!"(공자께서 "나를 아는 사람이 없구나!"라고 하시자 자공이 "어째서 선생님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까?"라고 했다.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으며, 하찮은 것에서부터 배워서 수준 높은 것에 이르나니 나를 아는 사람은 하늘이리라!" / <논어>, 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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