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 강의(팬데믹 이후의 학교와 병원을 생각한다)』의 저자, 이희경(aka.문탁) 선생님의 [나이듦 리뷰] 연재를 시작합니다! 이 코너에서는 문탁 선생님께서 나이듦과 죽음에 관한 책/영화를 읽고 리뷰를 해주시겠다고 합니다. 앞으로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_<
나이듦, 상실에 맞서는 글쓰기
1회 - <내가 늙어버린 여름 >(이자벨 드 쿠르티브롱)
나는, 올해, 늙어버렸다.
이자벨 드 쿠르티브롱.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다. 책날개를 보니 프랑스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페미니스트 작가이자 학자이다. 저자의 나이가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져봤지만 확인할 수 없었다. “1960~70년대 미국의 반문화, 페미니즘 열풍에 온몸으로 화답”했다고 하니 68세대임이 틀림없고, MIT에서 가르치다가 2010년에 퇴직했으니 어림잡아 70대 중반쯤 되었으리라 추측한다. (물론, 미국엔 고용연령차별금지법에 따라 정년제도가 없다^^) 그녀가 쓴, “늙음에 관한 시적이고 우아한 결코 타협적이지 않은 자기 성찰”이라는 부제가 붙은 <내가 늙어버린 여름>을 펼쳤다.
첫 페이지에는 “그 여름, 그녀는 더 숨이 찼고 더 빨리 헉헉거렸다.”라는 문장이, 그다음 페이지에는 “사람들은 버스나 지하철에서 점점 더 자주 그녀에게 자리를 양보했다”라는 문장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연속적으로 “날이면 날마다, 온 사방의 젊은이들이 그녀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냐고? 나이를 먹었을 뿐이다”, “그 여름에 그녀는 노인이 되었다”라는 문장이 적혀있었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 그 문장은 틀렸다. 나이를 먹는다고 노인이 되지는 않는다. 나이가 의식될 때 노인이 된다. 다시 말해 생물학적 나이는 특정한 배치나 계기를 통해 주관적으로 실감되지 않는 한, 숫자에 불과하다. 나이듦은 생물학적임과 동시에 특정 사건을 경유하여 형성된 주관적 감정이기 때문이다. <내가 늙어버린 여름>의 저자 이자벨 드 쿠르티브롱은 어느 날 요가 수업을 받다가 늘 해오던 아사나 동작이 잘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백내장 진단을 받았다. 백내장이란 노인질환이 마치 선고처럼 내려진 그 날, 이자벨 드 쿠르티브롱은, 비로소, 늙은이가 되었다.
나는, 그동안 나이를 거의 의식하지 않고 살아왔다. 저자보다 어려서도 아니고 내공이 깊어서도 아니다. 그건 내가 10년마다 인생을 리셋하면서 매번 새롭게 바닥부터 다시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즉 예를 들어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다른 동창들처럼 취업해서 커리어 우먼의 길을 갔다면, 어느 순간 “그 나이에 아직 과장이야?” 라거나 아니면 반대로 “나이도 어린데 승진이 빠르네”라는 식의 사회적 연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운동권에 계속 머물렀다면 ‘원로’ 대접을 받았을 것이고 그 경력으로 정치권에 진출했다면 이제는 공공의 적이 되어 퇴진 요구를 받는 ‘586’이라는 꼬리표를 영원히 붙이고 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행스럽게도 그렇게 하지 않았고/못했고, 덕분에 다른 사람의 사회적 성취와 비교해서 내 나이를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올해 뭔가가 변했다. 생물학적으로 60을 갓 넘긴 나는, 나이가 ‘의식’되기 시작했다.
계기는 올봄 모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일이었다. <이반 일리치 강의> 책 소개를 위해 20분 정도의 전화 인터뷰를 하기로 되어 있었고 본 인터뷰 전에 앵커와 잠시 인사 겸 방담을 나누게 되었다. 그런데 그 앵커의 첫마디는 “전, 훨씬 젊은 분이라고 생각했어요”였다. 아마도 덕담이었을 것이다. 문탁 네트워크도 알고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친근함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당황했다. 갑자기 내 나이가 의식이 되었고, 내가 이런 데 나오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은가, 라는 자의식이 불쑥 치솟았고, 하마터면 “늙어서 미안합니다”라고 말할 뻔했다.
그날 이후 난 이자벨 드 쿠르티브롱처럼 온 사방의 나보다 젊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페이스북에서 내가 유의미한 정보를 얻는 오피니언 리더들도, 신문 칼럼니스트들도, 심지어 새로 바뀐 정권에 입각하는 장관들도^^ 모두 나보다 젊었다. (내가 그들의 나이를 따져보았다는 이야기도 된다) 아, 나는 늙었구나, 라는 실감! 올해 나는, 늙.어.버.렸.다!!
우리는 몸에 갇히고 있다
“지금보다 더 젊고, 지금보다 훨씬 더 자주 여행을 다니던 때, 우리의 짐 가방엔 책이 가득했다. 그런데 지금은 약 봉투가 가득한 가방을 끌고 다닌다. 스무 살 때, 우리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고, 서른이 되자 일에 대해서 이야기 했는데, 마흔이 넘자 청소년에 대한 이해 불가능성, 커플의 어려움 등을 화제에 올렸고..... 예순이 되면서는 퇴직과 각종 계획이 수다의 단골 주제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p151)
오늘 우리는 영화며, 책, 사고와 경험치, 여행과 정치 등에 대해서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하지만 우리의 대화는 결국 건강 문제로 귀결되고 말았는데...한 친구는 위장 계통, 다른 친구는 눈과 시력, 또 다른 친구는 다리의 불편함을 호소한다. 각종 알레르기며 치아, 등 통증, 초기 류머티즘, 건망증, 탈모 문제를 털어놓는 친구들도 있었다. 매번, 고해성사하듯, 자신을 찾아온 새로운 증세를 고백하는 기분이다.”(p157)
이자벨 드 쿠르티브롱이 쓴 이 구절을 읽었을 때 나는 박장대소를 했다. 너무 웃긴 나머지 참지 못하고 40년 지기 친구들의 단톡방에 이 내용을 퍼 날랐다. 즉각적 응답. “어, 우리네!”
우리는 ‘불의 연대’였던 80년대를 온몸으로 통과했던 소위 ‘민주화 세대’다. 쿠르티브롱이 자신의 여자친구들과 “혁명이라고 부르던 모험을 함께 했”던 것처럼 (p152) 나와 내 여자 친구들은 ‘광주’를 함께 겪었고, “혁명이라고 부르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했다. 동시에 우리-여자친구들은 운동권 내의 가부장적 기풍과 문화에 대해서도 극렬하게 저항했다. 남학생들은 우리 자생적 페미니스트들에게 “사사건건 세미나 하자고 덤빌 게 분명하니 연애하기 피곤한 족속들”이라면서 조롱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란 듯이 연애도 하고 결혼도 했다. 하지만 차츰 우리는 운동의 최일선에서 후퇴했고, 각자 가족을 꾸렸고, 다른 일을 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조금씩 멀어졌다.
그러다가 한 친구가 크나큰 위기를 맞았다. 남편의 외도가 있었고, 친구의 인생은 하루아침에 진창에 처박혔다. 그 사건이, 살짝 멀어졌던 우리를 다시 뭉치게 했다. 그리고 우리는 <부부의 세계>에 버금가는 막장드라마급의 그 외도사건과 배신감과 후회를 오가는 친구의 격렬한 감정변화를 8개월 가까이 함께 겪었다. 결국 친구는 이혼을 결행했고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외박계’를 결성했다. 서로를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라고 말하면서도 일상적으로 서로의 삶을 돌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계절에 한번은 각자의 가족을 버려두고 ‘1박2일’로 만나기로 했고, 남편과 자식 이야기 금지를 강령으로 삼았다. 오로지 각자의 삶, 고민과 관심, 슬픔과 기쁨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기! 이후 30년간 우리 다섯 명의 친구들은 쿠르티브롱들처럼 “항상 웃음과 지지, 애정, 기나긴 대화, 불굴의 연대감을 소중하게 가꿔나갔다.”(p152)
이제 우리는 나이를 먹었다. 그 사이 누구는 재혼했고, 누구는 사별했다. 암에 걸린 친구도 있다. 나는 이혼을 했고 어머니 부양을 떠맡았다. 그리고 한때는 한번 모이면 정치적 이슈부터 유행하는 드라마에 대한 평론까지 온갖 주제들에 대해 밤을 새워 대화를 나누던 우리는 이제 체력이 달려 더 이상 밤을 새우지 못한다. 책이 가득한 삶, 여행을 통한 모험을 함께 즐기던 삶 대신에 “약 봉투가 가득한” 삶을 살게 되었다. 사별의 스트레스 때문이든, 부양의 간난신고 때문이든 이제 우리의 단골 주제는 삐걱거리는 ‘몸’이다.
“LDL 콜레스테롤이 어마어마하게 높아서, 7주동안 빡센 운동으로 34를 뺐어”
“난 (백신) 3차 맞고 이틀 정도 몸살. 타이레놀로 잘 넘겼는데. 설사는 안했어”
“등과 허리가 너무 아파서 침을 맞고 있어”
“이 나이에는 당이 시키는 대로 살아야 한다고. 파티(party, 政黨가) 아니라 혈당. ㅋ”
“데드리프트 35킬로 도전하다가.ㅋ 디스크에 조금 염증. 몇 달 운동 금지”
“없던 두통이 생겨서 6월부터는 몸 상태 기록하는 노트를 만들었어.”
올해 우리 단톡방에서 나눈 대화들이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린 요 몇 년, 만나는 것조차 삼가며 단톡방에서 가끔 서로의 안부를 물었는데 근황 토크는 “매번, 고해성사하듯, 자신을 찾아온 새로운 증세를 고백”(p157)하는 데 바쳐진다. 증세의 고백 후에는 목과 등에 좋은 경추베개를 서로 추천하고 노트북 거치대와 손목이 편한 블루투스 키보드에 대한 정보를 나눈다. ‘백년허리’와 ‘기능의학’도 올해 단골로 등장한 단어였다. 물론 가끔씩 ‘치커리 장아찌’나 ‘군자란’ 이야기도 하긴 한다. 어쨌든 우리는 더 이상 일이나 세상에 대해 그렇게 자주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서로의 관심사나 집필 계획에 대해서도 그렇게 궁금해하지 않는다. 우리의 세계는 축소되었고 우리는 점점 몸의 감옥에 갇히고 있다.
이제 세상은 다른 세대에 속한다
얼마 전 녹색당이 주관하는 <플래닛 A>라는 동물권, 환경 다큐멘터리가 파지사유에서 상영되었다. 감독은 이하루. 소개 글에는 “외국인, 노숙인, 여성으로 살아본 경험과 트랜스젠더퀴어 정체성을 맹렬히 드러내며 모두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영상기록 활동가”라고 쓰여있었다. 난 동물권이나 환경 같은 주제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트랜스젠더퀴어’라는 것을 ‘맹렬히’ 드러낸다는 감독이 더 궁금했다. 영화를 보러 갔다.
“대안은 없다, There is no Plan(et) B”라는 의미의 <플래닛 A>는 감독의 말에 따르면 “종 차별로 인한 비인간동물 대학살, 여성동물의 재생산권 착취, 난민/장애인/성소수자/성노동자 인권, 기후 위기, 자본주의와 과소비, 쓰레기 문제 등 여러 주제”를 15편의 뮤직비디오 형식으로 담고 있는 영화이다. 작업방식도 색달랐는데 OST로 사용될 컴필레이션 앨범을 먼저 만들고 전곡의 뮤직비디오 15편을 제작해 이어 붙이는 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주제의 시의적절함, 형식의 신선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화의 표현방식이 너무 노골적이고 비인간동물의 고통에 대한 재현이 지나치게 전시적이라고 느꼈다. 수잔 손택의 말처럼 이미지가 너무 자극적이면 그것은 일종의 포르노그래피가 되어 관음증적으로 타자의 고통을 소비하게 된다. (<타인의 고통>, 이후, 2004) 감독한테 질문을 해볼까? 그러나 결론적으로 그날 나는 감독에게 영화에 대한 어떤 가타부타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영화가 끝난 후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서 이하루 감독은 대뜸, “저는 동물해방 운동가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다른 운동권의 탄생!’ 그 순간 내 기분이 딱 그랬다. 영화감독이 아니라 동물해방 운동가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젊은 청년. 수십 년 전의 내가 전태일에 가슴 아파하고, 동일방직 똥물 사건과 YH무역 여성 노동자 사망에 분노하여 “저는 노동운동가입니다”라는 수행적 정체성을 획득했었던 것처럼 지금 이하루 등은 평생 A4 용지 한 장 남짓한 공간에서 계속 알만 낳다가 죽는 산란계 암평아리에, 또 평생을 스툴에 갇혀 ‘출산 기계’나 ‘비육 기계’로 살다 죽어가는 돼지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며 이 영화를 만든 것이다. 이 영화는 고발의 영화가 아니다. 어줍잖은 타자 재현의 영화도 아니었다. 돼지와 암소와 장애인과 트랜스젠더를 가로질러 ‘퀴어’한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이하루 등의 급진적이고 수행적인 활동, 그 자체였다. 나는 드디어 그 영화를, 지금의 동물해방 운동가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그들의 세계에 속하는가? 환경문제에도 동물권에도 관심 있지만, 나는 이하루 감독의 영화 <플래닛 A>에 등장하는 <동물해방 직접행동DxE>의 활동가들처럼,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서 “이건 음식이 아니라 폭력입니다”라는 피켓팅을 하고, 대형마트 정육 코너에 가 국화꽃을 놓고 살해당한 가축들을 애도하는 퍼포먼스를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과 나는 다른 정서를 가지고 있고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참여한다.
이자벨 드 쿠르티브롱은 2017년 마크롱 선거캠프에서 일했다. 나이가 들었어도 사회정의에 대한 소명 의식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경험이 유의미하게 사용되리라는 확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캠프에 모여있는 주로 삼십 대의 사람들과 일하면서, 공통의 명분에도 불구하고 자기 경험이 그들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녀의 기억, 그녀의 모험은 더 이상 젊은 사람들을 매료시키지 않는다. 그녀가 전달하고자 하는 생각들은 그들 귀에 들리지도 않는다. 이 주변부로 밀려나는 경험을 저자는 더 이상 세대 차이나 세대 갈등이라고 부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세대 차이가 아니라 세계의 차이(p52)”라는 것을 깨닫는다.
“앞으로 이 세상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세대들에 속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적인 영역에서의 은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터이다.”(p58)
나도 요즘 계속 ‘은퇴’를 생각하는 중이다.
나이듦과 상실, 그리고 글쓰기
“나는 인생의 막바지에 접어들어 이 사회, 우리가 이미 한 발은 들여놓은 이 미래 사회에서 장애인으로 여생을 보내게 될까 봐 두렵다. 나는 이제 퍼머컬처에 종사하겠노라며 브르타뉴 지방으로 떠날 나이는 지났다....어느 날 아침 이렇게 겁쟁이가 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내가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그 세상 밖으로 조금씩 조금씩 밀려나게 되리라고도 물론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수동성과 위축, 자발적 폐쇄 같은 것에 대한 두려움과 맞설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나는...내가 포기하고 항복할까봐, 그냥 움츠린 채로 살고 싶은 욕망에 백기 투항하게 될까 봐 겁이 난다...결국 모든 소통을 단념하게 될까 봐 무섭다” (p70)
늙는다는 것은, 그러니까 어떤 상실감, 모종의 후회, 그리고 슬픔이 엄습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두려워하기’를 시작하게 될까 봐 두렵다”(p24) 이 책 <내가 늙어버린 여름>은 쿠르티브롱이 평소 자기에게 낯설었던 이런 감정들, 두려움과 상실감을 정면으로 들여다보면서 자기 자신과 차분히 대화를 해나가는 책이다.
평생 다른 사람의 시선의 노예로 살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엉덩이가 처지고 주름이 잡히고 마치 선사시대 살았던 어떤 동물처럼 변해가는 자기 몸을 차마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동시에 이렇게 자기검열을 하는 태도에 스스로 실망한다. 한때는 전투적 페미니스트였지만 이제 SNS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논쟁을 따라갈 기력도 의욕도 없다. 이제 “참여 지식인, 행동대원 자리는 내려놓고...관찰자의 역할을 받아들여야”(p89)한다고 자신을 다독거리기도 한다. “책들이 나의 젊음을 해방시켜주었으니, 어쩌면 (늙어감이라는) 이 고통스러운 통과의례도 무사히 치르도록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p163)라는 생각에 노화에 관한 문학 작품들을 톺아본다.
그리고 화해들. “절대 엄마처럼은 되지 말겠다고 맹세하게 만든” 그 엄마를 이제 이해하고 자신이 엄마에게 얼마나 부당했는지를 인정한다. 자기와 엄마를 두고 떠난, 상실감을 원초적으로 제공한 아버지에 대해서도 아버지만 자기를 버린 게 아니라 자기도 아버지를 버렸다는 것, 아버지도 버림받았다고 느꼈으리라는 것에 생각이 미친다. 그리고 고통스럽게 이혼했던 남편, 그런데 어느 날 헤어진 남편이 몸을 숙여 구두끈을 매는 순간 그 남자 정수리의 탈모를 목격하고 “모든 회한과 오해가..눈녹듯이 사라져버린다”(p209)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런 화해들 앞에서 멈칫했다. 이런 화해야말로 늙어가고 죽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발로가 아닐까?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게 아니라 자기를 연민하는 감상적 태도가 아닐까? 나는 여전히 죽음을 앞두고 “나를 미워하라고 해라. 나 역시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겠다”(1936년, “죽음”, <차개정잡문 말편>)라고 한 루쉰의 결기에 더 마음이 간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최근 몇 년 사이 나는 부쩍 ‘은퇴’에 대해 생각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복지의 대상으로서의 노인도 아니고 자본의 먹잇감으로서의 액티브 시니어도 아닌 노년의 실존양식에 대해 고민한다. 우리 세대는 어떻게 ‘다른 노인’이 되어 갈 수 있을까?
얼마 전엔 모든 공적인 일에서 은퇴하고 식물생태학자로 전업해서 여생을 보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식물 세미나 때 읽은 <향모를 땋으며>에 푹 빠졌고, 로빈 월 키머러처럼 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공부가 필요하지 않을까? 나는 방통대와 사이버대학의 식물학과를 검색했다. 그런데 없었다. 이번에는 범위를 넓혀 전국의 대학을 검색했다. 식물생명과학과 혹은 식물자원원예학과, 식물·환경신소재공학과..... 아, 이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닌데. 친구들은 깔깔대며 노골적으로 나를 비웃었다. 한 친구는 나에게 식물학자가 되기 위한 지름길은 공부가 아니라 경험이라면서 도시농부를 해보라고 권했다. 그러나 무릎도 아프고 허리도 신통치않고 골감소증에 퇴행성 목디스크와 퇴행성 어깨회전근개파열이 있는 나로서는, 그것은 ‘미션 임파서블’에 가깝다.
다음에 나는 요즘 유행한다는 ‘러스틱라이프’를 꿈꿨다. 인문약방이나 일리치약국과 같은 공적인 일은 일주일에 3일만 하고 나머지 날들은 시골의 작은 집을 장만해 읽고 쓰고 산책하고 명상하고 사색하는 일에, 그러니까 완전히 나 자신에 몰두하는 삶을 살아보면 어떨까? 그런데 이번에도 주변의 모든 사람이 나를 말렸다. 싱글인 내가 집을 짓고 그 집을 관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말년의 양식樣式’, ‘다른 노년의 life style' 이런 화두만 붙들고 나는 계속 우왕좌왕 뻘짓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듦에 대해 사유하고 실험하는 일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중 한 가지로 나이듦과 관련된 책/영화들을 찾아 읽고 리뷰를 쓰는 일을 해보려고 한다. 이번엔 친구들도 말리지 않지 않을까? 이자벨 쿠르티브롱이 <내가 늙어버린 여름>에서 알려준 잘 늙어가는 방법도 결국 글쓰기였다.
글_문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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