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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듦리뷰

[나이듦 리뷰] 만국의 늙은이여, make kin, not babies!!

by 북드라망 2023. 4. 24.

만국의 늙은이여, make kin, not babies!!

 
내가 늙으면 누가 나를 돌봐주지?
한 5년 전쯤인가? 그러니까 어머니를 돌본 지 3년 정도 되던 어느 날이었는데 떨어져 사는 아이 둘과 간만에 함께 밥을 먹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독박돌봄의 고단함을 한도 끝도 없이 펼쳐놓았고 그 끝에 “내가 늙으면 도대체 누가 나를 돌보지?”라는 질문을 꺼내놨다. 그러면서 딸에게 모계 돌봄의 전통^^을 이어받으라고 은근히 압력을 가했다. 딸은 이런 저런 저항을 시도했지만 결국 굴복, 내가 딸을 20년 키워준 만큼 이후 최소 20년은 나를 돌봐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말았다. 옆에서 우리 둘의 ‘티키타카’를 지켜보며 낄낄거리던 아들 녀석은 그것을 ‘9.15 OO 효녀 선언’이라 이름 붙였다. “자식에게 아첨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노후는 부탁할 셈이다”(우에노 치즈코,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 p57) 라는 말이 있는데 내가 그렇게 한 셈이었다.

어머니와 살기 전까지는 나 역시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의 노년에 대해서도, 나이듦 일반에 대해서도 별생각이 없었다. 저질 체력이긴 했지만 특별한 지병은 없었고, 맏딸 프리미엄으로 다른 사람 눈치를 별로 안 보면서 컸기 때문에 나는 내가 늙어 죽을 때까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인간으로 살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나에게 약간 예외적인 케이스, 즉 본투비 의존적인 성격에 사별 트라우마로 인한 일종의 신경병까지 덧붙여져 끊임없이 누군가 돌봐줘야 하는, 그런 손이 많이 가는 별종일 뿐이었다.

그런데, 요 몇 년 어머니와 친구 부모님들에게 예외없이 나타나는 현상들, 즉 귀 안 들림, 눈 안 보임(백내장, 녹내장, 황반변성), 낙상과 골절, 수두증, 뇌졸중, 파킨슨, 치매, 암, 척추협착증, 골다공증, 고혈압, 당뇨 등의 사태를 보면서, 또 나 역시 회전근개파열이니, 노안이니, 목디스크이니 한둘씩 몸이 고장 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곱게 늙는다”라거나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늙는다”라는 말은 말짱 빈말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곱고 깨끗하고 건강하게 늙는 사람은 없다.  나이듦은 몸이 손상된다는 것이고 그 몸을 둘러싼 사회적 시선 –주로 배제와 혐오로 작동하는-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는 뜻이다. 주디스 버틀러처럼 말한다면 몸을 가지고 사는 우리는 모두 취약한/위태로운(precarious) 존재이다.
 

“몸은 삶의 유한성, 취약성, 행위 주체성을 암시한다. 피부와 살 때문에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고, 접촉과 폭력에도 노출된다... 우리는 몸에 대한 권리를 위해 분투하지만, 정작 분투의 목적인 몸은 우리 자신만의 것이 아니다. 몸에는 변함없이 공적인 차원이 있다. 공적 영역에서 구성되는 사회적 현상인 내 몸은 내 것인 동시에 내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타인의 세계에 넘겨지는 몸에는 그 세계의 흔적이 각인되어 있고 몸은 사회적 삶의 용광로에서 형성된다.”(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p56)


버틀러는 이런 ’취약함(precariousness)’의 논의로부터 근대적 주권개념을 해체하는 정치적 탐구로, 새로운 사회적 연대를 구축하는 윤리적 실천의 모색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나는, "엄마처럼 늙지 않을거야"에서 "나도 엄마처럼 늙겠구나"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일단 허겁지겁 딸의 부양 약속이라는 보험부터 들어놓는다. 하지만 과연 이 보험은 유효할까? 그럴 리가.....ㅎ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고 더 이상 가족 돌봄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누구에게나 닥칠 돌봄 위기에 대한 좀 더 현실적인 대안을 만들어가야 하는 건 아닐까? 나는 친구들과 <나이듦연구소>를 만들었고, 요양원이라는 국가 돌봄과 실버타운이라는 시장 돌봄, 이 둘을 넘는 새로운 상호 돌봄의 형식에 관해 공부해보기로 했다. 세미나를 열었고 그 첫 책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이 <가족을 구성할 권리>(김순남, 오월의 책)이다.
 



이미 당도한 n개의 가족
이 책의 첫 번째 주제는 가족을 둘러싼 현실과 제도 사이의 낙차, 혹은 내 식으로 말하면 "현실을 따라잡지 못하는 담론적 지체 현상" (나는 <루쉰과 가족>에서 계속 이 이야기를 했다^^)이다. 머리말에 나오듯 “시민들은 이미 하나의 가치나 형태 모델로서의 ‘가족’에 국한되지 않은, 다양한 방식으로 상호의존과 돌봄을 실천하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p5)다. 그러나 이에 비해 우리의 법과 제도는 너무 낙후되어 있고 그것을 지탱해주는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도 한편에서는 여전하다.

세상이 바뀌고 가족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멀리 갈 필요도 없다. 현재 나는 80대의 엄마와 그를 돌보는 70대의 간병인과 함께 셋이 산다. 이 중 둘은 혈연관계이고 다른 둘은 계약 관계이지만 함께 살다 보면 이 구별은 종종 무의미해진다. 어머니는 나보다 간병인을 더 많이 의지하기도 하고, 나는 어머니 못지않게 간병인의 건강과 마음을 돌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한 상호의존! 이름 붙이기 어려운 동거형식!

원가족을 둘러봐도 사정은 비슷한데 전형적인 이성애 규범적인 4인 핵가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남동생네뿐이다. 나는 몇 년 전에 이혼했고, 둘째 여동생은 작년에 이혼했으며, 막내 여동생은 비혼이다. 또한 지금 내 딸은 남친과 동거 중이고 아들은 베트남에서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다. 한 마디로 내 원가족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반려묘 동반 1인 가구, 2인 동거가구, 비혼 1인 가구, 3인 모자가구, 3인 비혈연 노인가구 등 다양한 가족 형태를 띄며 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이런 가족 변동은,  모두 알다시피  사회의 경제적 토대 변화에 기인한다. 크게는 남성 가장 가족임금 중심으로 이성애 핵가족이 재생산되던 산업사회가 이미 쇠퇴했기 때문이고, 가깝게는 IMF가 많은 핵가족의 경제적 토대를 빠르게 허물었기 때문이다. 2000년대의 페미니즘 리부팅도 여성과 젊은층을 중심으로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나는 수년 전 문탁에서 개최한 페미니즘 강의를 통해 소위 영 페미니스트들의 4B 운동, 그러니까 비연애, 비섹스, 비혼, 비출산을 통해 가부장제를 재생산하는 그 어떤 구조에도 동참하지 않겠다는 운동을 접한 바 있다. 요즘 젊은 여성들이 “남자와 사느니 차라리 고양이와 산다”라고 말한다는 것도 그때 처음 들었다. 이미 삶의 경로는 다양해졌고, “많은 사람은 경제적인 이유로, 외로워서, 임차 계약기간이 끝나는 시기가 비슷해서, 혹은 사랑하는 사이라서 등등 여러 이유로 ‘우연히’ 함께 만나 살아가고, 그러한 경험을 통해 ‘이렇게 살아도 괜찮다’라는 사실을 확인한다.”(p138) 문탁 안에서도 이런 사례가 있는데 바로. 정화와 임수의 ‘정임합목 2인 동거가족’이 그것이다. (1월 말부터 연재될 ‘정화와 임수의 좌충우돌 가족-되기’ 연재를 기대해주세요^^)

책에서는 이런 탈근대사회 가족의 변동을 설명하는 다양한 개념들이 소개되고 있다. 데이비드 모건의 ‘가족 실천’이나 재닛 핀치의 ‘가족시연displaing family’의 개념은 가족을 규범이나 형태가 아니라 일종의 수행성으로 파악하는 개념이고,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의 ‘생활의 동반자’나 ‘생애 한 시기의 동반자’라는 개념은 “현재의 삶을 ‘임시적인 삶’으로 유예하지 않고, 현재의 상호의존하는 관계망을 중심으로 삶을 바라보는 태도의 변화를 의미한다.”(p59) 나는 이 ‘생애 한 시기의 동반자’라는 개념이 아주 마음에 들었는데 이성애든 동성애든, 정서적 욕구 때문이든 경제적 이유 때문이든 파트너와 함께 사는 삶이 결코 영속적일 수 없다는 것을 환기해주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LGTB에서 출현한 ‘내가 선택한 관계/가족 families of choice’ 혹은 이와 비슷한 ‘패치워크 가족’이라는 개념도 있다.(p59) 원가족에게 배척당한 다양한 소수자들 (학대, 동성애, 약물중독)이 지속가능한 사회적 지원을 서로에게 제공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가족 형태이다. “결혼제도 밖에서 연대감을 느끼고, 마음 맞는 사람끼리 돌보고, 서로에게 동지애를 느끼고, 일부는 로맨스도 가능한 관계”인 ‘보스턴 결혼’(p81)도 개인적으로는 아주 흥미로운 개념이었다. 일찍 알았다면 나도 해보는 건데....쩝!

그런데 문제는 한국 사회의 법과 제도가 이런 현실의 변화를 좇아가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미 수많은 ‘조립식 가족’(tvN, 가족 관찰 예능, 2022년 3월~5월 방영)이 출현해있고, “혼인, 혈연에 무관하게 생애와 주거를 공유하면 가족으로 인정한다”라고 답하는 시민도 60%가 넘고 (2019년 여성가족부+한국여성정책연구원 공동 조사), 이에 비해 ‘법적인 혼인이나 혈연관계’를 가족의 조건으로 꼽는 사람들은 2.0%에 불과한데도 (2020년 서울시여성가족재단 조사) 우리 민법 제779조(가족의 범위)에서는 이성애 결혼으로 인해 구성되는 결연만을 가족으로 인정한다. 그리고 이 민법에 따라 ‘가족’을 언급하는 240개 법 조항이 작동한다. 우리는 주거, 의료, 돌봄, 연금, 상속 등 삶의 전 영역에 걸쳐 이성애 가족의 구성원이 되어야만 적절한 국가의 보호와 제도의 혜택을 받는다. 법과 제도 속의 가족은 결국 시민이 될 수 있는 자와 아닌 자를 구별하고 국가의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는 자와 아닌 자를 나눈다. 평생 함께 살아온 동성 파트너는 상대가 죽은 후에도 유산을 상속받지 못하고, 정화는 임수가 병원에 입원해도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할 수 있는 법적 보호자가 되지 못한다. 이성애 규범적인 가족 장치는 우리 사회 차별과 불평등, 배제와 혐오를 재생산하는 장치가 된다.


가족구성권과 퀴어가족정치
그렇다면 이런 지체(遲滯) 혹은 단락(斷落)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이것이 이 책의 두 번째 주제이다) 국가와 각종 지자체가 출산율을 높이겠다면서 하는 ‘바보짓’(인천광역시, 충청남도의 ‘결혼친화도시’ 선포, 대구 달서구의 ‘결혼 장려팀’ 신설 등/ p100~101)은 일단 논외로 하자. 하지만 저자 김순남은, 예를 들면 1인 가구를 지원하는 주거정책 같은 것도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p117) 다양한 가족형태(한부모가족, 조손가족, 다문화가족 등)을 뒤따라가면서 제도적으로 포섭하고 약간의 지원을 하는 방식은 여전히 잔여적 복지의 패러다임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상당히 급진적으로 보이는 ‘동성결혼 합법화’나 ‘생활동반자법 제정’에도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왜냐하면 이것 역시 다양한 성소수자, 즉 바이섹슈얼, 논바이너리, 트랜스 젠더 퀴어 등의 존재를 비가시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가족구성권’과 이에 기초한 ‘퀴어가족정치’이다.
 

“가족을 정치화하는 가족구성권은 단순히 가족으로 인정되지 않는 관계들을 가족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데서 그치는 이야기가 아니다....가족구성권은 근본적으로 가족들 둘러싼 여러 갈래의 복합적인 차별 해소에 대한 접근을 요청한다. 다시 말해, 사회가 상상해오고 권장해온 ‘가족’의 의미와 가족 모델은 무엇인지, 그것이 한국 사회에서 ‘시민’으로 가정되고 상상되는 이들의 모습과 어떻게 연동되고 있는지, 제도가 어떻게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들 구분하는지 등 여러 갈래의 질문들이 제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 ‘시민’으로서의 삶과 자격이 부여되는 데 이성애 규범적인 가족중심 시민모델이 핵심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p8)


한마디로 말해 가족구성권은 사적 권리가 아니고 낯설고 불온하고 문란한 신체들이 공적으로 출현하고, 관계를 맺고, 일상과 사회를 함께 점유할 권리를 말하는 것(p104)이기 때문에 푸코식으로 말하면 근대생명권력에 대한 정치적 저항이며, “이런 식으로 통치당하지 않는 기술”이기도 하다. 따라서 생명정치, 인구정치를 퀴어가족정치로 바꾸어가야 한다. “퀴어가족정치의 핵심의제는 근본적으로 발전주의, 성장주의 너머의 삶과 관계에 대한 모색”이 되어야 하며 “이상적인 시민/비시민의 경계를 비틀면서 ‘오염된 공동체’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오염된 공동체’란 가족 상황, 인종, 장애,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등으로 삶의 경계를 구분하는 권력에 개입함으로써 새로운 시민적 유대의 장을 확대하는 공동체를 의미한다.”(p165)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이 나올 수 있다. 하나는 혈연에 기초한 ‘원가족’ 너머를 상상하면서 왜 여전히 ‘가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느냐(p174)이고, 다른 하나는 “가족구성권운동은 가족 중심 시민 모델로 제시되는 시민의 상을 개인 중심 시민 모델로 바꿔야 한다”라고 할 때 그 개인 중심 시민 모델이란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저자의 답은 다음과 같다. 가족이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하는 이유는 “가족제도 불평등에 관한 질문을 확장하고 새롭게 사유하는 변혁의 장치로 재전유”(p175)하기 위함이고, 개인의 자기 결정권은 김도현의 논의(<장애학의 도전>)를 가져와 “상호의존적인 관계 속에서 서로의 의견과 판단을 소통하고 조율해가며 실현할 수밖에 없는 권리”(155) 라고 한다.

난 우선 ‘가족’이라는 단어와 관련해서 새로운 사회적 유대의 형식, 결연의 방식에 꼭 ‘가족’이라는 단어를 붙여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가족에서 가족구성권으로, 또 그것은 형태의 다양함이 아니라 정상가족 규범을 문제 삼는 퀴어한 가족정치이다, 라고 설명하는 방식이 좀 복잡하게 느껴진다. 차라리 저자도 인용하고 있는 해러웨이의 ‘kin’이라거나 아니면 우리말 ‘식구’ 정도가 더 낫지 않을까?
 

“나의 목적은 ‘친척 kin’이란 말이 혈통이나 계보에 묶인 실체가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을 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친척 만들기는 사람들persons 만들기인데, 대상이 반드시 개체이거나 인간인 것은 아니다. 나는 대학 시절 친척 kin과 종류 kind라는 말을 두고 하는 셰익스피어의 재담에 감동했다 – 가장 다정한 것들이 반드시 핏줄로 엮인 친척은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친척의 확대와 재구성은 지구에 사는 모든 것이 가장 깊은 의미에서 친척이라는 사실에 의해 가능해지고, 우리는 진작 집합체인 ‘종류’들을 (한 번에 하나씩의 ‘종’이 아니라) 더 잘 돌보았어야 했다. 친척은 집합이라는 종류에 해당하는 말이다. 모든 크리터들은 수평적으로, 기호론적으로, 계보상으로 공통의 ‘육신’을 공유한다. 조상들은 매우 재미있는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친척은 (우리가 가족 혹은 씨족이라고 생각했던 존재의 바깥에서) 낯설고, 불가사의하고, 끊임없이 출몰하는, 활동적인 무엇이다...
  자,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친척이 어떻게 친척을 만드느냐가 중요하다”(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 하기, p179)


두 번째는 ‘개인’이라는 개념. 이것의 의미는 머리말에 잠시 나오는 한나 아렌트의 ‘권리를 가질 권리’라는 개념으로부터 추론해낼 수 있다. 아렌트는 유대인, 여성으로서 27세부터 45세까지 국가 없는 난민이었다. 이 경험이 그녀를 ‘인권’ 개념에 대한 탐색으로 이끌었다. 흔히 인권은 '양도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해지지만 1933년 독일을 탈출해 파리로 몸을 피한 그 순간부터, 즉 독일 유대인은 더 이상 독일 시민이 아니게 된 순간부터 인권 따위는 없게 되었다. “고향을 떠나자마자 그들은 노숙자가 되었고, 국가를 떠나자마자 무국적자가 되었다. 인권을 박탈당하자마자 그들은 아무런 권리가 없는 지구의 쓰레기가 되었다.”(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p490) 따라서 아렌트는 이런 인권의 역설 속에서 인권에는 ‘권리를 가질 권리’가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전 세계적으로 새로운 정치상황이 출현하면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권리를 가질 권리(그것은 어떤 사람이 그의 행위와 의견에 의해 평가를 받을 수 있는 하나의 구조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조직된 공동체에 속할 수 있는 권리를 잃고 다시 얻을 수 없게 되면서, 우리는 비로소 그런 권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한나 아렌트, 위의 책, p533)

 
하여 나는 저자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개인이, 추상적 인권의 담지자가 아니라 발리바르 식으로 이야기하면 보편적 시민권, 즉 봉기적 시민권을 통해 정치적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인, 공적 영역에 '출현'하는 개인이라고 이해했다. 아래는 책의 이 두 번째 주제를 어설프게 도식화해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빠르게 해체되고 있는 소위 '정상가족'과 1인 가구의 증가로 표현되는 개인들의 출현이 상호의존의 생태계를 만들어나가는 새로운 시민이 될지(저자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아니면 능력주의에 포섭된 신자유주의 공정 주체가 될지는 여전히 미지수이다.

 
나이듦과 난잡한 돌봄의 공동체
얼마 전 우연히 ‘노루목 향기’라는 이름을 가진 시니어 공유주택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게 되었다. (kbs <다큐 온> “노후, 누구와 사시겠습니까”, 2021년9월10일 방영) 주인공은 68세 동갑내기 심재식, 이혜옥, 이경옥 세 할머니이다. 이들이 모여 살게 된 것은 우연이었는데 13년 전에 심재식 씨가 귀촌하여 여주에 집을 지었고, 그곳에 오랜 친구였던 이혜옥 씨가 합류하였고, 4년 전에 그 동네 주민이던 이경옥 씨가 마지막으로 합류하면서 3명의 비친족 노인가족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들 중 심재식, 이혜옥 씨는 비혼이고 이경옥 씨만 결혼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사별했고, “아들은 장가보내면 해외교포”라고 말하는 노인 1인 가구였다. 이렇게 모인 세 명의 노인은 낮에는 자연스럽게 집안일을 분담하고, 저녁때는 각자 독립적으로 젊었을 때 돈 버느라 혹은 자식 키우느라 못했던 취미생활을 즐긴다. 이혜옥 씨는 기타를 잡고 노래를 부르고, 젊은 시절 자수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는 심재식 씨는 이경옥 씨와 함께 프랑스 자수를 익힌다. 어쩌다 이경옥 씨의 다섯 살짜리 손주가 할머니를 방문하는 날이면 온 집안이 들썩인다. 아이는 할머니가 셋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할머니들은 맛있는 걸 해먹이고 함께 물놀이를 하면서 즐거워한다.

더 놀라운 것은 이분들이 정기적으로 집 마당에 천막을 치고 자기네 차를 이용하여 마을 노인들을 모셔다 야외 노인 문화센터를 여는 것이었다. 관의 도움 없이 할머니들의 힘으로 비혈연 가족을 이루고 그 가족을 마을로 확장해나가는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이분들은 이런 가족의 가장 큰 장점을 ‘서로 돌봄’이라고 한다. 특히 이경옥 씨는 암이 재발하여 매우 불안한 상태인데 친구들과 살면서 맘이 많이 편해졌다고 한다. 이런 상태라면 요양원에 가지 않아도 살던 곳에서 유쾌하고 명랑하게 서로를 챙기면서 더 오래 살아낼 수 있지 않을까?

책에서는 ‘난잡한 돌봄’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이 말은 1980년대 에이즈 인권활동가인 더글러스 크림프가 사용한 용어인데, 당시 게이들이 공격받은 ‘난잡한 성생활’이라는 혐오 표현을 뒤집어 그것을 ‘난잡한 돌봄’이라는 급진적 용어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는 당시 “(몇몇 게이 지도자들이) 우리의 난잡함이 우리를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난잡함이 우리를 구할 것”라고 썼다.(더 케어 컬렉티브, <돌봄선언> p86) 다시 말해 여기에서 “난잡함promiscuous이란 성애적인 것이 아니며,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게 많은 친족 단위의 돌봄에 대항하여 돌봄의 위계를 급진적인 평등주의로 만들어가는 방향 전환이 핵심이다.”(p125)

나는 노루목 향기의 세 할머니에게서, 한 명의 친족 손주를 공동의 손주로 사랑하고 돌보는 모습에서, 암에 걸린 친구를 위로하면서 일상을 함께 꾸리는 삶에서, 자신의 돌봄 역량을 마을의 더 많은 할머니에게 확장해나가는 모습에서 ‘난잡한 돌봄’의 모습을 목격한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나는 싱글이고 <나이듦연구소>를 함께 꾸리는 내 친구는 남편이 있다. 나는 내심 그 남편과 아들까지를 더 넓은 확장된 가족 속에서 ‘공유’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꾼다. 그 남편과 아들의 손이 아주 야무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일리치약국>에는 두 명의 비혼 싱글이 있다. 우리 사이에 나이와 경제력의 차이가 있지만 이건 오히려 우리가 확대된 가족을 꾸려나갈 때 강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친구는 일단 땅부터 보러 다니자고 하지만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올해, 새로 맞은 계묘년 검은 토끼해가 비혈족 시니어 친족만들기(Make kin)!, 시니어 공유주택의 원년이 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어디 좋은 땅이 있는지 빨리 주역점을 쳐봐야겠다.
 
 

글_문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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