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할배의 탄생
-영화, <그랜토리노>(2009,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 글에는 두 개의 영화가 등장하는데 둘 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왜 내 눈엔 할머니들만 보이는 걸까?
87세에 한글을 깨쳐 “먹고 싶은 것도 없다. 하고 싶은 것도 없다. 갈 때 대가 곱게 잘 가는 게 꿈이다.”라는 시를 쓴 칠곡의 박금분 할머니가 94세를 일기로 얼마 전 돌아가셨다. 신문 기사를 보니 당신 시처럼, 당신 바람처럼 가신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박 할머니 기사를 찾아 읽다가 소위 ‘권안자체’ ‘추유을체’ ‘이종희체’ ‘김영분체’ ‘이원순체’ 등 칠곡할매체의 주인공들의 짧은 글도 읽게 되었다. 폰트 개발을 위해 4개월 동안 한 명당 2,000장의 종이를 사용했다는 할머니들의 글씨는, 내용도 폰트도 따뜻하고 정감이 넘쳤다.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의 저자인 순천 할머니들의 그림일기도 비슷했다. 거기에도 할머니들의 살아온 이야기가 진솔하고 유머러스하게 펼쳐지고 있다. 할머니들의 삶에는 그 험난한 생애 여정에도 불구하고 ‘다정한’ 뭔가가 있다. 노년 구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이야기청’의 구술작가 ‘육끼’ 역시 주름진 할머니들을 볼 때마다 편안해지며, 그 주름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아카이브 같다고 말한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들의 얼굴은 묘하게 아름답다. 웃을 때마다 물결처럼 움직이는 그 주름들은 길게 이어진 밭의 이랑과 고랑을 연상시킨다...나는 밭의 이랑과 고랑이 만들어내는 굴곡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할머니들의 주름을 볼 때도 비슷한 안도감을 느낀다. 밭의 이랑 고랑도, 할머니들의 주름도 아주 평범하지만 들을수록 찰지고 구성진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야기들의 아카이브인 것이다. 노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그래서 삶의 최전선인 주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고, 동시에 이야기가 된 삶을 만나는 것이다. (노년들의 이야기를 듣고 예술로 표현하는 '이야기청'의 총괄 기획자 육끼,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의 노년성찰인터뷰 7회)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할아버지들은 어떨까? 할아버지들의 주름도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많은 할머니가 그러하듯 할아버지들도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야기꾼이나 시인이 되어 가는 것일까? 그런데 나는 경험적으로나 자료를 통해서나 ‘이야기꾼 할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다. ‘육끼’ 작가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데 구술에 참여하는 분들의 95%는 할머니라는 것이다. 할머니들이 더 장수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할아버지들은 이야기하기보다는 가르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남자들은 늙어서도 ‘맨스플레인(mansplain)’*을 버리지 못하나 보다.
그렇다면, 경로당이나, 교회, 절 같은 커뮤니티에서도 만날 수 없고, 영화나 다큐 같은 영상물에서도 재현되고 있지 않다면, 그 많은 할아버지는 다 어디에 가 있는 것일까?
*맨스플레인(mansplain) : ‘남자(man)’와 ‘설명하다(explain)’를 합친 단어로, 어느 분야에 대해 여성들은 잘 모를 것이라는 기본 전제를 가진 남성들이 무턱대고 아는 척 설명하려고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뉴욕타임스는 2010년 맨스플레인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으며, 2014년에는 옥스퍼드 온라인 영어사전에 이 단어가 등재됐다. 우리나라에서는 2015년 국내에 번역, 출간된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통해 ‘맨스플레인’이 널리 알려졌다.(네이버 지식백과)
‘종삼(鐘三)’은 할아버지들의 성지(聖地)? 혹은 성지(性地)!
2005년경, 지식인 코뮌 <수유 너머>의 원남동 시절, 나는 이동을 위해 혹은 산책을 하느라 거의 매일 종묘 공원을 가로질러 다녔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둑을 두거나 술을 마시거나 그것도 아니면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수없이 많은 할아버지를 만났다. 분주한 도심 한복판에 마치 외딴섬처럼, 남성 노인들이 삼삼오오 혹은 각자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 그 모습은 참으로 기괴했다. 그리고 그 풍경은 10년 후에도, 심지어 코로나 정국을 지나면서도 변함이 없다.
지난 8월 18일 오후 1시 서울 종로구 종묘 공원을 찾았다. 이날 서울 최고기온은 섭씨 34.3도를 기록했고 폭염경보가 발령됐다... 노인 70여 명이... 나무 그늘 밑 인도에 은박 돗자리를 펴 놓고 부채질하며 바둑을 두는... 이 공터는 마치 ‘노인 전용 출입 구역’인 것처럼 청년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노인 중에도 여성은 보이지 않았다. 눈에 띄는 모두가 남성이었다. ( “종묘 공원 노인들 “왜 그렇게 살았느냐 물어보면…””, <경향신문> 2016년10월5일)
코로나19로 모이는 것을 두려워하던 시기였지만 아랑곳없이 더 많은 인파가 찾아왔다....백여 명의 어르신들이...신문을 보거나, 바둑을 두느라...구경꾼에게 물으니 매일 거의 비슷한 숫자가 모인다고 한다...이모(83) 어르신은 '여기 오는 사람들 대다수는 잊혀진 사람들이며, 가끔 이런 식으로 만나서 이야기라도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그마저도 친구가 있는 이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은 그냥 앉아서 사람 구경이나 하다가 가는 거지’라고 체념조로 말한다. (“탑골공원 "코에 바람이라도 넣으려고 나온다"” , <이모작 뉴스> 2021년7월9일)
소위 ‘한강의 기적’의 주인공, 산업화 세대의 주역인 우리나라 7, 80대 남성 노인들은 경로당이나 교회, 노인복지회관 대신에 종묘 공원 혹은 탑골공원에 모여든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리나라 노인들이 대체로 가난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무료인 지하철로 접근할 수 있고 무료 급식이 제공된다는 등의 공간적 가성비가 첫 번째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할아버지들의 ‘종삼’ 집결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OECD 1위라는 한국의 노년 빈곤도 젠더화되어 있어, 더 가난한 것은 남성 노인이 아니라 여성 노인이기 때문이다. 2022년 현재, 국민연금 수급자 비율은 남성 54%, 여성 20%인 반면, 기초연금 수급자 비율은 남자는 60%, 여성은 73%이다. 여성 가구주 노년 세대 세 명 중 두 명은 빈곤 상태로 남성 가구주 노년 세대 빈곤율의 두 배 이상이다. (“코로나19가 부채질한 노인·여성 빈곤”, <매일노동뉴스> 2021년11월10일) 그런데도 ‘종삼’의 거리에서 할머니들을 만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할아버지들이 그곳을 찾는, 경제적 이유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인정 욕망이다. 그들은 젊었을 때 열심히 일했으나 이제 “잊힌 사람”이 되어 한편으로는 “쓸모없다”라는 좌절을, 다른 한편으로는 “기관총으로 국회의원들 다 갈기고 싶다”(위 경향신문 기사)라는 분노를 품고 산다. 그래서 이들은 동병상련을 할 수 있는 또래 집단을 찾아 그곳으로 모여든다. 덤으로 그곳에서는 자신을 여전히 심리적, 육체적으로 위로/인정해주는 여성도 값싸게 구매할 수도 있다.
이재용 감독의 영화, <죽여주는 여자>(2016)는 바로 이 탑골공원의 노년 생태계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인 65세의 소영은 ‘빈곤의 노년화’와 ‘빈곤의 여성화’라는 중층 억압의 최일선에서 매일 매일 자기 몸을 놀려야만 연명할 수 있는 처지이다. 하지만 전쟁통에 고아가 되어 식모살이와 공장일, 그리고 동두천의 ‘양공주’를 거친 늙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이런 여성이 밑천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폐지를 줍는 일 정도인데 2022년 KBS의 조사에 따르면 평균 하루에 열한 시간 정도 폐지를 주어 고작 9,000원 정도를 손에 쥔다고 한다.(“폐지수집노동 실태보고서 : GPS와 리어카”, <시사기획 창 373회>, 2022년5월31일) 소영의 경우, 이 정도의 돈으로는 일수를 찍어 빚을 갚아나가고, 월세를 내기에도 빡빡하다. 물론 자존심도 좀 상한다. 그녀는 폐지를 줍는 대신 ‘종삼’으로 매일 출근하여 남성 노인을 상대로 건당 3만 원 혹은 4만 원에 성(性)을 판다. 다행히 그녀는 '죽여주는 여자'라는 별명답게 단골이 꽤 있는 박카스 아줌마이다.
영화에서는 그녀의 단골, 세 명이 등장한다. 재우는 아내를 사별하고 급격히 삶의 의욕을 잃은 인물인데 이제 발기불능이어서 그녀의 벌이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소영은 재우를 통해 또 다른 단골의 소식을 듣는다. 연금 덕분에 주머니가 두둑했고, 늘 맞춤 양복을 입고 다녀서 ‘세비로 송(せびろ 宋)’이라 불렸던 그는 “풍을 맞아” 요양병원에 누워있다. 그는 이제 대소변 처리를 포함 아무것도 혼자 못한다. “죽을래도 혼자 못 죽어”라며 우는 그 노인을, 측은지심 가득한 소영이 농약을 통해 ‘죽여준다.’ 재우의 또 다른 친구 종수는 치매를 앓고 있다. 그는 재우에게 “내가 너도 못 알아볼 날이 올 텐데 그땐 네가 날 좀 보내주라”고 부탁하지만 재우는 그 일을 소영에게 떠넘긴다. 결국 소영은 그를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여준다.’ 마지막 재우, 가지고 있는 돈을 몽땅 털어 소영을 데리고 비싼 밥을 먹고 좋은 호텔에 간 그는, 혼자 죽기 외롭다며 소영에게 동반자살을 제안하고 수면제를 입에 털어 넣는다. 소영은 이제 재우까지 ‘죽여 준’ 여자가 되어버렸다.
소영의 고단하고 쓸쓸한 일상을 별다른 수사와 신파 없이 담백하게 보여주는 <죽여주는 여자>는 많은 호평을 받았다. 제66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는 “<죽여주는 여자>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그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방식으로, 타인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가지고, 그들의 마지막 순간, 죽음까지 지켜보는 여성, 그 주인공의 이야기다”라고 평했고, 제20회 몬트리올판타지아국제영화제에서는 이 영화에 각본상과 여우주인공상을 안겼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의 이데올로기에 분노했다. 나에게 이 영화는 늙은 성매매 여성이 교환관계를 떠나 “타인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갖고 능동적으로 조력사를 수행하는 과정으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이 영화가 평생을 부인(혹은 다른 여성)에게 의존하며 살아왔던 무능력한 남성들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까지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을 자기보다 가난하고 약한 여성에게 떠넘기는, 가부장적 권력과 위계, 공모에 대한 영화로 다가왔다. 종수는 왜 벼랑 끝에서 스스로 한 발을 내딛지 못하는 것일까? 재우는 왜 친구 종수의 조력사를 기꺼이 떠맡지 않는가? 또 재우는 왜 자살하는 순간까지 외롭지 않기 위해서라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소영을 범죄자로 만드는 것일까? 혼자서는 죽지도 못하는 극도의 무능력과 비겁함! 우리 사회 남성 노인들은, 우에노 치즈코처럼 말한다면 ‘싱글력’이 전무하다. 그리고 그들의 불행은 많은 부분 그것으로부터 연유한다.
<그랜토리노>, 다른 할배의 탄생
영화 <그랜토리노>(2009)의 첫 장면은 상징적이다. 파이프오르간 소리가 장엄하게 울리는 성당의 장례식장에서 죽은 아내의 관 옆에 서 있는 주인공 월터 코왈스키는 손자들의 옷차림과 태도가 못마땅해 시종일관 인상을 쓰고 있다. 이런 아버지에 대해 뒤에 앉아 있던 아들 둘이 뒷담화한다. “애슐리(손녀) 노려보는 표정 봤어? 어머니 장례식에서도 여전하시네”, “당연하지, 아직도 50년대인줄 알고 계시는데...” 장례미사가 끝난 후 다가와서, 죽은 부인의 부탁이었다며 월터를 돌봐주겠다는 신부한테도 가서 다른 양이나 보살피라고 쏘아붙인다. 이 할아버지, 고집불통에 구태의연하고 괴팍한 꼰대가 분명하다.
영화 속 월터는 <죽여주는 여자>의 ‘종삼’ 노인들처럼 미국 산업화 세대의 일원이다. 그는 20대 때 한국전쟁에 참여한 경험이 있으며, 평생을 포드사에서 자동차를 조립하면서 살아왔다. 단골 이발소 가게의 주인장하고는 “미친 이태리 똥개”, “자린고비 후레자식” 같은 ‘싸나이’ 대화를 일삼아 주고받고, 술집에서는 친구들과 “멕시코, 유대인, 흑인이 술집을 갔는데 바텐더가 보더니 그랬지, ‘모두 냉큼 꺼져’”라는 농담을 즐긴다. 그러니까 그는 꼰대일 뿐 아니라 50년대 미국의 배타적이며 인종차별적인 가치를 내면화하고 있는 블루칼라 출신 마초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이 할아버지 싱글력만큼은 만랩이다. 홀로된 아버지를 자식들은 걱정하지만, 그는 추호도 자기 집을 떠날 생각이 없다. 평생 그러했듯이 자기 집 잔디를 손질하고, 이웃의 싱크대를 고쳐주고, 친척의 병원 수발을 하고, 자신의 보물이자 프라이드인 1972년산 세단, 그랜토리노를 쓸고 닦으며, 늙은 개와 함께 발코니에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 일상을 지속한다. 다만 문제는 그의 동네가 너무 변해서 이제 백인 친구들은 다 죽거나 떠나고 그 자리에 “중국 놈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월터의 바로 옆집에도 잔디를 손보는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베트남계 몽족이 이사를 왔다.
이후 영화는 몽족의 남매, 똘똘한 누나 ‘수’와 숫기 없는 그의 남동생 ‘타오’, 그리고 월터, 이 셋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사건은 그 동네를 주름잡는 몽족 갱 중 한 명인 타오의 사촌이 타오에게 남자가 되기 위해 그랜토리노를 훔치라는 미션을 내리면서 시작된다. 타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 일을 계기로 월터와 타오 사이에 일종의 채무 관계가 형성된다. 월터는 절도를 반성하는 타오에게 온 동네 집들을 수리시키고, 성실한 태도를 확인하자 그에게 건설 현장 일자리를 주선하고, 일에 필요한 개인 장비를 빌려주거나 사준다. 또한 그가 좋아하는 여자애와 어떻게 말문을 터야 하는지도 알려준다. 둘 사이에는 천천히 우정 비슷한 것들이 쌓여나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문제는 몽족 갱들이 타오를 그냥 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타오의 장비를 빼앗고 폭행하고 뺨에 담배빵을 놓는다. 분노한 월터는 몽족 갱들 집에 쳐들어가 총을 들이대면서 타오를 괴롭히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이 부분에서 월터는 영락없는 더티 해리였다^^) 돌아온 것은 타오 집이 갱단에 의해 습격당하고, 타오의 누이, 수가 그들에게 납치당해 끔찍한 성폭력을 당하는 일이었다. 월터는 한국전 당시 항복한 소년병을 살해한 일이 평생의 트라우마가 된 사람이다. 그런데 이제 다시 자신의 성급함과 무책임함 때문에 수와 타오 남매가 위험에 처했다. 월터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게다가 타오는 격렬한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폭력은 폭력을 부를 뿐 아닐까? 월터는 이제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는 일단 타오를 진정시켜 집으로 돌려보낸 후, 무심하게 잔디를 깎고 목욕하고 담배를 피우고 이발하고 양복을 맞추고 세금 체납 등 소소한 일들에 대해 묵은 고해를 한다. 그리고 타오를 따돌리고 홀로 갱들의 집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는 계획대로 갱들의 난사를 유인하여 그들을 감옥으로 보낸다. 월터가 치른 대가는 그의 목숨이었다. 그는 제 죽음을 통해 수와 타오, 이 두 명의 아시아계 소년의 삶을 지켰고, 수십 년 전 한국전에서의 실수에 대해 속죄했고, 그렇게 자신의 삶을 구원했다. 김도훈 평론가의 말처럼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근사한 퇴장”이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 영화의 감독이자 주인공. 내 십 대 시절의 우상. 그러나 잘 알려진 대로 그는 미국 공화당원이자 정통 보수주의자이다. 하여 나의 두 번째 질문. 어떻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보수주의자인 채 저런 위엄과 관용을 갖춘 ‘늙은 더티 해리’가 될 수 있었을까? 그의 보수주의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옹호를 너머, 등 떠밀려서 그랬다는 것은 핑계다”
영국 휘그당 소속의 젊은 자유주의자 에드먼드 버크는 당대 프랑스 혁명에 경악하였다. 그에게 있어 프랑스 혁명은 “이 세상에 벌어진 일 중 가장 경악스러운 일”, “경박함과 잔인함이 빚어내고, 온갖 종류의 죄악이 온갖 어리석은 짓과 더불어 뒤범벅이 된 괴상한” 혼란에 불과했다.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 한길사, p49) 그리고 그는 그것이 혁명에 대한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접근, 사회를 이념에 따라 개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기하학적 설계주의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그들은 형이상학을 많이 가졌는데, 그것은 나쁜 형이상학이다. 기하학을 많이 가졌지만 나쁜 기하학을 가진 것이다. 비례산술을 많이 가졌지만 잘못된 비례산술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형이상학, 기하학, 산술이 그래야 하는 것처럼 정확하다고 해도, 그들의 계획에서 그 모든 부분이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해도, 그 결과는 좀 더 그럴듯하고 구경거리가 될 뿐인 환상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그들이 사람들을 대규모로 재편하는 일에서, 도덕과 관련된 어떤 것이나 정치와 관련된 어떤 것을 참조한 바는 무엇이 되었든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인간의 관심사, 행위, 정열, 이익과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는다. “인간적인 맛이 없다” (위의 책, p289)
한마디로 혁명에는 이념이 있을 뿐 살아있는 구체적 인간, 인격과 애정을 나누는 구체적 인간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세상의 전통과 관습에는 인간이 오랫동안 공들여 쌓아 올린 지혜가 있으며 우리는 그런 사회의 일시적 거주자에 불과하므로 그것들을 잘 보살피고 늘 겸손하게 처신해야 한다. 다시 말해 오랜 규약과 모델들은 바꾸더라도 천천히 신중하게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갑자기 공자님과 맹자님이 떠오른다^^) 나는 버크의 이 오래된 보수주의 교의가 영화에서는 ‘자기의 공간을 스스로 돌보고 지키는 일’, ‘자기의 사람(공동체)을 힘껏 돌보고 지키는 일’, 그리고 ‘반성과 성찰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하는 일’로 표현되었다고 생각한다. 보수주의는 단어 뜻 그대로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보존하는 것, 지키기 위해 돌보고 가꾸는 것을 의미한다.
“어르신과 꼰대 사이, 가난한 남성성의 시원을 찾아”라는 긴 부제가 붙어있는 최현숙의 『할배의 탄생』은 김용술, 이영식이라는 두 명의 칠십대 남성에 대한 인터뷰집이다. 기본적으로 두 남자의 삶을 옹호한다는 최현숙도 후기에서 “옹호를 너머, 등 떠밀려 그랬다는 것은 핑계다”라며 그들의 성찰 없는 삶에 대해 지적한다.
김용술은 한편으로는 소설 <아큐정전>의 주인공 아큐처럼 생존본능과 정신 승리와 자가당착이 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설 <꺼삐딴 리>의 주인공 꺼삐딴 리처럼 기회주의적 변신과 위선이 보인다. 사실 우리 모두 그렇다. 김용술이 말하는 ‘세상 이치’, ‘남들이 하는 식으로’, ‘상식적으로’, ‘다 그렇게 돌아가는 거’, ‘그때는 다 그랬어.’ 등에 멈칫한다면, 우리 모두 한통속이기 때문이다. 아큐나 꺼삐탄 리의 시대를 지나고 김용술의 한창나이도 지난 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우리 모두 더하면 더했지 덜하고는 살 방법이 없다....그렇더라도 그게 다는 아니다. 살아남으라 그랬고, 있는 것마저 뺏길까 봐 그랬고, 악의 없이 남들 하는 만큼 했더라도, 세상에 침묵하고 공조하며 숟가락을 얹어왔다...사람은 모두 자신의 등을 밀며 앞으로 나아간다. 등 떠밀려 그랬다는 말은 핑계다 (최현숙, 『할배의 탄생』, p141)
'종삼'의 할배들도 늙은 더티 해리가 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우리 부모 세대들, 탑골공원 할배와 광화문 태극기부대를 넘어 이제 종일 유튜브와 종편 뉴스를 시청하면서 그들의 혐오 선동에 자신의 울분을 포개는 그분들의 삶은 아마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다. 우리는 그들과 정말 달라질 수 있을까? 민주화 세대인 우리는 나이듦에 대한 다른 비전을 갖고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내 남자 사람 친구들이 '다른 할배'로 살아가게 될까? 그것을 몹시 염원하지만, 여전히 이념은 과잉이고 손끝은 무딘 내 또래의 수많은 남성을 떠올리면 사태는 별로 낙관적이지 않다. 싱글력 없고 살림에 젬병인 그들의 노년을, 그리하여 나는 진심으로, 몹시, 근심하고 있는 중이다.
글_문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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