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각자도사 사회> (송병기, 어크로스, 2023)-
9년 전 혼자 살던 어머니가 화장실에서 넘어져 응급실에 실려 갔다. 아, 계속 혼자 사시게 하는 건 위험하구나. 결국 난 어머니와 살림을 합쳤다. 다소간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래도 어머니를 눈앞에서 보고 있는 편이 맘이 편할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깨달았다. 아, 망했구나. 그러니까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은 MZ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같은 소위 베이비붐 세대들에게도 부모 돌봄이 닥치면, ‘이생망’ 소리가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나온다. 왜 우리는 누군가를 돌보기 위해서는 자기 삶을 망칠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여야 하나? 왜 우리는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고 오래 사느니 그냥 빨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의료인류학자인 저자는 바로 그런 현실을 낳고 있는 우리 사회의 나이듦과 질병, 죽음의 맥락을 세심하게 들춰낸다.
왜 노인은 애물단지가 되었을까?
책의 앞부분, 아주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나온다. 서울 한 요양원의 오후 4시, 팥죽이 간식으로 제공되었다. 그런데 어떤 할머니 한 분이 가장 먼저 거실에 도착해서 신속하게 음식을 먹고 자리를 떴다. 저자는 그분을 좇아가서 대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알게 된다. 할머니가 팥죽을 좋아한 게 아니라 그 반대라는 것을. 할머니는 매번 간식으로 나오는 팥죽을 먹는게 고역인 분이다. 그런데도 “일하는 분들과 딸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할머니는 그걸 드신다. 할머니가 실제 좋아하는 간식은, 저자의 귀에 속삭였다는 ‘딸기’였다. 하지만 요양원이라는 맥락 속에서 딸기는 소박한 기호식품이 아니다. 그것은 표준적인 노동 밖에서 누군가가 따로 구입하고 씻어 보관하고 제공해야 하는 ‘신세스러운’ 물건이다.
고대의 노년은 아마도 지금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자님은 나이 칠십이 되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자연의 원리에서 어긋나는 게 단 한 가지도 없다(“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고 했고, 서양도 비슷해서 헬레니즘 시대의 노인은 현자와 동일시되었다. 그 세계에서 노년은 육체적 쾌락이나 정치적 야망에서 완벽하게 벗어나 자기 자신을 온전히 향유하는 자를 가리켰다. 아, 물론 고대의 노인들이 다 지혜로웠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곳에서 노년은 생의 완성으로, 어떤 도달해야 하는 이상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푸코는 이것을 ‘이념으로서의 노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근대에 와서 이런 에토스는 사라졌다. 노베르트 엘리어스가 지적한 대로 나이듦과 죽음은 일상 세계에서 완벽히 배제되고 추방되었다. 무엇보다 근대의 생명권력 하에서 노년은 관리되어야 하는 하나의 ‘인구’ 집단으로 통치의 적극적 대상이 된다. 더구나 현대 의료의 비약적 발전으로 평균 수명이 늘게 되자, 이들은 고령화 사회의 ‘대책’ 거리가 된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 사회에서 이런 관점이 분명하게 표명된 것은 2003년에 출범한 참여정부의 저출산 고령화 대책이라고 한다. 저자도 인용한 <2004년 보건복지 백서>의 내용 일부분을 보자.
구체적으로 저출산은 인구 고령화를 가속화시키고 생산가능인구와 노동생산성의 감소로 인한 경제성장둔화, 노인의료비.연금 등 공적 부담 증가, 세입기반 약화 등으로 인한 재정수지 악화, 노인부양부담 증가에 따른 세대 간 갈등 첨예화 등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심각한 문제를 파생시킬 것이다. (책, 38쪽)
그러니까 저자가 강조하듯, 국가는 전통적인 4인 가구의 해체를 위기로 규정하고, 인구를 발전에 쓸모있는 인구와 쓸모없는 인구로 분류한다. 이런 통치전략 속에서 노인은 의존적 존재로 전락한다. 모든 인간은 상호의존적인 존재인데 노인만 의존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노인은 이제 사회의 ‘똥 덩어리’, 짐짝이다.
온갖 정신과 약으로 기세가 한풀 꺾인 어머니는 요즘 나에게 오래 살아서 ‘미안하다’는 소리를 부쩍 많이 하신다. 친구 어머니는 노인이 병원을 많이 다녀 건강보험재정이 날로 악화된다는 뉴스를 접한 이후 매일 ‘죽고 싶다’라는 말을 반복하신다고 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안락사와 존엄사 사이,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
<씨 인사이드>(2007)라는 영화가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고, 다이빙 사고로 전신마비가 되어 26년째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있는 남자 주인공 라몬이 주인공이다. 그는 그를 사랑하는 가족의 헌신적인 돌봄을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고 싶어 한다. 그는 삶은 의무가 아니라 권리이고, 삶의 권리 속에는 죽음의 권리도 포함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91세의 장뤼크 고다르의 안락사 소식이 들려왔다. 그가 안락사를 선택한 이유는 아파서가 아니라 ‘삶이 고갈되었다’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난, 생으로부터의 ‘존엄한 퇴장’도 인간의 권리 중의 하나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편 우리사회에서도 2016년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연명의료결정법)’ 제정에 이어, 작년에는 안규백 의원이 ‘조력존엄사’법을 발의했다. 죽음이 터부시되는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죽을까? 무엇이 좋은 죽음인가?를 논의할 수 있는 장이 드디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환영할 일! 하지만, 저자를 따라 잠시 더 생각을 해봐야 한다.
어머니는 나와 살면서 한 번 더 넘어지셨다. 일단 집 근처 대학병원 응급실에 갔다. 그러나 너무 심한 부상이어서 “전신마취에 개복해서 앞쪽으로 부서진 허리뼈를 드러낸 후 다시 뒤쪽으로 들어가서 나사를 박아야 한다”라는 수술을, 골다공증의 고령인 어머니가 선택할 수는 없었다. 결국 저절로 붙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지만 대학병원에 있을 수는 없었다. 그곳은 급성기 환자를 치료하는 3차 의료기관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척추 전문병원인 2차 병원에 어머니를 입원시켰다. 하지만 여기서도 2주 이상 입원은 불가능했다. 적극적 치료를 할 필요가 없는 환자를 장기 입원시키면 병원이 공단에서 패널티를 받는다고 했다. 하지만 격심한 통증에 시달리며 누워있는 어머니는 여전히 24시간 돌봄이 필요했다. 나는 결국 요양병원에 어머니를 입원시켰다. 그러나 그곳은 요양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별도의 돌봄 인력은 없는 곳이다. 그렇다고 돌봄 인력이 있는 요양원으로 모실 수도 없었다. 그곳은 거의 말기 치매나 심한 파킨슨 환자 등 노인장기요양등급 1,2등급을 받아야 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결국 대학병원-2차병원-요양병원-다시 2차병원으로 떠돌고, 돈은 돈대로 쓰고, 돌봄은 돌봄대로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어머니는 부서진 허리뼈가 대충 아무렇게나 붙자마자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골절에 섬망까지 생긴 어머니를 돌보는 나의 이야기는 이제 간병 스릴러로 장르를 바꾸게 되었다.
저자는 묻는다. 연명의료법 제정이나 조력사법의 발의로 야기된 안락사 논의가 우리 사회에서 존엄한 죽음에 대한 논의를 확산시키고 있는 게 과연 맞는지를. 오히려 지금의 안락사 논의 뒤에는 “생애말기와 돌봄은 ‘끔찍한 일’이 됐고, ”주변에 폐를 끼치지 않고 깔끔하게 죽고 싶다”라는 말은 ‘죽음의 윤리’”가 된 현실(138쪽)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를. 개인의 권리와 사회적 규범(법)의 언어로 논의되는 현재의 안락사 논의는, 더 중요한 문제, 우리 대부분이 불평등하고 취약한 삶의 조건에 내팽개쳐진 사회적 현실을 가리고 있다. 스위스의 세계적인 조력존엄사 단체 디그니타스(Dignitas)의 대표도 “조력존엄사를 허용하려면 모든 국민이 최고의 의료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공공의료시스템과 통증완화의료 제도도 동시에 갖춰져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유영규 외, <그것은 죽고 싶어서가 아니다>).
늙으면 우리는 누구에게 돌봄을 받을 수 있을까?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부분은 ‘커뮤니티 케어’에 관한 논의였다. 왜냐하면 자식들에게 기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실버타운이나 요양원 중 한 곳을 선택하는 것도 내키지 않는 나와 친구들은 원래 살던 곳에서 적절한 의료와 돌봄을 받으면서 늙고 죽어가고 싶기 때문이다. 일본처럼 지역사회 의료-돌봄 원스톱 시스템이 갖추어지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현재 시범 실시되고 있는 ‘커뮤니티 케어’에 기대를 잔뜩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의료인류학자인 저자의 눈에 포착된 커뮤니티 케어의 현장은 나의 기대와는 달랐다.
나는 저자가 참여했다는 정책 포럼에서 “커뮤니티 케어가 무엇입니까?”라는 한 패널의 질문에 정책담당공무원이 “포용적 복지국가로 향하는 담대한 걸음입니다”로 대답했다는 문장에서 일단 빵, 터졌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이런 시작은 대개 알맹이가 없는 법이다. 아니나 다를까, 저자가 추적하는 커뮤니티 케어의 민낯은 대략난감이었다.
우선 전문가들이 커뮤니티 케어에서 제일 강조하는 것은 소위 ‘공공성’이었다. 그러나 “상호신뢰”, “협동의 공동체”, “사회적 경제”, “일자리 확충”, “사회적 약자를 이웃으로 포섭하는 치료적 지역사회”, “주민 주도”, “지역사회 읍면동 기능확충” 등 난무하는 단어들은 사실 모두 애매모호한 말들이다. ‘공공성’은 비영리를 의미하는 것일까? 정부가 운영 주체라는 이야기일까? 아니면 거버넌스를 확충해야 한다는 말일까? 전문가들은 각자 자신의 주장과 더불어 다양한 모델을 내놓았고, 저자는 “포럼이 끝나자 두통이 찾아왔다”(52쪽)
시범사업 현장은 그러면 어떨까? 저자가 보기에 구청 공무원에게 커뮤니티 케어는 ‘명단 만들기’로 수렴된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보건복지부의 선도사업에 선정된 만큼 성과를 분명히 내야 했고 그렇다면 사업 대상자를 선정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을 것이다. 그는 수급자, 저소득층, 고령자, 1인 가구, 만성질환을 겪고 있는 사람을 선정했다. 앞으로 그들에게 집수리, 식사 배달, 방문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막상 손발이 되어야 할 주민센터 공무원들은 이 사업에 시큰둥했다고 한다. 그들이 매일 하는 일이 ‘커뮤니티’에서의 ‘케어’인데 웬 새삼스럽게 또다시 커뮤니티 케어냐는 반문이다. 주민센터 공무원 입장에서 볼 때 중앙정부의 커뮤니티 케어는 관리해야 하는 기존 명단에 새로운 명단을 덧붙이는 ‘마뜩잖은 사업’에 불과한 것이었다.
지역 의료의 영역으로 가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보건소장은 커뮤니티 케어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역 의사들의 참여라고 했지만, 지역 의사들은 참여할 의사가 전혀 없다. 그들은 볼멘소리로 “합리적인 왕진 수가도 없이 어떻게 의사들이 노인 집에 가냐?”고 했다. 물론 의사들을 탓하면 안 된다. 이것은 인격의 문제가 아니라 정책과 제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 사업의 혜택을 받는 노인들의 만족도는 높았다. 구청 직원들이 집으로 찾아와 낡은 형광등을 LED 등으로 교체해주고, 밥솥과 냉장고를 본 후 필요한 식료품을 보내주고, 간호사가 정기적으로 찾아와 복약지도도 하고 혈압도 체크를 하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러나 그런 돌봄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급자여야 한다. 자신의 가난을 증명해야, 자신의 무능력을 증명해야 복지혜택의 대상이 된다. 이런 복지, 수상한 거 아닌가?
저자가 보기에 커뮤니티 케어의 현장에서는 “정처 없고 허망한 말들의 유령”만 떠돌았을 뿐이다. 그것은 누구나 말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정책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낙담에 빠진다.
내가 나이듦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은 나이듦은 누구나 겪는 것이지만 계급이나 성별, 가족관계에 따라 각자 다른 의미상 속에서 경험된다는 사실이었다. 죽음 역시 그러한 게 아닐까? 우리는 모두 필멸의 존재이지만 현실에서 모두가 애도 받을 만한 존재로 죽어가는 것은 아니다. 책 뒷장에 쓰여 있는 대로 “존엄한 돌봄과 임종을 희망하는 사람은 돈이 많거나 운이 좋아야 한다. 생애 말기 돌봄 앞에서 그렇게 사람들은 각자도생 혹은 각자도사한다” 죽음을 정치화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정치적 문제로 다루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글_문탁 (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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