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동체, 지금 만나러 갑니다

[공동체, 지금만나러갑니다] <사이재>: 중고신입*들의 꽃도 보고 길도 잃기

by 북드라망 2023. 4. 14.

<사이재>: 중고신입*들의 꽃도 보고 길도 잃기

* 중고신입: 요즘 경력직이 새 회사에 신입으로 들어갈 때 ‘경력직 신입’ 대신 사용되는 단어다. 밈(meme)으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그럴 땐 새로운 일을 하는데 이미 해본 것처럼 노련하게 일을 잘 해쳐가는 사람을 의미한다.

 


<규문>은 친구들이 낯익고 <남산강학원>은 공간이 낯익었다면, <사이재>는 사람도 공간도 모두 낯설었다. <사이재>는 충무로에 있는 인문학 공간으로 지산씨가 큰 선생님으로 계시고, 그곳에서 공부하는 내 또래로 다영, 소담, 보겸이 있다. 


이번 인터뷰의 인터뷰이인 <사이재> 청년 셋과 나는 <규문>에서 열렸던 공장식 축산업에 관련된 세미나와 <비학술적 학술제>에서 얼굴을 한두 번 본 적이 있었지만, 가까이에서 대화를 나눠보는 건 처음이었다. <사이재> 공간에 가본 건 아예 처음이었는데 이전에 방문한 두 곳보다 규모는 작지만, 빈 공간이 거의 없어 알찬 느낌을 주었다. 빈 벽에는 각종 게시판과 보드가 걸려있었고, 선반 위에는 강력한 포스를 뿜어내는 싱잉볼이, 원형 테이블 옆 공간에는 각종 차와 커피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인터뷰이들은 이곳의 큰 선생님인 지산씨가 “다 받아주지만, 결코 봐주지는 않는” 선생님이라고 했는데, 인터뷰하면서 정말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이재> 청년 셋의 이야기에서 그들에게 공부하고 활동해볼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사이재>에 있다는 것이 느껴졌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큰 선생님의 제한과 제안을 최대한 받아들이려는 의지도 느껴졌다. 인터뷰이들은 그게 전부 청년 셋의 일간이 모두 木이고 지산씨의 일간은 土라서, 木들이 土에 충분히 뿌리내리고 뻗어나갈 수 있는 덕분이라고 말했다. 우연히 나 또한 일간이 木이었으니, 인터뷰 자리는 2030 木木木木 여자들의 수다장이 된 셈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인터뷰하는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다영의 호쾌한 웃음과 보겸의 싱긋한 웃음은 멈출 줄 몰랐고, 소담은 크게 웃지 않았지만 장난기 어린 말로 모두의 웃음을 자아냈다. 이들 셋이서 자꾸 내 말에 동시다발적으로 웃어주는 바람에 나는 ‘내가 그렇게 센스 있나?’ 하는 착각을 잠시 하기도 했다. 녹취된 파일을 들으며 도저히 ‘(웃음)’ 표시를 할 곳을 고를 수가 없어서 다 뺐다. 이 인터뷰를 읽으며 원하는 곳이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웃음)’ 표시를 마음껏 넣어가며 읽어도 좋을 것이다.

 

 


중고신입들의 인문학 공동체 살이
고은 세 분 소개를 좀 해주세요.
다영 저는 남다영이라고 하고요. <남산강학원>에서는 한 5년 정도 공부한 뒤에 상주 생활을 그만뒀어요. 그 뒤에 유아 숲지도사를 해보려고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잘 안 풀리더라고요. 그 사이에 <사이재>에서 유튜브랑 홈페이지 관리를 부탁받아서 맡게 됐고, 또 등산도 같이 가게 됐는데 등산 후기를 맡게 됐고…. 일을 하나씩 맡으면서 <사이재>에 깊숙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소담 다영이가 실세예요. 이번에 <사이재> 공간이 이사하는데요, 이사 총책임자거든요.
다영 아니에요, 그냥 일꾼입니다. 그리고 제가 홈페이지 담당이라서 2018년 가을에 지산씨가 <북드라망>에서 열린 ‘북꼼 리뷰대회’를 홈페이지에 옮기라고 말씀하시면서 문자로 “너도 하고”라고 덧붙이셨거든요. ‘선생님 말씀은 들어야지’ 하면서 글도 다시 쓰게 됐어요. 거기서 상을 받았더니 지산씨가 권유한 사실을 잊으시고는 “너는 이미 작가 아니니?” 하시는 거예요. 그때 사실 유아 숲지도사가 잘 안돼서 대학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산책하면서 소담이한테 얘기했는데, 소담이가 쌤들에게 다 말했어요. 쌤들이 그렇게 마음을 못 잡으면 어떡하냐고, 일단 공부하라고, 그래서 ‘토요 주역’을 시작했어요. 지금은 등산도 계속 하면서 에코프로그램도 하고 있습니다. 
소담  중요한 건 대학원에 다영이가 떨어졌어요.
다영  아 맞아, 그게 중요해요.
보겸 저는 보겸이에요. 근데 얘기를 듣다 보니까 다영도 사주가 甲甲甲이고 저도 甲甲甲이거든요. 그래서인지 궤적이 좀 닮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도 <남산강학원>에서 2년 동안 공동체 생활한 뒤에 다른 걸 해봐야겠다고 말씀드리고 나와서 대학원에 가야겠다고 결정했어요. 1년간 준비 기간을 가졌는데 그 와중에도 공부를, 특히 주역 공부를 하고 싶더라고요. 여러 공동체에서 찾아보다가 <사이재>의 ‘토요 주역’으로 오게 됐어요. 올해로 2년 차이고, 저도 에코프로그램도 하고 등산도 하는데 ‘토요 주역’이 제일 중심이에요.
소담 보겸이는 대학원에 갔어요. 아, 둘 사이에 이런 차이가 있었군! 저는 박소담이라고 하고요. 대학교와 <남산강학원>을 병행하다가, 대학교 마지막 해에 코로나가 터지면서 대면 수업이 없어져서 <남산강학원>에서 상주를 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는 수의사로 일했고, <사이재>에 간 건 코로나 때문에 <남산강학원>이 셧다운됐을 때예요. 그때 <사이재>는 외부 사람한테도 열려있어서, 1년 동안 아침과 저녁을 여기서 먹었어요. 2년 차인 작년에는 의학 세미나 하면서 글을 썼는데, 반년 정도 쓰다가 그만뒀어요. 글도 일도 막히는 지점이 있었는데 뭔지 모르겠더라고요. 공부를 좀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을 주 3일로 바꾸고 ‘토요 주역’을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접속을 하게 됐죠. 올해는 아예 일을 그만두고 공부에 집중하고 있어요.
고은 <사이재>에 청년들은 얼마나 있나요?
소담 청년이라…. 정의에 따라서 좀 다른데, <사이재>에는 40대 청년들이 몇 분 계세요. 20-30대 청년은 저희밖에 없긴 해요.
보겸  작은 공동체인데 그 안의 구성원은 되게 다양해요.


꽃도 보고 길도 잃고
고은 아까 유독 등산 얘기를 하실 때 목소리 톤이 올라가면서 활기차지시라고요.
소담 작년 9월에 장금쌤이랑 저랑 다영이랑 운동을 해야 된다, 하면서 시작한 뒤로 계속 이어가고 있어요. 그런데 장금쌤은 첫 주 이후로 거의 안 나오셨고, 저희 둘이 주멤버였다가 ‘토요 주역’ 쌤들을 꼬셨는데 그때 대거 들어오셨어요.
다영 저희에겐 ‘대거’이긴 한데 사실 두 명이에요. 저희가 너무 앉아있으니까 움직일 필요가 있었던 것 같아요. 
소담 우리가 왜 이렇게 등산을 좋아할까, 그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등산은 운동은 좀 해야겠는데 열심히 하고 싶지는 않은 사람들이 경치도 즐기고 내려와서 맛있는 밥도 먹을 수 있는 게으른 자들의 스포츠다, 라고 결론 내렸어요. <남산강학원>에서 등산할 땐 이러진 않았던 것 같아요. 그때는 한 번에 힘을 몰아 쓴다는 느낌으로 갔다 왔어요. 바쁘니까 오후에는 또 다른 일을 해야 했거든요. 근데 지금은 코스도 계절마다 다양하게 알아봐요. 무슨 꽃 필 때니까 어딜 가봐야겠다. 그렇게 다니면서 서울에 산이 이렇게 많다는 걸 알게 돼서 충격받았어요. 다른 도시들을 가봤는데 서울만큼 주변에 산이 많은 곳이 없더라고요.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완전히 다른 공간에서 계절을 느끼고 시간이 흐르는 걸 깨달을 수 있으니까, 우리 진짜 축복받은 거 아닐까 싶어요.
다영 그리고 또 저희는 등산에 은근히 놀 거를 같이 끼워서 가요. 최근 이사한 쌤네 근처 산을 타고 집들이를 한다거나, 등산하고 영화도 보고, 자전거도 타기도 하고요. 근데 자전거 타고는 다시는 이러지 말자고 그랬어요. 재밌긴 재밌는데 둘 다 하려니 너무 힘들더라고요. 
보겸 저는 <남산강학원> 있을 때도 거의 매주 등산에 갔어요. 산에 가면 힘을 받는 느낌이 들어서 좋아하거든요. 근데 <사이재> 등산팀에 와서 되게 놀랐던 게, 굉장히 무계획적이고 경로를 자꾸 벗어나고 이탈하는 거예요. <남산강학원>에서는 오후에도 일정이 있다보니까 오전에 몰아서 계획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근데 여기는 그러지 않아서 처음엔 적응을 못 했어요. 이러면 안 될 것 같은데? 효율이 너무 떨어지는데? 
소담 혼자 중간에 자꾸 내려가자 그러더라고요.
다영 거의 하루가 다 날아가는 그런 날도 있어요.
보겸 근데 나중에는 이탈의 즐거움을 좀 알겠더라고요. 길을 잃잖아요. 그럼 오감을 다 써서 내려가야만 해요. 안 써본 걸 써보게 되더라고요.
소담 계곡을 따라서 내려간 적도 있어요. 길을 잃다 보면 감이 좀 붙어요. 길 같아 보이는 데도 알게 되고, 어딜 가면 위험하겠다, 그렇게 야생적인 신체를 깨우는 재미도 있는 것 같아요. 고은쌤은 <문탁네트워크>에서 등산 안 가나요?
고은 저는 등산 가면 너무 힘들고 기 빨리는 느낌이 들어서 잘 안 가요. 대신 물에서는 날아다녀요. 같은 木이라고 다 같은 운동이 맞는 건 아니네요.

 

왼쪽부터 - 보겸, 소담, 다영



에코, 매일매일 읽고 실천하기
고은 세 분이 다 <북꼼>이라는 ‘북 꼬뮤니티’에서 에코프로그램을 하고 계시죠?
소담  맞아요. <북꼼> 자체가 북극곰을 살리기 위해 마음의 온도를 낮추자, 놀러 나갈 시간에 책을 읽자는 취지로 만들어졌어요. 거기에 ‘에코’ 파트가 있거든요. 쌤들이 보시기에 저희가 잘 맞을 것 같았나 봐요. 다영이가 숲 해설을 공부하기도 했고, 저도 수의사이기도 했고, 보겸이도 인류학과 쪽이고 무엇보다 저희가 다 등산을 엄청 좋아하니까, 꼭 하라고 하셨어요. 시작하고 보니까 에코 범위가 꽤 넓더라고요 올해는 아예 구성을 나누고 담당을 정해서 운영하고 있어요. 아침 낭송을 한다거나, 매일 조금씩 읽고 필사해서 올린다거나, 산책과 낭송을 곁들인다거나, 다큐멘터리와 책을 엮는다거나. 형식 면에서는 안정이 됐죠. 지산씨는 내용적인 면에서 우리가 좀 더 각자 색깔을 가지고 장기적으로 가기를 바라시는 것 같아요.
다영 저희는 지금 한 달 하고 또 그다음 달하기가 바빠요.
소담 그래도 한 달 단위고 매일 조금씩 읽기를 도전해보는 프로그램이라 저희가 이것저것 시도를 많이 해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외부에서 오시는 쌤들도 처음에 어렵지 않게 시작하실 수 있고요.
보겸 꾸려가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일상의 리듬을 잡아줄 수 있는, 일상의 중심이 되어줄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 좋은 것 같아요. 
다영 에코프로그램으로 <향모를 땋으며> 읽기 전까지만 해도 인간이 세상의 악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걸 읽으면서 우리도 선물을 받고 있으니까 책임감을 갖고 보답해야 한다는 걸 느꼈어요. 세상이 되게 각박한 곳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사실 되게 풍성한 곳이구나. 요즘에는 환경 관련한 시위도 많이 하고 실천도 많이 일어나잖아요. 아직 저희는 병아리 단계이지만, 다양한 것과 연결 지점이 많아서 이걸로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보겸 맞아요. 에코프로그램으로 사람들이랑 연결되는 게 되게 좋았어요. 짧은 시간이지만 일상에서 자주 만나면서 뭔가를 공유하고 이런 주제로 수다를 떨 수 있는 장이 있다는 것 자체에서 연결감이 느껴지거든요.
소담 사실 저는 처음에 에코백을 사고 텀블러를 들고 다니는 그런 실천에 약간 비관적이었어요. 오히려 근본적인 시각을 바꾸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그런데 최근에 <쓰레기 거절하기>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 책에는 화려한 이론이 아니라 저자와 가족들이 일상에서 실천하는 내용이 담겨있거든요. 이번에는 플라스틱을 적게 써보자, 또 이번에는 자동차를 한번 셰어해보자, 이런 식으로 점점 단계를 밟아나가요. 그 행동들로 자기 삶이 바뀌면서 충만감을 느끼는 모습이 좋더라고요. 하나하나 시도해보는 게 내가 익숙하지 않은 일들을 시도해보는 거잖아요. 공부하더라도 결국에는 행동으로 나와야 진짜 공부를 했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에코쪽이 그런 기회를 많은 사람에게 열어주는 것 같아요. 또 그런 것들이 제 시선을 바꿔주기도 하고요. 우리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조금씩 실천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지금은 등산하면서 플로깅도 하고, 에코 일지도 써보고, 소비도 체크해보고 있어요.
다영 최근에 개인적으로도 이사를 했는데, 이번에는 ‘중고로 다 구해보자!’ 해서 당근마켓을 열심히 했어요. 근데 이런 생각도 했죠. ‘아, 내가 이런 책들을 너무 빨리 읽었다.’ 이 책들을 안 읽었으면 제가 이렇게까지는 안 했을 거 아니에요. 당근마켓으로 사서 옮겨야 했던 물건들이 진짜 무거웠거든요.


글에 다 담지는 못했지만, 인터뷰 중에 주역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셋은 모두 2년째 주역을 메인 공부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규문>에서는 규창이가 몇 년째 공부하며 주역으로 글을 쓰고 있고, <남산강학원>에서는 미솔쌤이 주역을 공부하며 2년째 ’청년주역’ 영상을 만들고 있으며, 내가 공부하는 <문탁네트워크>에도 나를 비롯한 청년 넷이 작년부터 주역을 메인 테마로 공부하고 있다. 여러 공동체의 청년들이 같은 책을, 그것도 동양고전 책을 메인으로 공부하고 있는 날이 오다니! 약간은 섣부르지만, 그래도 동양고전을 사랑하는 청년으로서 기쁜 마음이 일었다.


인터뷰하는 동안 <사이재> 친구들과 함께 간식으로 내놓은 방울토마토를 두 양푼이나 깨끗이 비웠다. 방울토마토를 다 해치운 뒤에는 새로 이사하는 <사이재>의 공간도 구경했다. 맞붙어 있는 바로 앞 건물로 이사를 가는데, 사람이 늘어서 공간을 좀 더 잘 나눠 쓸 수 있는 곳으로 간다고 했다. 지금은 모둠으로 토론하는 시간에는 근처 사시는 선생님들 집에 가서 세미나를 하고, 가끔은 <남산강학원>으로 가기도 하는 상태라고 말이다. <사이재> 친구들은 오늘도 <남산강학원> 근처, 보다 작은 공간이지만 역과는 더 가까운 거리인 비옥한 땅에 뿌리 내리고, 실험적인 에코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새롭게 접속하는 사람들과 꽃도 보고 길도 잃으며 하루하루 뻗어나가고 있다.

 

 

인터뷰_김고은(문탁 네트워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