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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지금 만나러 갑니다

[공동체, 지금만나러갑니다] 2023 <규문> 사인방의 느릿한 독립 초읽기

by 북드라망 2023. 2. 13.

2023 <규문> 사인방의 느릿한 독립 초읽기


<규문>은 혜화에 있는 공부공동체다. 채운쌤과 정옥쌤, 그리 네 명의 청년이 공간을 꾸리고 있다. 나는 청년 넷, 혜원 건화 규창 민호와 인연이 있다. 내가 도맡아 진행한 <길드다> (<문탁네트워크>에서 공부하던 청년들이 2018년에 만든 청년인문학스타트업이다. 5년간 다양한 활동을 하다가 2022년에 분화되었다.)의 <비학술적 학술제>에 <규문>이 참가하면서 가까워졌다. 우리는 인문학 공동체에서 보기 드문 ‘장기 거주 청년’이었기 때문에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의 처지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동질감을 공유하는 것 치고 서로를 따뜻하게 응원하는 사이는 아니다. 장난스럽게 견제하고 은근히 놀리기 바빠서 살가울 틈이 없다.

나는 5년의 활동 끝에 2022년에 <길드다>를 마무리하고 다시 <문탁네트워크>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규문>의 친구들은 나와 반대의 길을 간다는 소문을 들었다. 네 친구를 만나기 위해 한파가 최고조에 달한 1월의 어느 날, 오랜만에 <규문>을 방문했다. 가장 먼저 규창이 “여어~ 왔어”하고 반겼다. 규창은 나와 동갑내기 친구이자, 인문학 공동체에서 동양고전을 전공하는 몇 없는 친구다.(ㅜ) 화장실을 다녀왔더니 민호가 보드에 그림을 그리며 며칠 전에 봤던 슬램덩크의 여운을 곱씹는 중이었다. 민호는 붙임성이 좋은 막내로 과학에 관심이 많다. 자리에 앉으니 건화가 곶감과 레드향을 가져다줬다. <청년, 니체를 만나다>로 데뷔한 그는 여전히 서양 철학자들과 씨름하고 있다. 나와 함께 간식을 집어든 혜원 언니는 동양철학과 불교를 오가며 공부하는데, 넷 중 유일한 여자라 자꾸 눈길이 간다. <길드다>를 하며 남자 셋과 여자 하나로 일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로의 근황을 나누다가 질문 폭격을 맞았다. 분명 인터뷰는 내가 하러 왔는데, 거꾸로 인터뷰를 당했다. 내가 어쩌다 인터뷰어의 길을 가게 됐는지 20분간 취조를 당한 뒤에야 넷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왼쪽부터, 규문의 규창-민호-건화-혜원


공간에 필요한 사람이 되다
고은 : 네 분은 <규문>에서 공부도 하시고 글도 쓰지만, 공간도 운영하고 있지요. 2022년에 <규문>에서는 어떤 나날을 보냈나요?
민호 : 작년에는 역할을 나눠서 공간을 운영해봤어요. 저는 회계를 맡았는데 이 공간에 돈이 얼마큼 필요하고, 어느 정도의 규모로 돌아가는지 알게 돼서 신기했어요. 그렇게 큰 액수가 제 통장에 들어온 것도 처음이었고요(!)
건화 : 이번에 저희가 역할을 더 맡으면서 좋았던 건 채운쌤과 관계가 달라졌다는 거예요. 아무래도 채운쌤이 강의도 하시고 운영도 하시면 관계가 일방향적일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민호한테 회계도 맡기시고, 저한테 IT도 맡기시니까 아무래도 저희가 채운쌤한테 필요한 존재가 되더라고요.
고은 : IT요?(웃음) 공동체에 IT부서가 있군요!
건화 : 이곳에 전기가 들어가는 모든 것을 담당했어요. 홈페이지를 가장 많이 신경 썼죠. 규창이는 청년부의 리더가 되어서 회의를 소집했고, 혜원 누나는 ‘규문각(규문의 서재)’을 담당했어요. 이전에는 채운쌤이 시키시고 저희가 그걸 굴리는 정도였다면, 이제는 저희가 채운쌤에게 이것저것 요청하고 제안도 하는 관계로 바뀌었어요. 그러니까 공간에 마음이 더 밀착되더라고요.
고은 : <규문>에 청년부가 있는지 몰랐어요.
규창 : 청년밖에 없어서 청년부라고 부르는 건데요.(웃음) 우선 다른 세대에서 오는 감각 차이를 조율했고요. 또 <규문>은 채운쌤의 비전 안에 있는데, 우리는 그 안에서 어떻게 공부하고 공동체 생활을 할까, 하는 논의를 했어요. 제 생각에는 공부하면서 돈 버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지점이지 않을까 해요. <규문>에서 공부하고 돈 번다는 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되는 거거든요. 작년에는 공부로 먹고살기 위해 어떤 능력과 관계가 필요할까를 고민하고 실험했죠.
민호 : 작년에 저희 넷이서 처음으로 청년 프로그램을 진행했어요. 또래 청년들과 오늘날 문제의식을 나누기 위해서 ‘짠’ 열었는데, 아무도 오지 않아서 저희끼리 했지만요. 거기서 생태, 젠더, 경제같이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는 텍스트를 많이 읽었는데, 오래된 책만 읽다가 오랜만에 환기가 됐죠.
건화 : 그게 <청지밴드>였어요. 그것도 그렇고 작년에는 <규문> 내수용이 아닌 활동들이 좀 있었어요. <옴팡>이라는 부천의 청소년 모임에 강의도 갔고, <한국도서관협회>에서 하는 유투브 강의에도 참여했어요.
고은 : ‘공부로 어떻게 먹고살 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작년에 시작한 건 아니죠?
규창 : 그건 아닌데요, 그래도 실제로 뭐가 남았던 건 작년이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이전에는 수입원이 매니저 일이나 원고 쓰기에서 나왔거든요. 작년에는 강의를 하면서 꽤 쏠쏠하다는 걸 느꼈죠. 게다가 강의는 이전에 글쓰기와 다르게 넷이서 준비했는데요, 집단 지성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게 가능하구나 싶었어요. 지성이 많이 부족하긴 했지만요.(웃음)
건화 : 저희가 지금 타율 반, 자율 반으로 고민하는 것 중 하나가 독립이에요. 채운쌤이 올 1년 동안 준비해서 내년에 독립하라고 먼저 운을 띄우셨는데, 저는 공감하고 있어요. 언젠가는 저희가 맺는 관계가 달라져야 할 텐데, 저희가 독립을 위한 능력을 전부 다 갖추는 때는 오지 않을 것 같아요. 작년에 했던 활동들도 그렇고, 관계를 맺어가다 보면 독립이 그렇게 막연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어요. 전에는 내가 엄청난 능력을 갖춰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공간을 소개하고 있는 규창


안정적인 중력에서 벗어나기
고은 : 독립이 왜 필요하다고 느끼세요?
건화 : <규문>이라는 공간이 돌아가기 위한 중력이 있는 것 같아요. 우선 채운쌤과 중년쌤들이 계시죠. 그분들이 하고 싶어 하시는 공부가 있고, 또 이곳의 규모에 맞게 운영하다 보면 거기에 드는 에너지가 있잖아요. 우리 나이에 펼쳐보고 싶은 게 있어도 쉽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좋은 면도 있어요. 안정감이 있고, 지지를 많이 보내주시는데다 이렇게 공부에 대한 직접적인 코멘트를 받을 기회는 또 없을 것 같아요. 휴, 적절한 단어 고르느라 좀 힘들었네요. (웃음)
혜원 : 제가 여기 제일 오래 있었어요. 그래서 건화가 말하는 중력이 뭔지 제일 잘 알지 않나 싶어요. 책을 읽고 공부한다고 한다고 꼭 역량이 커지는 건 아니잖아요. 여튼, 그래서 ‘독립은 하는 게 아니라 당하는 거’라는 말에 납득이 되더라고요. 자율적으로 뭐가 필요할지 생각할 리가 없으니까, 좀 떨어져 있는 게 좋은 기회가 되겠죠.
규창 : 저는 채운쌤 말이 아니더라도 독립해야되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어요. 공부를 지속하려면 공부로 먹고살 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또 배우는 데서만 그치면 고일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요. <규문> 밖의 장에 나가는 게 공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고은 : 독립을 하게 되면 어떤 모양새가 되는 거예요?
건화 : 우리한테는 구체적인 모델이 있죠. <길드다>에요.
고은 : 저희 없어졌는데요? (웃음)
건화 : 없어지는 것까지 완벽했다(!) 아마 공간은 따로 마련할 것 같아요. 당장에 지원 사업이나 외부 강의로만 끌어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고, <규문>에서 튜터를 하지 않을까요? 완전히 관계가 단절되는 건 아니고, 새로운 활로를 열겠죠.
민호 : 사실 제가 독립에 대한 생각을 제일 늦게 하긴 했는데요. 지금은 그래도 동감하고 필요성도 느끼고 있어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채운쌤에게 더 배워야지라는 생각이 컸는데, 이제는 그 영향력 밖에서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겪고 있는 문제가 거기서 풀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고요. 그리고 저희가 이 공간에서 특정 역할을 하는 만큼, <규문>에 접속하고 싶어 하시는 중년쌤들이 그걸 못하시게 되시는 거잖아요.
건화 : 공부를 되게 진지하게 하시는 중년쌤들이 있으니까 그분들을 위해서 자리를 비켜줄 필요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죠.
민호 : 또 이런저런 걱정도 있어요. 많은 문제들이 들이닥치겠죠. 공간을 운영하기 위해 바쁘게 프로그램을 짜고 금전적인 문제를 해결하다 보면 성현들을 말씀을 얼마나 읽을 수 있을까 걱정도 돼요.
모두 : (‘성현들의 말씀’에 웃음)
민호 : 그리고 이 사람들과 <규문>에서만 만나봤기 때문에, 우리끼리 뭉쳤을 때 어떻게 달라질지 두렵기도 하고 기대도 돼요.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아낄까, 우리가 그렇게 친할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고요.
건화 맞아요. 지금은 각자가 <규문>과 맺는 관계가 먼저 있어요. 사실 저희가 거의 싸우지 않거든요. <규문>이 안정적인 곳이니까, 각자 기행을 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어도 내버려 둘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독립하면 우리의 관계가 되게 중요해지겠죠.



섹시한, 안목, 뼈대있는, 기초공부
고은 : 올해는 각자 어떤 공부를 할 계획이에요? 그 공부가 왜 매력적인지도 얘기해주세요.
건화 : 예전에는 푸코가 너무 멋있었거든요. 감히 내가 푸코에 대해 뭔가를 써낼 수 있을까, 그러려면 나도 푸코처럼 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압박감이 있었어요. 근데 작년에 공부하면서 푸코도 하나의 도구로 쓸 수 있겠구나 싶어졌어요. 그래서 올해엔 그 전에 공부한 일리치와 푸코를 같이 다뤄보려고 해요. 둘이 똑같은 해에 태어났고, 병원과 학교를 다뤄요. 근대적인 주체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비슷한 게 많아 보이는데 실제 삶이나 문체는 너무 다르거든요.
  글도 연재하고 세미나도 열 거예요. 세미나는 <IF(일리치&푸코) 세미나>인데, 섹시한 책을 많이 읽어요. 일리치와 푸코의 고전이라고 할 만한 책과 그와 연결된, 동시에 확장시켜주는 포스트휴머니즘을 읽거든요. ‘인간’에 대한 근대적 규범을 해부한 일리치와 푸코의 문제의식을 포스트 휴머니즘이 현대로 확 당겨와요.
고은 : 재밌겠다. 작년에 연재한 마지막 글이 푸코의 쾌락에 대한 글이었잖아요. 그 글에 따르면 일리치는 금욕주의자고 푸코는 쾌락주의자인데, 그 둘을 묶어서 본다는 게 흥미롭게 느껴지네요.
규창 : 제가 여는 세미나는 <마이너 세계사 세미나>에요. 작년에는 우리가 주류적 세계사에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면, 올해는 주류적이지 않은 세계사를 직접 써보려고 해요.
고은 : 커리큘럼만 보고 <사기(史記) 세미나>인 줄 알았어요.
혜원 : 날카로워. (웃음)
규창 : 끝까지 제대로 안 보셨나 봐요^^ (이를 꽉 물고 웃음) 오전, 오후가 다르거든요. 오전에는 <사기>를 읽지만, 오후에는 몽골의 역사를 공부하거든요.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사는 서양의 근대국가를 목표로 서술됐는데, 사실 ‘세계사’라는 개념이 성립될 수 있었던 배경에 몽골 제국을 빼놓을 수 없어요. 마이너 세계사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려면 몽골 제국을 공부할 수밖에 없고, 몽골 제국을 입체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맞닿아 있는 중국의 역사도 공부해야 하죠. 주어진 정보를 암기하는 것 이상으로 역사 공부를 하고 싶다면 자기 관점으로 세계사를 쓸 수 있어야 하거든요. 그런 안목을 가질 수 있고 그런 훈련을 할 수 있는 곳은 <마이너 세계사 세미나> 밖에 없어요.
혜원 : 뭐지, 이 자화자찬은?
모두 : (웃음)
민호 : 저는 고대 과학 철학부터 시작하는 과학 세미나를 열려 하고 있어요. 지금까지는 과학 대중서를 읽었는데, 찾아보니까 과학 철학이 던지는 질문이 흥미롭더라고요. 여러 앎들 중 어떤 것이 어떻게 과학의 지위나 힘을 갖게 되는지를 살펴보는 거예요. 특히 고대 과학에서는 사실이라는 걸 증명하는 데 실험이 아니라 논리를 사용하거든요. 그런 과정을 플라톤 이전부터 시작해서 중세까지 자연과학자들을 쭉 다뤄보려고 해요.
그리고 이 공부가 왜 매력적이냐면요, 이 문과생만으로 가득한 공부 바닥에서
모두 : 오…!
민호 : 과학적인 질문을 하지 않고, 앎이 난무하는데 그 앎의 체계에 대해 질문하지 않고 뭘 하겠다는 건지(!) 뼈대 있는 질문을 해보고 싶은 분들은 오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건화 : 잘한다…. 나 다시 해야 될 것 같은데?(웃음)
혜원 : 작년에 저는 안 건드린 게 별로 없어요. 근데 남는 게 거의 없었어서, 기초부터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저 혼자 테스트를 봐야해서 <중용>과 <노자>를 외우고 있어요. 수험생이 되라는 말을 들었거든요. 지금은 일단 이 고비를 넘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규창 :두 개를 합치면 9천 자에 달하죠.

인터뷰가 끝나자 이들은 퇴근 시간이 아닌데도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농구를 하러 간다고, 나에게도 같이 가자고 했다. <슬램덩크>에 빠진 건 민호만이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농구장이 5분 거리라기에 따라나섰다. 우리가 놀림과 속임이 난무하는 사이라는 걸 깜빡한 것이다. 성균관대 농구장은 20분 거리였고, 그마저도 높은 지대에 있는 야외 농구장이었다. 한파에 야외 농구라…. <슬랭덩크>를 보지 않아 과몰입에 실패한 나는 사인방의 응원을 받으며 열심히 점프했다. 이렇게라도 받아보는 친구들의 응원이 어찌나 시원하던지^^


이들은 <길드다>가 앞서 간 길이 있지 않냐고 자꾸만 묻는다. 나는 <규문>의 사인방이 <길드다>와 좀 다른 길을 갈 거라고 생각한다. <길드다>와 <규문>의 멤버들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공동체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길드다>는 보다 빠르게, 공간을 채운다는 것이 뭔지 모르는 상태로, <문탁네트워크>를 부유하던 와중에 만들어졌다.(<길드다>가 정리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었다.) 반면 <규문>의 사인방은 공간에 정말로 필요한 사람이 될 때까지 꽤 긴 시간이 필요했고, 이제 비로소 독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사인방은 자신들이 친하지 않아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걱정하지만, 나는 그게 유일한 걱정거리라면 오히려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길드다>의 멤버들은 한 번도 농구를 같이한 적이 없었지만, 잘만 일하고 잘만 싸우고 잘만 화해했다.

<규문> 사인방은 느리고 차분히, 자기들만의 속도와 강도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 만약 그들이 내게 도움을 청한다면 나는 얼마든 기쁜 마음으로 나설 것이다. 내가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아마도 그들의 길고 긴 독립 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조심스러운 발걸음에서 그간 쌓아온 시간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인터뷰_김고은(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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