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디씨나 지중해

[메디씨나 지중해]새해를 맞이하며

by 북드라망 2023. 3. 28.

새해를 맞이하며



끝없는 장작패기
누군가 나에게 의학공부가 재미있느냐고 물으면 나는 그렇다고 답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생고생을 하고 있을 이유가 없다. (무슨 영광을 보려고? 애초에 의사를 꿈꿨던 것도 아닌데.) 게다가 지금 바르셀로나에서 공부하게 되기까지의 과정도 순탄치 못했다. 사 년 전 의학 공부를 막 시작했을 때 사촌동생이 만학도냐고 나를 놀렸다. 온 우주도 내가 만학도가 되기를 바랐던 것인가, ‘글로벌 천재지변’은 내 공부를 몇 년 더 지연시켰고, 덕분에 나는 올해야 병리의 세계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렇지만 요즘, 스페인인들 모두가 성찬을 즐기며 여유를 만끽하는 연말에 수백 쪽의 종이에 묻혀 여전히 ‘의학의 유령’과 씨름하고 있는 요즘, 나는 종종 생각한다. 이게 대체 어떻게 ‘재미’가 될 수 있을까? 터무니없는 말이 아닌가? 이번 학기에 우리가 매주 소화해야 하는 공부의 양은 300쪽 안팎이었다. 학기 말이 되면 십오 주 동안 프린터한 종이만 쌓아도 책상 높이의 탑을 만들 수 있을 정도다. 절대 시간이 부족하다보니 재미를 느낄 여력이 없다. 건조한 정보들을 최대한 빨리 훑고 효율적으로 분류해야 한다. 산더미처럼 쌓인 ‘장작’을 패야 하는 ‘마당쇠’가 된 기분이다. ‘시험 마님’이 눈을 부라리며 얼른 일을 끝내라고 재촉하고 있는 마당에, 장작 한 조각 한 조각이 얼마나 독특하고 아름다운지 감탄하고 있을 틈 따위는 없다.

나는 매일 책상 앞에 앉아서 똑같은 일을 한다. 모르는 단어를 찾고, 도식을 그리고, 어제 외웠으나 오늘 잊어버린 내용을 다시 되새김질 한다. (내 머릿속의 지우개… 하…) 확실한 건 억지로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의학의 세계에 들어오려면 반복 작업은 숙명임은 일찍이 받아들였고, 그게 고역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어쩌면 수행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이분법의 와해, 그 다음 질문들
정확히 언제부터 의학 공부에서 ‘수행’을 연상하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다. 맨 처음 내가 의학에 끌렸던 것은 쿠바 의사를 향한 경탄과 호기심이었지, 이렇다 할 만한 실존적 결단을 내린 적은 없다. 그러나 엉겁결에 발을 담그게 된 의학 안에서 나는 내가 살아보고 싶은 방향을 발견하게 되었다. ‘졸업’이나 ‘면허’처럼 당장의 공부를 수단으로 만드는 먼 미래의 목표 대신, 매 순간 따를 수 있는 기준이 생긴 것이다.

의학을 공부하기 이전 내 머릿속은 옳고 그름의 이분법으로 구획되어 있었다. 그래도 철학책을 좀 읽었답시고 ‘결국 모두들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진실이라 주장할 뿐이고, 나-너의 이분법에 갇혀 있을 뿐이야’라고 쉽게 말하곤 했지만, 실제로 그 말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는 몰랐다. ‘이분법에 매인 고리타분한 자들’과 ‘이분법에서 자유로울 줄 아는 자들’이라는 또 다른 이분법이나 만들고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의학의 세계에 들어온 순간부터 이런 구획은 철폐되어야 했다. 이유는 간단했는데, 아무 짝에도 쓸모없기 때문이다. 의학이 추구하는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병증과 치유다. 생명력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기에 치유를 돕는 것은 옳고, 고통을 증가시키는 것은 그르다. 부처님 말마따나 ‘화살을 맞았으면 당장 화살을 뽑는 게 제일 중요한 것’이다. 게다가 의학은 공평하게 만인의 건강을 기원한다. 설사 ‘저 사람’이 밉상이고, 나와 정치적으로 정반대의 의견을 지녔으며, 나를 몹시 싫어하는 사람일지라도 마찬가지다. ‘그’가 숨을 헐떡이고 심장을 부여잡은 채 침상에서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것보다는, 제대로 치료를 받아서 나를 다시 열심히 싫어할 만큼 팔팔하게 기력을 차리는 쪽이 더 낫다. 그렇다고 믿어야 의학에 임할 수가 있다.

따라서 나는 질문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 했다. ‘저것(저 습관, 저 환경, 저 욕망, 저 관계…)이 당사자의 치유에 도움이 되는가, 아닌가? 도움이 된다면 어째서 그러한가?’ 이 질문은 의료에 국한되는 기술적 접근이 아니었다. 세상과 삶의 중심으로 곧장 들어갈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나로서는 이해 불가한 인생을 사는 사람부터, 너무나 익숙해서 그 내면을 의심해본 적 없는 사람까지, 고통과 치유라는 키워드 속에서는 모두가 이해받을 수 있었다. 사회를 구성하는 무수한 명칭들과 규범들은 ‘세상’과 ‘나’를 위치시키는 상식적인 틀을 쌓아올린다. 그러나 이 틀 위에서 각자가 일상의 지도를 어떻게 그리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곳에는 고통과 치유라는 두 가지 힘이 작용한다.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바를 쫓아가다 아픔을 겪고,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이것저것 시도하다가 실패한다. 이 두 축에 휘둘리며 삶은 희한한 나선을 그리게 되는데, 이 경로를 합리성만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역시 큰 쓸모가 없다. (스스로의 행동거지를 청산유수로 설명하지만, 실제로는 병든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내 안의 이분법이 시나브로 무너진 후, 나는 치유의 지평을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이 길은 방향만 제시할 뿐, 고민은 끝나지 않는다. 자칫했다가는 ‘치유 VS 고통’이라는 또 다른 이분법에 빠지게 된다. 치유는 모두가 바라는 절대선이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통을 제거하자…! 이렇게 단순명료한 접근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병리를 조금만 공부해 봐도 이는 불가능하다. 병은 적으로서 찾아오지 않는다. 병리생리학의 메커니즘은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교란시키면서 진행된다. 어디까지가 외부 환경 탓이고, 또 어디까지가 몸의 조성 때문인지 칼로 무 자르듯이 말하기가 어렵다. 치료는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도록 해주지만, 그렇게 회복한 환자들은 대부분 근시일내에 또 다른 병을 얻을 수 있는 ‘열린 결말’을 안고 집으로 돌아간다. (서양의학은 병을 대상화하여 제거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지만, 최근에는 그렇게 해서는 ‘구멍들’을 메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추세다. 결론은 ‘의사가 적절히 판단해야 한다’는 말로 어물어물 넘어가버리지만.)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묻지 않을 수 없다. 치유란 무엇인가? 고통은 무엇인가? 치유란 고통의 제거 혹은 유예인가? 육체를 타고 태어났기 때문에 고통을 피할 수 없고 이를 수용해야 한다면, ‘고통으로부터의 완벽한 구원’은 망상이 아닌가? 거꾸로 숱한 고통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마음은 어떤 원리를 통해 만들어지는 걸까? 치유를 구하는 마음은 불완전한 존재의 자기위로와 발버둥인가, 혹은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할 가능성인가? 회복과 탄생이라는 뜻을 동시에 담고 있는 ‘재생(再生)’이라는 말은, 우리 일상을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까지 어루만질 수 있을까?

해결되지 않은 질문들을 품은 채 산더미처럼 쌓인 프린트물 앞에 앉으면, 넓은 모래밭에서 보물찾기에 나선 아이가 된 심정이다. 이 건조한 정보의 장작더미 속에 내 앙상한 사유에 금을 낼 수 있는 ‘도끼’가 숨어 있기를 기도하게 된다. 질문을 던져놓고도 금세 까먹는 내 박약한 의지를 붙들어 놓기 위해서라도 반복 작업이 필요하다. 만약 이런 것들을 재미라 부를 수 있다면, 의학 공부가 재미있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바꾸려는 마음
재미를 학교에서도 찾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런 고민을 학우들과 나누기 쉽지 않다.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이들에게 언제 스트레스성 우울증이 찾아올지 몰라서 내 심장이 벌렁거린다. 지난 번 MVQ 연재에서 의대 내부에서 갈리는 ‘중심과 주변’에 대해 이야기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치유를 배우겠다고 대학에 들어온 의대생들이 정작 자신이 아픈 상태에 대해서는 무디다. 왜 주변에서 중심으로 나아가지 못하는지만 고민할 뿐, 왜 병이 들었고 치유의 과정이 어떠해야 하는지는 질문하지 않는다. ‘해결책’은 심리상담사를 찾아가는 것으로, ‘잘못’은 시험을 어렵게 내는 교수에게 돌리는 것으로, ‘목표’는 여전히 중심에 진입하는 것으로 설정된다.

이 상황을 당사자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다. 몸은 주체가 아니다. 우리가 남들과 비슷한 병을 앓는 것은 우리들의 육체가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증거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중심과 주변을 고정시키는 배치가 마음의 병을 만들어낸다. 중심에 머무는 마음은 스스로 모든 걸 이뤘다고 여기기 때문에 주변에 대하여 깊은 무관심에 빠진다. 주변에 머무는 마음은 중심에 진입하려고 애쓰다가 점점 자존감이 마모되고, 고통을 잠시 잊기 위해 자기 탓을 하거나 남 탓을 한다. 오만함이나 자기비하가 지나치게 강력해지면 마음은 자기보호 메커니즘을 가동한다. ‘자기중심적 마음’을 먹는 것이다. 극한의 추위가 닥치면 피가 인체의 핵심장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팔다리를 떠나 중심부로 몰리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 메커니즘에는 제한시간이 있다. 짧은 시간 내에 피가 주변부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육체는 괴사가 진행되며 돌이킬 수 없게 망가질 것이다. 못난 마음과 병든 마음 또한 지나치게 오래 고여 있으면 주위 사람들이 슬슬 피하기 시작한다.

이 상황은 ‘나’ 한 사람의 탓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를 바꿀 수 있는 것은 ‘나’라는 당사자 밖에는 없다. 스스로를 바꾸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는다면 어떤 조언도 무용지물이 된다. ‘의사’의 역할은 환자가 그 사람을 치유자로서 인식하는 관계 속에서만 기능할 수 있다.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에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자기성장의 서사는 바뀌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난장판에 처할 때에만, 이 병을 치유해야 한다는 이해 속에서만 만들어진다. 그런 서사들이 산발적으로 싹을 틔웠다, 다시 꺾였다, 복원되었다 하면서 우당탕탕 학교의 시간은 흐르고 있다.

미완 상태로 남은 질문들, 스트레스 속에서 어떻게든 길을 뚫어보려는 친구들, 느리지만 꾸준히 넘어가는 교과서의 페이지들. 이 모든 것의 출발점에 환자의 마음이 있다.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는 수동적인 마음이 아니라, ‘나’를 (그와 엮여있는 ‘세상’까지도) 조금이라도 바꿔보려는 살아있는 마음이다. 세상 모든 것이 변화의 흐름 속에 있다면, 그 흐름을 타려는 몸짓은 자연스럽다. 이에 비하면 의학의 지식은 불완전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생명의 마음에 화답하지 않을 수 없기에 의학 역시 사라지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새해에는 의학공부 속에서 더욱더 광활한 ‘재미’를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나의 셀 수 없는 약점과 무지가 더 많은 환자를 이해할 수 있는 배움의 재료로 활용되기를 바란다. 부족한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욕심일 것이다.

 

글_김해완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