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맞이의 시간
북적였던 겨울
바르셀로나에도 봄바람이 분다. 2023년으로 해가 바뀐 게 얼마 전인 것 같은데, 벌써 달력이 3월로 넘어간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매년 매번 똑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것 같다. 도대체 언제 시간이 이렇게 지났지? 내 나이 앞자리가 언제 바뀌었더라? 그렇게 십 년이 흐른다. 올해는 내가 한국을 떠나 산지 햇수로 십년 째 되는 해다.
이번 겨울은 내가 바르셀로나에 온 후 처음으로 손님들을 맞이하는 시간이었다. 그제야 내가 바르셀로나에서 보낸 시간이 벌써 꽤 흘렀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렇지만 나의 손님맞이는 이번에도 미숙했다. 원래도 가이드를 못 하기로 유명한 나이지만, 바르셀로나 도심으로 이사를 온 건 겨우 두 달 전인지라 정말 아는 게 없었다. 손님들이 오히려 바르셀로나 맛집들을 내게 알려주고 떠날 정도였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이들의 여행에 계속 동행하면서 말동무가 되어주는 것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나도 잔뜩 신이 나서 돌아다녔을 텐데, 이번에는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체력이 이십 대와 달라졌다는 걸 실감하는 요즘이다ㅠㅠ) 시험이 끝나자마자 예정되었던 여행과 미뤄두었던 일거리에 매진했더니, 결국 몸이 탈이 났다. 겨울방학이 짧은 터라 몸을 회복할 시간도 없이 학교로 돌아가야 했다. 궁여지책으로 전기장판을 빵빵하게 틀어놓고 일주일 동안 땀 흘리며 잤다. 그랬더니 이제는 사람의 꼴을 다시 갖추었다.
몸이 고생하기는 했지만 좋은 시간이었다. 연고도 없이 오직 공부 하나만 보고 불쑥 찾아온 바르셀로나에 한 겹씩 추억이 쌓인다. 추억은 누군가가 그 시간을 함께 공유할 때만 만들어질 수 있는 기억이다. 특히 나와 내가 사는 도시를 보겠다고 굳이 먼 길을 온 사람들을 맞이하는 시간은 움직인 거리만큼 더 특별해진다. 내가 사는 바르셀로나가 매력적인 여행지로 여겨져서 기쁘고, 내게는 익숙해진 이 도시를 바깥의 시선으로 재조명할 수 있어서 기쁘고, 무엇보다 친구 및 가족들에게 ‘한국 탈출’의 좋은 핑계(ㅋ)가 되어줄 수 있어서 기쁘다.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이번 겨울의 시간을 짧게 기록으로 남겨 공유해본다.
배웅의 시간
손님들을 맞이하기 전에 먼저 보내야 할 손님이 있었다. 남편 제프리다. 우리는 배웅을 너무 자주 한다. 연애 때부터 장거리를 (그것도 거주 국가를 바꿔가면서) 했기 때문에 서로를 공항, 기차역, 버스정류장에 데려다준 기억이 허다하다. (팬데믹이 한창일 때 내가 멕시코에서 쿠바로 들어가던 날이 떠오른다. 내가 공항행 버스에 올라타자 제프리가 버스정류장 유리창에 만화 스티커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던 기억이…)초반에는 이제 가면 언제 보나 눈물 찔끔 흘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조심해서 가거라~ 굶지 마라~’ 따위의 말을 남기고 쿨하게 돌아선다. 지금 헤어져야 나중에 또 볼 수 있다.
이번 배웅은 비교적 단순했다. 제프리가 버스를 탔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로 돌아가기 전에 독일로 이동해서 친구를 보고 가겠다고 한다. 스페인에서 독일까지, 두 번의 버스와 한 번의 기차를 이용한 이 여행은 장장 26시간이 걸렸다. 나는 그냥 돈을 내고 편한 비행기를 타라고 말렸지만, 간만에 배낭여행 본능이 발동한 것일까, 제프리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다행히 무탈하게 도착하여 친구와 재미있는 일주일을 보낸 듯하다. 그렇지만 잦은 이동에 지친 것인지, 말레이시아로 갈 날짜가 다가오자 제프리는 내가 졸업하면 한 장소에 말뚝 박고 십 년은 움직이지 말자는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제프리의 소망에 맞장구를 쳐주긴 했지만, 실현 가능성은 별로 없는 계획이다. 제프리와 나는 둘 다 (이동을 원하느냐의 여부와는 별개로) 이동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우리 둘의 생활이 섞이자 삶의 반경이 급격히 넓어졌다. 어느새 나는 친정은 한국에, 시댁은 말레이시아에, 남편은 중국에, 학교는 스페인에 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서로를 선택하기로 했으니 이동은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또 움직여야 하다니’라고 탄식하기보다는 ‘움직일 때 잠 좀 자두자…’라고 생각하는 쪽이 더 편하다.
제프리가 떠나고 이틀 뒤에 배웅할 사람이 또 왔다. 쿠바에서 영화 공부를 하는 친구였다. 쿠바로 가는 길목에 스페인에서 비행기를 갈아탄다고 했다. 한국에서 받을 물건도 있고 또 쿠바에 사는 친구들에게 전해줄 물건도 있어서 저녁을 함께 먹었다. 저녁 시간은 진담과 농담이 섞인 쿠바 이야기로 채워졌다. 이런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눌 만큼 쿠바살이의 애환을 피부로 체득한 사람은 극소수다. 이번에 나눈 대화 중에서는 땅콩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어쩌다가 내가 땅콩을 싫어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러자 내게 진지하게 묻는 게 아닌가. “땅콩을 안 먹으면 쿠바에서 뭘 먹고 살았어? 진심으로 묻는 거야.” 그 얼굴이 어찌나 심각하던지, 실컷 웃다가 또 쿠바에서 친구가 매일 먹을 식단이 상상되면서 살짝 서글퍼졌다. 얼른 졸업하고 쿠바에서 나오렴 친구야…
자매의 시간
제프리와 친구가 떠나자마자 새 손님이 도착했다. 사촌들이었다. 사촌동생은 내가 쿠바에 있을 때도 홀로 불쑥 방문한 전적이 있다. 스페인어를 한마디도 못 하면서 쿠바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콩나물 버스를 용감하게 타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나도 깜짝 놀랐었다. 당시 동생은 대학교를 막 졸업하고 석사과정에 들어가기 직전의 푸릇푸릇한 청년이었다. 그랬던 녀석이 이제는 박사과정에 한참 매진하고 있다. (자기는 석사에서 박사가 되었는데 나는 언제 졸업하느냐고 놀린다. ^*^) 또 사촌 언니는 내가 뉴욕에 있을 때 삼 주 정도 방문했다. 언니 역시 당시 대학원을 막 졸업하고 임용고시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랬던 언니가 이제는 벌써 사 년 차 중학교 미술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다.
사촌 동생은 학회 일정을 맞춰야 한다며 짧고 굵게 놀다가 훌쩍 떠나버렸다. 그렇지만 칠 년 만에 겨우 해외 나들이를 한 사촌 언니의 여행 경로는 더 야심 찼다. 파리에서 출발해 바르셀로나를 거쳐 스페인 남부인 세비야와 그라나다, 거기에 포르투갈까지 방문할 예정이었다. 언니는 바르셀로나에 남아 시험 보는 동안 스페인 남부를 홀로 여행했고, 그 후에는 내가 언니가 있는 포르투갈로 날아갔다.
여행객들 사이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리스본과 포르투는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특히 포르투는 여행을 많이 해본 나조차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세상에 어쩜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가 있을까? 그렇지만 여행이 특별했던 진짜 이유는 언니와 단둘이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자매가 없는 우리들은 어렸을 때부터 친자매처럼 지내왔다. 그러나 우리가 더 깊이 연결된 계기는 우리 둘 다 빈말로라도 평탄했다고 말할 수 없는 이십 대를 공유하면서였다. 성격도 취향도 공통점이 없는 우리 둘이 끈끈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던 건 서로를 향한 관심 덕분이다. 일상이 버겁더라도 마음만은 평안한 시간을 누리기를, 내 생활은 힘들어도 상대의 생활은 덜 힘들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언니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말로 나눈 대화보다 더 좋았던 것은 ‘해외’라는 환경을 함께 경험해보는 암묵적인 대화였다. 해외 살이 십 년 동안 생활지를 세 번이나 바꾸면서 나는 적응을 늘 최우선의 기준으로 삼았는데, 그 과정에서 새로 생긴 습관이 하나 있다. 주위 사람들과 좋은 소식은 남김없이 나누되, 괴로운 이야기는 선택적으로만 오픈하거나 언급하지 않는 것이다. 나를 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상황을 공유하는 게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내가 처한 환경과 택해야 하는 결정들이 너무나 특수하기에, 이를 이해시키려면 지나치게 많은 길을 돌아가야 한다. 게다가 그렇게 힘들게 이해한다 해도 상대방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듣는 사람의 마음만 안 좋아질 뿐이다. 공부 현장이 넓어질수록 일상을 공유할 사람이 줄어드는 것은 자연히 감수해야 할 대가다.
그런데 언니는 이번에 틈이 날 때마다 내 일상을 캐물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해외 살이의 단서가 생긴 듯했다. 캐묻는 범위는 점점 넓어져서, 나중에는 내가 이런 사소한 애로사항까지 같이 고민해줄 필요 없다고 막을 정도였다. (그러나 언니는 멈추지 않았다!) 언니는 말했다. 내 힘든 상황을 온전히 공감할 능력은 없겠지만, 내가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공유하려는 관심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아달라고 말이다. 그 순간 ‘심쿵’ 했다(^^). 실로 나 같은 떠돌이의 심장을 정확하게 겨냥한 말이었다. 사랑은 디테일에서 나온다. 사랑과 관심이 있을 때 떨어져 있는 사이에서도 시간은 함께 흐른다.
친구의 시간
사촌 언니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나서 일주일 뒤에 일본 친구 한 명이 바르셀로나를 방문했다. 이 친구와의 인연도 길게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십 년 전 뉴욕에서 만났고, 오 년 전에는 나를 보러 쿠바에 왔으며, 작년 나와 비슷한 시기에 결혼식을 올렸다. 서로의 결혼식을 보러 가지는 못했지만, 친구는 내 결혼식을 유튜브로 시청했고 나는 친구의 결혼식으로 사진으로 공유했다.
우리 둘은 뉴욕 생활과 국제결혼을 제외하면 삶의 교차점이 거의 없다. 내가 계획이라고는 없이 여기저기 떠돌면서 공부를 하는 학인이라면, 친구는 일본 명문대를 졸업하고 졸업하자마자 외국계 금융회사에서 칠 년째 고액 연봉의 커리어를 쌓고 있는 사회인이다. 둘 다 외국인 남편과 결혼했지만, 친구의 남편은 전생에 일본인이라 해도 좋을 만큼 일본 사회에 동화되어 살고 있는 정주민이다. 그렇다면 우리 둘의 우정은 어떻게 지속되는 걸까? 일 년짜리 추억만 가지고 십 년 동안 관계를 계속할 수는 없다.
친구에게 나는 끊임없이 바깥 세계를 상기시켜주는 사람이다. 친구는 ‘본 투 비 우등생’으로서 월급이 따박따박 나오는 정규직의 일상을 소중히 여기지만, 그러면서도 일상 바깥의 세계와 연결고리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외부 세계가 새로운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해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제자리를 떠나는 ‘여행’의 진정한 가치를 알기에, 친구는 내가 사는 곳을 방문할 때마다 늘 감사한 마음으로 온다. 내가 친구에게 고마워하는 것 역시 이 열린 마음이다. 친구와 대화를 하면 이 마음을 어김없이 느낄 수 있다. 내가 지나가는 말로 던진 몇 마디를 통해 내 속마음을 캐치하고, 짧은 설명으로도 내 생활 조건을 빠르게 이해하며, 내 상황을 자신의 상황과 늘 연결 지어 응답해준다. 내가 어떤 삶을 사는지 관심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번에 친구가 해준 말 중에 깜짝 놀랄 이야기가 있었다. 십 년 전 친구가 뉴욕을 떠나던 날, 나는 친구에게 노래를 한 곡 녹음해주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친구가 내 기타 소리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리 잘 치지도 않건만…) 나는 친구가 이 녹음파일을 컴퓨터 한 구석에 박아두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친구는 이 파일을 핸드폰에 넣어두고 긴장하는 날마다 반복해서 들었다고 했다. 회사 면접 날이나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이 있을 때, 즉 ‘부자연스러운 자기’를 연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 음악이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친구에게 실로 도움이 되었던 것은 내 음악이라기보다는 뉴욕에서의 추억이었을 것이다. 뉴욕에서 보낸 일 년의 시간은 친구에게 매우 특별했다. 일본 사회에서 자라면서 전전긍긍했던 규칙에 꼭 매일 필요가 없고, 얼마든지 새로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음을 깨달았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내 음악은 친구에게 이때의 시간을 되살려주는 매개체였다. 마들렌을 한 입 베어 물자 과거가 순식간에 되살아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그 유명한 장면처럼 말이다.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이 친구의 특별한 시간이 ‘나’라는 형태를 빌려 그의 일상에 남았던 셈이다. 나를 그렇게 기억해주고 나의 쓸모를 만들어주어 고맙다고 친구에게 답해주었다. 좋은 우정의 척도는 얼마나 오랫동안 연락하느냐가 아니라, 서로의 삶에 얼마나 오래도록 필요한 ‘시간’으로 머물러 주느냐일 것이다.
혼자의 시간
고마운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내 동선은 의대와 집과 카탈란어 학원 사이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동안 외면해왔던 ‘원고 빚’을 갚느라 딴짓할 시간이 없다. 그럼에도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이 시간이 고맙다. 스스로를 돌보기 위해 따로 시간을 내려고 하면 돌봄은 불가능해진다. 매일 반복하는 일과 속에서 자신과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내가 나와 만나는 시간 역시 추억이 된다. 결국은 나 또한 여행객으로 이곳에 왔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오래 머물고 있을 뿐, 내가 바르셀로나에서 사는 시간에도 끝이 있다. 그래서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내가 이곳에서 매일 같이 시간을 보내는 의대와 집과 길거리의 모습이, 훗날 나에게 오래도록 힘이 되는 기억으로 남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글_김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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