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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씨나 지중해

[메디씨나 지중해] 중심과 주변

by 북드라망 2023. 2. 28.

중심과 주변


UAB 의대에 발 붙인지 일 년 반이 흘렀다. 요즘 들어 부쩍 생각하게 된 주제가 있다. 바르셀로나 의대생들이 보여주는 미묘한 다이내믹이다. 작년에는 내 발 등에 떨어진 불(카탈란어, 새로운 시험 방식, 갑자기 다시 들춰보게 된 삼각함수와 자연로그…)을 끄느라 급급해서 주위를 둘러볼 여력이 없었는데, 이제는 동료 의대생들의 모습을 관찰할 여유까지 생기다니. 바르셀로나에 정말로 자리를 잡은 모양이다.

관찰은 내 학교생활에서 빼먹을 수 없는 재미 중 하나다. 나는 내가 우리 학교에서 가장 특이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한다. 바르셀로나에 전혀 연고가 없는 한국인, 의대 공부를 시작한 곳은 보통의 스페인인들이 전혀 모르는 쿠바, 의대와 상관없는 직업(글쓰기), 게다가 결혼한 유부녀이기도 하다. 이정도면 ‘주변부’라고도 할 수 없는 ‘특이점’이다. 처음에는 내 조건이 어느 그룹에도 낄 수 없게 하는 장애물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이 자리는 최고의 관찰자 시점이기도 했다. 사람 사이의 다이내믹을 이토록 지속적으로 조망해보는 건 처음인 것 같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이다.
 

중심부를 향한 전진
첫 번째로 내가 발견한 것은 학생들의 무관심이었다. 처음에는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이렇게까지 서로에게 관심이 없을 수가 있나? 같은 반 친구들끼리 복도에서 마주쳐도 친하지 않으면 인사도 안 한다. 내 생각에는 인사를 일부러 안 하는 게 더 어려울 것 같은데 말이다. 같이 있지만 좀처럼 섞이지 않는, 샐러드 채소처럼 따로 노는 청년들을 보면서 이보다 더 우중충한 학교를 찾기도 어렵겠다 싶었다. (옆 동네 수의대 친구들이 열정적으로 섞이고 몰려다니는 것을 보며 부러워하기도 했다. 의대 앞에 ‘수’ 하나 붙었을 뿐인데 저렇게 분위기가 다를 수가…)

그렇다고 해서 이 친구들을 ‘냉혈한’이라고 속단하는 일은 옳지 않다. 십대 후반에 이십대 초반인 친구들이다. 국적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더라도 청년의 신체가 내뿜는 에너지는 어디나 비슷하다. 말과 행동이 어설프게 설익었고, 힘이 넘치는 만큼 감정도 폭발적으로 표현되며, 무엇보다 자기 세계를 확장하고 싶어 한다. 세계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사람과의 어울림을 빼놓을 수는 없다. 아니나 다를까, 의대 청년들은 자신들이 노는 작은 그룹 안에서는 사이가 매우 끈끈했다. 강의, 세미나, 식당, 캠퍼스 거리, 주말 파티까지 열심히 서로 붙어 다녔다. 평생 친구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소그룹이 형성되는 기준은 무엇일까? 동질성이다. 자라온 환경이 비슷하고, 공부 능력도 비슷하고, 의대라는 험난한 길을 헤쳐 나가는 속도가 비슷한 친구들이 모인다. 결과적으로 성적이 안정적인 친구들이 안정적인 소그룹을 형성하게 된다. 물론 대학교는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바글바글 섞이는 공간이다. 그러나 다양한 사람들이 마주칠 때 어떤 다이내믹이 형성되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내가 있는 의대는 중심과 주변이 확실하게 나뉘는 쪽이다. 그룹의 중심을 이루는 사람이 있고, 이 중심에 녹아들 수 있는 주변인이 그룹에 속하게 된다.



내가 사는 기숙사 건물에는 역사학 전공을 하는 이웃이 한 명 사는데, 그 친구가 내 학교 생활 이야기를 듣더니 몹시 놀라워했다. 인문대는 분위기가 딴판이라는 것이다. 애초에 동질성을 측정할 기준 자체가 불분명하다. 친구는 킥킥대면서 말을 덧붙였다. “우리는 성적이나 계획에 개의치 않아. 요즘 역사학이나 철학을 선택하면서 사회적으로 대단히 성공하겠다는 포부를 가진 사람이 거의 없거든. 우리는 전부 ‘아무도 아닌 녀석(nadie)’들이야.” (실제로 그쪽 학과 건물에 가보면 대낮부터 술판이 벌어지고 있다.)

그제야 나는 의학이라는 전공이 인간관계에 끼치는 영향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의대는 의사를 키우기 위한 장소이고, 의사는 사회의 명실상부한 ‘중심부’에 위치한 자리다. 결국 의대에 진학했다는 것 자체가 중심부를 향해 전진을 시작한 것이다. 학기를 보낼수록 이 진군에 함께 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자가 걸러지게 된다. 이를 두고 ‘인맥’이라고 한다. 참으로 당연한 사실이건만, 제도권에서 벗어난 시간이 길다 보니 내가 사회 전반에 너무 무지했던 셈이다. 심지어 내가 의학 공부를 시작했던 쿠바 의대 역시 완벽하게 ‘제도권에서 벗어난’ 곳이었으니 말 다 했다.


주변부의 좌절
인맥이 넓어질수록 실제 세계는 좁아지는 게 아닐까? 그토록 공들여 엮어낸 인맥이 맨 처음 출발한 ‘소그룹’의 복제판에 불과하다면 말이다. 어쩌면 중심부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더 자유로운 것인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한계 안에 머물지 않고 더 큰 세상과 만날 기회가 더 잦을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반대인 경우가 더 잦다. 이 역시 내가 직접 관찰한 것이다. 주변부라는 표현 자체가 중심부를 두고 정의된다. 그래서 주변에 속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중심을 의식한다. 중심에 의거해서 스스로가 정의된다. 그때마다 매번 떨치기 어려운 열패감이 솟구친다. 이 정서 작용을 얕잡아 봐서는 안 된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불안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을 단기간 내에, 같은 장소에서, 이 정도로 많이 만나본 것은 처음이다. 도움을 조금만 줘도 무작정 기대려는 사람, 노골적으로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 시험기간마다 토사곽란을 일으키는 사람, 같은 불평을 수십 번씩 반복하는 사람… 의사가 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은 그보다 먼저 환자가 되고 말았다.

나도 처음에는 이게 공부 스트레스의 표출이라고 생각했다. 공부 양이 워낙 많은데다가, 같은 과목을 몇 번씩 낙제한다면 괴롭지 않은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의문이 들었다. 몸과 마음이 이토록 괴로워한다면 왜 의대를 그만두지 않는가? 의대 밖에도 가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지 않는가? 이렇게 질문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다양한 표현으로 포장되긴 했지만, 그 내용이 동일했다. 결국 중심부를 향한 동경이었다. 그리고 이 추상적인 ‘중심 세계’를 의대 내에서 당장 구체적으로 대표하는 것은 성적 좋은 ‘소그룹’이었다. 어떻게든 이 그룹에 속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투명하게 보였다. 그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결핍된 마음이 주변부에 속한 사람들끼리 서로를 ‘대충’ 대하는 모습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꽤나 안타까웠다.

의대의 다이내믹 덕분에 지금까지 내가 스쳐지나온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부잣집 출신이 구김살 없고 더 착하다던가, 주변부에 속한 시간이 길수록 아집이 세진다던가, 무시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어떻게든 중심부에 진입하려고 기를 쓰는 모습이 갑자기 가슴에 와 닿았다. 사람들이 각기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외부 조건 때문이 아니다. 자기 마음이 만들어낸 ‘중심’과 ‘주변’ 사이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 사이의 긴장감 속에서, 어느 한쪽에는 가까워지고 다른 쪽에서는 멀어지려고 쉼 없이 외줄타기를 한다. 인간 사회는 늘 이렇게 굴러갈 테다. 중심과 주변이 나뉘는 것은 물리법칙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구역이 나뉘면 마음은 이를 따라 분별을 만든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주변부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중심부 안에서도 또 다시 중심과 주변이 나뉠 수밖에 없다. 비교는 끝나지 않는다. 모든 힘이 집중되어 있지만 시야가 손바닥만큼 좁은 중심 세계, 중심에 속하지도 떠나지도 못한 채 맴맴 돌기만 하는 주변 세계. 어느 쪽에 속하든 허무하지 않을까.


 

우정의 조건, 무(無)조건
최근에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충고해주었다. 의대 안에서 친구를 사귀고 싶다면 졸업 후에 한국에 돌아갈 예정이라고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스페인 혹은 유럽에 남아 있을 것처럼 말을 해야 다른 학생들도 나와 친구가 되고 싶은 동기가 생길 것이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듣자마자 의문이 들었다. 그게 ‘친구’인가? 지금까지 내가 우정을 쌓아온 기준은 사람에 대한 관심이다. 우선 신기한 사람과 마주쳐야 한다. 나와는 참 다른데도 잘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렇게 그의 인생이야기가 궁금해지고, 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알게 되고, 그러면 그가 앞으로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저절로 인다. 상대방이 나의 마음을 고맙게 여기고 내게도 관심을 가져주면 그때부터 쌍방 우정이 시작된다. 타인이 베푸는 조건 없는 관심은 귀한 경험이다. 이를 한 번 경험하고 나면 몇 년 간 연락을 하지 않더라도, 혹은 앞으로 어디서 보게 될지 기약이 없더라도 언제든 기껍게 연락할 수 있다. 우정은 시공간을 멀리 가로지를수록 더 강하게 담금질된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고 평가하려는 게 아니다. 인맥의 유용성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여러 조건을 달아야만 기능하는 관계가 허약하게 느껴진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둘러싼 조건은 늘 변한다. 중심이 주변이 되기도 하고 주변이 중심이 되기도 한다. 공들여 쌓은 관계가 변해가는 것에 허무해지지 않으려면, 공을 들였던 경험 자체로도 충분히 가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공’이라는 게 ‘앞으로 이 사람을 통해 얻게 될 지도 모르는 계산된 이익’이라면 그런 삶은 너무 초라하다.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에 구애받지 않는 내면은 강하다. 아니, ‘건강하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그런 내면을 가진 친구들이 적지만 있다. 이 친구들은 주위의 평가에 개의치 않고 스스로의 호기심을 쫓는데, 그 관심이 학교의 특이점인 나에게까지 가닿을 때도 있다. 스스럼없이 내게 다가와서 외국 경험을 묻거나, 의대에 다니는 자기 심정을 솔직하게 나눈다. 그때마다 나는 기쁘다. 옆에 사람이 머무르는 게 기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건강하게 사는 모습이 예뻐 보인다.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은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겠다는 마음으로 자아를 키우는 때다. 이 민감한 시기에 자의식에 매이지 않고 의대를 활보하는 친구들을 보면 나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고, 나와 보낸 짧은 시간이 조금이나마 긍정적인 소통이었기를 바라게 된다. 이처럼 숨어있는 ‘예쁜 친구들’을 찾아내는 재미에 학교를 다니는 중이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이 친구들 대부분이 의대의 시험 시스템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험에 번번이 낙제를 하거나 아예 전과해버린다. 그래서 나는 학기를 거듭할수록 동료를 잃고 있다! 처음에는 이들을 살려야한다는(?) 위기감에 함께 공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의대 공부는 아무리 뛰어난 과외선생이 붙어도 결과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만 깨달았다. 스스로 발심해서 공부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그렇다고 우정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같이(?) 낙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 그저 친구들의 힘을 믿는 수밖에 없다. 나와 함께 졸업까지 의대를 통과할 친구가 한 명 즈음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글_김 해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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