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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희씨가 들려주는 동의보감이야기

잃어버린 정(精)을 찾아서

by 북드라망 2022. 12. 15.

잃어버린 정(精)을 찾아서


『동의보감』에서는 정을 아끼라는 말을 마르고 닳도록 한다. 아이를 만드는 데 쓰는 것도 아끼라고 할 정도다. 그 이유는 남녀가 성행위를 할 때 가장 많은 정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이를 가질 때가 아니라면 성행위를 삼가라, 그래야 생명을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다는 말이다. 행위만이 아니라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정이 빠져나간다고 한다. 이건 이미 상식이 되었으니 각자 알아서 주의를 하도록 하고,^^ 이번 글에서는 일상생활 가운데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가는 정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그렇게도 소중한 정이 어디서 어떻게 빠져나가는지를 알아야 보존할 수가 있지 않겠는가.

 


잃어버린 밤과 블루라이트
『동의보감』에 의하면 우주는 기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기가 다양한 운동과 흐름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기의 이합집산으로 우주만물이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물의 생성소멸은 한 번은 음이 되고 한 번은 양이 되는, 음양의 교차에서 이루어진다. 대표적인 것이 밤과 낮의 교차다. 인류는 몇 백만 년 동안 한 번은 낮이 되고 한 번은 밤이 되는 환경에서 진화해왔다. 그 오랜 세월 동안 해가 뜨면 일어나 활동하고 해가 지면 잠을 자는, 자연의 리듬이 우리 몸에 새겨진 것이다. 그 리듬의 가장 중요한 축은 밤과 낮, 즉 잠과 깨어남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생체리듬에 교란이 일어나고 있다. 긴 진화과정에서 보자면 100년 남짓 된 아주 최근의 일이지만 그 정도는 꽤 심각하다. 

바로 전깃불이 일상으로 들어오면서부터다. 최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야간조명은 어두울 때 나오는 호르몬인 멜라토닌의 생성을 방해한다. 멜라토닌은 밤과 낮의 길이나 계절에 따른 일조시간의 변화 등과 같은 빛의 주기를 감지하여 생체리듬에 관여하는 호르몬이다. 멜라토닌 분비가 잘 되지 않으면 수면장애를 일으킨다. 다시 말해 몸이 어둡다는 걸 인식해야 멜라토닌이 분비된다. 공공의 안전을 위해 야간조명 아래서 근무해야 하는 사람들이 그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다. 대표적인 분야가 의료계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다 보니 밤낮을 가릴 수가 없다. 이들이 가장 크게 호소하는 것이 피로감이다. 문제는 단순 피로에 그치지 않고 심각한 질병으로 발전하는 경우다. 

대표적인 것이 암이다. 특히 호르몬에 영향을 받는 유방암이나 전립선암 발병률이 야간근무자들에게서 높게 나타난다. 멜라토닌은 유방암과 전립선암세포의 성장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2005년에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 어두운 밤에 채취한 인간의 혈액, 즉 멜라토닌 수치가 높은 혈액은 쥐의 몸에서 자라고 있는 인간 종양의 성장을 늦춰 주었다. 반면에 낮에, 혹은 밤이라도 빛에 노출된 뒤에 채취한 혈액은 암세포의 성장을 전혀 늦추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야간근무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안심할 일이 아니다. 밤늦도록 조명 아래 노출된다면 그 역시도 우리 몸이 감당할 수 없는 정도로 생체리듬을 교란시킨다. 인공조명은 어떤 종류의 빛이라도 멜라토닌의 생성을 억제하지만 특히 파란빛의 파장을 가진 불빛이 유독 멜라토닌 생성을 방해한다. 이는 다시 말해서 파란빛의 파장을 가진 빛이 비치면 낮이라고 인식하도록 우리 몸이 프로그래밍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파란빛이 바로 날이 새면 우리 눈으로 들어오는 맑고 파란 아침 하늘의 색깔인 것이다. 수천 만 년 동안 ‘파란빛’이 시각으로 들어오면 낮이라고 인식해온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모든 전자기기들에서 나오는 빛이 다 이 ‘블루라이트’들이다. 텔레비전, 컴퓨터 화면, 핸드폰, 테블릿 등등. 심지어는 형광등마저도 전기 절약을 이유로 파란 빛을 발생시키는 LED로 바뀌고 있다. 형광등은 더 이상 구하기가 어렵다. 울며 겨자먹기로 형광등 수명이 다하면 LED로 교체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그러니 디지털 기기를 끼고 사는 현대인들의 몸은 늘 낮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찍 조명을 끄고 잠자리에 들면 안전한가? 그 역시 아니다. 밤새 켜져 있는 가로등, 광고판의 현란한 색깔의 빛들, 자동차의 불빛들이 새어 들어오고, 심지어는 실내 기기들에서도 밤새 불빛이 뿜어져 나온다. 냉장고의 온도판, 전기밥솥의 시계, 완전히 끄지 않은 컴퓨터의 전원 스위치, 모뎀의 깜빡이는 불빛은 밤이 깊어질수록 더욱더 밝아져 어쩌다 한밤중에 잠이 깨면 집안에 불이 켜진 듯 환하다. 그래서 자기 전에 모니터 전원을 끄고 플러그를 뽑고 그럴 수 없는 것들은 가리개로 가리거나 수건으로 덮어둔다. 그래도 커튼의 올 사이로 비치는 불빛까지 막을 수는 없다. 요즘은 암막커튼을 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이렇듯 점차 밤을 잃어버린 탓에 돈벌이는 나아졌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몸의 정은 쉴 새 없이 빠져나가기만 하고 축적될 시간이 없다. 모든 생명은 낮에 태양이 뜨면 양기를 받으며 왕성하게 활동한다. 그리고 밤이 되면 활동을 잠시 멈추고 음기, 즉 정을 축적한다. 잠을 자는 동안 생명유지에 필요한 기초대사 활동만을 하면서 그날 하루 소모한 정을 다시 채우는 것이다. 그런데 밤이 되어도 조명을 켜둔 채 낮처럼 활동하거나 사방에서 새어드는 인공조명이 몸을 비추면 몸은 밤을 기다리다 지쳐서 피로감에 시달리고 정은 고갈된다. 흡사 산업사회 이후 모든 자원을 다 긁어모아 돈벌이로 삼느라 사막화가 진행되면서 물 부족 사태에 이른 지구의 처지와 같다. 

이처럼 밤에도 전깃불이 환하다는 것은 고요한 밤이 사라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밤이 되어도 지속되는 각종 소음들이 귀가 편히 쉴 시간마저 앗아간다. 귀는 신장과 연동되어 있고 신장은 오장 중에서도 정을 보관하는 소중한 장기다. 신장이 과로에 시달리면 이명에 시달리는 건 물론이고 정을 보존하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정을 아끼고 보존하려면 우리는 잃어버린 밤, 고요하고 깜깜한 밤부터 찾아야 한다.

 


정, 멈추면 자란다
인공조명에 더해서 현대인들의 생활 패턴 또한 정 고갈의 주범이다. 특히 쉴 때조차도 정을 있는 대로 끌어다 쓴다. 아니 정을 불태운다. 일단 정은 음의 기운이다. 음의 기운이 성한 시간은 밤이다. 밤에 정이 축적되는 이유다. 밤은 고요하고 어둡고 모든 걸 단순하게 한다. 눈에 보이던 만물이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온갖 소음들도 잠잠해진다. 오직 자연의 소리만이 자장가처럼 들린다. 눈도 귀도 편안해지고 몸도 마음도 차분해진다. 이런 시간이야말로 정이 차오르는 때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휴식을 해도 열씨미 한다. 뭔가 색다른 이벤트를 했다는 느낌이 들어야 쉰 것 같다. 휴가도 ‘즐겨야’ 하는 것이다. 평상시 치열한 경쟁 속에서 힘들었으면 적어도 휴식을 할 때는 그 반대로 살아볼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다. 몸이 이미 자극에 익숙해서인지 강렬해야 뭔가를 한 것 같다고 느끼고, 그래서 점점 더 센 자극을 원한다. 메뉴만 다를 뿐 경쟁을 할 때나 쉴 때나 패턴은 같다. 주말이나 연휴, 휴가철이면 도로는 차들로 만원이고 도심 곳곳 어딜 가도 술집이나 식당에서는 고기를 안주삼아 술을 마시는 풍경들이 너무도 익숙하다. 낮 동안 받은 스트레스를 그런 식으로 푸는 것이다. 그 순간에는 짜릿한 자극이 뭔가를 풀어주는 것 같지만 몸속의 정을 화기가 성한 술과 고기로 불태워버린다. 몸에는 결국 더 큰 스트레스가 남는다. 그래서 더 큰 자극을 원하게 되는 악순환을 되풀이한다.

 


지난 일요일, 숙소에서 조금 떨어진 계곡을 찾았다가 작년보다 부쩍 늘어난 캠핑카 탓에 시원한 계곡을 상상하고 갔던 마음이 쪼끔 답답했다. 미국 같은 나라야 땅덩어리가 넓으니 캠핑장도 주차 공간들도 널찍널찍하고 생필품을 구입할 수 있는 상가도 드물다. 그러니 그런 걸 갖추고 다녀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좁은 땅덩어리에 전국방방곡곡 어딜 가나 24시 편의점에 식당이 즐비한 우리나라에서 저런 캠핑카가 가당키나 할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특히나 그 계곡은 비좁아서 동네 주민들이 하루의 피로를 풀기에나 적당한 그런 곳이다. 거기까지 집채를 끌고 올 일인가 싶었다. 집에서 지내는 것과 같은 편리함에 산 좋고 물 좋은 경치까지 갖고 싶은 욕심이 느껴진다. 일 년에 한 번 휴가니…, 그도 저도 다 좋다고 치자. 무엇보다 그게 휴식이 될까 싶다. 일단 캠핑카를 장만하는 데 드는 비용 마련을 위해 또 열씨미 경쟁 속에서 뛰어야 하고, 휴가지에서 캠핑카를 관리하는 데 또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런 에너지 소모는 아예 계산에 없는 듯하다. 그러고 나서 또 고기와 이런저런 정력제로 정을 보충하려고 한다. 생각만 해도 뭔가 복잡하다. 

휴식(休息)이라는 글자를 찾아보면 쉴 휴休에는 ‘그만두다, 멈추다, 검소하다, 그늘’ 등의 의미가 있다. 하던 일을 멈추고 그늘에 앉아 검소하게 지내는 게 쉬는 것이라는 뜻이다. 식息에는 ‘호흡하다, 자라다, 키우다, 중지하다’ 등의 의미가 있는데, 이 역시 활동을 멈추고 호흡을 관찰하며 내 안의 힘(생명력)이 자라게 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동의보감의 관점에서 보자면 ‘휴식’이란 하던 활동을 멈추고 나무그늘에 앉아 호흡을 고르며 내 안의 정을 차오르게 하는 시간이라고 풀이할 수 있겠다. 

뭐든 화끈해야 하는 현대인들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쉬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정작 시간이 나도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 쉬는 게 무엇인지를 모른다. 쉰다고 하는 게 온통 있는 대로 힘을 쓰는 일만 골라서 하니 어찌 정이 보존될 수 있겠는가? 그래 놓고 조금만 피로하거나 기운이 딸리면 정력에 좋고, 몸에 좋은 것부터 찾아먹는 게 우리들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정이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이 역시 용법의 문제건만. 정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있는 대로 끌어다 쓰니 고질적인 물 부족에서 헤어나기가 어렵다. 그러니 쉬는 것 하나라도 제대로 하는 법을 배우자. 잠시 멈추고, 모든 걸 간소하게 하면 정은 저절로 차오른다. 

 


몸은 알고 있다
모든 생명을 다 살고자 한다. 그렇게 진화해서 여기까지 왔다. 고로 우리 몸도 다 저 나름으로 살 길을 찾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돌이켜 보면 정 부족에 시달려온 내 몸 역시도 내가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그런 노력을 해 온 것 같다. 목이 마르면 저절로 물을 찾듯이 몸 전체에 물이 부족하면 몸이 먼저 위기감을 느끼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스스로 정을 보충할 수 있는 길을 찾는다. 그럴 때 나도 모르게 찾는 게 있었다. 아름드리나무들이 가지를 넓게 드리운 울창한 숲, 계곡을 흘러내리는 우렁찬 물소리, 촉촉한 흙길, 풀냄새, 가로등 하나 없는 깜깜한 밤, 비오는 날 등. 특히 체력이 심하게 떨어졌을 때는 이러한 것들이 정말 간절해진다. 

2000년대 초반 어느 해 여름, 갑자기 몸이 신호를 보내왔다. 빨리 서울을 벗어나라고. 머리에 떠오른 곳은 어딘지 모르지만 조용하고 인적이 없고 깜깜한 밤이 있는 곳이었다. 불현듯 고향집이 떠올랐다. 거리가 멀었지만 그런 걸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일정을 살펴보니 일박이일은 가능했다. 몸이 보내는 절박한 신호가 바쁜 일정을 쪼개 그 먼 고향집으로 바로 날아가게 했다. 그날, 삼면이 산으로 에워싸인, 가로등 불빛도 자동차 불빛도 인기척도 없는 깜깜한 그 밤, 두터운 무언가로 채워진 듯한 그 밤이 너무도 푸근했다. 창호지에 부딪치는 날벌레의 날갯짓소리와 산에서 들리는 수많은 벌레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묵직한 무언가가 전신을 채워주는 것 같았다. 든든하고 편안한 어떤 힘 같은 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바쁜 일정으로 지쳐있었던 것 같다. 그때 밤낮없이 조명탄을 쏘아 올리는 서울에 이대로 있다가는 얼마 안 되는 물마저 다 말라버린다고, 내가 나에게 SOS를 친 거였다. 그날 묵직한 무언가는 정이 차오르는 느낌이었던 것 같다.  

그 이후에도 정 부족, 물 부족을 알리는 생리적인 신호가 자주 울렸다. 2010년(?) 여름 갑상선기능항진증으로 체력이 바닥을 찍고 기진맥진했을 때, 무얼 먹어도 쉬어도 좀처럼 기운이 돌아오지 않았다. 정이 바닥이 난 듯했다. 다시 고향 생각이 났지만 워낙 먼 거리라 자주 오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우연히 서울 근교의 휴양림을 알게 됐다. 거의 매달 2박3일의 일정으로 그곳을 찾았다. 그 휴양림은 산 속에 있었고, 종일 계곡의 물소리가 쉼 없이 들리는 곳이었다. 그러면서 점차 체력을 회복했고 일상을 이어갈 힘을 얻었다.    

 


그런가 하면 나도 모르게 피하는 것들이 있다. 인공조명을 싫어한다. 특히 휘황찬란한 네온사인과 전광판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정이 다 말라버리는 듯. 내가 가 본 곳 중 그 끝장판이 뉴욕 맨해튼의 타임스 스퀘어였다. 2016년과 2017년 연거푸 뉴욕에서 한 달 가량씩 머문 적이 있었다. 워낙 관광명소로 이름난 곳이라 호기심으로 한 번 들렀었다. 인산인해에다 전 세계 굴지의 기업들이 집채만한 대형 광고판을 설치해 놓았다. 낮이었음에도 마치 내 몸의 모든 물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빨아먹겠다고 달려드는 듯했다. 밤에는 물론이고 낮에도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집에서도 될 수 있으면 조명을 켜지 않는다. 해가 져서 어둑해서 글자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최대한 버틴다. 불을 켜면 피로도가 훨씬 증가한다. 연구소에서도 골방(?)에서 전등을 안 켜고 지내는 걸 좋아했다. 그러면 꼭 불을 켜주고 가는 친절한^^ 분들이 있다. 내가 귀찮아서 그러는 줄 알고…. 

이 밖에도 진한 쇳소리가 나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싫어한다’는 감정을 알차채기 전에 몸이 먼저 피한다. 어느 날 국립극장 앞마당으로 산책을 갔다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꽹과리 소리에 무서운 뱀이라도 만난 듯 반대방향으로 마구 걸었다. 내가 좋아하는 장이 섰고 저만치 보이는 곳에서 떡볶이를 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소리를 피해 냅다 도망을 쳤다. 함께 가신 선생님은 아마도 내가 평소 떡볶이를 좋아하니 당연히 그리로 갈 줄 아셨던 모양이다. 아마도 그게 다 정을 보존하려는 본능적인 행동이 아니었을까 싶다. 떡볶이를 먹어서 생길 정보다도 그 시끄러운 소리에 빼앗길 소중한 정을 보존하려는 생존 본능이라고나 할까. 

몸이 건네는 소리를 우리가 잘 알아듣지 못할 뿐, 몸은 알고 있다. 어떻게 해야 소중한 정을 아낄 수 있는지. 그 소리를 들으려면 우리에게 밤과 휴식이 필요하다. 그때라야 비로소 몸속 저 깊은 데서 올라오는 몸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 * *


인공조명이 사방에서 무차별적으로 우리의 밤을 침범해오는 세상에 살면서 정을 지키기는 참으로 어려운 듯하다. 과학자들이 인공조명이 인체에 미치는 해악을 유의미한 연구결과로 내 놓기 전에는 지금의 산업구조가 바뀌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사람을 상대로 연구를 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러니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피해자가 나온 뒤에야 조금의 변화가 있을까 말까한 일이다. 그렇다면 각자도생하는 수밖에. 

다행히도 몸은 이미 알고 있다. 무엇을 가까이하고 무엇을 멀리해야 하는지. 어떤 리듬을 가져야 하는지. 잃어버린 잠을 찾고 휴식을 제대로 취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런 기본적인 토대도 마련하지 않고 그 위에 온갖 좋은 것들을 먹어봤자 밑 빠진 독에 물붓기이고 병 주고 약 주는 꼴이다. 차라리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사는 걸 멈춘다면 그만큼 정소모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일도 휴식도 오로지 ‘열씨미’ 하고 있는 우리 모두가 생각해 볼 일이다.

 

 

글_복희씨(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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