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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희씨가 들려주는 동의보감이야기

[복희씨가 들려주는 동의보감 이야기] 열 시간 운전, 그리고 심호흡

by 북드라망 2023. 1. 26.

열 시간 운전, 그리고 심호흡

 

“인체란 허무한 것이어서 단지 돌아다니는 기만이 존재할 뿐이니, 기를 호흡하는 데 그 이치를 얻는다면 온갖 병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섭생을 잘 하려는 사람은 기를 고르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허준 지음, 『동의보감』, 동의문헌연구실 옮김, 법인문화사, 2012, 249쪽)

 

『동의보감』 ‘기(氣) 편을 죽 읽다가 이 대목에서 눈길이 멈췄다. 첫 구절 “인체란 허무한 것어서” 라는 구절에서 불경 이야기가 퍼뜩 스쳐갔다. 당연히 부처님 말씀처럼 절세미인의 몸 안에도 박색의 몸과 똑같이 똥, 오줌 등 온갖 오물이 가득하고 벌레들이 득시글거리니 욕정을 불태우며 기를 혼란스럽게 만들지 말라는 말을 하려니 했다. 그런데 이어서 “단지 돌아다니는 기만이 존재할 뿐이니” 라는 구절을 만나니 앞의 '허무'가 그런 뜻이 아니었구나 싶다. '몸이 무엇으로 꽉 찬 듯 보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텅 비어서[虛] 딱히 뭐가 있는 게 아니[無]'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볼 수 있는 형체에만 신경을 쓰지 말고 보이지 않는 기의 흐름에 주목하라는 말이다. 기의 흐름이 원활하면 병이 안 생긴다니, 그리고 그 방법이 호흡에 있다니 귀가 솔깃해진다.

 


Only 氣!
그런데 아무리 눈을 비비고 봐도 몸이 이렇게 멀쩡하게 형체를 이루고 있는데 오직 기만 돌아다니고 있다니 선뜻 이해가 안 간다. 『동의보감』을 배울 때도 이 정(精)기(氣)신(神) 이해가 정말 어려웠는데 여기서 이렇게 맞닥뜨리다니. 생각 같아서는 천지만물이 기의 이합집산이라고 했고,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니 당연히 기밖에 다른 게 뭐가 있겠어. 이렇게 퉁치고 넘어가고 싶지만, 그래서는 기를 고르면 왜 병이 생기지 않는지를 납득할 수 없을 듯하다. 할 수 있는 만큼 짚어 보자.

일단 정기신의 족보를 따져보면, 천지만물이 기의 이합집산이라 했으니 기가 우리 몸으로 들어와 정기신으로 분화된 건 분명하다. 먼저 정(精)은 부모로 받은 타고난 정과 음식물을 섭취함으로써 생기는, 먹어서 확보하는 정이 있다. 정은 몸을 이루는 물질적인 토대다. 주로 신장이 주관을 하지만 오장에 다 정이 있다. 다음으로 기(氣)는 두 갈래로 들어오는데 하나는 지기 즉, 정과 마찬가지로 땅에서 나는 음식물로부터 받는 곡기(穀氣)이고, 다른 하나는 천기, 즉 호흡으로 받아들이는 청기(淸氣)다. 곡기는 음식물이 위(胃)로 들어가면 소화·흡수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청기는 늘 우리가 하는 호흡을 통해 쉼 없이 나고 드는 기다. 기 역시도 신체의 모든 곳에 존재한다. 오장의 기가 조화를 이루어 생기가 돌면, 다시 정에서 만들어진 진액의 작용을 받아 신(神)은 자연스럽게 왕성해진다.

기의 그 구체적인 활동을 보면 기는 정과 신에 비해 열일을 하고 있다. 음식물이 위로 들어와 소화 과정을 거쳐 생성되는 정미로운 물질을 폐로 운반하는 것도, 폐에서 전신으로 뿌려주는 것도 다 기의 작용이다. 이런 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려면 각각의 소임을 맡은 장부들의 생리기능도 정상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그래야 기의 활동도 왕성해진다. 그런데 이들의 생리기능을 촉진시키는 것도 역시 기의 역할이다. 이렇게 기의 움직임이 왕성해야 거기서 발생하는 열이 온 몸을 따뜻하게 하여 체온의 항상성을 유지해준다. 기의 활동이 저하되면 몸이 차가워지고 그러면 기가 어느 한 곳에 몰려서 뭉쳐지고 그 부위에 열이 난다. 이때 그걸 흩어줄 수 있는 것도 기다. 기의 움직임을 따라 액체 상태의 혈, 진액, 정액 등이 온몸으로 운반되도록 돕는 것도 기다. 예를 들면 혈액의 흐름을 도우면서 동시에 그 속도와 세기를 조절하여 혈이 맥 밖으로 넘치는 것을 제어하고 관리한다. 이렇게 해서 기의 흐름이 손끝발끝까지 가면 우리 몸은 건강한 상태를 유지한다. 몸도 살찌고 머리털과 손톱발톱도 윤이 난다. 이뿐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기를 막는 것 또한 기의 작용이다. 우리가 밖에서 활동하는 내내 추위나 더위, 습한 기운의 급작스런 침입으로부터 인체를 보호하는 방위병 역할을 한다.

 


한 마디로 생명의 질료인 정도 기에서 만들어지고 이 질료를 온몸으로 돌리는 것도 기이다. 게다가 이들 사이의 상호교섭이 잘 이루어지도록 각 장부의 생리기능을 조절하는 것도 기이다. 그러니 신체는 오직 돌아다니는 기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기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돕는 것이 호흡이다. 호흡이 급하거나 얕으면 기운을 몸 전체에 돌리기가 어렵다. 천기를 받아들이는 장부는 아래에 있는 신장이다. 호흡이 밑으로 쭉 내려가서 천천히 깊게 부드럽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래야 기의 활동을 도우면서 동시에 체내에서 만들어지는 탁기를 배출해주어 기가 균형감 있게 움직일 수 있고, 몸 속의 기가 늘 맑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이런 기의 균형을 깨뜨리는 대표적인 것이 칠정이다. 감정이 요동치면 호흡이 무너진다. 그래서 “기를 호흡하는 데 그 이치를 얻는다면 온갖 병이 생기지 않는다” 라고 했다. 그러니 “기를 고르는 방법”을 아는 것이 중요할밖에.

 


가는 날이 장날
2019년 5월 4일 토요일 아침 9시, 연구실 선생님 세 분과 함께 전라북도 완주로 출발했다. 감이당에서 공부하던 학인이 완주에서 새롭게 공동체를 꾸려서 활동을 시작했다며 곰샘(고미숙 선생님)께 강의 요청을 해 온 것이다. 그러잖아도 궁금하던 차에 현장 방문도 할 겸, 오랜만에 겸사겸사 다녀오자며 소풍 가는 마음으로 길을 떠났다. 내비게이션을 켜니 어제 검색한 대로 두 시간 반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넉넉잡아 점심 무렵에는 도착할 것이고 그러면 점심을 먹고 좀 쉬다가 선생님은 강의를 하고, 우리는 주변 구경을 하다가 강의가 끝나고 여유롭게 돌아오면 될 것이었다. 마침 봄이라 해가 길어서 시간은 충분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느긋하게 가고 있는데 차츰 차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토요일이라 그러려니 했다. 내비게이션에서는 도착 시간이 예상보다 좀 늦어지는 걸로 나왔다. 그러나 크게 문제가 되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점심때가 되어 맛있는 점심을 생각하면서 들어선 휴게소는 완전 도떼기시장이었다. 유독 어린 자녀, 노부모와 동행한 그룹이 많았다. 그때서야 그날이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앞둔 연휴 시작 날임을 알아챘다. 어찌나 소음이 심한지 밥을 대충 먹고 밖으로 나왔다.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 안 되면 돌아가지 뭐” 라는 농담을 하며 다시 차에 올랐다. 휴게소에 들른 사이 차들이 훨씬 늘어나 있었다. 이런 속도라면 약속 시간에 맞추기가 빠듯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버스전용차로로 들어갔다. 조금 달리는가 싶더니 버스들도 점점 늘어났다. 일반도로와 큰 차이가 없어졌다.

조바심이 났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마음들이 일어났다. ‘연휴라는 걸 생각했어야 하는데, 좀 더 일찍 떠났으면 나았으려나, 국도로 나가볼까, 그랬다가 더 헤맬지도 몰라’ 등등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생각들이 줄줄이 자동적으로 올라왔다.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일단 선생님이 조금 늦을 거라며 현장에 사정을 알렸고, 우리 서로도 도로 사정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고는 했지만, 약속 시간에 맞춰야 한다는 마음이 멈춰지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여유롭던 마음은 사라지고 도로 상황에 신경이 쓰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모처럼 소풍길이 공교롭게도 연휴와 겹치다니!

 


체력짱 등극
드디어 결단을 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두고 본다고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다행히도 다른 행사를 하는 중에 포함된 강의라서 시간 조정이 가능했다. 선생님께서 아예 강의 시간을 마지막으로 미루었다. 마음이 놓였다.

비로소 긴 시간 운전을 해야 하는구나 하는 자각이 들었다. 왕복 열 시간 남짓 걸릴 듯했다. 더군다나 내일은 일요대중지성 수업이 있는 날이다. 밤늦게 도착할 건데 어떡하지? 몸은 스스로 살고자 하는 힘이 있다. 나도 모르게 심호흡을 시작했다. 그때서야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는 게 느껴졌다. 어깨도 긴장을 하고 있었고 허리도 뻣뻣했다. 자세를 편안하게 고쳐앉았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면서 고개며 어깻죽지, 무릎, 발목 등에 돌아가며 기운을 보내주었다. 별 문제가 없기를 바라면서 할 수 있는 한 힘을 빼고 마음으로^^ 어루만져주었다. 힘이 들어간다 싶으면 다시 풀어주고. 그렇게 그렇게 마음을 내 몸에 집중시키면서 틈틈이 이야기를 나누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돌아오는 길에도 여전히 차들이 많았다. 그러나 시간 맞춰 가야 한다는 압박이 없어지니 한결 느긋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서울로 들어서고 있었다. 오는 길에도 간간이 심호흡을 하면서 여기저기 관절과 근육에 애정을 보냈다. 역시 힘빼기를 거듭하며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이튿날 일요대중지성 수업을 하러 갔더니, 선생님들이 놀라워했다. 체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둥, 운전을 좋아해서 그렇다는 둥, 류머티즘 40년의 힘이라는 둥 해석이 분분했다.

내가 생각해도 몸 상태가 이상하게도 멀쩡했다. 그런데 늘상 피로감을 좀 더디게 느끼는 편이긴 하다. 그래서 과로했다 싶으면, 다음날에는 컨디션이 괜찮다. 그럴 때면 어제 과로했는데도 괜찮구나 싶어서 기분이 업된다. 그러다 보면 평소에 하지 않던 대청소를 하고, 그러다가 진짜 과로가 겹쳐서 뒤늦게 여기저기 관절에 통증이 심해졌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또 그럴까봐 그날은 수업을 마치고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혹시나 이상이 생기나 기다려봤으나 별 문제가 없이 지나갔다. 결국 ‘체력짱’이라는 훈장을 달게 됐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뒤로 친구들한테 심호흡이 좋은 것 같다는 정도로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곤 했다. 어쨌든 안 아프니 다행은 다행이었다.

 



숨만 잘 쉬어도
얼마 전 동의보감 세미나를 하면서 이날 일이 생각났다. ‘인체에는 돌아다니는 기’의 족보와 성격과 하는 일을 알고 보니 그날의 심호흡이 훨씬 의미 있게 다가왔다. 북 치고 장구 치고 바쁜 기의 역할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 싶은 게 ‘흘러가게’ 해 주는 역할이었다. 특히 잘 뭉치는 것이 감정이다. 감정은 주로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감정 자체야 무슨 죄가 있겠나. 흐르지 않을 때, 심하게 요동칠 때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데 그날 운전 상황에는 기의 흐름을 요동치게 할 요인들이 거의 없었다. 기분 좋게 출발했고, 강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으니 응급상황이 생기지 않는 한 가지 않을 수 없었고, 운전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기대를 할 곳도 없었고, 다음날 아침부터 일정이 있으니 되짚어 돌아오는 수밖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리고 약속을 충분히 늦춰두었으니 차량 흐름에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외적인 변수가 정리되고 나자 내가 처한 상황이 보였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의식을 했다기보다는 좁은 차 안에서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는 없었다. 차츰 마음이 더 차분해지면서 몸 구석구석이 점차 내 인식의 범위 안으로 들어왔고 호흡으로 몸을 두루두루 돌보았다. 그 덕분에 먼 길을 무사히 다녀오고 그 이후에도 무탈했다.

평소에 피곤하고 힘들었던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본다. 대부분 상황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감정들의 출렁임과 불안정해지는 기의 흐름 때문인 것이 분명하다. 책에서도 배우고 얼추 알고는 있었지만 더욱 분명해졌다. 그래서 『동의보감』에서는 칠정을 다스리는 일을 양생의 핵심으로 보고 그렇게 강조하고 있었던 거다. 그 중요한 방법이 호흡이다. 화가 날 때를 가만히 지켜보면 기가 위로 확 솟구치는 게 느껴진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동안에도 멈추질 못한다. 어느 정도 올라가야 다시 내려온다. 90초 동안 심호흡을 하면 분노가 가라앉고 다시 기가 평온해진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니 평소 호흡을 깊고 부드럽게 해서 감정에 휘둘리지 않도록 훈련을 하는 게 필요하다.

그날의 제한된 상황에서 한 짧은 경험이지만 이로써 모든 병은 기에서 생긴다는 말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800세를 살았다는 팽조가 말하는 기를 돌리는 법이 “똑바로 누워서 눈을 감고 가슴속으로 숨을 고요히 쉰다. (…) 귀로는 들리는 것이 없게 하고, 눈으로는 보이는 것이 없게 하고, 마음으로는 생각나는 것이 없게 한다.” 라고 한 이치를 몸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모든 수련법에 호흡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고, 대표적인 것이 명상인 모양이다.

이날은 참으로 운이 좋았다. 흔히 운동을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운동을 하냐고 물으면 “숨쉬기 운동”이라고 농담삼아 대답한다. 그러데 알고 보니 숨쉬기 운동만큼 중요한 운동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늘 함께 하는 것을 소홀히 여기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일상에서 숨쉬기는 돌볼 생각을 안 하고 전문가에게 배우러간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감정이 요동칠 때, 그 순간을 알아차리고 숨 쉬기만 제대로 해도 훌륭한 양생의 도를 실천하는 것이다. 일상을 꾸리면서도 온몸에 기가 두루두루 돌고 있는지를 생각할 일이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든, 틈틈이 심호흡을!

 

 

복희씨(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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