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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희씨가 들려주는 동의보감이야기

[복희씨가들려주는동의보감이야기] 양생의 달인, ‘그랑’

by 북드라망 2022. 11. 14.

양생의 달인, ‘그랑’



백문이 불여일견! 이쯤에서 양생의 달인 한 사람을 만나보자. 그는 까뮈의 『페스트』에 등장하는 인물이다.『페스트』는 1940년대, 아프리카 북단 알제리의 항구 도시 오랑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 어느 날 일명 흑사병이라고도 불리는 페스트가 덮친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도 코로나-19 팬데믹 초기, 전 세계가 속수무책으로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오랑 시민들의 고통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있다. 정부 기관도 의료계도 손을 쓸 수가 없다. 사람들이 죽어가고 도시는 봉쇄된다. 물류수송이 불가능해지자 생필품은 동이 난다. 이 틈을 타 암거래가 횡행하고 가짜뉴스들이 판을 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살아야 하는 오랑 시민들. 그 중 ‘그랑’이라는 인물을 클로즈업해 보려고 한다. 그랑의 주치의는 그랑을 두고 “어떤 페스트에서도 살아남을 인간형”이라 했다. 『동의보감』식으로 바꿔 말하면 양생의 달인이라는 말이다. 그에게 어떤 비법이라도 있는 걸까?

 


오랑의 루저, 그랑
과연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일단 팬데믹 상황에서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전염병 ‘고위험군’에 속한다. 대동맥협착증이라는 지병이 있다. 이 병을 언제부터 앓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젊은 시절부터 건강이 좋았던 적이 없다. 나이는 오십 가까이 됐다. 키는 크고 구부정하다. 어깨는 좁고 말랐다. 걸음걸이는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로 조용조용하다. 도무지 기운이라고는 없어 보인다. 게다가 윗니가 다 빠지고 없으니 먹는 것도 부실하다. 그렇다면 경제력이 빵빵한가? 전혀 아니다. 현재 시청에서 임시직으로 서기 보조 일을 하고 있다. 22년 전 취직을 할 때만 해도 근무 기간이 늘어나면 승진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건강도 안 좋고 돈도 없다면 혹시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주는 아내가 있는 걸까? 그도 역시 아니다. 결혼 몇 년 뒤, 아내는 ‘사랑하지만 떠난다’는 유행가 가사 같은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새출발을 했다.

돈 없고, 몸 약하고. 아내마저 없는, 루저의 3대 조건을 다 갖춘 세상 초라한 그랑. 그에게는 먹여 살릴 자식마저 없다.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는 듯하다. 점점 궁금해진다. 이런 처지의 그랑을 두고 주치의는 어째서 그런 말을 했을까. 지금 오랑을 덮친 어지간한 페스트도 아니고 역사상 그 어떤 대대적인 페스트에서도 살아남을 인간형이라고.

 


혹시 오랑이라는 도시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는 다른 가치관을 가진 곳인가? 그랑 같은 인간형이 존중받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진 그런 세상. 그 또한 아니다. 오랑 역시 여느 상업 도시와 다를 바가 없다. 그곳 사람들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한다. 물론 돈을 벌기 위해서다. 사랑도 한다. 그들에게도 사랑은 역시 성행위와 동의어다. 하룻밤에 성욕을 불태우며 서로를 ‘탕진’하거나,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두 사람만의 기나긴 ‘습관’에 얽매이거나. 이러든 저러든 사랑이 뭔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사랑이라는 걸 한다. 그러나 죽음은 그들의 삶 바깥에 있다. 질병 역시 마찬가지다. 죽음이나 질병은 그들의 일과 사랑을 방해하는 불청객이다. 그래서 오랑이라는 도시 역시 오늘 우리가 그렇듯이 ‘건강한 몸’에 집착한다.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잠도 줄이고 휴식도 줄일 수 있는 체력을 자랑하는 몸, 언제든지 쾌락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는 스테미너 넘치는 몸이라야 사람대접을 받는 그런 곳이다. 그런 곳에서 그랑은 그저 루저 중의 루저일 뿐이다.



보잘것없는 이상과 존재의 축
그랑과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코타르에 의하면, “저녁을 먹은 후에는 절대로 그를 불러낼 수가 없다.” 그랑 스스로도 그 시간은 신성불가침이라고 말한다. 외출을 했다가도 그 시간이 되면 할 일이 있다며 양해를 구한 뒤 어김없이 귀가한다. 그렇다면 혹시 도인술 같은 걸 연마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어떤 페스트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그랑은 도인술이 아니라 문장쓰기 훈련을 하고 있다. 상황과 맥락에 딱 맞는 말을 하는 법, 자신의 마음을 속 시원하게 표현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게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미션이다. 그랑이 나이 쉰이 다 되기까지 여전히 임시직으로 근무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딱 맞는 말 미션과 무관하지 않다. 시청에 대고 승진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지 못한 것도 그 상황에 딱 맞는 말을 찾지 못해서이다. ‘약속’이나 ‘권리’ 같은 단어는 이미 ‘자기 몫을 요구한다’는 의미로 굳어진 상태라 지금 자기의 처지와 생각을 드러내기에 딱 맞지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승진 청원서 한 장 못 쓰고 20년째 임시직인 채 지내고 있다.

공적인 장에서 쓰는 언어뿐만 아니다. 자기 가족에 대한 소소한 감정들을 이야기를 할 때도 딱 맞는 말을 찾느라 고심한다. 아내 잔이 떠난 것도 그녀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는 적절한 말을 하지 못해서라고 생각하고 있다. 오랑시민들의 관심이 온통 페스트에 쏠려 있을 때도 그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여전히 적확한 단어를 찾는 일이었다. 그래서 의사를 만날 때마다 “아! 의사 선생님, 나는 나 자신을 잘 표현하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라는 하소연을 하는 것이다. 정확한 언어를 사용하고 싶다는 그의 바람은 거의 결벽증에 가깝다.

누가 뭐래도 자신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기는 삶의 축이 없다면, 죽음의 공포와 그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 탐닉하는 감각적 쾌락 앞에서 삶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페스트가 덮쳤을 때 대부분의 오랑 시민들은 고립감과 공포에 못 이겨 쾌락에 몸을 던졌다. 이때에도 그랑은 “다행히도 나는 할 일이라도 있다”며 여전히 저녁마다 문장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만족하느냐라는 리외의 물음에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스스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때 그 상황에 딱 맞는 말을 하겠다는 의지와 그것을 실행하는 날마다의 노력은 그랑을 지켜주는 존재의 축이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짚고 가야 할 게 있다. 존재의 축이라고 하면 뭐 대단한 이상 같은 걸 상상하기 쉽다. 그러나 존재의 축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이상의 ‘크기’에 달려 있는 게 아니다. 그에 대한 분명한 문제의식과 그것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간절함’의 강도에 달려 있다. 그랑은 문장쓰기를 통해 돈이나 명예를 얻으려는 게 아니다. 인생을 살았으면 책 한 권 정도는 남겨야 하지 않겠냐는 소박한 바람조차도 없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싶다거나 명작을 써서 이름을 남기겠다거나 하는 마음은 더더구나 없다. 오로지 매순간 자신의 마음을 오롯이 드러내는 언어를 찾고 싶다는 마음, 그런 언어로 떠나간 아내에게 편지 한 장을 쓰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자신의 마음을 진솔하게 전함으로써 아내가 어떤 마음의 잉여도 없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아주 구체적인 바람, 그런 마음으로 날마다 문장쓰기 훈련을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랑의 문장 훈련이 그 어떤 보상도 주어질 수 없는, 남의 칭찬조차 받기 어려운 ‘보잘것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오로지 자신의 간절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자발적 수련이었다. 그러기에 아내가 떠나가도 승진길이 막혀도 페스트가 와도 멈춤 없이 지속할 수 있었다. 그것이 허약하기 짝이 없는 그를 살리는 도인술이자 비법이라면 비법이다.

 

 


욕망과의 거리두기, 그리고 생명력
『동의보감』에서 말하는 양생(養生)은 말 그대로 내 안에 있는 생명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 첫 번째 요건이 쓸데없는 기의 낭비를 막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12가지를 줄이라고 한다. 그것은 생각, 걱정, 욕심, 일, 말, 근심, 노여움, 싫어하는 것, 좋아하는 것, 즐거움, 기쁨, 웃음 등, 살아있는 동안에는 한시도 우리와 뗄 수 없는 것들이다. 혹시 뭘 더 보태라는 건 없나 해서 계속 읽어보니 침을 삼켜 오장의 기운을 보양하란다. 입안에 저절로 생기는 침도 함부로 뱉지 말고 몸으로 순환시켜 양생을 도모하라는 뜻이다. 요컨대 뭘 자꾸 보탤 생각을 하지 말 것. 그 대신 기운을 소모하는 행위들을 최대한 줄일 것. 가지고 있는 기운을 잘 순환시킬 것.

그런데 요즘은 어지간한 건 다 상품으로 구매가 가능하다. 이런 세상에서는 ‘줄이는’ 삶이 여간 힘들지가 않다. 일단 문제가 생기면 필요한 걸 가짐으로써 해결하려고 한다. 이런 태도는 지금의 상황을 일단 결핍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결핍을 채운 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다. 그때부터 모든 안테나는 수입을 늘리는 쪽으로 맞춰지고 거기에 도움이 되는 정보들이 안테나에 걸린다. 생각도 동선도 그 쪽으로 기울어지고 일상도 그에 맞춰 재구성된다. 더 많은 수입에 대한 욕구는 다시 더 많은 소비 욕구로 이어지고 다시 더 높은 수입을 원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을 점점 더 치열한 경쟁 속으로 밀어 넣는다. 경쟁에 성공하면 다시 그에 대한 보상 심리로 풍족한 삶을 향한 기대치는 더 높아진다. 가짐으로써 해결하려는 해법은 이 악순환을 벗어나기 어렵다. 고로 기대치와 현실 사이의 결핍감은 영원히 채워질 수가 없다. 이 채워질 수 없는 결핍감은 자기 안의 생명력을 주눅 들게 한다.

아내가 떠난 뒤, 그랑은 수입을 늘리는 쪽이 아니라 지출을 줄이는 길을 선택했다. 이러한 선택의 배경에는 ‘그 상황과 맥락에 딱 맞는 말을 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그의 ‘보잘것없는’ 이상이 자리하고 있다.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문장훈련을 할 시간 확보가 필요했다. 따라서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경제활동은 현재의 시청 임시직으로 충분하다. 필수불가결한 항목을 제외한 지출을 최소화한다. 이렇게 원칙을 정하고 나면 그에 따라 삶에 변화가 일어난다. 필요한 물건도 동선도 단순해지면서 걱정, 근심이 줄어들고 따라서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지 않는다. 삶이 정결해지고 따라서 정신도 맑아진다. 그러면서 인식에 변화가 일어난다. 자신이 삶의 주인이라는 의식이 생기면서 ‘내가 살고 싶은 삶’ 쪽으로 점점 더 무게중심이 옮겨간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욕망과 거리두기가 가능해지고 결핍감에 주눅이 들어 있던 내 안의 생명력이 약동한다. 이 생명력이 자신의 경계를 넘게 한다.

그리하여 그랑은 수입이 부족한 탓에 ‘거의 고행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질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경험한다. 더 나아가 물질적인 곤궁함에서 비롯되는 모든 종류의 번뇌에서 해방된다. 거기서 뿌듯함이 올라온다. 이 뿌듯함이 존재를 충만하게 한다. 충만감은 물질의 양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의식이 있을 때 자부심과 자존감이 생기고, 어떠한 조건도 더 이상 결핍으로 느끼지 않는다. 그럴 때 객관적으로는 아무리 열악한 상황이나 조건도 자신을 살리는 자산이 된다. 그랑의 약한 몸. 빠듯한 살림살이가 탐욕과 쾌락으로부터 거리두기를 가능케 하고, 페스트가 창궐하는 상황에서도 허약 체질의 그랑이 생명력을 잃지 않게 된 이치가 여기에 있다.

 


열림과 선함, 그리고 ‘순환’
그랑의 저녁 시간은 신성불가침이다. 대부분의 오랑 시민들이 퇴근 후 술집으로 어디로 몰려가 하루의 스트레스를 풀고 있을 때 그는 집에서 문장연습에 몰두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랑이 타인에게 무관심한 이기적인 인물은 아니다. 물론 동네 소문에는 별 관심이 없다. 동네에 떠도는 소문이라고 해 봤자 뻔하다. 주식이 올랐네 내렸네. 어느 지역 집값이 급등을 했네, 또는 급락을 했네. 그래서 누구는 대박을 쳤고 누구는 쪽박을 찼다는 등, 돈벌이에 관한 것이거나, 연애담이나 스캔들 같은 그랑의 관심사에서 먼 것들이다.

그렇지만 그랑은 자신의 처지와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줄 알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할 줄 알고, 남을 돕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오버하지는 않는다. 그저 자신의 일상에서 마주치는 인연들에 선한 마음으로 응답할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감정에 솔직한 사람이 드문 것도 사실이고, 타인의 어려움에 공감하며 마음을 내고 시간을 내어주는 사람도 흔치는 않다. 그러다 보니 마음에 이런저런 찌꺼기들이 쌓인다. 이런 감정의 잉여가 번뇌를 일으키고 번뇌가 쓸데없는 기의 소모를 불러온다. 양생에는 치명적이다.

그 중심에는 ‘나’라는 자의식이 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나’에게 득이 되는가, 손해가 되는가, 저 사람이 ‘나’보다 나은가 못한가 등등. ‘나’라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 이렇게 ‘나’라는 걸로 가득찬 마음으로는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할 수 없다. 그랑은 욕망의 방향이 그들과 다르기에 경쟁심도 열등감도 없다. 그러니 ‘나’가 있을 그 자리에 주변 사람들의 고통이 자리할 수 있다. 그래서 자살소동을 벌인 코타르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주저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 그를 구했다. 의사가 하룻밤 같이 있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도 서로 잘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기꺼이 코타르 곁을 지켰다. 페스트 방역을 위해 민간보건대를 조직했을 때도 주저 않고 합류했다. 그리고 신성불가침의 저녁 시간을 쪼개어 자신이 할 수 있는 기록 관련 일을 기꺼운 마음으로 수행했다. 그랑의 마음이 세상을 향해 열려 있었기에 허약한 몸이지만 페스트 현장에 참여할 수 있었고, 거기서 리외, 타루 같은 좋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흘려보낼 수 있어야 타인의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그런 사람이라야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반응할 수 있다. 고로 열림은 곧 선함이고 통함이다. 마음이 세상을 향해 열려 있을 때 선한 인연들을 맺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 이럴 때 가장 살맛이 나고 살맛이 나면 기혈의 순환이 왕성해진다. 이보다 더 확실한 양생법이 있을까.


* * *


양생을 할 수 있는 상황, 유리한 조건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지금 여기 내게 주어진 조건에서 최상의 삶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양생술이다. 루저 중의 루저 그랑이 할 수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고, 속수무책인 전염병 하에서도 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못하겠는가. 문제는 상황과 조건 그 자체의 유불리가 아니라, 그것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는가, 매일의 일상을 어떻게 순환시키는가, 그리고 그때그때의 상황에 진실하게 응답하려 매 순간 노력하는가이다. 그런 점에서 매 순간 최적의 언어로 상대와 소통하고자 하는 그랑. 자기 앞에 펼쳐진 현장이 어떤 곳이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활동을 기꺼이 담당하면서 우정을 나누는 그랑. 이런 그랑이야말로 지금 여기에 주어진 조건에서 자신을 살리고 타인을 살리는 양생의 달인이라 할 만하다.

 

글_복희씨 (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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