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자, 우리에게 잊히는 것을
<히로시마 내 사랑, Hiroshima mon amour>, | 알랭 레네 감독 | 1959
시간이라는 공통분모와 ‘현재성’
2차 세계대전, 일본이 항복하지 않자 미국은 1945년 8월 두 개의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다. 역사상 최초로 일반시민 학살에 원자폭탄이 사용됐다. 그로부터 14년 후 1959년, 프랑스 여배우인 그녀는 세계평화 메시지를 위한 영화 촬영차 ‘히로시마’를 방문한다. 그곳에서 일본인 남자를 만나고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처음 와 본 히로시마에서 보낸 낯선 남자와 하룻밤. 그러나 그녀는 그와의 만남을 통해 잊고 있었던 ‘느베르’에서의 첫사랑 혹은 그의 죽음을 다시 떠올린다. 영화의 소재는 공교롭게 ‘사랑과 전쟁’ 속에 이뤄진 불륜이지만, 이건 제목처럼 부부클리닉 재현드라마가 아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두 도시, 일본의 히로시마와 프랑스의 느베르는 모두 2차 세계대전의 상처를 갖고 있다. 다만, 히로시마는 집단기록인 ‘역사’를, 느베르는 개인적인 ‘기억’의 문제를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히로시마는 박물관의 전시내용 혹은 극중 영화 속 반전퍼레이드 장면을 통해 이야기되는 반면, 느베르의 시간은 대부분 그녀에게 일어난 과거 개인적인 사건에 집중한다. 영화가 의도적으로 묻고 있는 ‘집단과 개인’ 혹은 ‘역사와 기억’문제의 교집합은 ‘시간’이다. 역사 속 전쟁은 지난 과거가 됐으나, 그날 개인의 어떤 기억 혹은 사건들은 늘 현재의 질문으로 다가온다. 즉 집단의 역사와 개인의 기억은 시간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며, 집단의 역사는 개인의 기억으로 현재성을 지닌다.
역사 안에 개인적 기억이 들어있지 않다면, 그것은 재현의 배경으로써 집단적 기록 이상의 의미를 갖기 힘들다. 1994년은 모두가 알고 있는 성수대교가 무너진 해이기도 하지만, 영화 <벌새>(2018)에서 중학교 2학년 은희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 물리적 붕괴가 은희의 관계 붕괴와 맞닿아 있다고” 김보라 감독은 말한다.
<히로시마 내 사랑>에서도 유사한 주제의식이 드러난다. 원폭이 투하된 히로시마의 사건을 생생한 ‘기록영상’으로 보이고, 그것을 ‘재현’한 박물관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동안 여자의 나레이션이 흐른다. “이제는 히로시마를 알 것 같아요.” 그러나 '목소리’는 “당신은(아직) 히로시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대꾸한다.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그녀 혹은 나와 당신이 아는 것은 무엇이고, 또 모르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기억의 ‘신체성’
1945년 히로시마 원폭투하는 여자와 남자가 동시대에 겪은 역사적 사건으로 두 사람 모두 그곳에서 벌어진 일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공유되는 기억’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기억이란 어떤 의미에서 볼 때는 ‘머리’에 저장되는 게 아니라, 실은 ‘몸’에 새겨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기억이 ‘신체성’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기억은 인식하기 전 몸이 먼저 반응한다. 우리가 몸으로 기억한다는 것, 몸에 각인되는 기억이란 무엇인가?
감독은 의도적으로 맨 첫 장면에서 서로 뒤엉켜 있는 두 남녀의 벗을 몸을 보여준다. 그들의 몸 위로 마치 히로시마의 원폭가루 같은 무언가가 뿌려진다. 온몸에 가루가 달라붙어 있는 모습으로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 날 아침, 침대에 ‘누워있는’ 남자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여자는 느닷없이 ‘죽어있는’ 느베르의 첫사랑과 마주하게 된다.
여자 : 망각과 싸웠지만, 당신처럼 나도 잊고 말았죠.
남자 : 프랑스에서 당신에게 히로시마는 어떤 의미였지?
여자 : 무관심, 무관심이라는 공포.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지방소도시 느베르에 살았던 여자의 첫사랑은 아니러니하게 독일병사였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느베르의 주민들은 그 병사를 잡아 죽이고, 충격에 빠진 여자도 지하실에 감금(보호)된다. 그녀는 잊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어두운 절망의 시간 속에서 첫사랑도 차츰 잊히고 만다.
어느 날, 여자가 그 독일병사를 완전히 잊은 것 같다고 생각한 마을주민들은 그녀를 풀어준다. 여자는 미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느베르의 죽음(개인의 기억)에는 무관심해야 했다. 지하실을 벗어난 여자는 무작정 파리로 떠난다. 그때가 1945년, 그녀는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됐다(집단의 역사)는 뉴스를 접한다. 그녀의 느베르의 기억은 히로시마의 역사로 대체된다. 기억의 대부분 망각되지만, 몸의 즉각적인 반응은 시간의 개념을 뒤틀어 놓는다. 즉 신체성을 통한 어떤 기억(공유)에는 늘 현재성이 들어있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남자와 헤어지고 호텔로 돌아온 여자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여자는 거울을 보며 혼잣말을 한다. 그러나 마치 남자에게 하는 말 같다. “(느베르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지만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마치 히로시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던 그 목소리처럼. 뒤이어 여자는 자신이 14년의 망각의 늪에서 느베르를 건져 올렸다는 사실에 놀란다. “난 오늘밤 당신을 배신했어요. 우리의 얘기를 할 수 있었다구요.” 혼란스런 여자는 다시 밖으로 걸어 나간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여자는 무작정 히로시마의 새벽거리를 헤맨다. 영화는 지금의 히로시마 거리와 당시의 느베르 거리를 교차해서 보여준다. “여기 히로시마에 살 거예요. 너무 슬퍼요. 이런 일은 상상도 못했어요.” 무엇이? 느베르를 떠올린 게? 아니면 남자와 헤어지는 게? 그러나 거짓말이다. 프랑스에 가정이 있는 그녀는 히로시마를 떠날 것이다. 여자는 동시에 자신이 떠났던 느베르를 생각한다. 허나 다시 망각의 시간을 보내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여자의 마음은 조금씩 차분해 진다.
뒤따라온 남자, 히로시마에 머물러 달라고 애원하자 여자는 뭘 위한 시간이냐고 묻는다. 남자는 알기 위한 시간이라고 답하지만, 여자는 이내 고개를 흔들며 그런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서로 알기 위한 시간이란 무엇이며, 또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실천이란 앎 이전의 행위이며, 앎은 실천으로 드러난다. 기억하고 있는 지식이 책을 벗어나지 못 한다면 나는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문탁에선 익숙한 표현이다. 책으로 배운 연애도 실전에선 소용이 없다. 드라마의 흔한 장면이다. 필요한 것은 ‘그것’을 알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지금 그걸(연애)해 보는 거다. 이 또한 익숙한 문장임을 부정하긴 어렵다. 안다. 늘 알면서도 안 한다. 그러나 그건 모르는 거랑 다를 게 없다. 우리는 히로시마를, 밀양을, 느베르를, 세월호를, 알레포를, 키이우를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서로를 알기 위한 시간이 아니다. 우리는 몰라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신체성을 통한 기억에는 현재성이 잠재되어 있다.
잊힌 개인의 기억은 집단의 기록이 대신하겠지만, 어쩌면 개인의 기억만이 현재 속에 되살아난다. ‘기억 못하겠지만 기억’하고 있는 나와 당신의 시간들. 그녀가 잊어야 했던, 그러나 기억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본다. 사랑은 박제된 역사가 아니라 매번 다른 사건으로 다가온다.
글_청량리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청량리발 영화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량리발영화이야기] 우연이라는 결과 (0) | 2023.01.17 |
---|---|
[청량리발영화이야기] 함께 그러나 불안정하고 모호한 (0) | 2022.12.27 |
[청량리발영화이야기] 우리에게 ‘사과’가 필요할 때 (0) | 2022.12.13 |
[청량리발영화이야기] #살아있다 (0) | 2022.11.08 |
[청량리발영화이야기]영화를 '듣는다'는 것 (0) | 2022.10.26 |
[청량리발영화이야기] 카메라로 드러나는 질문의 태도 (0) | 2022.10.1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