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듣는다'는 것
스코어 : 영화음악의 모든 것 SCORE: A Film Music Documentary | 2016
M본부의 <출발, 비디오여행>은 1993년에 시작됐으니, 그 역사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영화소개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요즘엔 ‘비디오’로 영화를 보는 사람은 당연히 없을뿐더러, 영화소개 프로그램을 ‘텔레비전’으로 보는 건 옛날 사람들이다. 반면 라디오는 매체의 특성상 영화에서 흘러 나왔던 음악을 중심으로 영화를 소개한다. 1998년에 시작된 CBS의 <신지혜의 영화음악>은 영화음악 방송의 초장수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유튜브’가 대세인 요즘 영화를 영상이 아닌 음악으로 소개하는 건 어쩐지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아 보인다.
그럼에도 <신영음>이 20년 이상, 지금도 여전히 애청된 이유도 분명 존재한다. “이 시간이 방송을 듣는 사람들에게 아지트같이 편안하고 아늑한 시간이었으면 좋겠어요. 잠시 숨어 영화음악으로 숨 쉴 수 있는 시간이요.” 진행자인 신지혜 아나운서의 말이다. 결국 영화를 ‘듣는다’는 건 아지트에 숨어들어야 찾을 수 있는 나만의 또 다른 영화감상법이다.
영화에서 사운드트랙(soundtrack)이라는 말은 영화에 쓰이는 모든 ‘소리’를 지칭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영화 <봄날은 간다>(2001)에서 상우(유지태)가 녹음하는 자연의 소리도 은수(이영애)가 진행하는 라디오프로그램이 아니라 영화에 삽입되었다면 그 영화의 사운드트랙이 된다. 그러나 좁은 범위에서는 영화에 흐르는 ‘음악’으로 한정하여 말한다(OST, 오리지날 사운드트랙 ≒ 영화음악).
영화음악은 다시 ‘노래’가 있고 없음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중 노래 없이 영화를 위해 작곡된 순수 연주음악을 ‘필름 스코어(film score)’ 혹은 ‘오리지날 스코어(original score)’라고 구분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두 가지에 대해 구별 없이 영화음악상을 시상하지만, 미국 아카데미에서는 각 부문으로 나눠서 시상한다. 영화 <스코어 : 영화음악의 모든 것>(2016)은 제목처럼 (오리지날)스코어를 다룬 영화음악 다큐멘터리다.
영화 <스코어>에는 수많은 오리지널 스코어와 그 작곡가들을 만날 수 있는데, 그 중 가장 탁월한 인물은 ‘존 윌리엄스’다. <죠스>, <스타 워즈>, <슈퍼맨>, <E.T.>, <인디아나 존스>, <쥬라기 공원> 등 한 음절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영화 속 음악들이 모두 그의 손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천재감독인 스티븐 스필버그도 단 두 개의 음, 빠~~~밤으로 만든 <죠스>음악을 듣고선 처음엔 그를 미쳤다고 했을 정도였다. 존 윌리엄스는 영화음악을 새롭게 개척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7~80년대를 휩쓴 존 윌리엄스를 대신해 최근 주목을 받는 영화음악 작곡가는 단연 ‘한스 짐머’다. 존 윌리엄스를 보며 “영화음악이 클래식처럼 위대해질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 한스 짐머는 영화 속 이미지들을 영상보다 더 강렬하게 음악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인셉션>, <다크 나이트>, <인터스텔라> 등 그의 음악은 오히려 영화를 압도한다. 뿐만 아니라 영화를 더욱 시적으로 만들고, 품격을 높이는데 사용된 한스 짐머의 음악은 혁명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현악기를 기타처럼 연주”하며 “오케스트라와 전자음악의 경계”를 허물고 모든 걸 재창조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영화에는 등장하진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영화 <매트릭스1>의 OST앨범(음악: 돈 데이비스)이 기억에 남는다. 지금은 ‘자매’가 됐지만, 워쇼스키 ‘형제’시절에 만든 <매트릭스1>(1999)은 개봉하기 전 음악으로 먼저 만난 영화다. 그 OST 앨범은 마를린 맨슨의 <롹 이즈 덷>를 시작으로, 프로디지의 <마인필즈> 등 당시 최고의 헤비메탈과 일렉트로닉을 담고 있었다. 몇몇을 제외하곤 거의 모르는 그룹들의 음악임에도 그들의 거칠고 폭발적인, 음침하고 어두운 사운드트랙을 듣다보니 이미 영화를 상상해버렸다.
영화음악은 영상매체인 영화를 ‘음악’으로 ‘듣는 행위’를 전제로 한다. 어쩌면 이 당연한 전제를 통해 우리는 영화음악이 갖는 특이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영화음악은 영화의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텔레비전이나 유튜브의 영화소개 프로그램들은 메인장면이 없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스포일러로 작동한다. 분명 내가 본 영화 같은데 사실은 <출발, 비디오여행>인 경우도 많다. 그러나 영화 속 음악들은 아무리 많이 들어도 전혀 정보로 전달되지 않는다. 스팅의 <쉐잎 옵 마이 핱>은 불후의 명곡이지만, 그걸 많이 듣는다 해서 <레옹>(1994)의 줄거리를 알 수는 없다.
또한 영화음악은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순간 영화는 즉각 ‘소환’된다. 물론 같은 노래를 들어도 떠오르는 영화나 장면은 각각 다르며, 영화가 전혀 안 떠오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맘보댄스로 유명한 곡, 사비에르 쿠가트의 빠-빠빠빠빱빠~ <마리아 엘레나>를 들으면 장국영의 허리와 엉덩이가 눈앞에 흔들거리는 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불행히도 존 레논의 <이매진>을 들으면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좋은 싫든, 엉뚱하게도 <킬링필드>(1984)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게 됐다(영화대로 42길 8회 참조).
사람을 듣는다는 것이 그 사람의 인적사항이나 호구조사를 뜻하는 게 아니듯, ‘듣는다’는 건 그 속에서 유용한 정보를 캐치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심지어 배경지식이 없다 해도 그 사람을 들을 수 있다. 영화음악도 분명 그러하다. <시네마 천국>(1988)의 정확한 줄거리정보가 기억나지 않아도, 엔리오 모리꼬네의 음악을 통해 우리는 토토의 옆자리에 앉아 그와 함께 눈물을 흘린다. 영화음악을 듣는다는 건 허구적인 영화 속 주인공에게 우리의 마음이 향하도록 한다. 왜냐하면 “영화음악은 영화의 심장이자 영혼”을 듣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코어>는 짧은 러닝타임 안에 너무 많은 음악과 사람들이 등장하면서 다소 혼란스럽게 전개되는 건 아쉬웠다. 수많은 영화와 거기에 사용된 영화음악, 그리고 그 음악의 작곡가들과 관련된 영화제작자들, 심지어 영화음악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는 학자(!)까지 등장한다. 게다가 안 본 영화의 경우, 그 음악으로 바로 ‘소환’되는 장면이 없기에 온전히 흐름에 집중하기 어렵다.
또한 영화 <스코어>가 보여주는 오리지널 스코어의 제작과정은 결국 대자본이 투입되는 미국 할리우드 영화에서만 가능한 건 아닌가라는 질문도 든다. 영화에 적합한 오케스트라 음악을 유명 작곡가에게 주문하고, 좋은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스튜디오에서 90명이 넘는 뮤지션들과 녹음을 하는 과정이 꼭 좋은 영화를 담보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화 <스코어>는 내가 몰랐던 영화음악의 세계를 선물했다. 영화음악의 오리지널 스코어 작곡자는 지금 시대에 “유일하게 남은 오케스트라 음악가”라는 한스 짐머의 말이 깊게 와 닿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무단으로 비틀즈의 노래를 사용해 거액의 소송이 걸린 국내영화 <비트>(1997)의 흑역사나, 작곡자와 영화제작자가 직접 계약하게 된 게 불과 10년이 안 된 국내 영화음악시장은 영화 <스코어>에 비해 안타까울 뿐이다.
영화 <기생충>이 촬영되기도 전에 봉준호 감독은 정재일 작곡가에게 시나리오를 보냈다. 영화음악에는 봉준호 감독의 말처럼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무언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권하고 싶은 좋은 영화가 있다면 줄거리를 설명하기 보다는 한 곡의 영화음악을 들려주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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