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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발 영화이야기

[청량리발영화이야기] 함께 그러나 불안정하고 모호한

by 북드라망 2022. 12. 27.

함께 그러나 불안정하고 모호한

결혼이야기 Marriage Story(2019) | 감독 노아 바움백 | 주연 스칼렛 요한슨, 아담 드라이버 | 137분 |


통상적으로 ‘가족’은 결혼으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주거와 생계를 유지하는 단위로서의 ‘가구’와는 달리 가족은 혈연이나 혼인 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자 사는 1인 가구는 가족을 구성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가구와 가족의 구별은 사적 사회구성의 서로 다른 형태일 뿐, 그 구성원(들)의 밀도나 결속력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내밀함’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지 않을까. 쉽게 말해, 현관문을 열면 바로 방이 보이는 ‘원룸’구조와 현관문, 중문, 방문, 전실을 통해 들어가야 하는 ‘안방’이 다르게 배치되는 이유다. 가족이라는 ‘스위트홈’에서 가장 내밀한 영역의 안방, 그곳에 거주하는 이들이 ‘부부’다. 이때 문제는 그들의 관계가 정말 내밀하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내밀함을 가족 혹은 부부의 ‘견고함’으로 받아들이는데 있다.

어린 아들을 둔 부부, 찰리(아담 드라이버)와 니콜(스칼렛 요한슨)은 서로에 대한 장점과 애정을 편지로 써서 읽어주려 한다. 그러나 니콜은 이혼조정 전문가 앞에서 그 편지를 읽지 못한다. 이미 벌어진 틈을 과거의 감정으로 메울 수는 없었다. 영화 <결혼이야기>(2019)는 그렇게 어느 부부의 ‘이혼이야기’로 시작한다.

연극연출가와 배우로 만난 찰리와 니콜. 찰리를 사랑했고 그와 함께 하기 위해 10년 전 LA를 떠나 뉴욕으로 온 니콜의 마음은 좀 더 복잡하다. 굳이 변호사를 통하지 않고 원만하게 그들 사이를 풀고 싶은 마음도 있다. 하지만 찰리는 그러한 니콜을 믿으며 둘의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즈음 니콜에게 TV연속극 출연제의가 들어온다. 다만 방송국 사정 상 다시 LA로 돌아가야 하는 조건이었다.

그러한 상황에도, 니콜의 내면을 살피기보다는 찰리는 그녀의 연기에 대한 평가를 늘어놓는다. 아, 재수 없어. 그러한 찰리를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듯하지만, 뒤돌아서 니콜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노련한 변호사 노라(정성미 로라 던)를 만나면서 니콜은 진심으로 찰리와 헤어지길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상대가 뭘 원하는지는 관심도 없고, 잘 나가는 자신을 위해 훌륭한 반려자로 남길 원하는 찰리가 니콜은 싫다.

아직 헨리는 아무 것도 모를 때다. 그러나 조금만 더 크면 부모의 이혼에 혼란스럽고 돌발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하다. 참고로 노아 바움백의 <오징어와 고래>(2005)를 기회가 된다면 살펴보자.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결혼’제도로 시작되는 가족은 ‘부부’의 관계에 따라 해체되거나 유지되기 때문에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분리불안, 의심, 원망, 사랑, 애정 등이 혼재된 가족은 그래서 ‘사랑의 보금자리’가 아닌 공포의 무대로서 영화와 현실 속에서 종종 등장한다.

가족은 불안정하기에 명확하지 않고 모호하다. 신혼은 지나가고 아이가 태어나고 빚을 갚기 위해 맞벌이를 하고 아이들에게는 사춘기가 찾아온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관계’ 속에서 가족의 모습도 파도를 탄다. 보약 한 번 안 먹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환절기마다 알러지에 약을 달고 사는 사람도 있다. 눈이 나빠져 안경을 낀 사람이 비정상은 아니다. 평생 함께 살아가기도 하지만, 어느 날 헤어지는 부부도 있기 마련이다.

건축물 중에도 리모델링이나 대수선이 가능한 게 있고, 아예 허물고 신축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때 제일 고려해야 할 건 ‘구조’의 상태다. 겉으로는 멀쩡해도 속이 텅 비어있거나 녹이 슬었다면, 눈에 보일 정도로 크랙이 발생했다면 그 건축물은 철거대상이다. 구조에 이미 변이가 생겼는데 계속 유지한다면 그 피해는 심각해진다. 물론 감당할 수준이라면 지나가겠지만 눈 가리고 아웅하지 않고 어떨 때는 허무는 게, 즉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이 정상이다.

그때 건축물에 대한 구조안정성검토를 진행한다. 그건 건축주가 오랫동안 소유하고 있었다고 해도 알기 어렵다. 오히려 그 동안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혹은 문제가 드러날까 봐 쉬쉬한다. 그러나 육안검사든 구조기술사의 도움이든 받아야 한다. 내가 소유한 건축물이니 알아서 하다간 큰 사고로 이어진다. 함께하는 다른 이들을 생각한다면 이상증상이나 문제점들은 공공연히 드러내야 발견할 수 있다.

어느 하나를 가족 혹은 부부의 ‘정상’으로 재단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우리가 흔들고 종말을 고해야 할 것은, 내밀하고 견고하다고 여기는 상태만을 ‘정상’으로 바라보려는 ‘사적영역’으로서의 가족일 것이다.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은 독일의 환경운동가이자 여성운동가인 페트라 켈리의 주장으로, 사적영역에 감춰진 여성의 문제를 드러내고 사회문제로 이야기하자는 그녀의 정치적 행동을 담고 있다. 가족을 더욱 견고한 사적 관계로만 소유하려는 가부장적(남성) 권력을 비판한다고 볼 수 있다. 니콜과 찰리의 불안정한 상태는 찰리가 LA에 얻은 임시 거처에 니콜이 찾아오면서 폭발한다. 얼마 전까지 부부였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폭언과 비난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화가 찰리도 주먹으로 니콜 대신 벽에 구멍을 낸다. 좀 더 흔들렸다면 찰리가 가족에게 도끼를 들이대는 <샤이닝>(1980)의 ‘잭(잭 니콜슨)’이 되는 건 결국 ‘한 끗’ 차이일 뿐이다. 우리 집에도 화가 난 내가 주먹으로 내리쳐 선반 하나가 부서진 책장이 있다. 종종 아이들에게 소리도 지른다. 그래서 EBS방송 중 가족폭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은근 찔끔거린다. 아이들은 작은 것도 기억하고 있다. 찰리와 니콜, 두 사람의 사생활은 그들의 변호사를 통해 법정에서 전부 들춰진다. 상대에게 흠집을 내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치부쯤은 감수해야 한다고 변호사 노라는 니콜에게 조언한다. 인간적인 조정을 권하던 변호사를 해고하고 찰리도 낡고 닳은 변호사 제이(레이 리오타)를 선임한다. 처음에는 별 문제없다고 생각했지만,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변호사를 해임하고 아이의 양육권을 놓고 상대를 헐뜯기까지, 영화에서는 찰리의 심리변화도 밀도 있게 그려졌다. 문제의 해답은 옳은 질문에 있고 프레임의 문제는 그것을 벗어나야 보이고 나의 문제는 자신과 떨어져야 알게 된다면, 부부의 문제도 그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데서 출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이 사적영역을 벗어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다행이 니콜과 찰리에게는 연극단원들이 늘 함께 있었다. 그들이 만나고 결혼하고 다투는 상황을, 헨리가 커가는 모습을 함께 지켜보는 친구들이 있었다. 때문에 그들의 사적영역은 어느 정도 공공연히 드러나게 되는 생활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아쉬운 점은 니콜과 찰리가 둘 사이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변호사를 찾아가고 법정에서 만나는 걸 오로지 두 사람의 문제로만 본다는 것이다. 결국 감독은 왜 친구들이 아닌 변호사에게 그 해법을 물을 수밖에 없었을까? 연극무대에서 만난 찰리와 니콜, 그리고 그들과 10년 넘게 함께 해온 친구들이 옆에 있지 않았나? 그러나 니콜과 찰리는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주체로 그려진다.

물론 주변에 이런 이야기를 나눌 친구들이 함께 하는 건 쉽지 않다. 무진장에서도 가족경제를 벗어나 돈을 섞어보려고 했으나, 애초의 생각과는 달리 가족의 울타리는 견고했고 돈의 흐름은 정체되었다. 사적인 것을 정치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은 여전히 굉장히 어려운 숙제다. 해 본적이 없어서 더 어렵게 느껴진다.


법정에 선 두 사람의 문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난다. 이제는 그들이 어찌 해보려 해도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니콜과 찰리는 따로 떨어져 헨리를 만나고, 가족을 유지하는 법에도 익숙해진 듯하다. 어느 날, 헨리가 읽고 있는 편지를 무심코 집어든 찰리. ‘2초만에 나는 그에게 사랑에 빠졌다. 나는 평생 그를 사랑할 것이다. 지금은 말이 안 되지만.’ 니콜이 이혼조정 전문가 앞에서 읽지 못했던 글이다. 순간 니콜의 마음을 다시 느끼지만, 이제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걸 안 찰리는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지금 흘리는 찰리의 눈물은 과거 찰리의 연기평가 뒤에서 몰래 흘리는 니콜의 눈물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 니콜이 상대(찰리)에 대한 안타까움, 이미 어쩔 수 없음에 대한 것이라면, 찰리의 눈물은 자기 연민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영화 <파이란>(2001)에서 죽은 파이란(장백지)의 편지를 들고 오열하는 강재(최민식)의 모습과 흡사하다. <파이란>의 송일곤 감독과 <결혼이야기>의 노아 바움백 감독, 두 남성 감독이 결국 자기 연민의 눈물로 남성을 구원하려는 시선이 다소 불편하게 느껴진다.

불안정한 건 나쁜 게 아니라 오히려 무엇과도 결합이 가능한 잠재적인 상태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가족이란 내밀하고 견고하기 보다는, 불안정하고 모호한 측면이 강하다는 걸 알아차리고 살펴보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 게다가 함께 밥을 먹는 사이라면 누구든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걸 영화 <가족의 탄생>(2006)은 이미, 보여줬으니 해 볼만 한 하지 않은가?


*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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