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로부터 벗어나기
1935년, 편협한 유럽중심주의에 지친 레비-스트로스는 유럽의 ‘바깥’을 기대하며 남아메리카 브라질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바깥’은 없었습니다. 남미에 도착하자마자 알 수 있었지요. 아무리 ‘바깥’을 찾으려고 해도 그의 눈은 익숙한 풍경, 길든 관념밖에는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럽에는 없는 대로와 자동차, 유럽에는 없는 거칠고 투박한 살림살이와 먹을거리 등. 낯선 풍경 속에서 작동하는 것은 여전히 ‘유럽’이라는 척도였습니다. 열대로부터 돌아와서 그는 자기라는 관점 바깥으로 나가기가 극도로 어렵다는 점을 절감했습니다. 또한 자기와 타자를 가르는 구분선이라는 것이 결정적인 것도 아님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통찰을 거듭해 가며 그는 독특한 인류학적 시선 하나를 개발해 갔습니다. (『슬픈 열대, 공생을 향한 야생의 모험』, 52쪽)
여행을 가면 주로 느끼는 감정이 있다. “와~ 이건 우리나라랑 똑같네.”, “이 부분에서는 좀 다르네.” 레비-스트로스가 유럽의 ‘바깥’을 기대하며 떠난 브라질에서처럼 나 또한 어떤 여행에서든 “익숙한 풍경”, “길든 관념”만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장소만 다를 뿐, 비슷한 여행의 패턴을 반복해서 그런지 어딘가에 다녀오면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곳의 인상적이었던 음식과 기념품정도 생각날 뿐이다. 이제껏 여행지에서의 그 시공간과 제대로 만나고 있었는지 의심이 든다.
내가 아는 것들을 넘어, 그러니까 ‘자기’를 떠나 바깥을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굳이 왜 그래야하는가? 내가 아는 것들, 내 생각, 내 물건, 등등 ‘내 것’에만 집착하면 답답해진다는 건 더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럴 때 주변 사람들의 어두워지는 표정을 나만 본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평생 ‘나’에 갇혀 소통 불가능한 신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떠올려보면 ‘나’라는 존재가 태어나려면 부모가 먼저 있어야 하고, 기발하다고 생각했던 사유 또한 오로지 내가 만들어 냈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우리는 조건 상 여러 사람들과 관념들에 의해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많은 존재들과 관념 그리고 여러 생물과 무생물 등등과 섞여 살아가며 편협한 ‘자기’라는 관점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떻게 이 경지가 가능할까?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1년 전 쯤 요가를 하다가 뭔가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은 그러니까 나를 벗어난 듯한(?)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 한쪽 다리를 앞쪽으로 접어서 엎드리는 비둘기 자세를 할 때였다. 골반이 뻐근한 채로 엎드려 호흡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골반 통증이 사라지더니 지금 호흡하는 내 몸만으로 온전한 느낌이 들었다. 말로는 표현하기가 어려운데 분명 몸은 여기에 있는데 느껴지지 않는 그런 이상한 기분이랄까?
우연히 만난 ‘나’로 부터 벗어나는 경험은 내가 우주적인 존재, 좀 더 큰 세계의 일부분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아, 뭔가 내가 지각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구나!’ 잠깐이었지만 어떤 자유로움까지 느낄 정도였다. 그때의 그 강렬했던 경험은 이제껏 내가 ‘내 몸뚱이’를 애써 지키려 해왔다는 걸 알게 해주었다. 나는 평소에도 의도치 않았겠지만 주변을 이렇게 ‘나’, ‘내 몸’, ‘내 것’ 등등 힘주는 방식으로 만나왔던 것은 아니었을지... 이 느낌은 안타깝게도 그 때 이후로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다시 돌아가, “레비-스트로스는 ‘내가 쓴다’는 의식도 없고, ‘써야 할 무엇’도 따로 지정하지 않는 글을 기획 했”(같은 책, 56쪽)다고 한다. 그의 글쓰기 방식을 보며 ‘자아’를 고집하지 않고 자신만의 편견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으려는 노력이 느껴진다. 결국 20년의 침묵을 깬 그의 글쓰기는 자신을 비우는 그러면서도 온 만물과 소통하려는 시도가 아니었을까? 요가하며 만난 ‘나’로부터 벗어나는 시간이 레비-스트로스의 글쓰기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잠깐 동안의 ‘나’를 떠나는 자유를 맛보았기에 이제는 좀 더 논리적인 방식으로 사람들과 소통, 나아가 만물과의 연결을 꾀하는 방법을 연구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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