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쓰기’는 ‘잘 읽기’부터
표현의 역량
생각해 보건대, 많은 사람들이 ‘글을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글’을 잘 쓰면 뭐가 좋을까?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러한 마음의 근저에는 ‘표현의 역량’에 대한 욕망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럼 ‘표현의 역량’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어떤 생각이나 정서 또는 자신과 작용한 사건, 사물의 상태 등을 ‘원하는 대로’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렇게만 써놓으면 이 역량은 ‘묘사력’과 같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오해해서는 안 된다. ‘표현의 역량’은 그보다는 좀 더 심층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단순한 기술 같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표현의 역량’은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글’을 쓰는 중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때 우리는 ‘표현하고자 하는 것’과 ‘표현된 것’ 사이를 수없이 왕복한다. 그러는 중에 이미 표현된 것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고, 대체된 것을 다른 표현된 것들을 통해 고정한다. 이와 같은 표현-운동이 말해주는 것은 글을 쓰는 나의 의식이 모종의 제약 속에 있다는 점이다. 흔히 언급되는 ‘물 흐르듯 쓴 글’이라는 표현은 그러한 ‘제약’을 최대치로 극복해낸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원리상 그러한 제약은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 그렇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에 가깝게,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표현되어야 할 것’과 ‘표현된 것 사이’를 왕복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어째서 우리는 ‘글’을 생산할 때 제약되는 것인가? ‘표현’과 관련된 새로운 항이 여기서 출현한다. 그것은 ‘표현하고 싶은 것’이라는 항이다. 앞의 두 항이 필연적으로 어긋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 번째 항, ‘표현하고 싶은 것’ 역시 다른 두 항과 어긋남의 필연성을 갖는다. 뿐만 아니라 이 항은 쓰는 자의 ‘욕망’과 더욱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 큰 위험이다. 왜냐하면 단일한 성분을 가진 욕망은 있을 수 없으며, 있다 해도 그것이 향하는 방향은 매 순간 달라지기 때문이다. 욕망은 언제나 복합적이며, 언제나 이동한다. 반대로 글의 평면은 욕망에 일정한 형식과 방향, 속도를 요구한다. 요약하자면, ‘표현하고 싶은 것’은 ‘표현되어야 할 것’의 지배를 받고 싶지 않으며, 반대로 ‘표현되어야 할 것’은 ‘표현하고 싶은 것’을 지배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미 ‘표현된 것’은 자신의 상태에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글을 쓰는 자는 각 항들 사이의 싸움 안에서 자유를 상실한다. 따라서 ‘표현의 역량’은 ‘욕망’과 ‘표현’을 얼마나 일치시키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더 자유로운 사람은 더 잘 쓰는 사람이다. 더 잘 쓰는 사람은 사는 것과 쓰는 것이 한없이 가까운 사람이다.
감응의 역량
놀랍게도, 우리는 글을 잘 쓰고 싶어 하는 만큼 잘 읽고 싶어 하지 않는다. 여기서 벌써 모종의 불일치가 발생한다. 그렇다는 것은 원하는 것과 하고 있는 것이 전혀 결합되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잘 읽지 않으면 잘 쓸 수 없다. 그런데, ‘잘 읽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잘 결합한다’는 말과 같다. ‘잘 결합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잘 감응한다’는 말이다. ‘물 흐르듯 읽힌다’는 말은 ‘흐르는 물을 오래도록 볼 수 있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물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때의 ‘읽기’는 존재론적이다. 말하자면 ‘감응’은 ‘나’를 바꾼다.
다시, ‘나를 바꾼다’는 건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려면 ‘나’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나’는 항상 무언가를 ‘한다’. 이를테면 그것은 ‘먹는다’, ‘입는다’, ‘산다’, ‘걷는다’, ‘노래 부른다’, ‘뛴다’, ‘탄다’, ‘쓴다’, ‘듣는다’……‘잔다’……‘죽는다’. 그러니까 그것은 가장 수동적으로 보이는 순간에도 무언가를 ‘한다’. ‘나’는 동사적이다. 즉, ‘나’는 나의 ‘욕망들’이다. 말하자면 ‘나’가 있고, 그것이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들이 나를 이룬다. 그렇다면, ‘나’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하는 일을 바꾸면 된다. 그러면 그건 또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목적어’를 바꾸면 된다. ‘목적어’란 그것이 ‘만나는 것들’이다. ‘만나는 것들’이란 어떤 것들인가?, 하고 물을 것 같지만, 거기까지 가진 않겠다. ^^ 여하간, ‘감응’하는 것들을 바꿔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들과 더 잘 감응할수록, ‘나’라는 동사는 더 큰 폭으로 변조된다.
‘읽기’는 그와 같은 ‘감응’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물론 우리는 텍스트 외에 다른 여러 사물들과도 감응의 관계를 맺는다. 가령, 지금 이렇게 모여서 함께 공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도 감응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을 듣거나, 산책을 하거나, 음식을 먹거나 등등.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행동들 속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과 감응적 관계를 맺는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미 뚫려있는 회로다. 예를 들어 높은 산이 있다고 하자. 아무 훈련 없이 한 번에 거길 오르려면 당연하게도 엄청나게 힘들 것이다. 어쩌면 얼마 못 가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건 나의 보행이 비포장 경사면과 감응하는데 무능력하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다. 그렇기 때문에 산에 오르고 싶다면 지속적인 훈련을 통해서 감응력을 높이면 된다. 그러다가 스스로 ‘산’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등산 외에 다른 예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가령 이른바 ‘민감한 부분’이라고 표현되는, 내가 유난히 화를 참지 못하겠는 상황도 똑같이 해석될 수 있다. 유난히 소화를 못시키는 음식도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감응력’으로 내 역량의 거의 모든 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런 중에 ‘읽기’가 그런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도 조금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언제나 ‘해석’과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또는 ‘내가 왜 이러는 거지?’ 같은 도처에서 나를 엄습해오는 한계들 속에서 솟아오르는 질문들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이때 필요한 것이 ‘해석’이다. 이것은 우리의 생각과 정서가 극도로 언어적이기 때문에 언어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말과 글’로 ‘해석’이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필요한, 그 ‘언어’와 감응하는 것, 그것이 ‘읽기’다.
‘감응’은 어떻게 ‘표현’과 관계되는가?
앞서 잘 쓰려면 잘 읽어야 한다고 했다. 당연한 말 같지만, 그것을 ‘표현’과 ‘감응’의 관계 속에서 다시 생각해 보자. 우리가 쓴 글의 대부분은 내가 쓰고 싶었던 어떤 것과 ‘거리’가 있다. 그러니까 거기엔 ‘표현’을 둘러싸고 ‘쓰려는 대상-쓰여진 글-쓰는 사람의 욕망’이라는 삼중의 불일치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감응’이다. 쓰려는 대상과, 나의 욕망, 내가 쓴 글과 나가 서로 감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에서 ‘감응’과 ‘표현’ 사이의 긴밀한 관련이 발견된다. 내가 어떤 것과 감응하고 있는 사이에 나는 나와 감응 중인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면 어떨까? 그러니까 누군가가 나에게 아무 이유 없이 화를 낼 때 나도 화가 난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감응 중인 그 ‘화’가 되고 있는 것이다. 더 멀리 가보자면 내가 ‘귤’에 관한 글을 읽고 있는 동안에 나는 어느 정도는 귤이 되고 있다는 말이다. 내가 직접 ‘귤’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면 어떨까? 읽을 때보다 더 귤이 되고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감응과 표현은 하나에 대한 다른 두 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잘 쓰려면 잘 읽어야 하고, 잘 읽으려면 잘 써야 한다. 잘 감응하면 잘 표현하게 되고, 잘 표현한다는 건 잘 감응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 모든 면은 마치 잘 구축된 기계장치와 같아서 어느 한 곳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모든 기능에 이상이 생긴다. 반대로 어느 한 부분이 원활하게 작동한다면 모든 부분의 기능이 원활해진다. 시작은 ‘잘’ 읽는 것이다!
글_정승연(문탁넷 회원, 『세미나책』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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