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사유하기 좋은 시기
그런 점에서 사문유관은 하나의 사건이다. 결정적 변곡점으로서의 사건. 그동안 잠재태로만 흘러다니던 내면의 파동이 어떤 마주침에 의해 문득! 아주 명료한 현실태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젠 돌이킬 수 없다. 그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길은 끊어졌다. 그리고 이 사건은 청년이라는 신체적 조건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 무릇 청춘이란 본디 실존적 질문에 휩싸이는 시기다. 왠 줄 아는가? 에너지와 기운이 넘쳐서다. 질문을 하는 데도, 방황을 하는 데도 체력이 필요하다. 그저 추상적인 사고만으론 절대 불가능하다. 집요해야 하고 끈질겨야 하고 긴장감이 넘쳐야 한다. 즉, 신체적 활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앞의 스토리에 나오는 활쏘기 무공을 환기해 보라. 저런 에너지라면, 저 에너지가 활이 아니라 내면으로 향한다면, 에로스적 열락이 아니라 삶에 대한 질문으로 향한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엄청난 사유의 공간이 폭발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청춘이라는 시점이 중요하다. 중년이 되고 장년이 될수록 우리는 이 질문으로부터 멀어진다. 무엇보다 체력이 떨어져서다. 질문을 붙들고 내면의 심해를 자맥질할 여력이 없어서다. 체력은 떨어지는데, 가족적 책무, 직장 스트레스, 노후대책 등의 그물망은 더 촘촘히 조여 온다. 늘 쫓기며 살아간다. 체력은 없지 시간은 쪼들리지 결국 모른 척, 아닌 척하면서 치워 버린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늙음이 코앞에 와 있고, 죽음이 목전에 당도해 있다. 결국 다시 윤회의 ‘파도타기’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청년 붓다』, <청춘의 교만은 산산이 부서지고>, 121쪽-122쪽
“청춘이란 본디 실존적 질문에 휩싸이는 시기다.” 정말 그런 것 같다. 문득, 대학교 4학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기숙사에서 친구와 이력서를 쓰던 중, 친구에게 물었다.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모르는데 그냥 아무 회사에나 지원해야 하는 거야?” 옆에 있는 친구가 말했다. “일단, 너무 복잡하니까 그냥 하자~” 사실 나 또한 딱히 어떤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렇게 여느 취준생처럼 취업을 위한 토익 점수를 따고 각종 자격증을 챙겨서 정부 기관 계약직 연구원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력서를 쓰면서 생각났던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것으로 업을 삼을 수는 없는지’와 같은 의문들은 어쩌면 저자가 말하는 “실존적인 질문”들이 아니었을까? 결국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또 무엇이 내게 중요한 가치인지에 대한 고민은 곧 나의 존재성과 연결되는 문제일 테니 말이다. 그렇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20대 청춘들은 실존적 질문들을 끝까지 붙잡지 못하고 넘치는 에너지를 오로지 취직 준비를 하며 지낸 것이 아니었을지.
한두 번 내면에서 올라오는 소리를 스스로 무시하다 보면, 그다음부터는 자연스럽게 더 이상 질문하지 않게 된다. 너무나 당연하다. 뚜렷한 대책은 보이지 않고 머릿속만 복잡해질 뿐, 그저 남들이 하는 대로 하는 것이 일단 당장은 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런 내면의 소리들, 곧 실존적 질문들이 영원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해결되지 않는 의문들은 박노해 시인이 ‘건너뛴 삶’이라는 시에서 말하듯 “담요에 싸서 버리고 떠난 핏덩이처럼” 되돌아올 뿐이기 때문이다.
생과 사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붓다처럼 그렇게 늘 무거운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삶과 관련된 부분에 있어서 이제 더는 모른 척하고 싶지 않다. 일상에서 드는 소소한 의문이나 내 습관과 관련된 부분, 또 남편과 부딪치는 작은 사건까지도 하나하나 해결해서 나만의 철학을 만들어 내고 싶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인문학 공부를 하고 있는 지금, 어떻게 방황하고 질문해야하는 지에 대해 배우고 있는 과정인 것 같기도 하다. 일상에서 떠오르는 너무나 사소한 문제일지라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고민한다는 면에서 붓다가 넘고자 하는 생과 사, 탐욕 등등의 실존적인 질문들과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만은 없을 듯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나는 아직 젊고, 반백수^^(비정규직)이므로 고민할 시간은 충분히 많다는 거다. 하루라도 젊을 때, 사유하자. 청춘은 출가하기 딱 좋은 시기라는 저자의 말을 빌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청춘이야말로 사유하기 딱 좋은 나이라고!
'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 > 씨앗문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위트 홈’이라는 환상 (0) | 2022.10.17 |
---|---|
‘자기’로부터 벗어나기 (0) | 2022.09.13 |
‘잘 쓰기’는 ‘잘 읽기’부터 (0) | 2022.08.16 |
정화스님, 『나와 가족 그리고 가까운 이들을 그냥 좋아하기』 ‘기대’하는 습관 내려놓기 (0) | 2022.06.10 |
감각하는 행위와 글쓰기 (0) | 2022.05.18 |
오창희, 『아파서 살았다』- “자기 결정권”에 대하여 (0) | 2022.04.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