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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동물병원에 갑니다

[지금동물병원에갑니다] 슬기로운 동거생활─아무것도 베풀지 않는 관계(上)

by 북드라망 2022. 8. 24.


3편. 동거-동물의 기원을 찾아서(上)

 


다르게 ‘함께’ 살고 싶다
‘여우와 두루미’라는 이솝 우화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 여우가 두루미를 자신의 식사에 초대했다. 여우는 자신이 평소에 먹던 넓적한 접시를 내왔는데 부리가 긴 두루미는 그것을 먹을 수 없었다. 이 일로 앙심을 품은 두루미는 여우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그다음은 대략 짐작이 갈 것이다. 두루미는 자신이 먹기 편한 목이 긴 호리병에 식사를 담아 내놨고 주둥이가 짧은 여우는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아무리 호의를 베푼다 한들 상대의 처지를 고려하지 못한다면 말짱 도루묵이란 얘기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러 ‘여우와 두루미’ 얘기는 다큐멘터리가 되어 온갖 가정 내에서 펼쳐지고 있다. 제목을 바꾸자면, ‘호모 사피엔스와 동거-동물’ 정도가 될 터다. 호모 사피엔스는 개나 고양이를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온갖 선의를 베푼다. 개나 고양이 역시 인간에게 상당한 앙심을 품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동거-동물들에겐 두루미처럼 인간에게 앙갚음할 기회가 없다. 인간의 초대는 끝날 기미가 없고, 동거-동물의 집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지난번의 글에서 우리는 어떻게 동거-동물을 향한 동거-인간의 사랑이 동거-동물을 아프게 만드는지를 보았다. 동거-인간이 원했던 건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받아줄 수 있는 존재,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반려자였다. 인간은 자신이 받고 싶었던 사랑, 자신이 누리고 싶었던 보살핌을 동거-동물들에게 쏟아부었다. 동거-동물들이 그 사랑을 전부 받아낼 수 없다는 것은 알지 못한 채!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인간이 주는 지나친 간식 때문에 배탈이 나 병원을 찾아오던가? 이제 인간은 사랑 때문에 아픈 동거-동물을 앞에 두고 고민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동물들이 건강하게 인간과 살아갈 수 있을까? 사랑을 쏟아붓는 것 외에 동거-동물과 다르게 관계 맺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러다 보니 궁금해졌다. 과거의 호모 사피엔스는 동물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었을지. 보다 자연에 가깝게 생활했던 그들은 어떻게 동물과 함께 살아갔던 걸까?

 



받는 자로서의 인간─바깥에서 오는 힘
인간과 처음으로 함께 살기 시작한 동물은 개였다. 개가 최초로 가축이 되기 시작한 데에는 여러 가설들이 있는데, 그중 가장 주류적인 가설은 이렇다. 신석기 시대가 태동할 즈음인 1만 5천여 년 전, 야생의 늑대가 인간이 남긴 쓰레기를 먹기 시작하면서 둘의 관계는 시작되었다. 야생의 늑대는 인간에게 의존하면서 음식을 얻었고, 인간은 보다 인간에게 우호적인 늑대를 선택적으로 교배시켰다. 그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바로 지금의 개다. 꽤나 오래전의 일이지만 구도 자체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먹이를 주는 인간과 그 먹이에 의존하는 늑대. 1만 5천여 년 전에도 인간에게 의존하는 동물이란 구도는 변한 적이 없었단 말인가?

그러나 여기 흥미로운 얘기가 있다. ‘늑대가 인간이 남긴 쓰레기를 뒤지다가 인간에게 길들여졌다’라는 가설을 생태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실제로는 허점투성이라는 거다. 첫째로 늑대는 죽은 동물을 먹지 않는다. 늑대가 죽은 동물을 먹는 경우는 굶어 죽기 직전이거나,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과정에서 우연히 다른 동물이 사냥한 시체를 발견했을 때뿐이다. 늑대가 쓰레기를 뒤져 음식을 먹는 일이 벌어졌다 하더라도, 그건 늑대가 배를 채우는 아주 부분적인 방법에 지나지 않았단 소리다. 둘째로 인간이 동물의 고기를 쓰레기로 내버렸다는 내용 역시 의심스럽다. 인간 종족은 100만 년 전부터 도구를 사용해 고기를 깨끗하게 발라내는 데 매우 특화된 동물이었다. 농경이 시작되고 난 1만 년 전이라면 모를까, 그보다 훨씬 전에 그런 인간 무리에서 늑대를 끌어들일 만큼의 고기 쓰레기가 나왔으리라고는 추측하기 어렵다.

 


결국 늑대와 인간에 대한 생태학적 자료는 현실적으로 늑대가 인간에게 의존할 어떤 이유도 없다는 사실을 대변한다. 그렇다면 늑대와 인간의 관계는 어떻게 처음 맺어졌을까? 진화생태학자 레이먼드 피에로티와 브랜디 R. 포그는 원주민들의 이야기 속에서 그 단서를 찾는다.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늑대와의 관계는 사냥으로 묶인 협력 관계였다. 오늘날 사냥꾼들이 사냥하러 가는 데 개를 동반하는 것처럼, 원주민들 역시 늑대와 함께 사냥에 나섰다. 하지만 원주민들이 늑대를 대했던 방식은 오늘날 개를 이용하는 사냥꾼의 입장과는 매우 달랐다. 놀랍게도 이때 사냥을 주도했던 건 인간이 아닌 늑대 쪽이었다. 원주민들에게 늑대는 사냥의 도구가 아니라 그들에게 사냥을 가르치는 스승이었던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출현해 북방으로 진출했던 인간은, 본래 북방 곳곳에서 생활하던 늑대들에 비하면 사냥꾼 초짜에 가까웠다. 하여 초기의 인간은 늑대 무리가 이용한 방법을 흉내 내면서 사냥 기술을 배웠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원주민들이 늑대의 움직임을 겉으로 보고 따라한 것이라 말하기엔 뭔가 부족한 감이 있어 보인다. 원주민들은 늑대처럼 행동하기 위해 그들 스스로가 직접 늑대가 ‘되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늑대의 방식을 배웠다. 자신들이 존재하는 현실을 늑대들이 이해했기 때문이다. 예리한 후각, 날카로운 시각, 그리고 강한 턱을 가진 늑대는 최고의 사냥꾼이었다. 이런 것들은 가공할 무기였지만, 최초의 부족들은 이 무기가 지구력‧참을성‧인내심 없이는 거의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런 특징들은 늑대의 무기보다 더 중요했으며, 최초의 부족들이 자신들을 위해 스스로 키울 수 있는 능력이었다”. (레이먼드 피에로티, 브랜디 R. 포그, 『최초의 가축, 그러나 개는 늑대다』, 뿌리와이파리, p.224)


원주민들에게 늑대가 ‘된다’는 건 행동거지뿐만 아니라 마음가짐 역시 늑대와 다르지 않게 되는 걸 의미했다. 원주민들은 동물이 인간과 별개의 존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직접 동물이 ‘됨’으로써 얼마든지 동물의 힘에 접근할 수 있다고 여겼다. 원주민들의 늑대에 대한 존경은 늑대가 지닌 삶의 태도를 끊임없이 갈고 닦는 것이기도 했다. 사냥 후 잡은 사냥감은 인간에 의해 깨끗이 해체되었고 협력한 늑대를 위한 고기는 따로 남겨졌다. 이는 늑대를 길들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냥을 가르쳐준 늑대에게 존경심을 보여주는 방법이었다. 베풂은 늘 인간이 아닌 늑대 쪽에서 먼저 왔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인간이 동물에게 늘상 무언가를 베푼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동물을 집에 들일 때도, 먹이를 줄 때도, 놀이를 할 때도 주도권을 쥐고 있는 존재는 전부 인간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동물에게서 그 보답을 구했다. 내가 이만큼 해주었으니 너 역시 어떤 방식으로든 내게 보상을 줘야 한다는 심리다. 그렇게 인간은 무의식중에 자신을 ‘가진 자’의 위치에 가져다 놓는다. 그러나 현생 인류가 갓 생겨났을 그 무렵, 인간은 보잘것없는 한 마리 동물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다만 인간에게 한 가지 이례적인 면이 있었다면, 그것은 자신의 가까운 사회집단 너머 아주 이질적인 존재들로부터도 기꺼이 배울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처럼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받는 자’의 위치에 서 있었다.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동거-동물은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활력을 주고, 새로운 관계를 가져다주고, 책임감을 지니게 해주던가? 하여 동물에게 보답해야 하는 건 오히려 인간 쪽이다. 동물에게 베풂을 되갚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건, 얼마나 기쁜 일인가^^?

 

 

글_박소담(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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