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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동물병원에 갑니다

[지금동물병원에갑니다] 4편. 동거-동물의 질병과 치료(下)치료를 돌려드립니다(下)

by 북드라망 2022. 11. 17.

4편. 동거-동물의 질병과 치료(下)

치료를 돌려드립니다(下)

 

연명이란 이름의 고통
대증치료라는 말이 있다. 대증(對症), 즉 증상에 대응하여 처치를 하는 치료법을 말하는데, 예를 들어 구토를 하는 환자에게 항구토제를 투여한다거나, 열이 나는 환자에게 해열제를 주는 등이 여기에 속한다. 요컨대 증상과 반대되는 처치를 함으로써 몸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길 기대한다는 거다. 이는 때로 효과적일 때도 있다. 하지만 보다 의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여러 검사를 통해 병의 원인을 파악하고 그 원인을 해결하려고 한다. 질병의 원인에 대해서 생각지 않은 채 증상만을 없애는 대증치료는 지나치게 근시안적인 접근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러나 설령 그 원인을 파악하더라도 아무도 치료할 수 없는 원인 또한 있다. 바로 노화다. 동물이 인간의 도시 생활에 동참하게 되면서 동물의 수명은 늘어났지만, 고령화로 인한 질병 역시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나이가 많은 동물들은 인간처럼 심장이나 신장이 안 좋아진다거나, 연골에 문제가 생긴다거나, 심지어는 암에도 흔히 걸린다. 고령화에 대처하는 치료들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어떤 치료나 예방이라도 노화라는 근본 원인을 없애버릴 순 없다. 노화에 맞서는 의학이란 결과적으로 대증치료가 될 수밖에 없다.

 

 


생명은 태어나서 나이를 먹고 병에 걸려 죽음에 이른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생로병사의 스텝을 밟아나간다는 건 하나도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생명을 살려내야 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는 병원에서랴. 동물병원을 찾아오는 동거-인간들도, 동물병원에 있는 치료-인간들도 죽어가는 동물들을 향해 하나라도 뭘 더 해주기 위해 애를 쓰지, 질병이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는 쉽게 생각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동물을 포기한다는 말에 지나지 않으니까. 병원이란 최선을 다해 생명을 살리는 곳이지 버리는 곳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생명이 당연히 스러져 가는 것이라면,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면 동물이 어떻게 마지막을 맞이할지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했다. 죽음이 임박한 동물에게 끝없는 치료는 오히려 동물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던 밥을 먹지 않는 동물의 사례를 보자. 동물들이 밥을 먹지 않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신장이 안 좋은 경우다. 신장 기능이 떨어지면 몸속에 노폐물이 배설되지 못하고 쌓이면서 몸에 이상을 일으키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음식물을 계속 섭취한다면 어떻게 될까? 배설되지 않는 노폐물은 더더욱 몸속에 쌓이게 되니 당연히 몸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많은 신부전(신장의 기능 부전) 환자들이 밥을 먹지 않는 증상을 보인다. 음식을 끊음으로써 스스로 고통을 최대한 완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부전 치료가 시작되면 수액을 맞춰 노폐물을 희석시키고 배설을 유도하는 등, 신부전에 대한 대증치료가 이뤄지는 동시에 밥을 먹이기 위한 온갖 시도가 벌어진다. 입으로 강제로 음식을 넣는 것부터 해서 식욕촉진제를 먹이는 건 기본이요, 튜브를 꽂는다거나 식도나 위에 구멍을 뚫어 영양분을 공급하기도 한다. 계속 치료를 진행하다 보면 다시 스스로 밥을 먹기 시작할 때도 있다. 한번 망가진 신장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지만, 치료를 통해 조금이나마 목숨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신부전 치료는 매우 지난한 과정이다. 금전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인간이 상당한 신경을 쓰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요즘에는 동물에게 이 정도의 신경을 쓰려는 동거-인간들이 많아지고 있다. 어떻게든 동거-동물을 치료하려 애쓰는 동거-인간들을 보면 동물을 향한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가 매번 느껴진다. 그래서 치료-인간으로서도 동거-인간을 도와 조금이나마 동물들이 활력을 되찾기를 빌게 된다. 제발 한 숟가락이라도 스스로 먹었으면, 조금이나마 수치가 나아졌으면, 하고 함께 응원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간절함 속에서 인간들은 늘 잊게 된다. 이 동물이 지금 죽어가고 있고, 그 죽음을 계속해서 연장하는 데에서 동물이 오히려 고통스러울 수 있음을.

 



동물의 죽음을 곁에서 보고 있는 인간들은 괴롭다. 그러나 동물 역시 죽음에 대해 똑같이 느낄까? 이전에 어느 책에서 죽기 직전의 신체는 오히려 고통과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얘길 들었다. 패혈증이나 과다 출혈로 인한 쇼크 상태에 처하면, 몸에서는 진통 효과가 있는 엔도르핀의 농도가 올라가게 되고 이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몸이 죽음의 고통을 피해가는 기전을 장착하고 있다는 것도 놀랐지만, 무엇보다 한 번도 죽어가는 신체의 느낌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았음에 더욱 놀랐다. 죽음은 늘 두려운 것이라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겪어가는 신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에 대해 나는 너무 무지했다. 동물 치료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들은 모두 동물을 걱정하지만 동물이 더욱 오래 살 수 있는지 아닌지를 볼 뿐, 동물이 치료 중에 겪는 고통─동물이 먹기 싫은 음식을 억지로 먹으면서 겪는 고통─은 쉽게 간과한다. 동물을 위해서가 아니라, 동물이 고통스럽더라도 인간을 위해 좀더 오래 살아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사태는 보다 간단하다. 동물이 밥을 먹지 않는 이유는 오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스럽지 않기 위해서다. 하여 노령인 동물이 돌이킬 수 없는 노화를 맞닥뜨렸다면 마땅히 동물 스스로가 고통스럽지 않은 쪽으로 치료를 중단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밥을 먹고 먹지 않고를 결정하는 동물의 행동은 존중되어야 하며, 이를 존중할 수 있었을 때에 인간 또한 보다 편안히 동물을 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글_박소담(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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