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무기력한 치료-인간(下)
대칭성, 거대한 흐름 속 ‘생명’
그렇다면 어떻게 제3의 길을 뚫을 것인가? 내가 치료-인간으로써 느끼는 무기력이란 인간이 타 동물과 맺는 관계에 대한 상상력의 결핍에서 왔다. 인간이 타 동물들을 관리하는 것 외에 다른 방식으로 동물들과 관계 맺는 방법은 없을까?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마땅한 대답이 보이지 않는다면 시간 여행이라도 해야 한다. 그래서 아주 멀리까지 가 봤다. 한 3만 년 정도? 구석기를 사용하던 3만 년 전의 호모 사피엔스는 비록 문자를 통해 기록을 남기진 않았지만, 그들의 철학을 담은 신화만은 구전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선사 시대 신화를 인류 최고(最古)의 철학이라고 하며, 신화를 통해 당시 인간은 여타 생명체들과의 관계에서 ‘대칭성’을 유지하려 애썼다고 한다.
이때 등장하는 ‘대칭성’이란 우리가 동거-동물을 ‘인간처럼’ 치료하면서 ‘평등하게’ 대하고 있다고 여기는 믿음과는 거리가 멀다. 신화 속 동물들을 보자. 그들은 인간이 잡아먹는 야생 염소이거나 인간을 잡아먹는 곰이었다. 당시 인간과 동물은 서로를 치료해주긴커녕 서로 먹고 먹히기 바빴고, 여기에는 어떤 타협의 여지도 없다. 인간은 온갖 머리를 써서 야생 염소를 잡기 위해 애썼고, 야생 염소들 역시 섬세한 감각을 이용해 필사적으로 인간에게서 도망쳤다. 곰과의 관계는 더욱 말할 것도 없다. 인간은 때로 곰을 사냥하기도, 곰에게 사냥당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우리가 동거-동물에게 기대하는 가족 같은 친근함이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서로가 먹고 먹히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다면, 동물을 배려한다는 건 불가능하지 않나? 한데 신기하다. 선사 시대 인류는 오히려 이런 적대적인 관계 속에서 ‘대칭성’을 말했으니 말이다.
나카자와 신이치의 『대칭성 인류학』에서 소개되는 야생 염소 신화를 하나 살펴보자. 어느 젊고 유망한 사냥꾼이 한 명 있었다. 사냥꾼이 숲으로 사냥을 간 어느 날, 그는 한 여자를 따라 동굴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는 여러 숫염소와 암염소들이 대가족을 이뤄 살아가고 있었다. 사냥꾼이 만난 여자는 털가죽을 벗은 야생 염소였던 것이다. 사냥꾼은 그 동굴에서 스스로 직접 야생 염소가 되어 야생 염소들의 생활에 대해 배우고 모든 암염소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염소들의 생활을 깊이 체험한 사냥꾼이 나중에 인간 사회에 돌아가게 되었을 때, 그의 부인인 암염소는 그에게 말한다. 야생 염소를 사냥할 때는 그들이 모두 인간이란 사실을 잊지 말고 사체에 경의를 표하며, 모든 암염소와 그 새끼들은 당신의 부인과 아이들이니 사냥하지 말고 처남인 숫염소만을 사냥하라고 말이다. 또한 숫염소들을 표면적으로 죽이더라도 그들의 인간 부분은 동굴로 돌아오게 되니 미안한 마음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야생 염소와 인간이 구분 없이 서로를 넘나드는 세계, 심지어는 죽음마저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 얼핏 듣기론 허무맹랑한 상상이지만, 나카자와 신이치는 먹음과 먹힘, 죽음과 삶을 이어주는 대칭적인 사고야말로 인간 문화의 근저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야생 암염소가 사냥꾼을 대하는 태도에서 대칭성의 지혜가 빛을 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엔 야생 염소들을 사냥하게 될 사냥꾼을, 암염소는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염소들의 생태에 대해 가르친다. 암염소는 가족이기 때문에 자신들을 사냥하지 말라고는 부탁하지 않는다. 한 동물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동물의 먹힘이 있어야 하고,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그 먹고 먹힘의 거대한 생명 고리를 이루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야생 염소와 인간의 관계는 좁게 보면 포식당하는 자와 포식자의 관계이지만, 거대한 생명 고리 안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생명’이다. 먹지 않고 존재하는 생명이란 없고 먹히지 않고 존재하는 생명이란 없기에. 모든 동물의 먹고 먹힘 전체가 하나의 큰 ‘생명’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대칭성의 시선 속에서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삶과 죽음을 발견한다. 염소의 죽음이되 사냥꾼의 삶이 되는 죽음. 사냥꾼의 삶이되 염소의 죽음 위에 선 삶. 이는 삶은 좋은 것이요, 죽음은 나쁜 것이라는 이분법의 도상을 완전히 날려버린다. 개인의 안위를 넘어 더 넓은 ‘생명’을 사유할 수 있는 힘. 사냥꾼이 염소의 사체를 경의를 담아 다룰 때 그들은 분명 그 넓은 ‘생명’과 접속하는 충만함을 느끼고 있었으리라.
사냥꾼은 분명 스스로가 염소를 죽이는 비대칭적인 입장에 서 있었지만, 사냥의 윤리를 세움으로써 인간과 야생 염소를 넘나드는 대칭성의 세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 야생 염소를 사냥하는 일은 오히려 인간이 거대한 ‘생명’과 접속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되었던 것이다. 이때 느껴지는 충만함이란 겉으로는 얼마든지 동거-동물의 생명을 살리는 치료-인간의 치료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던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문득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치료’란 생명을 살리고 죽이는 것과 무관하게 비대칭적인 현실 위에서 대칭성을 회복하는 데 있지 않을까? 타 동물을 관리하는 인간에 머물지 않고 동등한 동물로서 지구를 살아가는 수많은 다른 생명들과 연결될 수 있는 지혜를 갖는 것. 무기력하지 않은 동물 ‘치료’학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치료’-인간, 배움의 기쁨을 알다
나는 치료-인간으로서 인간들과 함께 사는 동거-동물들의 신체를 관리하는 일을 한다. 나는 그것으로 돈을 벌어 살아가고, 이는 분명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아마 앞으로도 내가 치료-인간으로서 배우는 기술이란 동거-동물에 대한 관리 능력일 것이다. 하지만 막상 동물병원에서 인간의 관리란 그리 수월하게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치료-인간은 매번 인간의 관리가 실패하는 지점과 마주한다. 인간이 바라지 않는 동거-동물의 질병과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동거-동물의 신체를 완벽히 관리하고자 하는 치료-인간에겐 뼈아픈 실패의 경험이겠지만, 한편으로 나는 그 속에서 ‘대칭성 치료학’에 접근할 수 있는 힌트를 얻는다.
앞서 얘기했던 집 강아지와 길고양이의 관리만 해도 그렇다. 치료-인간의 일을 계속하는 이상 나는 동거-동물의 목숨을 필사적으로 살리면서도 길고양이의 목숨을 내버리는 일을 몇 번이고 다시 마주하게 될지 모른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그렇게 열심히 인간들이 길고양이의 숫자를 관리하려고 한들, TNR하는 길고양이의 수는 그다지 줄어들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고양이들이 동물병원에 들어왔다 나가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TNR을 할 고양이들이 잡힌다는 건 정말이지 감탄스러운 일이다! 반면 빈틈없이 중성화 수술로 관리되며 선택적으로 교배하는 집 강아지들을 보라. 눈 깜박할 새 새끼들이 늘어나는 길고양이들에 비해 한 번의 출산도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고생이다. 좀 줄었으면 하는 데선 넘쳐나서 문제, 좀 낳았으면 하는 데선 모자라서 문제인데, 치료-인간이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건 바로 이런 관리 실패의 현장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치료-인간은 동거-동물을 계속해서 인간의 관리 하에 두려는 동시에 결코 관리될 수 없는 ‘생명’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 ‘생명’은 마치 이렇게 얘기하는 것만 같다. 삶과 죽음이란, 건강과 아픔이란 지금의 호모 사피엔스가 바라는 대로 절대 흘러가지 않는다고, 너희들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관리가 얼마나 반‘생명’적인지를 깨달아야 한다고. 실제로도 명백하지 않은가. 온갖 갖은 케어를 다 받음에도 아픈 동거-동물과,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도 건강하게 자라나는 고양이들이라니. 현대의 인간은 결코 ‘생명’을 단 한 번도 손에 넣은 적이 없다. 우리가 좋다고 생각했던 관리가 사실은 반‘생명’적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동시에 드넓은 생명력의 바다가 펼쳐지는 것을 느낀다. 그건 타 동물을 마주할 때 우리가 느끼는 생명력뿐만이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라는 동물 속에도 깊이 새겨져 있는 생명력이다. 우리가 이미 오래 전에 잃어버린 ‘생명’에 대해 동거-동물은 기꺼이 가르침을 아끼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로지 그 ‘생명’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뿐, 그저 배울 뿐!
이제 더 이상 동거-동물들의 병과 죽음에 대해 마냥 슬퍼하고 있지는 않으련다. 동거-동물은 오로지 관리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므로, 그들의 병과 죽음 역시 실패가 될 수 없다. 나는 그저 동거-동물을 치료하는 데 아등바등할 것이 아니라, 병과 죽음을 통해 그들과 나를 꿰뚫는 ‘생명’의 원리를 배우고자 한다. 가끔은 아직 동거-동물을 관리하는 실력도 없는 상황에서 관리의 실패에 주목한다는 게 스스로 우습기도 하지만, 결국엔 치료-인간의 관리 역시 근본적으로는 ‘생명’의 원리를 따라가야 하는 것이라 믿는다. 치료자란 치료를 베풀기 이전에 먼저 모든 생명에게서 가르침을 구하는 자임에 틀림없다.
매일 아침 출근길, 역에서 동물병원까지 걸어가는 5분 남짓한 구간을 나는 늘 조금씩 돌아서 간다. 원래는 노래를 듣거나 멍하게 산책하며 지나갔지만, 요새는 걸으면서 짧은 기도문을 여러 번 낭송하고 있다. (평소 공부하러 다니는 사이재 연구실 벽에 붙어 있던 달라이 라마의 기도문인데, 기도문에 등장하는 ‘사람’이란 말을 모두 ‘동물’로 바꾸니 딱 내 상황에서도 읽기 좋은 글이 되었더랬다) 출근하기 전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낭송을 하는 것뿐이라, 야생 염소의 생태를 면밀히 관찰해서 사냥의 윤리를 세웠던 선사 시대 사피엔스에 비하면 아직 미진한 감이 없진 않다(^^;). 역시 뭐든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기도문을 외우면서 느껴지는 기쁨, 나라는 인간을 모든 동물들과 대칭적인 위치에 둘 때 느껴지는 충만함만은 3만 년을 넘어 지금에까지 확실히 이어지고 있다. 내게 무기력을 가르쳐준 동물병원은 또 이렇게 내게 기쁨을 가르친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내가 동물병원에 가고 있나 보다.
동물을 만날 때마다 언제나 자신을 가장 미천한 동물로 여기고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상대방을 최고의 존재로 여기게 하소서
나쁜 성격을 갖고 죄와 고통에 억눌린 존재를 볼 때면
마치 귀한 보석을 발견한 것처럼 그들을 귀하게 여기게 하소서
다른 동물이 시기심으로 나를 욕하고 비난해도
나를 기쁜 마음으로 패배하게 하고 승리는 그들에게 주소서
내가 큰 희망을 갖고 도와준 동물이 나를 심하게 해칠 때
그를 최고의 스승으로 여기게 하소서
그리고 나로 하여금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모든 존재에게 도움과 행복을 줄 수 있게 하소서
남들이 알지 못하게 모든 존재의 불편함과 고통을 나로 하여금 떠맡게 하소서
(「달라이 라마의 기도문」, 달라이 라마, 출처 마음건강 길 / 저자 일부 수정)
글_박소담(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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