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동거생활─아무것도 베풀지 않는 관계(下)
3편. 동거-동물의 기원을 찾아서(下)
이야기하는 인간─있는 그대로 동물과 살다
과거의 인간들이 맺었던 동물과의 관계가 모두 늑대와 인간의 관계처럼 협력적인 모습을 띠는 것은 아니었다. 동물은 때로 살기 위해 서로를 잡아먹었고, 인간도 그 먹이사슬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인간을 위협하는 많은 야생동물이 사라진 지금에야 상상하기 어렵지만, 인간이 다른 동물에게 잡아먹히는 경우도 허다했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사는 한반도는 1세기 전만 해도 호랑이가 넘쳐나는 땅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벌인 호랑이 사냥으로 현재 한반도에서는 호랑이가 거의 멸종되었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호랑이에게 잡아 먹히는 게 지금의 교통사고 만큼이나 흔했다고 하니 얼마나 호랑이가 넘쳐났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반도의 조상들은 자신들을 잡아먹는 호랑이와 어떻게 관계 맺었을까? 당연히 자신들을 위협하는 대상이니 두렵게만 여기지 않았을까?
그런데 막상 호랑이에 대한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한반도는 호랑이가 많이 창궐했던 만큼 호랑이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이것이 호랑이라는 한 마리 동물에 관한 것이 맞냐 싶을 정도로 다양하다. 호랑이 설화들을 내용에 따라 간단히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보은형, 호식형 우둔형, 변신형.
② 착해서 은혜갚기형, 잔인해서 잡아먹기형, 어리석어 바보되기형, 스스로 변신하기형.
③ 신격형, 보은형, 호환형, 우둔형.
④ 효를 아는 호랑이, 호랑이의 자식 사랑, 은혜갚은 호랑이, 어리석은 호랑이, 신령으로 모셔지는 호랑이. (…)
(이어령 책임편집, 『십이지신 호랑이』, p.144 재인용)
이 중에서 인간이 호랑이를 두렵게 여긴 내용은 저 많은 분류들 가운데 ‘잔인해서 잡아먹기형’, ‘호환(호랑이에게 당하는 재난)형’ 두 가지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 얘기들을 살펴보자. 인간처럼 효를 행하거나 은혜를 갚는 호랑이도 있고, 다른 동물에게 쉽게 속는 어리석은 호랑이도 있고, 용맹하거나 신격화된 호랑이도 있다. 이쯤 되면 이 이야기들이 호랑이란 동물에 관한 것인지 굉장히 의심스럽다. 지금에 와서는 당시 인간들이 호랑이를 의인화하여 많은 이야기를 지어냈을 것이라 생각된다. 요컨대 이야기의 대부분이 인간들이 호랑이를 보고 지어낸 상상 속 이야기라는 것. 하지만 인간들은 왜 많은 동물들 중에서도 하필 호랑이를 저 많은 이야기들의 주인공으로 설정했을까? 호랑이는 정말 아무 이유 없이 이야기의 소재로만 사용되었던 것일까?
그런데 호랑이의 생태를 한번 살펴보자. 호랑이는 분명 먹이사슬의 최정상에 군림하는 포식자로 다른 온갖 동물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준다. 그러나 막상 그 호랑이의 사냥 현장을 살펴보면 생각보다 허당인 지점들이 눈에 띈다. 소심하다 싶을 정도로 신중한 호랑이의 사냥 성공률은 고작 20퍼센트(!)로, 첫 공격에 실패하면 대개는 재시도를 하지 않는다. 호랑이는 10미터 가량의 절벽도 단숨에 뛰어내릴 정도로 날쌔지만 “전력질주를 할 수 있는 거리는 300미터 정도로 생각보다 지구력이 약하다.”(앞과 같은 책, p.26) 그러다 보니 추격적에는 취약해서 번번한 사냥에 실패하여 열흘쯤 굶는 날도 허다하다고 한다. 백수의 왕인 호랑이의 의외로 짠내나는 현실이다. 확률적으로 본다면 사냥에 성공한 호랑이보다 사냥에 실패한 호랑이를 더 흔하게 보았을 법하다. 그러니 호랑이를 좀 멍청하게 보지 못할 건 또 뭐람. 또 호랑이가 주로 잡아먹는 동물은 사슴류와 멧돼지로, 가축과 인간을 잡아먹은 호랑이는 늙거나 병약한 경우였다. 그러다 보니 호랑이를 마주치더라도 살아 돌아오는 인간 역시 있었을 터고, 인간 입장에서는 호랑이가 어떤 기준으로 사냥감을 정하는지 궁금해졌을 만도 하다. 혹시 호랑이가 인간의 효심이나 도덕심을 꿰뚫어 보았던 건 아닐까? 이렇게 추측했을지도 모르는 일. 마지막으로 우리는 주변의 고양이들이 친한 인간에게 죽은 쥐 등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종종 목격하기도 하는데, 호랑이도 고양이과에 속하니 그런 경우가 없었으랴? 물론 마지막 얘기는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이다.(^^)
결국 호랑이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은 완전히 허무맹랑한 것들만은 아니었다. 당시 한반도에 전해지는 호랑이 이야기는 나름 호랑이의 생태를 기반으로 하는 것들이 많았다. 이야기 전부가 실제 벌어진 일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세상에 호랑이가 효를 안다는 걸 어떻게 증명한단 말인가?) 또 한편으론 완전히 거짓이라고도 말하기 어렵다. 완벽한 사실도, 허무맹랑한 상상도 아닌 ‘이야기’. 이처럼 이야기는 호랑이를 둘러싼 현실과 상상의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다면 호랑이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당시 인간들에게 대체 어떤 의미였던 걸까?
현대의 관점에서 완벽히 사실적인 호랑이란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다. 호랑이가 인간을 잡아먹는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나 명백하기 때문이다. 1세기 전 한반도에서도 분명 호랑이가 인간을 잡아먹는 사건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하지만 당시 인간들은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을 단순한 두려움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야기했다. 호랑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람을, 어떤 이유로, 어떻게 잡아먹었는지를. 호랑이가 인간을 잡아먹는다는 두려운 사건에 서사를 부여하고자 한 것이다. 그것이 현대의 과학적인 서사는 아니었을지언정, 한반도 인간들은 자신들이 가진 논리 전부를 사용하여 인간이 호랑이에게 잡아먹혔다는 무시무시한 사건을 어떤 식으로든 이해하려 했다. 조선시대는 유교 사회였으니, 효심이나 은혜와 같은 덕목으로 불행한 사건을 설명하려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선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설명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 사건을 인간의 논리 속에서 받아들일 수 있느냐다. 서사화된 사건은 이제 더 이상 막연한 두려움으로 남지는 않는다. 호랑이의 잔인함은 이야기와 함께 인간 속으로 녹아든다. 인간은 호랑이를 이야기함으로써 그 두려운 호랑이와도 공존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정신적 외상(트라우마)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연구한 의사가 있었다. 그는 정신적 외상을 겪고 있는 환자들의 뇌파를 조사한 결과, 그들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떠올릴 때마다 뇌에서 브로카 영역과의 연결이 끊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브로카 영역은 말하기를 담당하는 뇌 영역 중 하나로, 이 영역이 기능을 하지 못하면 생각과 기분을 말로 표현할 수 없게 된다. 요컨대 트라우마에 빠진 인간은 자신이 겪은 사건을 이야기화할 수 없다는 의미다. 이야기가 되지 못한 사건은 상처가 되고 고통이 된다. 반대로 말하자면 호랑이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인간들에게 호환은 그다지 큰 상처가 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야기 속에서 인간은 호랑이와 함께 울고 웃었다. 호랑이를 이다지도 해학적으로 그려낼 수 있었던 곳은 동아시아 문화권 중에서도 호랑이가 넘쳐났던 한반도뿐이었다. 가장 피해가 막심한 곳에서 풍성하게 피어나는 이야기들이라! 그렇게 풍성하게 만들어진 이야기들은 설령 호랑이가 거의 멸종한 지금에도 한반도에 사는 인간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현재 우리가 호랑이에 대해 품는 친근감은 오랜 시간을 거쳐 한반도 지역에 사는 사피엔스의 몸에 새겨진 문화적 코드일 터다.
현대의 인간은 객관적인 과학의 발전과 함께 이야기의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호랑이와 같은 야생동물은 인간을 잡아먹거나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존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요컨대 아주 단편적인 이야기 속에서만 동물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길들여진 동거-동물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동거-동물들이 얼마나 자신을 필요로 하는지, 그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자신에게 어떻게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지만을 확인한다. 동거-동물에 대한 수많은 글들은 굉장히 정형화된 레퍼토리를 따르고 있다. 동거-동물이 얼마나 인간을 사랑해주는지, 그들이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지, 동거-동물의 죽음이 동거-인간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등등. 그렇게 서로 다른 동거-동물을 보는데도 어쩜 이렇게 비슷한 얘기가 나올 수 있는지 놀라울 정도이다. 동물과의 관계가 고통이 되는 건 인간이 동물에게 뭘 더 해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 더이상 생성되지 않는 이야기 때문은 아닐까.
하여 이제 우리는 동물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기보다도 동물을 마주하면서 펼쳐지는 당혹함, 갈등들을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그건 분명 아름답게만 점철된 이야기는 분명 아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한들 결코 인간이 받아들일 수 없는 야생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가 바로 동물이란 타자다. 나는 이런 동거-동물과의 관계가 그저 아름답게 포장되기보다도 동거-동물이란 타자와 만나면서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스토리들이 좀더 날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동물과의 동거란 생각보다 즐겁지 않고, 기쁘지만도 않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이야기들이 분명 있으리라. 그 이야기들이야말로 동물과 인간의 동거를 더욱 활기차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글_박소담(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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