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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동물병원에 갑니다

[지금동물병원에갑니다] 2편. 심약한 동거-인간(下)

by 북드라망 2022. 8. 10.

2편. 심약한 동거-인간(下)

 

 

동거─삶의 부분을 함께하기
사실 동거-동물이 이렇게 전면적으로 보살핌을 받는 존재가 되기 시작한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건 우리 부모님 세대 이야기만 들어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한두 세대만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동거-동물이란 지금처럼 집 안에서 사는 동물이 아니었다. 당시 동거-동물이란 대부분이 개였는데, 그들은 대부분 마당을 돌아다니며 살았다. 그들에겐 이불은커녕 집 한 채가 주어진 전부였다. 이런 개들의 풍경은 흔히 동거-동물이 제대로 된 취급을 받기 이전 시대의 모습이라 불린다. 지금의 동거-동물의 대우와 비교해 볼 때 그것은 무지에 의한 학대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전 세대와 지금 세대 사이에는 단순히 동거-동물에 대한 표면적인 대우가 달랐던 것만은 아니다. 한국보다 20여 년 정도를 앞서 동거-동물 산업을 주도했던 미국의 상황은 살펴보자. 지금의 우리들처럼 동거-동물을 끔찍이 생각하는 동거-인간인 캐롤라인 냅은 자신의 할아버지 세대까지만 올라가더라도 동거-동물을 둘러싼 관계가 완전히 달랐다고 회고한다. 이전 세대가 개와 맺은 계약은 실용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목축이나 경비, 사냥 같은 특정한 목적으로 개를 키웠다. 그녀의 할아버지 세대 역시 개에 대해 정서적 유대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것은 실용성 다음으로 따라오는 부차적인 효과였을 뿐이었다. 하여 인간은 개가 일을 잘 할 수 있을 만큼만 개를 대우하면 그만이었다. 집을 지키는 개에게는 마당에서 머물 수 있는 집과 매끼 먹을 밥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러던 개 팔자는 고작 몇 십 년 사이에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인간보다 못한 개 팔자에서 진짜 상팔자로의 변화! 개 팔자를 둘러싼 이런 대격변은 대체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

 

우리는 한동안 우리가 공유한 뿌리 잃은 정서 이야기를 했다. 친구들이 하나둘 다른 도시로 떠나고, 동료는 계속 새 직장을 찾고, 우리 또한 10년 사이에 여섯 번이나 이사하는 삶, 거리에서 마주치는 이웃이 누군지도 모르는 삶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개가 이런 느낌을 다스려준다는 것, 그들의 존재가 우리를 안정시켜준다고 이야기했다. (…)

바로 이것이다. 세상 모든 불확실성 한가운데 개가 있다. 그것 하나는 분명하다. 녀석들은 개의 몸을 입고 찾아온 안정이다. (캐롤라인 냅, 『개와 나』, 나무처럼, p.70)


인간이 동물과 맺었던 급격한 관계 변화는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경제적 지반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았다. 1950년대에 전후 부흥기를 맞아 안정적인 경제적 지반을 가지고 있던 미국은 그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전, 석유 파동을 거쳐 침체기로 접어들게 된다. 한국은 뒤늦게 비슷한 경로를 밟았다. 베트남 전쟁 시의 전쟁 특수로 경제 성장을 이루었으나 20세기 말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경제적인 기반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설령 위기를 직접 겪은 세대가 아니더라도 그 여파를 실감하는 건 어렵지 않다. 주위만 둘러봐도 날이 갈수록 먹고 살기가 힘들어질 것이란 전망이 넘친다. 직장은 구하기 힘들어지고 가족을 만들기는커녕 내 한 몸 건사할 수 있을지도 의문스럽다. 무엇보다 돈도 돈이지만 마음 터놓을 관계 하나 없다는 사실이 더욱더 앞날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 불안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안식처가 될 만한 곳은 없을까? 조금이나마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관계는 없을까? 그때 인간은 비로소 마음을 나눌 상대로서의 ‘개’를 발견해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개는 여느 다른 인간관계에서도 맛볼 수 없는 평온함을 인간에게 가져다주었으니 말이다.

 


안정감의 이유는 간단했다. “녀석들은 우리가 집에 들어올 때마다 한 번도 어김없이 열렬한 환영을 바치고, 언제나 유쾌하고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앞과 같은 책, p.71)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바라보고 좋아해 주는 상대란 로맨스에 등장하는 단골 레퍼토리가 아니던가. 인간은 드라마나 환상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관계를 동거-동물과의 관계에 투사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동물이 현실적인 조건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을 사랑해준다는 증거를 찾았다. 그리곤 동거-동물의 본성이 바로 인간의 사랑을 받는 데 있다 믿었으리라. 하여 동거-인간의 임무란 그러한 본성을 지닌 동거-동물을 온전히, 마찬가지로 무조건 사랑해주는 데 있다. 설령 때로 사랑이 지나쳐 동물의 건강을 해치더라도 사랑받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기면서.

과거에 실용적인 목적으로 동거-동물을 키웠던 방식이 지금에 와서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이전 세대들은 개가 일을 잘 해내는 데 있어서만 개에게 호의를 품었다. 그들은 개 자체를 사랑했다기 보다도 개가 일을 해내는 조건 위에서만 그들을 사랑했던 것이다. 지금의 시선에서 보기에 이런 조건적인 사랑은 개를 일하는 도구로 생각했다는 점에서 학대나 다름이 없다. 그저 온전히 인간에게 사랑받으려는 동물의 본능을 충족시켜주지도 못하고 개를 이용하다니. 인간들은 얼마나 인간중심적으로 개들을 키웠던가. 맞는 말이다. 과거의 인간들은 결코 개를 그 자체로 사랑받을 존재라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딱히 그들이 개에게 관심이 없어서, 개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그들은 개라는 생물을 진심으로 존중했기 때문에 그들을 조건 없이 사랑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개는 인간의 사랑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백지 같은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개는 사냥을 잘했다. 재빠른 동물을 네 다리로 뒤쫓아 그들을 제압할 수 있는 공격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개는 집도 잘 지켰다. 일정 영역을 확보하고 그 안으로 들어오는 침입자를 경계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인간이 개에게 기대했던 능력들이란 개가 가지고 있는 생물학적 습성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옛사람들은 개를 면밀히 관찰하여 그들의 특징을 파악했고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삶을 타종인 개와 결합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그들은 개라는 구체적인 존재와 어떻게 함께 살아갈지를 고민했던 자들이었다.

생각해보면 옛 인간들의 생활 속에는 늘 개와 같은 동물들이 함께 섞여 있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가축들이 교외의 농장에서 사육되기 전만 해도, 가축은 가정집의 주변(결코 집안은 아니다)에서 인간들과 함께 생활하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그 많던 가축들은 이제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 식탁 위의 고기로만 등장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개를 포함하여 어떤 동물과도 함께 살아갈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현재의 동거-동물은 이런 관계의 공백 위에서 본디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습성을 모두 탈각시키면서 탄생했다. 인간에게 사랑받는 것 외의 어떤 습성도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동거-동물들. 동물을 향한 온전한 사랑이란 동물의 본성을 끊임없이 거세시키기에 그들은 아프다. 사랑받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지나치게 사랑받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동물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보다 조건적으로, 부분적으로 그들을 사랑할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사랑, 세상과 나를 연결하다
동거-동물과 부분적으로 관계 맺기 위해서는 먼저 동물의 습성, 즉 동물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사실 도시에서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경우 동물의 습성을 관찰을 통해 알아내기란 꽤 어렵다. 이미 인간에게 맞춰진 생활 환경 위에서 갑작스레 침입한 동거-동물이란 사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다루기 힘들고, 더럽고, 때로는 질병을 퍼뜨리는 존재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요컨대 얼마나 인간들이 키우기 편한지(혹은 사랑하기 편한지)를 기준으로 동물의 특성이 말해지기가 쉽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래서는 결국 현재 인간의 생활이 동물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은 동물의 본성에 대해 보다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동물의 본성이란 그들이 밟아온 삶의 궤적, 즉 그들의 역사 위에서 밝혀져야 하는 것이다.

도나 해러웨이는 「반려종 선언」에서 동거-동물(그녀가 만난 두 마리의 개)에 대해 남다른 이해심을 내비친다. 그녀가 주목하는 건 그저 사랑스럽기만 한 두 마리의 개가 아니다. 그녀는 두 마리의 개가, 각기 다른 두 품종이 어떤 역사를 통해 지금 자신과의 관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를 탐색한다. 가축 파수견인 그레이트 피레니즈가 어떤 배경 위에서 나타나게 되었는지, 그 개들과 관계 했던 인간들은 어떤 필요성 위에 있었는지, 인간과 개의 공존 관계는 어떻게 변화하여 이제는 파수견의 의미를 잃고 껍데기뿐인 혈통만이 남게 되어버렸는지를. 놀라운 건 그녀가 동거-동물을 통해 뻗어나가는 탐색의 스케일이 굉장히 광대하다는 점이다. 그녀는 그레이트 피레니즈가 처한 상황만이 아니라 개가 관계한 인간들의 고민, 때로는 그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까지도 짊어지려 했다. 그녀에게 동거-동물에 대한 사랑이란 단순히 동물들에게 맛있는 간식을 주고, 좋은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동거-동물과의 관계는 동거-동물에 대한, 혹은 그 너머 더 많은 타자와 인간을 연결해준다. 사랑은 그렇게 개를 둘러싼 조건 속에서 더욱 풍부해지고 충만해진다. 이런 조건적인 사랑이야말로 외로운 호모 사피엔스를 충만하게 만들어줄 하나의 방편이리라.

 


동물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동물병원에서 나는 자주 이런 질문에 부딪친다. 아픈 동물을 데려온 동거-인간은 물론이요, 치료-인간인 나 역시 동거-동물에게 인간이 어떤 식으로 다른 존재인 동물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물론 동물에게 어떤 실천을 해줄 수 있는지는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아무리 동거-동물을 위한 의료 지침이 날이 갈수록 훌륭해진다 한들 그저 뭔가를 ‘해주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우리는 동물에게 뭘 해주기를 묻기에 앞서 그들이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왔기에 지금 이곳에 있는지에 대해 충분히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동물은 단 한 번도 홀로 살아온 적이 없다. 내 눈앞에 한 마리의 동물이 이렇게 아픈 상태로 찾아오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조건들이 얽히고설켜야 했는가? 이 조건들을 찬찬히 살펴본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동물의 건강에 대해 말할 수 있으리라. 동거-동물과의 관계가 우리들에게 여타 인간들과는 다른 관계를 열어준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우리를 우리 자신에 머무르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인간 너머의 보다 광대한 세상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글_박소담(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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