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희, 『아파서 살았다』 - “자기 결정권”에 대하여
『아파서 살았다』의 저자, 오창희 선생님의 어머니는 97세의 나이로 뇌출혈 수술을 하게 된다. 그런 어머니가 입원과 수술, 퇴원을 겪으시며 저자 또한 이를 옆에서 지켜보는 게 쉽지 않다. 몸이 안 좋으시니 평소와는 다르게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어머니. 그러다 저자는 어머니가 어떻게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을 돌보며 살아가셨는지 궁금해한다.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겨우” 몇 달간 간병하며 어머니를 옆에서 바라보는 저자 또한 체력적으로 또 감정적으로 많이 지쳤기 때문이다.
그러다 생각한 것이 “자기 결정권”이다. 생을 마감하시는 어머니를 지켜보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얼까 고민하다 보니 “자기 결정권”이라는 떠오른 것이다. 정말 그런 듯하다. 주변을 살펴보아도 죽음이 다가왔을 때,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가까운 할아버지의 죽음만 살펴보더라도 그렇다. 요양병원에서 몇 년을 계시다가 입으로 식사하시는 게 어려워져 코에 줄을 끼워 음식물을 섭취하시겠냐는 의사의 제안에 가족들이 거부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할아버지께서 스스로 음식을 씹고 삼키고 소화하시는 것. 그래도 그 결정이 할아버지의 최소한의 “자기 결정권”을 지켜드린 게 아니었을지. 어쨌든 죽는 그 순간까지 오롯한 정신으로 내 삶을 마무리 할 수 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큰 축복이고 나 또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자기 결정권”이라는 것이 죽음 앞에서 더 크게 느껴지지만 어쩌면 일상의 한 부분 한 부분 또한 스스로 결정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지 떠올려본다. 사실 우리는 매 순간을 순간을 결정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 끼의 밥을 먹을지 말지, 화를 낼지 말지, 또 삶에서 마주하는 소소하면서도 중요한 결정들. 이러한 결정들이 모여 자기 나름의 윤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모든 선택은 아무리 가까운 관계인 가족일지라도 어떻게 해줄 수가 없다. 제안은 할 수 있을지라도 최종적으로는 스스로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자기” 결정권이 아닌가. 하지만 자식이나 부모에 대한 문제에 관해서는 이를 지켜보는 것이 잘되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너무나 쉽게 개입하곤 한다.
얼마 전, 5살 된 아이를 혼내고 난 후 아직 울고 있는 아이에게 말한다. “리오야, 이제 잘 마무리되었으니까 그만 울자” 나는 내 기준으로서의 상황이 다 해결되었으니 아이에게 눈물을 그칠 것을 강요한 것이다. 육아를 하다 보면 아이가 해결해야 하는 감정의 어떤 부분까지도 내가 나서서 해결하려고 하는 경우를 발견하게 된다. 부모님께도 그럴 때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방향을 권유 아니 이번에도 강요하곤 한다. 그 당시에는 상대방을 위한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참 이기적인 방법이 아니었을지.
어떤 하루를 보낼지, 일 년을 어떻게 살아갈지, 죽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결정하고 책임을 지는 건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같은 맥락에서 자기를 구원하는 것 또한 자기 자신만 할 수 있다. 요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이와의 관계에서 할 수 있는 건, 아이가 자기 스스로의 윤리, 즉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 아닐까? 물론 그 윤리가 어떤 것인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겠지만 말이다. 아, 이 또한 너무 깊은 참견이 되려나? 그래, 일단 오늘 나의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부터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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