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북드라망 한뼘리뷰 대회 - 『청년, 천 개의 고원을 만나다』 메모 & 밑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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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editor’s memo
우리가 사는 세계를 떠올려 보자. 모두 알다시피 ‘이 세계’는 변덕스럽다. 어제까지 옳았던 것이 오늘 보면 틀린 것이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한 가지 질문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그 질문이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질문이다. 누군가 ‘고전읽기’에 몰두하고 있다면, 아마도 이 질문이 그를 사정없이 몰아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말하자면, 이슈메일과 에이헤브 선장의 항해가 곧 우리의 인생과 같다는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밑줄긋기

말하기가 아주 조심스럽지만, 이제 막 철학을 시작한 당신에게 나타날 증상들이 있다. 지독한 혼돈과 함께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얼마간의 밤들, 턱 끝까지 차오르는 최초의 질문들이 가슴을 틀어막고,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엄습하는 외로움으로 의기소침해질지도 모른다. 사실 재미와 흥분은 그 이후의 문제다. 이 잔해와 먼지 속에서 어떤 방향으로 다시 걸어갈 것인가? 더듬거리며 부스러기들을 붙들고 나름의 몸부림을 쳐 볼 때, 그 과정에서 읽고 쓰고 토론하는 스텝을 밟아 나갈 때, 너무나 미약하지만 그래도 어제보다는 좀 더 초연해지고 단단해진 나를 발견할 때, 문득 깨닫게 된다. 이게 바로 공부의 재미로 구나. 이 과정이 없는 채로 무너진 폐허만을 무력하게 마주하다 보면 모든 것은 그저 무너지고 해체될 수밖에 없다는 허무주 의의 위험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자칫하면 생의 동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 나를 뛰어넘는 한 번의 도약으로 비상할 것인가? 혹은 끝없는 허무 속으로 침잠할 것인가? 이 두 갈림길 사이에 서 당신을 도와줄 것은 철학이다.(오찬영, 『모비딕, 삶과 운명을 탐사하는 두 개의 항해로』, 북드라망, 23-24쪽)
자연에 대한 관찰과 앎은 결코 인간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그 앎이 확장될수록, 역으로 우리는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말인즉슨, 스스로를 설명하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과 인연을 해석할 수 있는 문을 수 없이 만들고 열어젖힐 수 있다는 뜻이다. 각양각색의 언어를 확 보하는 순간, 고정된 가치 체계에 따라 부여된 비극적 엄숙함은 그 무게감을 상실하고 유머와 농담으로 가벼워질 수 있는 여력이 생긴다.
자신이 탔던 포경 보트가 본선과 고립되어 죽다 살아난 순간에 그가 웃으며 농을 치는 장면에서 이슈메일의 단단한 내공을 엿볼 수 있다. 죽음이 바로 코앞까지 왔다갔다는 충격과 혼란에 빠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동료에게 유머를 발휘하며 자기 유언장의 증인이 되어 달라고 하는 것이다. (같은책, 124-125쪽)
결국 삶과 운명에 대한 질문은 결국 존재에 대한 이해와 직결된다. 더 단순하게 요약해 보자면, 존재는 어떻게 작동하고 삶을 이어 가고 욕망을 생성하며 사건을 해석하고 죽음을 맞이  하는가? 『모비딕』에서 발견한 것은 두 가지의 존재론적 인식이었다. 열정과 광기의 타나토스, 웃음과 일상의 로고스. 정해진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추동력이 주는 쾌감의 선분과 엄숙주의 를 내려놓은 자리에 생기는 유쾌함의 선분 역시 보았다. 두 흐름 중에 물론 정답은 없다. 각기 다른 존재론적 인식의 과정을 오롯이 체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문학이다. 그래서 작가가 창조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입체적 캐릭터들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아닌 타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간접적으로 겪을 수 있게 된다. 세계에 대한 해석을 다르게 품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삶과 운명을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말하며 시공간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모든 과정들을 말이다.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 그리고 문학이 마침내 철학이 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같은책, 138-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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