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Q에게서 내 모습을 보다
-루쉰, <아Q정전>-
1. 자기 합리화
아Q는 속에 있는 생각을 매번 뒤에 가서 내뱉었다. 그래서 아Q를 놀려 대는 자들 거의 전부가 그에게 일종의 정신승리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뒤 그의 누런 변발을 낚아챌 때는 아예 이렇게 못 박아 두는 것이었다. “아Q, 이건 자식이 애비를 때리는 게 아니라 사람이 짐승을 때리는 거야. 네 입으로 말해봐! 사람이 짐승을 때리는 거라고!” (루쉰, <아Q정전>, 루쉰 전집 번역위원회, 그린비, p.113)
처음에 <아Q정전>을 다 읽고 나서는 딱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싱거운 줄거리라고 생각했고 사실 내용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슬퍼야 할 것 같았던 아Q의 죽음도 우습게 느껴졌고 다른 인물들의 행동도 딱히 다가오지 않았다. 내가 살면서 보지 않을 행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이한 점이 있었다면 아Q 자신은 한 번도 패배를 경험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일을 겪어도 저항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 책에서는 이런 아Q의 행동을 ‘정신승리법’이라고 표현한다. 항상 패배하는 위치에 있는 그이지만, 그 자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승리한다. 그런데 그가 한 행동 하나하나를 보면 내가 하는 행동과도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았다. 자아성찰이라고 하지만 내 멋대로 나 자신을 정의내리고,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며 현실을 직시하는 것을 피한다.
아Q는 다른 사람들에게 맞으면서 자신의 아들한테 맞는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맞는 상황이 싫어 차라리 아들한테 맞고 있다고 혼자 상상을 하는 것이다. 곧 동네 사람들도 그가 마음대로 상황을 합리화한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래서 그들은 아들에게 맞는 것이 아니라 우리인간에게 맞고 있는 거고 아Q는 짐승이라고 말하지만 여전히 아Q는 그 상황을 직시하려 하지 않는다.
<아Q정전>을 읽고 나서 당시 중국 사람들은 아Q가 자신을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만큼 아Q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닐까? 애초에 아Q의 이름이 아Q였던 것도 누구나 될 수 있다는 것 같다. 이름도 성도 확실하지 않은 그는 누구나 될 수 있는 것이다. 아편전쟁 이후에 중국은 많은 문제를 겪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전쟁 전의 화려했던 중국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른바 정신 승리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비겁한 ‘구경꾼’으로 밖에 남지 못했고, 루쉰은 아Q라는 인물로 당시 중국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2. 남의 시선
얼추 반 시간-웨이좡엔 자명종이 없어 딱히 얼마라고 말하긴 어렵다. 어쩌면 이십 분 정도였을지도-이나 지났을까, 둘의 머리에서 김이 솟고 이마에선 땀이 쏟아졌다. 아Q의 손이 늦춰지자 그 순간 애송이D의 손도 늦춰졌다. 둘은 동시에 몸을 세우고 동시에 떨어져 인파 속을 헤집고 나갔다. “두고 보자. 씨팔놈......” 아Q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씨팔놈, 두고 보자고......” 애송이D도 고개를 돌려 되받았다. 한바탕의 ‘용호상박’은 무승부처럼 보였다. 구경꾼들이 만족했는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다. 아무도 거기에 대해 토를 달지 않았으니 말이다. (루쉰, <아Q정전>, 루쉰 전집 번역위원회, 그린비, p.130)
아Q가 애송이D와 싸움을 끝내고 가장 먼저 한 생각은 바로 ‘구경꾼들이 만족하였는가’였다. 그는 너무 남의 시선에 신경 쓰는 나머지 무슨 일이 있어도 상대의 반응을 먼저 살핀다.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한 행동이 괜찮았는지, 저 사람들이 찬양할 만한 행동이었는지를 돌아보는 것이다. 이런 행동들을 반복하게 되면, 내가 한 행동들이 옳은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시선을 먼저 신경 쓰게 된다. 그렇게 되는 순간부터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남이 잘한다고, 좋다고 말하는 방향으로 가다보면 결국에는 나 자신이 원하던 것을 잃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도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었는데, 학원에서 상장을 한 번 받은 뒤로 그 상장에 대한 칭찬 한 마디가 듣고 싶어서 상장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상장이 파일에 매달 쌓이는 것을 보면서 혼자 매우 좋아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그 당시에는 그 시험 하나와 상장이 가장 중요했지만 막상 학원을 끊고 보니 내가 그렇게 목을 맨 상장은 그저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다. 학원에 다닐 때는 엄마가 왜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으며 일등하려고 하냐고, 일등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상장 그거 별거 아니라고 하셨는데, 그 때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학원을 끊고, 내가 선생님의 눈에 들려고, 저 종이 한 장 받으려고 한 노력을 생각해보니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남이 원하는 것에 먼저 맞추다 보니 그때는 내가 무엇을 왜 원했는지도 잊은 것이다. 이런 행동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내 방 책상 맞은편에 있는 보드에 포스트잇으로 붙여놓고 반복해서 생각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엔 암기밖에 되는 것 같지 않아서 포기했다. 일단 남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이 먼저인 것 같다. 나는 아직도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 모두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나를 살핀다. 그러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지만 쉽지 않다. 다짐은 하고 머릿속에서는 받아들였지만 마음속에서는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3. 허세
아Q도 누더기가 된 저고리를 벗어 까뒤집었다. 빨래를 한 지가 얼마 안 되어 그런지 아니면 찬찬히 살피지 못한 탓인지 오랜 시간을 들였건만 겨우 서너 마리밖에 잡지 못했다. 왕 털보를 보니, 한 마리, 또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연신 입에 넣고 툭툭 깨물고 있었다. 처음엔 무척 실망스러웠지만 점점 약이 올랐다. 허접한 왕 털보가 저리 많은데 자기는 몇 마리밖에 되지 않으니 이 어찌 체통을 잃는 일이 아니겠는가! (루쉰, <아Q정전>, 루쉰 전집 번역위원회, 그린비, p.117)
아Q는 왕 털보와 이 잡는 내기를 한다. 누가 더 많이 잡는지를 경쟁하는 것인데 왕 털보는 금방 여러 개를 발견하고 톡톡 깨물어 터뜨리는 반면에, 아Q는 얼마 전 옷을 빨아서 그런지 이가 얼마 보이지 않는다. 시작은 그저 장난에 불과했지만 결과는 더러운 것을 두고 경쟁심이 나게 된 것이다. 너무 일상적이고 당연한 것도 경쟁의 대상이 되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친구들이 집에 놀러오면 갑자기 피아노에 집착한다. 평소에는 연습도 하지 않아 앉지도 않는 피아노 의자에 우겨 앉으면서라도 피아노를 치려고 한다. 그냥 치기는 좀 그래서 서로 눈치 보다가 누군가 먼저 시작하면 다음에 치려고 눈에 불을 켜고 기다린다. 우리는 왜 평소에는 같잖게 생각했던 것에 이런 상황이 오면 갑자기 집착하게 되는 것일까? 평소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던 것들이 다른 사람 앞에서는 자랑거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떤 것 하나를 상대보다 잘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Q도 ‘고작’ 이 잡는 것이지만 그 순간 이를 잡는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행동한다.
4. 혁명
아Q의 귀에도 혁명당이라는 말은 진작부터 들리고 있었다. 금년엔 또 혁명단의 목을 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어디서 비롯된 생각인지 몰라도 그에게 혁명당은 반란은 일삼는 무리들이며 반란이란 곧 고난이었다. 그래서 줄곧 이를 ‘통절히 증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이것이 백 리 사방 이름이 알려진 거인 나라까지 벌벌 떨게 만들었다니 그로선 ‘신명’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웨이좡의 무지렁이들이 허둥대는 꼴은 아Q의 기분을 한층 상쾌하게 만들었다. ‘혁명이란 것도 괜찮네.’ 아Q는 생각했다. ‘이런 씨팔 것들을 뒤집어 버리자. 좆 같은 것들! 가증스런 것들!...... 나도 혁명당에 가입해야지!’ (루쉰, <아Q정전>, 루쉰 전집 번역위원회, 그린비, p.117)
아Q가 혁명당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단지 ‘사람들이 혁명당을 무서워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을 깔봤던 사람들을 두렵게 해주고 싶었고 혁명당이 사람들의 두려움의 대상인 것을 알게 되자 혁명당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그가 정말 혁명당원으로서 어떤 행동을 하려고 했는지는 모른다. 진짜 마음은 모르겠지만 사람들을 압박하고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걸 상상하며서 그걸 아마 무척 멋진 모습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나도 나 자신을 크게 바꾸고자 한 때가 있었다. 그 이유도 아Q와 같이 ‘남’의 시선 때문이었다. 실제 나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똑똑하고 예쁜 나의 모습이라는 것이 있길 바랬다. 그래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 모습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아Q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남을 위한 나로 모습을 바꾸어 가는 것이다.
솔직히 이 책을 처음 펼치고 나서 짧다는 것을 알고는 엄청 빨리 읽었다. 그런데 다 읽고 나서는 내용과 전개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엄청 많이 반복하면서 읽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이 책에 나온 인물들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생각해 보았다. 나는 대부분 책을 읽으면 그 책에 나오는 인물들을 마음대로 정의내리는 경향이 있다. 옳지 않은 것을 알아 고치려고 하지만 자꾸 내 마음대로 그런 전제를 두고 책을 읽게 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아Q를 ‘이상하고 합리화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 자신이 아Q라고 생각하면서도 아Q를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내가 너무 당연하게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아Q는 어쩌면 좀 안타까운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남의 시선에 신경 쓴 나머지 자신을 잃어버리는 상황을 겪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의 반응 하나하나에 쩔쩔매는 아Q의 모습을 보며 너무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은 나를 위해 살 수도 있다. 너무 나를 위해 산다면 그것은 이기적이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아Q는 지나치게 남을 위해 살았다. 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사람들이 나를 좋게 보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것이다.
5. 아Q가 되지 않으려면?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든 생각이 있는데 바로 ‘아Q처럼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였다. 읽으면서 아Q가 하는 행동에서 나를 보기도 했지만 결국 총살당하는 아Q의 모습을 보면서 저렇게 행동하지는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정말 말 그대로 추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하는 행동들을 하나하나 이해하다 보면 나도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패배하면 나 자신에게서라도 승리하려고 하고, 사소한 내기를 가지고 온 세상이 걸린 것처럼 찌질하게 굴며, 남의 시선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느라 정작 나 자신을 잊기도 한다. 우리가 아Q가 아니라면 누구란 말인가?
아Q는 집도 없고 하는 일도 없는 그저 날품팔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자의식이 너무 강해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조아리는 사람은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다. 약한 사람은 막 대하는 일명 ‘강약약강’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이 강약약강이 드라마에서 갑질하는 회사 부장들만이 하는 짓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착각하는 나 자신도 또 다른 아Q가 될 수 있었다. ‘저 사람들은 ~~하니까...’라고 깔보면서 나는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합리화하는 것이 나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면 어떻게 나 자신에게 믿음을 줄 수 있을까? 나는 당연하게도 나 자신을 믿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더군다나 나 자신을 믿지 못해서 ‘어떻게 해야 믿을 수 있나’라고 자문하는 나 자신도 우스웠다. 나는 보통 내가 할 행동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다고 말한다. 지나가는 말로 “나에 대한 믿음이 없는데 뭘 해”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내가 하는 행동, 어쩌면 행동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에서 정말 나 스스로를 믿고 있는가?
나는 이 기분을 딱 한 번 느껴보았는데 예전에 영어 시험을 볼 때 문제를 읽지 않아도 답을 알 정도로(?) 심각하게 공부를 한 적이 있었다. 총 문제가 75문제였는데 푸는 내내 나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만큼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이다. 이게 한 1년 정도 된 일인데 이 이후에는 딱히 그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어쩌면 더 이상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 ‘가능하지도 않을 거야’라는 생각을 한다면 결국엔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않을까? 내가 영어 시험을 준비할 때 만점을 받아보아야겠다는 말도 안 되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했다. 그 시험은 10개 정도 틀리면 점수가 잘 나왔다고 할 정도로 어려운 시험이었는데, 결국에 나는 시험에서 만점을 받는 데 성공했다. 내가 만약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목표를 세우지도 않았더라면 결국에 시도도 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 자신에 대한 어떤 믿음 있는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도 시도해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솔직히 내 주변에서 ‘너는 여기까지만 할 수 있어’라는 제한을 주지 않았다. 그냥 내가 너무 초조해서 내가 확실히 할 수 있는 내에서만 목표를 잡았을 뿐이다.
아Q도 자신은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싶었을 테지만 그러지 않은 것 같다. 합리화하는 마음속에는 나 자신을 믿지 못하는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은 결국 나 자신을 한계 짓는다. 아Q 자신은 혁명당에 들어가고 싶어 하지만 혁명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는 혁명을 원했지만 그 자신조차 혁명하지 못했다.
글_이우(규문)
'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 > 이우의 다락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우의다락방] 우리는 모두 공생자! - 린 마굴리스, <공생자 행성> (2) | 2022.07.26 |
---|---|
[이우의다락방] 고유의 쓸모를 찾아서 (0) | 2022.06.14 |
[이우의다락방] 나를 버리기 (0) | 2022.04.14 |
[이우의다락방] 어떻게 코로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0) | 2022.03.14 |
[이우의다락방] 역사, 시공간을 탐구한다는 것 (0) | 2022.02.24 |
[이우의 다락방] 반 고흐, 『영혼의 편지』하나의 작품을 위한 노력 (0) | 2022.01.2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