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공생자! - 린 마굴리스, <공생자 행성>
모든 것은 공생한다
그렇다면 내 ‘극단적’ 이론은 어떻게 볼까? 진핵세포의 중심립-키네토솜 세균의 통합이 진핵세포의 출발점이었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이 옳다면, 공생 발생은 모든 진핵세포 생물과 모든 세균을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중간 입장이란 있을 수 없다. 생물은 공생 발생을 통해 진화했든지 그렇지 않든지 할 뿐이다. 내 주장은 모든 진핵 생물들(원생생물, 식물, 곰팡이, 동물)이 공생 발생을 통해 생겼다는 것이다. 고세균이 중심립-키네토솜의 조상과 융합하여 다세포생물과 원생생물의 조상, 즉 진핵세포로 진화했을 때 말이다. (린 마굴리스, <공생자 행성>, 이한음 옮김, 사이언스 북스, p.86)
<공생자 행성>의 저자인 린 마굴리스는 세포내 공생설을 주장한 사람이다. 생물들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 즉 공생하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미토콘드리아의 세포내 공생설은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고 한다. 처음에 딱 1장을 읽었을 때는 재밌었는데 점점 뒤로 가니까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겨우 중학 과학을 하고 있는 내가 이해하기에는 막대한 과학 정보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아는 과학 용어가 하나 나오면 기뻐하면서 한 페이지 읽고 춤추고(??) 그러면서 읽었다. 진핵생물의 탄생설이 이 책의 메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잘 이해가 가지 않아 과학 선생님을 붙잡고 여쭤보았다. 메탄생성 고세균과 호기성 프로테오 박테리아의 공생이 진핵 생물의 탄생설이라는 것이다. 지금 내가 이렇게 한 문장으로 정리하고도 머리가 복잡한데 린 마굴리스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생각을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인지 참 신기하다.
처음에 이 책을 읽고 글을 쓰려고 했을 때 참 막막했다. 내가 세포내 공생설을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머리를 가지고 있어서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과학책으로 글을 쓰는 것은 딱히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든 생각이 ‘이미 다 정리된 내용이나 사실인데 내가 적어봤자 뭐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였다. 처음에 민호쌤의 루크레티우스 글을 보고 ‘오~ 나도 저렇게 쓸 수 있을까?’하고 잠시 생각했지만 곧 포기했다. 그래서 그냥 생각이 나는 대로 쓰기로 결정했다.
일단 처음에 진화과정이 ‘공생’이라는 것에 한 번 놀랐다. 왜냐하면 항상 어떤 상황이건 간에 나는 승자가 모든 이득을 취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화도 이긴 사람이 살아남는 것이라 생각했다. 덕분에 진화과정이 무척 치열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린 마굴리스는 진화의 과정이 공생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이 공생이라는 것은 꼭 세포내에서만 국한 되는 것도 아니었다. 모든 진화의 과정이 공생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나는 지금껏 어디를 가든 경쟁을 해왔다. 이기지 않으면 불편해서 무조건 잘해야 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다르게 말한다면 남은 꼴등을 하더라도 나는 일등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아닌가. 내가 일등을 하지 못한다면 다른 누군가가 일등을 하고 행복해 할 텐데 말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계속 경쟁하면서 공부를 하다 보니 금방 싫증이 났다. 그래서 학원도 그만뒀는데, 학원을 그만두고 새로운 공부 방식을 생각해봤다. 친구들하고 같이 공부하는 수업에서 이번에는 경쟁보다는 서로 협력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여전히 내가 잘하지 않으면 불편하다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는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친구들과 어울리며 서로 질문도 하고 그랬다. 생각해보니 이 방식이 나도, 그리고 다른 친구들도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싶다. 세포들도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솔직히 경쟁으로는 한계가 있고 꼭 이긴다고 해서 더 나은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도 공생하며 서로 협력하였는데 세포라고 왜 안 되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린 마굴리스의 세포내 ‘공생설’은 매우 설득력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예전에 <모모>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책에서도 마지막에 비슷한 내용이 나왔던 것 같다. 사람들의 시간을 얼려 살아가는 회색 사람들이 있는데, 사람들이 점점 자신의 시간을 찾기 시작하며 얼린 시간들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러자 회색 사람들은 가위 바위 보로 이긴 사람들만 남기고 진 사람들은 모두 죽인다. 그것이 소수의 사람들만이라도 더 오래 살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여섯 명쯤 남고 모두가 죽자 그들은 후회하기 시작한다. 적은 인원으로는 시간을 뺏는 일도 할 수 없고, 그저 남은 시간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악역으로 나온 인물들이긴 했지만 만약에 그들이 경쟁이 아닌 협력했더라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지 않을까.
이래서 경쟁이 아닌 협력이 진화를 일으켰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세포내에서도 경쟁을 하면 결국에는 살아있는 것도 별로 없을 것이고(?) 그 적은 것들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나도, 내가 포함하고 있는 세포도 결국에는 협력을 선택한 이유가 이것인 것 같다.
인간 없이도 잘 산다
두 번째로 기억에 남는 부분은 인간에 관한 내용이다. 물론 다른 멋진 내용들도 많았지만 이 부분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내가 청소년 수업 때 배운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장르의 책이기는 하지만 언뜻 <낭송 열자>에서 본 내용이다. 이 부분을 읽었을 때 진짜로 너무 행복했다. 책이 이해가 되지 않아 매우 느리게 읽고 있었는데 아는 내용이 나오니 ‘나 이거 본적 있어’ 하면서 뿌듯해 했다.
우리는 솔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인간 종 특유의 오만함을 버려야 한다. 인간이 ‘선택’되었다는, 다른 모든 생물들이 오로지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수가 많고, 강하고, 위험하기 때문에 인간이 가장 중요한 종이라는 생각도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특별한 혜택을 입은 존재라는 집요한 환상은, 그저 그런 포유류라는 우리의 진정한 지위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린 마굴리스, <공생자 행성>, 이한음 옮김, 사이언스 북스, p.211)
인간은 이 행성의 동료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인간은 자연을 끝장낼 수 없다. 인간은 오직 스스로에게만 위협을 가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이 원자력 발전소의 온수조나 열수 배출구에 번성하는 세균들을 비롯한 모든 생물을 없앨 수 있다는 말을 듣기만 해도 우스꽝스럽다. 나는 인간이 아닌 생명의 동료들이 코웃음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당신들을 만나기 전에 당신들 없이도 잘 지내왔으니까, 지금 당신들이 없어져도 잘 지낼 거야.” 그들은 멋진 화음으로 그렇게 우리를 향해 합창한다. (린 마굴리스, <공생자 행성>, 이한음 옮김, 사이언스 북스, p.227)
이 부분을 읽고 정말 많이 웃었다. 나 자신도 아무리 내가 특별하다고, 나는 잘났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만심이 있긴 하다. 그런데 이렇게 콕 집어서 말해주니 그렇게 생각했던 나 자신이 너무 웃겼다. <낭송 열자>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다룬다. 그때는 그 부분이 인상적이어서 글도 썼었다. 어른들이 제사가 있고 여러 고기를 먹으면서 ‘신은 인간에게 후하게 내려주신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한 꼬마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우리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모두 그저 같은 무리일 뿐이라고 말이다.
이런 내용의 책을 읽을 때마다 새삼 깨닫는데 나는 너무 잘났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모든 생물들은 인간 없이도 잘 살 수 있는데 왜 나는 내가 이렇게 중요한 사람인양 구는지 모르겠다. 정원에 있는 나무들도 내가 안 건드리면 더 쭉쭉 자랄 수 있고, 잡초도 뽑지 않으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그나마 조금씩이라도 잡초를 뽑기 때문에 정원이 엉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것도 또 어떻게 보면 너무 이기적인 관점이기도 하다. 정원이 ‘잘’ 유지된다고 하는 이 ‘잘’의 상태도 결국 내가 보기에 그럴 뿐이다. 나 하나 없어도 세상 생물들은 너무나도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사실을 알기는 하지만 자꾸 까먹는다는 것이다. 까먹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제대로 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 아닐까?
남 없이는 안 된다
내가 계속 ‘까먹는다’고 한 만큼, 계속해서 나는 인간이 뛰어나다고 생각하게 된다. 모두 동등하고 같다고 반복하고, 또 내가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계속 이런 생각이 들 때 린 마굴리스가 하는 말이 있다.
지구의 이 이질적인 존재들은 우리의 친척이자, 우리의 조상이자, 우리의 일부다. 그들은 우리의 물질을 순환시키고, 우리에게 물과 양분을 준다. ‘남’이 없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살아 있는 물을 통해 공생하고, 상호 작용하고, 상호 의존하던 과거와 연결된다. (린 마굴리스, <공생자 행성>, 이한음 옮김, 사이언스 북스, p.197)
정말로 계속해서 아무리 반복해도 여전히 ‘나는 뛰어나’라는 생각을 완전히 지우기는 어려웠다. 내 주변이 모두 그렇게 돌아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주변의 모든 환경들이 인간에게 편리하게 만들어졌으니 말이다. 예를 들어 지하철이나 고속도로와 같은 것을 보면 나는 정말로 세상이 인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한다. ‘이게 모두 인간이 뛰어나서 겠지?’라는 생각을 하기가 쉬웠다. 하지만 반대로 린 마굴리스는 우리가 남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동물, 그리고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고 하지만 결국에는 우리가 보호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보호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로 인간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인간 혼자만 있었다면 지금까지 진화할 수 있었을까? 이만큼 발전하고 우리가 지금 말하는 ‘인간의 뛰어남’을 갖출 수 있었을까? 아닐 것이다. 지구가, 인간이, 동물이, 식물이, 그리고 세포까지도 모두 함께 살아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 것이다.
넓디넓은 우주 속에서
크릭은 많은 영향을 끼친 저서 <생명의 출현>에서, 생명의 엄청난 복잡성을 생각할 때 생명이 우주에서 지구로 온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구라는 행성에 생명의 씨는 뿌리겠다고 결심한 어느 외계 문명이 세균들을 이곳으로 보냈다고 주장했다. 크릭은 정원사가 자신의 마당에 씨를 뿌리듯이, 수십억 년 전에 지구에 번식체가 뿌려졌다고 아주 진지한 어조로 주장한다. 생명이 지구 밖 우주에서 왔다는 이 지향 범종설이라는 개념은 원래 수백 년 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주장이 지구의 진화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나는 생명의 기원 문제를 우주로 떠넘기는 것에 지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지구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생명이 더 쉽게 출현했다는 말인데, 왜 그렇게 생각해야 한단 말인가? (린 마굴리스, <공생자 행성>, 이한음 옮김, 사이언스 북스, p.136)
예전에 아주 이상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아직까지 우주는 우리한테 어마어마하게 크고 측정도 할 수 없는 공간이다. 그런데 이런 커다란 곳이 어떤 것의 아주 작은 세포나 각질이라면?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너무 음모론 같지만 그만큼 우주는 나에게 거대한 곳이었다. 그래서 가끔 답이 나오지 않거나 모르는 것이 있다면 나도 혼자서 ‘이건 뭐 우주에 가면 풀릴 문제일지도 모르지’라 생각하며 스리슬쩍 떠넘기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어 예전에 나는 인간이 왜 있는가와 같은 살짝 중2병적인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 이후로는 딱히 답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냥 내가 인간 실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였다는 것에 만족했다. 그리고 그 ‘나오지 않은 답’에 대해서는 정말 우주에 인간 실존에 대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며 합리화했다. 그 때는 나름 나 자신의 대답에 만족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나도 린 마굴리스가 비판하는 크릭과 마찬가지로 ‘생명 근원의 문제를 우주로 떠넘기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모든 것을 우주로 떠넘기는 것은 지구보다 우주에서 무언가가 더 많이 일어날 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내가 우주에는 무언가 다른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 살짝 한심해졌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이런 것뿐만이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모두 떠넘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무언가를 떠넘기는 걸 끔찍히도 싫어한다. 선생님이 질문을 하셨는데 그것에 대한 답을 모르는 애가 나에게 “이우, 너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자신이 모르는 것을 나에게 넘기는 것 말이다. 이렇게 가벼운 것도 떠넘기는 것을 싫어했는데 나도 그와 똑같이 하고 있었다.
나는 항상 책을 읽을 때마다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나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편으로는 배워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또 다른 한 편에서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나도 하고 있었다니 깨달을 때마다 너무 슬프다.
한 분야를 파고들 수 있는
나는 다른 모든 영장류들과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신의 창조물이 아니라 매순간 반응하는 미생물들이 수십억 년에 걸쳐 상호 작용한 과정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견해에 대해서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부 사람들은 과학이 내놓는 소식을 두려워하며, 과학을 거부해야할 정보의 공급원이라고 본다. 하지만 과학은 나를 매료시킨다. 더 많은 것을 배우라고 끊임없이 아를 자극한다. (린 마굴리스, <공생자 행성>, 이한음 옮김, 사이언스 북스, 머리말)
나는 책 읽는 걸 막 좋아하지는 않는다. 가끔 재미있는 책을 보면 그 책에 꽂혀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곤 하지만 대개 읽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책을 읽을 때 거의 정신을 놓고 읽어서 말 그대로 책을 ‘읽는’다기 보다는 책을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읽고 다음 페이지를 읽으면 그 전 페이지에서 뭘 읽었는지 모른다. 읽고 싶은 의지가 없어서 생긴 일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읽을 때마다 나름 나의 단점과 신기한 것들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럴 때가 내가 책에서 재미를 느끼는 순간인데 그 순간은 정말로 내가 이 책을 날개로 삼아 날아다닐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 책에서 그런 부분이 바로 내가 모르는 것을 떠넘긴다는 부분과 인간이 자신이 잘난 줄 안다는 부분이었다. 눈을 반쯤 감고 읽다가 그런 내 취향에 맞는 내용이 나오면 나는 그 부분만 몇 번이고 읽는다. 특히 이번에 읽은 <공생자 행성>은 책 내용 자체가 나에게 너무 어려워서 그런지 마음에 드는 부분, 그리고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을 만나면 신이 났다. 책 내용 자체는 어려웠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과학을 이렇게까지 파고들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아직 린 마굴리스가 주장한 이론이 학계에서 완벽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그것에 관계없이 한 분야에 그렇게 집중하여 연구하는 모습이 멋있었다. 과학이 이런 분 덕분에 발전할 수 있던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이 이론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꽤나 많은 점을 배우지 않았나싶다. 애초에 나에게 진화의 과정이 공생이라는 것 자체도 너무나 생소했기 때문이다.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에 대한 책을 읽는 것도 나름 재밌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마지막에 남은 질문을 결국에 이것이었다. ‘공생은 도대체 뭐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공생할 수 있는 걸까?’ 공생이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이미 나처럼 인간이 다른 생물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많을 테니 말이다. 공생이라는 말 그대로의 정의는 ‘서로 해를 끼치지 않고 돕고 사는 것’이겠지만 일단 그런 마음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 같다. 공생하기 이전에 내가 공생을 하겠다고 내는 마음 말이다. 공생이라는 말 자체가 서로 돕겠다는 말인데 그런 마음도 없이 그냥 ‘공생하겠다’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이 바로 ‘나고 그 공생이란 거 한 번 해봐야지.’였다. 그러면서 마음을 내지 않고 있었다. 할 마음이 없는데 하겠다고 했으니 못한 것이 당연하다.
이제 공생하고 싶다는 마음도 생겼으니, 공생도 되지 않을까?
글_이우(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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