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코로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 알베르 카뮈, <페스트>(1947)-
"기억도 없고 희망도 없이 그들은 현재 안에 자리를 잡아 갔다. 사실을 말하자면 모든 것이 그들에게 현재가 되었다. 그 점을 분명히 말해야 하는데, 사랑의 힘, 심지어 우정의 힘마저도 페스트가 모두에게서 앗아 가버렸던 것이다. 사랑이란 조금이라도 미래를 요구하는 법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에게는 순간들 말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p.232)
1. 나에게 코로나는 무엇인가?
처음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국에 퍼졌을 때, 나는 일본에 있었다. 겨울 방학동안 일본에 사시는 이모 집에 잠시 놀러간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오기 한 일주일 전쯤에 한국에 코로나가 퍼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내가 비행기를 탔을 때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 때는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이름도 몰랐다. 누군가 ‘코로나’라고 알려주긴 했지만 이름이 어려워서 그냥 바이러스라고 불렀다. 그 때는 이 바이러스가 이렇게 오랫동안 지속될 줄도 몰랐고, 일상생활이 이렇게 많이 바뀌게 될 줄도 몰랐다.
<페스트>를 보면, 페스트라는 질병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 질병을 ‘페스트’라고 부르기를 거부한다. 그만큼이나 페스트라는 질병은 그들에게 무서운 것이었다. 페스트가 퍼지면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감염되었는지 아니면 건강한지를 판정해주는 것뿐이었다. 코로나가 처음 퍼지기 시작했을 때도 페스트가 퍼지기 시작했을 때와 비슷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따로 치료제와 백신이 없었기 때문에 마스크를 잘 착용하고 다니라고 9시 뉴스에서 앵커가 당부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 때는 방역 규칙을 지키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 다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소란스러웠던 것 같다. 나는 그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냥 '이 코로나라는 건 대체 뭘까'라는 생각을 반복했었다. 지금은 조금 이 분위기에 익숙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코로나에 대한 어떤 특별한 마음가짐이나 생각 같은 것은 없다. 그래서 지금도 나한테 코로나 바이러스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아직도 모르겠다고 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이 바이러스가 우리의 일상을 바꿔놓았다는 것이 익숙하지가 않다. 나는 학교를 다니지 않아서 딱히 달라진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달라진 것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 속에서 이미 변화를 겪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밖에 나갈 일도 없다보니 그냥 집에서 지내다가 가끔 학원가고 규문 가고 하는 것 외에는 새로운 것이 없었다. 물론 팬데믹 속에서도 예기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루즈해지니 새로울 것이 없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활동량이 적어 정신적으로 쳐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실제로 코로나 시기에 활동량이 줄어들다보니 신경질 내는 일이 많아지고 다니던 학원도 다 끊고 싶어지는, 짜증이 나는 상태가 만들어진다.
다만 코로나를 겪으면서 한 가지 느낀 점이 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서로를 더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들 각자 생각하는 바가 다르니 서로를 배려하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상황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처음에는 ‘즐거운 중학교 생활’이라는 환상이 있었으나 코로나 때문에 그나마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덕분에 잘생긴 남친을 사귀려던 막대한 계획도 무너지고 말았다. 그 때 나에게 코로나는 절망이라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다음에 학교를 그만두고 나니 코로나는 나와는 별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내가 있는 곳은 언제나 안전하다고 굉장히 자만한 상태였던 것 같다. 그 다음 현재, 친구와도 가족과도 밖에서 만나 뭘 할 수가 없는 지금은 다시 코로나에 지쳤다. 잘 알지도 못하는 코로나에 지쳤다고 말하니 굉장히 아이러니하지만, 정말로 말 그대로 지쳤다. 코로나를 ‘바이러스’로 보기보다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수업도 모두 온라인으로 하게 되니 나가는 일이 없어졌고, 그러다 가끔 현관에 있는 마스크를 보고 깨닫는다. '아, 지금 코로나라는 바이러스가 있지!'하고. 그러나 여전히 마음 한 편에서는 '나 하나쯤은 괜찮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모두가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나 하나쯤은 괜찮지 않을까.' 이 말 때문에 사람들이 해이해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누군가 한 명이 나서서 코로나 바이러스를 퇴치(?)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물론 나도 코로나를 퇴치하는 데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래도 어떤 한 사람이 영웅처럼 나타나서 퇴치해주기를 바랬다.
하지만 <페스트>의 저자인 알베르 카뮈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전염병은 어떤 영웅이 갑자기 나타나서 퇴치해주는 것이 아니라고. 아마 이 소설에서 일어나는 일들처럼, 전염병이 없어질 수 있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 즉 어떠한 영웅이 아닌 시민들의 노력과 투쟁의 결과라고 말이다. 놀랍게도 비록 등장인물들은 모두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고 자신이 하는 일이 따로 있지만, 결국에는 페스트를 없애기 위해 힘을 합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한 마음’이라는 것이 참 쉽지 않은 것 같다. 모두가 같은 것을 원할 수 없을 뿐더러,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 더욱 의견이 갈라지기 때문이다. <페스트>에서 한 것처럼 도시를 봉쇄시킬 수도 없고, 이렇게 하자고 하면 이쪽에서 반대 의견이 나오고 저렇게 하자고 하면 저쪽에서 반대 의견이 나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잘 모르는 일이나 사건을 겪게 될 때 '왜 이러지?'나 '어떻게 이러지?'와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런데 이 질문을 던지기까지의 과정이 매우 어려운 것 같다. 그러나 이 질문을 던지게 되더라도 '나는 처음 겪는 일인 걸. 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해.'라는 말을 한다. '이해할 수 없다'는 말로 이해의 책임을 모두 그 사건에 전가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 ‘전혀 모른다’라는 생각을 가지고는 아무것도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나의 태도였다.
2. 주인공들은 페스트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처음 <페스트>를 읽을 때는 알지 못했는데 여러 번 읽다보니 이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에 눈이 갔다. 처음에는 그냥 페스트에 맞서 싸우려는 인물들인 줄 알았지만, 다 나름 사회에 있는 직업이나 계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의사가 직업인 리유, 언론인 랑베르, 종교를 대표하는 파늘루 신부 등. 그리고 이런 혼란을 틈 타 돈과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고 하는 캐릭터인 코타르. 이들은 전염병이 퍼지게 될 때에 가장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기관들을 표현한 것 같다.
처음에는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함께 페스트에 대항해야만 이 질병이 끝나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유일하게 예외인 코타르는 페스트로 사람들이 정신없는 틈을 타 암거래를 하며 이익을 챙기려고 한다. 책에서도 이런 인물들이 나온다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그렇다면, <페스트>에서 페스트에 맞서 싸운 리유, 랑베르, 그리고 파늘루 신부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물론 세 번째 범주, 진정한 의사들이라는 범주가 있어야겠지만, 그것은 흔하지도 않고 아마도 어려운 일일 겁니다. 그래서 그 어떤 경우에도 희생자들 편에 서서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로 결심한 겁니다. 희생자들 틈에서 적어도 나는 어떻게든 이 세 번째 범주, 즉 마음의 평화에 이를 수 있는지를 찾을 수 있다는 겁니다. (p.325)
먼저, 의사인 리유는 말 그대로 ‘의사’로서의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페스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리유는 삶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의사가 직업이었던 그는 환자들을 돌아보며 보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수많은 죽음들을 눈앞에서 보게 된 것이다. 삶은 비록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리유는 페스트에 감염된 환자들을 보며 많은 죽음들을 목격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죽음은 익숙해지기가 힘들다는 것을 느낀다.
지금 코로나에서 가장 고생하는 분들이 의료진이니, 페스트를 없애기 위해 노력했던 리유와 비슷한 상황을 겪고 계실 것 같다. 나는 한 때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만약에 내가 코로나 시대 때 의사였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보니, 아마 내가 원했던 것은 진정한 의사가 아니라 의사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멋진 직업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내가 생각하는 의사는 의사 가운을 입고 멋지게 펄럭이며 환자들을 돌보는 그런 의사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가운을 펄럭이는 건 비위생적인 행동이고 그런 의사의 모습들은 정말로 그저 우리가 '보는' 의사일 뿐이었다. 내가 모습으로만 판단하던 의사는 어쩌면 정말로 힘든 직업일 것이다. 리유는 매일 환자들을 치료하며 희망이나 동정 같은 감정을 잊는다. 그리고 너무 많은 환자들을 보니 그에게 페스트는 '반복적인 하나의 추상적 개념'으로 다가온다. 어려운 상황을 많이 겪어서 그런지 그는 페스트의 유일한 해결책은 '성실성'이라고 말한다. 그러며 그 성실성은 ‘자기의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리유 그 자신도 의사로서의 직분을 다하는 것 같았다.
페스트와 지금의 상황이 이런 점들에서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비록 코로나는 백신이 개발되었고 치사율이 훨씬 낮긴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한다. 그리고 꼭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죽을 수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도 내일, 어쩌면 1시간 후에 죽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실들을 알면서도 나는 죽음은 나이가 들면 오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왜 살아가며 죽음이 멀리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일까? 죽음이 멀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죽음을 부정하고 싶은 것 같기도 하다. 멀리 있으니까 아직은 괜찮다는 식으로 이 무거운 ‘죽음’이라는 단어를 뒤로 미루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렵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까? 새로운 글을 쓸 때마다 새로운 주제를 가지고 쓰고 싶지만, 어째 쓰면 쓸수록 지금은 계속 똑같은 길로 가는 것 같았다. 내 생각은 어떻게든 죽음으로 흘러가고 있다. 죽음과 나, 이 두 가지가 지금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이다 보니 굳이 이 것에 대해 쓰고 싶지 않아도 마음이 그 쪽으로 가는 것 같다.
“만일 신부가 의사의 진찰을 받는다면, 그 자체가 모순이라는 겁니다.” 파늘루의 연설을 전해들은 타루는 전쟁 통에 눈이 빠져 버린 젊은이의 얼굴을 보고 나서 신앙을 잃을 어떤 신부를 알고 있다고 말했다. “파늘루 말이 맞아요.” 타루가 말했다. “죄 없는 자가 두 눈을 잃었을 때, 기독교 신자라면 신앙을 잃거나, 혹은 두 눈을 잃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거죠. 파늘루는 신앙을 잃고 싶지 않을 거고, 그는 끝까지 갈 겁니다. 그가 하려던 말이 바로 이거죠.” (p.293)
두 번째로, 개인적으로 페스트에 맞서 싸운 인물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사람은 파늘루 신부였다. 그는 페스트가 ‘오랑 시의 죄에 대한 신으로부터의 벌’이라고 말한다. 십자가를 쥐고 사람들을 불러 모아 페스트가 끝나기를 기도하지만 결국에는 그도 페스트에 걸리고 만다. 그리고 '신부는 신의 뜻에 따르기 때문에 의사의 치료를 받을 수 없다'라고 말하며 십자가를 손에 쥐고 세상을 떠난다. 처음에는 '신부이기 때문에 치료를 받지 않는다'라는 것이 너무 의아했다. 그 사람이 선택한 일이니 무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싶기도 했다. 종교가 죽음을 좌지우지 할 만큼이나 중요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늘루 신부의 사정을 다시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예전에 어디선가 종교가 힘든 사람에게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된다는 것을 들은 적도 있고, 심지어 신부라는 직업은 그런 종교를 대표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파늘루 신부가 페스트가 끝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게 너무 아쉬웠다. 전염병이라는 것이 정말 끔찍한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보통 비극이 아니라면 주요 등장인물을 희생시키지 않는다는 안일한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파늘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상당히 큰 충격을 먹었다. 그래도 만약에 내가 믿는 어떤 종교가 있다면, 파늘루 신부처럼 행동하였을 것 같기도 하다. 페스트가 신이 내린 벌이라면 죽음은 그가 섬겼던 신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일 테니, 신부로서의 바람을 이루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랑베르는 특이한 케이스로 페스트에 맞서 싸우게 된 인물이었다. 그는 파리에 아내를 남겨 둔 채 아랍인의 생활상을 취재하러 오랑 시에 '들렀던' 기자였다. 그런데 갑자기 페스트라는 전염병 때문에 봉쇄된 오랑 시에 갇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정부에 청원을 넣었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 결국엔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덕분에 리유와 합류하여 페스트에 함께 맞서 싸우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봉쇄된 곳에 자신이 갇혔다는 사실에 정말 어이없어 하지만, 곧 자원봉사자로 나선다. 리유를 따라 다니며 도우며 페스트가 꼭 오랑 시의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지금의 팬데믹 상황과 비교해본다면, 외국에서 잠시 한국에 들렀는데 코로나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시는 분들과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특이한 점은 그가 오랑 시에 살지 않는데도, 열심히 도왔다는 점이다. 사실 처음에 그는 리유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나요, 선생님. 절 이해하시겠죠. 전 보도 기사나 쓰려고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 여자와 함께 살기 위해서 세상에 나온 것 같기는 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에 맞지 않습니까?”
그러나 곧 페스트가 '당신들의 일'이라는 말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저는 이곳에서 제가 늘 이방인이고 여러분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겪을 만큼 겪고 보니 제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제가 여기 사람이라는 걸 알겠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 모두의 일입니다.”
대부분 나의 일이 아니라면, 공감을 내비치긴 하더라도 딱히 도우려고 하지 않는다. 나도 그랬다. ‘멀리 어디에 있는 나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다.’라는 기사를 보면 정말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 모두 안전하기를 바라며 기도한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은 ‘여기’에 있었다. 기도는 했지만 마음은 그들을 위해 있다기보다는 여전히 내 안에, 그저 나를 위해서만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랑베르는 리유를 도우며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처음에는 오랑 시에서 도망치려고만 했던 랑베르로서는 엄청난 배움인 것 같았고, 저자가 랑베르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주려 한 것도 이것이 아니었나 싶다.
3. 코로나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코로나를 겪으며 맞서 싸울 생각을 전혀 해 본 적이 없었다. 랑베르처럼 자원봉사자로 나가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았고, 집에만 있으려고 했다. 코로나가 어서 없어지기만을 '바랄'뿐 '행동'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마 '나는 안전하니까'라는 자만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항상 내가 안전한 게 가장 중요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전염병이 돌게 되면 아무리 백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이기적이게 되는 것 같다. 마스크를 쓸 때에도 모두를 위하여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일단은 나만 안전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코로나를 겪게 되며 아마 나처럼 조금은 나도 모르게 이기적이게 행동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남을 더욱 도우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랑베르가 했던 것처럼 말이다. 결국엔 모두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아마 대부분 코로나가 끝나길 바라는 마음이지 않을까 싶다. <페스트>에서도 주인공들은 이 전염병에 관해 모두 다른 태도들을 보인다. 전염병을 피해 안전하게 살아남으려고 도피적인 태도를 하는 사람들, 신이 내린 벌이라며 초월적으로 생각하는 파늘루 신부같은 사람, 그리고 마지막으로 리유처럼 역병에 맞서 싸우고 도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 각자가 전염병을 대하는 태도는 달랐지만 결국에는 끝나기를 바랐다는 한 마음이 모여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이라고 <페스트>에서는 말하는 것 같았다.
<페스트>에서 페스트가 사라지게 된 것은 어떠한 특별한 사건이 갑자기 생겨서가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죽기 시작하며 사라졌던 쥐들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로서 전염병이 끝난 것을 사람들이 알아차린 것이었다. 결국 오랑 시의 봉쇄는 풀리고, 도시가 봉쇄되며 한동안 운행하지 않았던 기차가 다시 움직이는 것으로 이 소설을 끝이 난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코로나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저자 알베르 까뮈(Albert Camus, 1913~1960)는 아버지가 세계 1차 대전 때 전사하여 어머니와 할머니와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처음에 책을 읽으며 질병에 대한 생생한 묘사에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눈을 깜박하는 것도 잊고 후루룩 읽었는데, 그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이 조금 들어간 것 같기도 했다. 인터넷에 막 찾아보니 <페스트>는 세계 2차 대전 때 독일에게 함락된 파리에 대한 은유라는 말도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페스트라는 질병이 정말 말 그대로 질병을 표현한다기보다는 어떤 상징적인 것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 책을 쓴 시기가 세계적으로 전쟁이 일어나던 시기임을 생각하니 페스트와 전쟁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페스트를 갑작스럽게 마주하게 되며 공포감과 두려움에 휩싸인다. 주변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그들이 살던 환경은 모두 바뀌며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비관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죽음, 그리고 노력 끝에 페스트가 끝난다. 그리고 오랑 시에 거주하던 '살아남은' 사람들은 페스트가 끝나자 그 전염병을 하나의 지나간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기쁨에 차마 이런 일이 다시 생길 수도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한다. 이제는 '페스트'가 그냥 하나의 역사로 남아 버린 것이다.
아마 코로나도 비슷할 것 같다. 전염병을 겪은 어떤 과정이 아니라 감염자수는 백신, 병원, 이런 정보들을 위주로 기록이나 통계가 남을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때도 메르스가 잠시 돈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전염병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다시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전염병이 돌고 있다. 그 전에도 여러 전염병들이 돌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걸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을까? 누가 전염병을 퍼지게 만들었을까? 내 생각에 이 질문의 답은 너무 당연하게도 인간일 것 같다. 인간은 여태껏 여러 생물들을 죽이고, 편의를 위해 엄청난 원자력이나 여러 전기를 설치하고, 이미 넘쳐나는 옷이나 생필품을 계속해서 새로 만들고 새로 사들였다. 그리고 이것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실상 멈추지는 못한다. 아마 이런 일들을 반복하다보면 자연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코로나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데 동물들은 사는 환경이 오히려 더 좋아졌다고 한다. 아마 코로나가 끝난다면 나중에 언젠가 새로운 전염병이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 전염병이 끝나면 나중에 또 새로운 것이 생겨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할 것 같다. 안타깝지만 전염병은 우리가 너무 많은 환경오염을 일으킨 결과가 아닐까?
글_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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