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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이우의 다락방

[이우의다락방] 나를 버리기

by 북드라망 2022. 4. 14.

나를 버리기
- 카렌 암스트롱,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

 


 1. ‘없는’ 상태를 찾아 나서다

 

고타마는 말했다. “내가 이런 굴레로부터 벗어나, 태어남이 없는, 늙음이 없는, 아픔이 없는, 죽음이 없는, 슬픔이 없는, 부패가 없는, 최고의 자유를 찾으러 나선다면 어떨까?” 그는 이런 “없는” 상태를 전적으로 만족스러운 상태인 닙바나(‘불어서 끔’)라고 불렀다. 고타마는 마치 우리가 불을 끄듯이, 인간에게 그렇게 큰 고통을 안겨주는 정열, 애착, 망상을 ‘끌’ 수 있다고 확신했다. (카렌 암스트롱,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 푸른숲, p.40)


어떤 자를 믿고 의지한다는 것은, 그러니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종교’를 믿는다는 우리가 어떻게 살지를 정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나의 믿음이 곧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개 종교라고 하면, 그 종교를 대표하는 신이 있고, 그 신을 믿는 것이 떠오른다. 처음에는 불교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붓다는 신이 아닌 인간이었다. 불교는 나에게 당연히 ‘종교’로 다가왔기 때문에, 붓다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새로웠다. 그리고 나는 무엇보다도 어떤 종교를 대표하는 신처럼 되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러 종교에 있는 신들을 보며 본받으면 좋을 만한 모습들이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신’이라는 이름이 너무 거리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 불교가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붓다가 신이 아니라는 것에 살짝 놀라면서도 좀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라는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제목부터 정말 너무 종교적인 책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깨어났다’라는 부분이 조금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어떤 식으로 불교를 소개하는 책일까 궁금했다. ‘스스로 깨어났다’는 말보다는 ‘태어날 때부터 어땠다’라는 것이 신에게는 더 어울린다는 편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타마는 내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달랐다. 고타마는 불교의 창시자인 붓다(깨달은 자)의 어렸을 적 이름이다. 그는 결코 어떤 초월적인 신에게 부름을 받아서 출가를 결심하게 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해탈이라는 경지에 이른 ‘인간’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수행의 길에 한 발 다가서는 질문을 한 것은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그 나이에, 모든 고통이 ‘없는’, 자신에게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그런 경지를 다른 것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의 힘으로 이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처음에는 도대체 왜 출가하려는 것인가 싶었다. 왕자라는 신분, 아름다운 부인, 그리고 어린 아들까지 있는 그가 말이다. 그가 노화나 병듦, 고통 때문에 집을 나갔다고 했을 때 의아했던 것은 나라면 결코 그러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은 사람들이 너무도 탐냈던 것일 텐데 왜 그는 그 모든 것을 쥘 수 있는 자리를 버렸던 걸까? 그가 처음에 했던 질문들은 누구나 던질 수 있는 질문이 아닐까 싶었다. 누구나 살다가 한 번쯤은 고통과 죽음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하지만 그런 질문은 다른 생각에 휩쓸려 사라지고 곧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고타마는 그 질문을 끝까지 가지고 갔기 때문에 깨달음이라는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인도의 다른 현자나 신비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붓다도 인격화된 신이라는 발상은 너무 제한적이라고 생각했다. 붓다는 늘 지고의 존재를 부정했다. 감독하는 권위적인 신 또한 깨달음을 방해하는 또 다른 버팀목이나 족쇄가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 어쨌든 붓다는 차분하고 신중한 태도로 하느님이나 다른 신들을 거부했다. 그냥 평화롭게 마음 밖에 둔 것이다. 이런 믿음에 격렬하게 반대하는 것은 에고를 서투르게 주장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카렌 암스트롱, <축의 시대>, 교양인, p.479)


고타마가 살았던 시대는 기원전 6세기, 즉 ‘축의 시대’라고 불리는 시기이다. 축의 시대에서 ‘축’은 영어로 axial로, 어떤 것의 축이 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만큼 이 시대에 축이 될 만한 중요한 일들이 몰려 일어났다는 뜻인 것같다. 이때는 여러 현자들이 나타난 시기로, 그 때 종교적, 지적, 철학적, 심리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붓다도 그 시대에 나타난 현자들 중 한 분이다. 축의 시대에 인도에서는 카스트 제도에 속하지 않는 새로운 계급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카스트 제도는 인도의 신분을 나누는 제도로, 인도의 모든 활동들이 이 제도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전환기를 살게 된 사람들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아나서는 이들이 생겼다고 한다. 고타마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고타마는 깨달아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붓다가 된 후에도, ‘내가 깨달음을 얻어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나를 믿어라’라고 하지 않았다. 다만, ‘너희도 나와 같이 될 수 있으니 스스로 깨어나는 자가 되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붓다 자신이 하는 말을 무조건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사실인지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확인해보도록 이끌었던 사람이다.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하게 그 사람의 말을 따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직접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멋진 것 같았다. 붓다가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들 때문이 아닐까?

 



2. 잘난 붓다, 못난 나?

 

고타마의 눈에는 인간의 삶에서 괴로움의 무자비한 순환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순환은 출생이라는 충격적 체험에서부터 시작하여 ‘노화, 병, 죽음, 슬픔, 부패’로 냉혹하게 이어져간다. 그 자신도 이런 보편적 법칙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현재는 젊고, 건강하고, 잘생겼지만, 앞으로 다가올 괴로움을 생각하자 젊음의 모든 기쁨과 자신감이 사라져버렸다. (카렌 암스트롱,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 푸른숲, p.36)


붓다는 나보다 고작 몇 살 많은 나이 때 여러 질문을 던진다. 나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돌아가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 말이다. 고타마의 아버지는 고타마가 고통을 모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성 안에 늙은 자나 병든 자, 그리고 다른 고통을 겪는 사람을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덕분에 고타마는 곱게 자랐지만 어느 날 성 안에서 늙고 병들어 보이는 노파를 보게 된다. 그는 노파의 모습을 보며 왜 인간은 늙고, 아프고, 병들 수밖에 없는지 질문한다. 인간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없는 걸까, 하고 말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스물아홉의 나이로 출가를 결심한다.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와 비교되는 것 같기도 했다. 붓다는 붓다이고 나는 나이지만 너무 다른 모습인 것 같았다. 자신과 세계에 대한 여러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구하기 위해 떠난 고타마와, 그에 비해 아무것도 정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지내는 나 말이다. 요즘 나는 좀 이상한데, 하기 싫으면서도 하고 싶고, 안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하지만 하기는 싫은 상태이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일단 원래 하던 것들을 다 하고 있긴 하다. 그런데 하면 할수록 내가 너무 놀고 있다는 느낌과, 또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쪽에서는 놀고 싶다는 생각이 올라온다. 그런데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를 보니 고타마는 멋지게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 그리고 요가 수행 고행, 명상 등 온갖 시도를 해보며 깨달음이라는 경지에 이르는 데 성공한다.

나는 머릿속에서는 고타마처럼 멋진 사람이 되는 것을 꿈꾼다. 예전에 의사가 꿈이었을 때는 환자를 보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는데(^^;;) 지금은 그 꿈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의사가 되려면 공부를 잘해야 하는데 세상에 똑똑한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의사는 노력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직업인 것 같았다. 예전에는 회사원은 대체가능한 직업이라고 생각해서 전문 직업을 갖고 싶었다. 예를 들어 내가 정년퇴직을 한다고 치면 내가 퇴사한 후에는 더 능력 있는 사원이 내 자리를 채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대체가능한 직업이 아니라 ‘엄이우’가 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결국에는 예외인 직업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요즘 굉장히 갈팡질팡하는 중이다.

 


3. 낡은 자아 버리기
글을 쓰는 데에 있어서도 그랬는데, 처음에 시작할 때는 온갖 있는 척을 다하며 쓰려고 했다. 처음에는 새 글을 쓰기 위해 더 생각을 하기가 싫어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나 써본 글의 주제를 가지고 재사용해서 쓰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붓다라는 분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나, 자아, 그리고 상相 같은 것에 대해 글을 적어보았는데 쓰고 읽어보니 도통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있어 보이는 척은 다 한 글쓰기였는데 적고 보니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 내 생각이 뭔지 도통 모르겠는 글이었다. 이런 것이 반복되다보니 글을 쓰기도 싫어졌고 써도 쓰레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같은 곳에서 맴돌던 내가 이 책에서 꽂힌 문장이 하나 있었다.

 

“나 역시 세상에서 나고 자랐지만, 세상을 초월하였으며 이제는 세상과 닿지 않습니다.” 그는 이 생에서 닙바나를 얻음으로써 인간 본성의 새로운 잠재력을 드러냈다. 이 고통의 세계에서 스스로를 통제하고, 자신을 비롯한 모든 생물과 조화를 이루어 평화롭게 사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요한 면역 상태에 도달하려면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오로지 다른 존재를 위해 살아야 했다. 이러한 자아의 죽음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무시무시하게 보일지 몰라도, 그것은 결코 어둠이 아니었다. 이 죽음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본성을 완전히 깨달을 수 있었으며, 그럼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살 수 있었다. 브라민은 붓다를 어떻게 분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자 붓다는 그에게 말했다.“ 나를 깨어난 사람으로 기억해주십시오.” (카렌 암스트롱,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 푸른숲, p.246)

 

붓다는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오로지 다른 존재를 위해’ 살았다. 그리고 그 결과 자신의 본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말들은 다 그럴듯해 보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기도 했다. 어떻게 자기중심주의를 벗어나 다른 존재를 위해 살 수가 있는지 궁금했고, 본성을 깨닫는 것도 무엇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기중심주의를 벗어날 수 있다면 남을 위해 산다는 말은 이해가 간다. 나의 입장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게 되니 남을 위해 살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나 자신만을 챙기면서 기쁘거나 마음이 가벼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만을 챙기는 것이 나를 가장 기쁘게 해줄 수 있는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다른 한 쪽에서 너무 나만 챙긴 것 같다는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성을 깨닫는다는 건 뭘까? 나는 보통 목적을 가지고 행동을 한다. 그리고 그 목적은 대부분 어떤 욕망 때문에 생겨나는 것인데, 어떤 것을 얻기 위해 특정한 행동을 하거나 아니면 평소에 나답지 않은 이상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런 일들을 계속 반복하다보면 결국에는 원래 목적도 잊게 되고 무엇보다도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도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쩔 때는 내가 누군지도 잊는다. 이럴 때 본성을 잃는다는 생각은 해보았지만 반대로 본성을 깨닫는 상황은 생각해보지 않은 것 같다. 그럼 반대로 본성을 깨닫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잊지 않는 것이 아닐까? 내가 무얼 하는지 알고 있는 상태에 있는 것 말이다.

‘나를 깨달은 사람으로 기억해 달라’는 붓다의 말을 이 책에서 읽는 순간 소름이 돋으면서 나도 저런 멘트를 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싶었다. 너무 있어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수행에 있어서 여러 시도를 해보지만 결국 선택한 방법은 자기중심주의를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나 자신이 거의 세상의 전부라고 느끼는 때가 종종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을 버린다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생각을 하니, 내가 앞에서 말한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은 어쩌면 너무 세계를 자기중심적으로 봐서가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붓다가 한 수행의 시작도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집착을 버리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나의 고민도 ‘나’를 중심에 놓고 생각한 고민이기 때문에 풀리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자기중심적인 것은 모든 것이 나의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버리는 것은 ‘나’가 아닌 다른 여러 것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배려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생각날 때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려고 노력하긴 하지만 인생 내내 남을 배려하며 사는 것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그러려면 항상 마음속에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깨달음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의 낡은 자아를 떠나는 것은 겁나는 일이다. 그것이 우리가 아는 유일한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익숙한 것이 비록 만족스럽지 않다 해도, 우리는 거기에 그대로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 미지의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타마가 끌어안으려 한 거룩한 삶은 그가 사랑한 모든 것과 그의 낡은 인격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뒤에 버리고 떠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전환기를 맞이할 때마다 자기를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움츠러드는 그 자신의 일부(마라로 상징된다)와 싸워야 했다. 고타마는 한 인간으로서 완전히 다른 삶의 방식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자아의 탄생에는 오래고 힘든 노력이 필요했다. 여기에는 또 기술도 필요했다. 그래서 고타마는 그에게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줄 수 있는 스승을 찾아 나섰다. (카렌 암스트롱,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 푸른숲, p.78)


다행히도 낡은 자아를 떠나는 것이 두려운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저자가 말하는 대로 낡은 자아를 떠나는 것이 겁나는 이유는 내가 여태껏 나를 중심으로 살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 상태로 계속 살기를 바란다. 이 사실을 몰랐다면 내가 더 편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붓다는 이것을 무지(無智)라고 불렀다. ‘몰랐으면 좋았을걸’ 또는 ‘그냥 이대로 있으면 안 될까?’라고 생각하는 이 마음이 사실은 나를 갇히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익숙한 것에 남아 있는 것이 차라리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반대로 그것은 나를 가두는 것이었다.

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인 ‘무지’는 사실 전혀 좋은 결과를 불러오지 않는다. 옳고 그른 것들을 판단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무지 속에 갇혀있으면서 낡은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상태에 머무르게 되면 결국 나는 다시 뱅뱅 돌게 될 것 같았다. 고타마도 한 거, 나도 못 할 거 없을 것 같다. 낡은 자아 버리기, 나도 한 번 해보겠다. :)

 

글_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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