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의 쓸모를 찾아서
-이반 일리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나를 쓸모없게 만든다니
예를 들어 동네에 살던 사람이 죽으면 무덤을 파던 이웃들은 전문가 집단의 일원이 아니었다. 그들은 장의사라는 호칭을 만들지도 않았고, 대학에서 자격증을 따지도 않았다. 관을 묻으면 돈을 받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자기들 직업에서 풍겨 나오는 죽음의 냄새를 없애기 위해 라이온 클럽에 외장을 배출하지도 않았다. 반면, 이 시대의 장의사는 전문가이다.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보통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전문가가 되었다. 그들은 장의사가 방부 처리를 하여 시체를 관 속에 넣는 장례가 아니면 경찰을 불러 중단시킬 힘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인간이 필요를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서,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현대의 전문가는 자신들이 공공 안녕을 책임지는 유일한 전문가라고 주장한다. (이반 일리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허택 옮김, 느린 걸음, p.65)
처음에 책 제목을 딱 보았을 때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나는 지금 나 자신이 충분히 쓸모 있다고 생각했고 주변에서도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 어떤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내게 쓸모없음과 있음이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해본다면, 말 그대로다. 쓸모없다고 하면 뭐 다리가 부러진 의자라거나, 아니면 너무 짧은 연필 같은 것들을 떠올렸으니 말이다. 게다가 ‘쓸모없게 만든다’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누군가가 원래 내가 했던 것을 빼앗는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쓸모없다’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쓸모없다고 하면 버럭 화를 낼 정도로 나는 쓸모에 집착한다. 사람에게 쓸모없다고 하는 것은 뭐랄까,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들리기 때문이다. 쓸모없는 것이라고 하면 이상하거나 고장 난 것이 떠오르듯이 그와 같은 의미의 쓸모없음을 사람에 대입시켜 생각했다. 그래서 똑똑한 사람은 쓸모 있는 사람, 그렇지 않고 ‘내 기준에서’ 할 줄 아는 일이 없는 듯한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든다니? 제목도 흥미를 끌었지만 무엇보다도 책이 얇아서 매우 재미있게 읽은 것 같다.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의 저자 이반 일리치의 생각을 정리해보자면, 시스템은 시민이 하던 일을 빼앗아가며 그럴 때 사람들은 무능력해지기 시작한다. 그는 이것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힘이 사라진다’고 표현한다. 이렇게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사라지니 ‘전문가’라는 집단이 생겨난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지고 전문가의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기다 보면 전문가가 하는 것이 아닌 행동은 비전문적인 것으로 분류된다. 다른 말로 하면, 비전문가의 지식은 이유 없는, 말도 안 되는 지식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이 책은 계속해서 전문가와 시스템에밖에 의존할 수 없게 되는 우리의 쓸모없어짐을 적은 것이다.
상품 속에서 필요를 찾다
부자들은 상품 속에 든 필요에 중독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필요가 만든 환상에 마비된다. 사람들이 실제로 필요의 미적분학에 적응하는 순간 다시는 이를 뒤집을 수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만은 않을 것이다. 어느 정도의 수준을 넘어서게 되면, 의학은 무기력과 질병을 만들고 교육은 인간을 파괴하는 노동 분업을 만들어낸다. (이반 일리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허택 옮김, 느린 걸음, p.80)
이 부분을 읽으니 정말 너무 절망적인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에 중독되고 환상에 마비된다니 얼마나 끔찍한가. 누구나 가끔씩은 필요 없는 물건들을 사고 후회하는 일을 하곤 한다. 이런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난다면 필요에 의해 상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일리치의 말대로 상품 속에서 필요를 찾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필요해서 상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상품을 사고 나서 그 안에서 필요를 찾는 것 말이다. 상품이 우리를 편리하게 만들어준 만큼 우리는 그런 상품들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반 일리치는 상품이 필요를 채워주는 것에서 나아가 사람들이 그 상품 없이는 생활할 수 없게 만든다고 말한다. 계속해서 더욱 편리한 삶을 만들어 줄 것이라는 환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래서 상품에 귀속된다는 것이 아닐까?
얼마 전에 우리 집 외벽을 청소했다. 벽돌 사이사이에 이끼가 껴 있어 윗집에서 고압세척기를 빌려 청소했다. 사실 그 전에는 유한락스와 솔을 들고 박박 닦았는데 이번에는 세척기를 써보니 다시는 내가 솔과 유한락스를 들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세척기가 없을 때도 비록 오래 걸리긴 했지만 닦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번 편하게 기계를 사용해보니 정말로 그 기계 없이는 청소를 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없으면 소외된다?
처음에 몇 페이지를 읽고 나서는 ‘설마 설마...’ 했다. 정말로 우리는 쓸모없어지게 되는 것일까? 생각해보니 세탁기 없이 빨래하는 모습이나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고 연락을 주고받는 일은 이제는 상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반 일리치의 말 그대로였다. 의사가 진단해주는 것이 아니면 불법의료기관이라고 칭하고 믿기도 힘들다. 처음에는 없어도 잘 살았는데 생기고 나니 그것 없이는 살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나는 초등학교 때 대안학교를 다녔다. 그 학교는 학생들이 스마트폰, 컴퓨터, TV 등등 여러 전자 제품(?)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핸드폰이 어른들한테만 있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나도 지금 핸드폰을 가지고 있고 이제는 핸드폰이 없는 것은 생각하기도 힘들다. 기능이 별로 없더라도 이 작은 것 하나가 없으면 불안해진다. 그러면 곧바로 ‘예전에는 핸드폰 없이 어떻게 살았나 몰라’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핸드폰 없이 살기가 힘들다는 것을 부정했다. 어쩌면 이미 핸드폰이 나를 무능력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핸드폰이 없으면 연락할 수단이 없어 불안하고 없으면 꼭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이미 밖에 나갈 때도 나는 나의 모든 것을 핸드폰에 의존하고 있었다. 핸드폰 없이는 불안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태가 무능력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가 핸드폰에 계속 의존하는 자체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대안학교를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전학 간 친구들을 보니 모두 결국에는 핸드폰을 사용하고 카톡으로 연락하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나름 ‘동창회’랍시고 전학 간 아이들이 모인 단톡방을 만든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것들도 핸드폰이 있는 친구들 한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보니 서로 만나면 대화에서 소외된다고 느끼는 아이들도 있었다. 분명 카톡이 없었을 때도 만나서 말할 때 즐거웠는데 이제는 그것이 없으면 소외되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다보니 학교에서 금했는데도 몰래 카톡 계정을 만들어서라도 단톡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친구들도 생겼다. 카톡뿐만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는 인스타그램, 또 그 다음에는 유튜브 채널도 구독하지 않으면 친구들한테 잔소리를 들었다.
이렇게 예전에는 전혀 없었던 필요가 어느 순간에 생겨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단톡이 만들어져서 즐겁기만 했다. 연락이 되지 않던 친구들도 다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엄청 싸웠고 복잡한 관계가 있었다. 결국에 나는 완전 큰마음을 먹고 장문의 메시지를 남긴 뒤에 ‘초대 거부 및 나오기’로 단톡을 나왔다. 처음에는 내가 그 방에 있으면서 불안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런데 이반 일리치의 말대로 정말 내가 이 기계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날이 올 것만 같았다. 친구들이 줌 들어와 달라고 하는데 시간이 안 돼서 못 들어가는 것도 미안해서 결국에는 나오게 되었다. 내가 매일 거기에 붙잡혀 있어서인지 나오겠다고 결심을 하는 데에도 꽤 오래 걸렸다. 나갈 거라고 온 가족한테 큰소리쳐놓고 정작 일주일을 고민했던 것 같다. 그만큼 벌써 익숙해져 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익숙해져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 계속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쓸모없다고 느껴지는 상황에 갇히지 않을까 싶다.
전문가는 뭘 하나
현대인은 어디서나 감옥에 갇힌 수인이다. 시간을 빼앗는 자동차에 갇히고, 학생을 바보로 만드는 학교에 잡혀 있고, 병을 만드는 병원에 수용되어 있다. 사람은 기업과 전문가가 만든 상품에 어느 정도를 넘어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면 자기 안에 있던 잠재력이 파괴된다. (이반 일리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허택 옮김, 느린 걸음, p.85)
전문가라고 했을 때 어떤 이미지를 떠올렸는가를 생각해보니, 한 분야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 사람이 떠오른다. 그래서 그 사람이 나보다 그 분야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몸이 아프면 나의 몸 상태를 신경 쓰고 귀 기울이기보다는 먼저 의사를 찾아가는 것을 택한다. 의사가 나 자신보다 나의 몸을 더 잘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일 거다. 이제는 나 자신보다도 전문가가 더 믿음직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전문가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한 분야에 뛰어난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깊이 있게 아는 사람이 많은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정말로 전문가의 역할은 이게 다일까? 우리는 대부분 이렇게 생각한다. 전문가는 우리가 잘 모르는 것을 더 잘, 믿음직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는 전문가들이 실제로 하고 있는 역할의 본질은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무섭게도 전문가들이 하는 일은 그 반대라는 것이다. 전문가는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더욱 필요를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더욱 추가적인 필요를 만들어 낸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요즘은 모두 전문직을 갖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나도 의사가 되고 싶어 했다. 전문가라는 직업이 쓸모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의사가 되고 싶어 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회사원은 다른 사람들로 얼마든지 대체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생각이 틀렸다는 것도 곧 알게 되었지만, 어쨌거나 그 때는 의사라는 직업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반 일리치는 전문가를 전혀 다르게 이해한다. 전문화된 직업들은 자신의 직업이 침해되지 않도록 법제 시스템으로 방어막을 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현실을 ‘인간을 불구로 만드는 전문가의 시대’라고 말한다. 이는 나 자신을 돌아보기 보다는 전문가에게 모든 것을 맡기게 되는 모든 행동들이 지배적인 시대를 뜻한다.
쓸모 있음과 없음의 경계
그러나 위기에는 꼭 그런 의미만이 있을 리가 없다. 관리를 가속하기 위해 무턱대고 돌진하는 것만을 의미할 리 없다. 우리에게 위기는 선택의 순간일 수 있다.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스스로 만든 새장에 갇혀 살았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기적의 순간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미국과 전 세계가 맞닥뜨린 선택으로서의 위기이다. (이반 일리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허택 옮김, 느린 걸음, p.22)
우리 자체의 쓸모는 언제나 있었을 텐데, 없다고 느끼게 되어버렸다. 요즘 사람들은 쓸모를 증명하라고 한다. 그리고 이 쓸모를 증명하지 않으면 나는 더 이상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쓸모없음이 당연해진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반 일리치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시장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자는 것이다. 의존도를 줄이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야 된다. 나는 우리가 시장 의존도가 높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야 알게 되었다. 이전에는 의존도가 높다는 것을 시장에 생산과 소비가 활발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장이 활발하면 경제 성장이 이루어질 거고, 그러면 세상이 더 좋아질 것이라는 표면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전에 <장자>에서 상수리나무와 목수가 나오는 짧은 에피소드를 읽은 적이 있다. 목수 석石이라는 사람이 상수리나무는 쓸모없는 나무라고 한다. 배를 만들어도 가라앉고, 기둥을 만들면 좀이 생기며, 방문을 만들면 진이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때 나무는 자신이 인간에게 무용無用하기를 바라왔다며 자신의 쓸모를 목수의 쓸모에 빗대지 않는다. 이 때 나는 나 자신도 나의 고유한 쓸모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목수와 상수리나무의 쓸모가 각각 다르지만 자신을 쓸모 있음과 없음으로 정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요즘의 나는 사회가 정해주는 쓸모에 맞춰 살려고 하고 있는 것 같다. 전문가라는 직업은 좋은 것이고 대학을 가지 않으면 멍청한 사람, 학위를 따지 않으면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자연스레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나 자신의 고유한 쓸모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 놓고 언제부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계속 이렇게 쓸모 있음과 없음으로 나를 규정하는 것도 이상하다. 이반 일리치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넌 쓸모 있고, 넌 쓸모없어’와 같은 것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는 요즘 사회가 마음대로 정하는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경계를 파삭 무너뜨리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쓸모 있음과 없음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예전에 누군가가 나에게 ‘사회에서 쓸모없는 사람은 정부가 주는 혜택을 받지 못한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마 이 분이 여기에서 말한 쓸모없음은 회사에서 일을 하고 세금을 내는 일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사회가 규정해주는 쓸모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누군가가 나에게 부여해주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의 쓸모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글_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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