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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열의 자기만의 고전 읽기

칼과 바다, 정치사상가 한비자 읽기 (1) : 생애와 저작 ① - 한비, 전국시대 최후의 대사상가

by 북드라망 2022. 5. 6.

칼과 바다, 정치사상가 한비자 읽기 (1) : 생애와 저작 ①

한비, 전국시대 최후의 대사상가



한비의 생애는 사마천의 『사기』 「열전」(列傳)에 기록되었다. 열전 제3편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이 우리가 읽을 수 있는 한비에 대한 최초의 전기다. 분량은 적지 않으나 객관적인 정보는 많지 않다. 한(韓) 나라 공자(公子) 가운데 한 명이라는 것, 형명법술지학(刑名法術之學, 까다로운 말이다. 뒤에 상술한다)을 좋아했다는 사실, 말더듬이라 말보다 글에 더 능했다는 점, 이사(李斯)와 함께 순자(荀子)에게서 배웠다는 기록이 보인다. 마지막에 그의 글을 보고 훗날 진시황이 되는 진왕(秦王)이 만나고 싶어해 한나라를 공격하자 한나라가 한비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왕을 만났다가 이사의 모함으로 죽었다는 얘기 정도가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한비 생애의 전부다. 중간에 한비가 조국 한나라가 쇠약해지는 걸 보면서 문제의식을 가다듬어 저술을 썼다는 학문배경을 비교적 자세하게 적고 특이하게도 한비의 글 「세난」(說難)을 길게 인용한다. 인용이 끼어들어 긴 기록이 됐지만 상세한 전기는 아니다. 전이라는 형식 규정 같은 게 있다면 특이한 전, 혹은 변격의 전이라 할 만하다.


‘한비전’을 읽으면 사마천이 한비를 주목한 이유가 그의 글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게 된다. 한비에 대한 어떤 애정, 불운한 죽음 뒤에 빼어난 글을 남겼다는 동병상련 같은 연민이 ‘한비전’을 남긴 추동력이 아니었을까 상상까지 한다. ‘한비전’을 읽고 나면 한비의 글이 훌륭하다는 인상을 가질 수 밖에 없다. 한 인물의 가치가 사회적 공적[立功]이 아니라 글이 입전[立傳]대상을 만들었다고 할까. 문(文)을 중시한 전통사회에서는 입언立言이 인간의 불후不朽의 업적 가운데 하나였으니 이상하게 여길 일은 아니다. 소략한 전기적 사실은 인간 한비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하지만 한비의 글이 한비를 정확하고 깊게 이해하는 길이라는 사마천의 태도가 느껴지는 데 수긍할 만하다.

 

 

그렇다면 한비의 행적은 사마천의 글을 뼈대로 살을 붙여보는 수밖에 없다. 앞서 말한 대로 한비전은 한비의 글을 중심으로 전기를 구성한 게 분명하다. 전국말기 약소국 한나라에 공실公室의 여러 자식 가운데 한 명으로 태어나 말더듬이로 자랐으니 유세가들이 말로 득세하며 국제정치를 이끌던 시절에 그는 글에 진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공자라면 신하들과 세력을 형성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그렇질 못했다. 약소국의 처지라는 절박한 시대 공기가 그를 부국강병에 대한 사고로 이끌었을 거라는 추측은 단순 논리의 조립에서 그치지 않는다. 비천한 출신의 “이사와 함께 순자에게서 배웠다”[與李斯俱事荀卿]고 사마천은 적었는데 이 사실은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다. 전국말엽, 사회계급의 붕괴가 눈에 띄게 커지면서 새 계층이 등장하고 사(士) 계급의 약진이 두드러졌다는 사실에 대한 한 예증으로서 읽을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옛 시절의 관습도 강력한 위력을 유지했기에 둘이 동등한 처지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단정하는 것도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재미있는 점은 인용한 문장에 이어 사마천은 이런 말을 했다. “이사는 자신이 한비만 못하다고 여겼다.”[斯自以爲不如非] 이 진술은 훗날 한비가 진나라로 사신으로 왔을 때 이사가 질투를 느껴 한비를 자살하게 만들었다는 강력한 암시를 주는 복선역할을 한다. 이사가 예사 인물이 아니었지만 사마천은 한비를 더 높였다. 한비에 대한 사마천의 애정으로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사마천이 한비를 배치한 방식을 눈여겨보자.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이라 했고 「태사공 자서」(太史公自序)에서도 “이이(=노자)는 무의로 스스로 변하였으며 청정으로 스스로를 바로 잡았다. 한비는 맡긴 일과 실제 한 일을 따져보고 세와 다스림의 원칙에 따랐다. 그래서 노자·한비 열전을 지었다”[李耳無爲自化, 淸淨自正;韓非揣事情, 循勢理, 作老子韓非列傳]라고 했으니(까다로운 개념어 가득한 어려운 글이다) 두 사람의 전기를 쓴 게 확실하지만 글을 읽어보면 노자와 한비 사이에 두 사람이 더 있다. 장자莊子와 신불해申不害. 사마천은 노자와 장자를 한 쌍으로 엮어 흔히 노장老莊으로 일컫는 도가계열의 흐름으로 파악하는 한편, 신불해를 한비와 한 쌍으로 묶으면서 신불해를 법가의 선구자로서 한비 앞에 서술해 관련성을 주었다고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중간에 두 사람이 끼어들어 노자와 한비의 연속성이 흐려질 수 있는데 사마천은 이를 몰랐을까.


사마천은 노자―장자―신불해―한비를 관통하는 공통요소가 있기 때문에 이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았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그게 무엇일까.

  
노자와 장자를 쓴 사마천은 두 사람을 무위(無爲)라는 말로 설명했다. 신불해에 대해서는 “신자의 학문은 황로에 근본을 두고 형명을 주로 했다”[申子之學本於黃老而主刑名]고 하면서 한비를 논할 때도 “그의 귀착점은 황로에 근본을 두었다”[其歸本於黃老]고 썼다. 황로학(黃老學)은 무위를 근원에 둔 정치사상으로 전국시대 중기에 발생해 전국 말기에서 한나라 초기에 성행했던 큰 세력임은 널리 알려졌다. 사마천은 노자를 황로지학의 비조(鼻祖)로 놓고 한비를 황로학의 공로자로서 함께 묶었던 것이다. 사마천이 살았던 시기, 황로학이 왕성해 영향력이 컸음을 반영한 사마천 당대성으로 파악한 전기라고 읽을 수 있다. 노자에서 한비자에 이르기까지 통치사상, 현대어로 정치사상의 흐름이라는 관점에서 이들을 한 그룹으로 꿴 것이다.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서력 전(前) 221년. 사마천의 『사기』 완성은 한무제 때인 전(前) 96년. 한비는 진시황의 천하통일 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사마천은 대략 120년 전에 살았던 한비를 기록했다. 사마천이 가진 자료는 한비가 쓴 글과 전해오는 이야기가 전부였을 것이다. 사마천은 객관적 정보는 기본 사항만 기록하고 그의 글에 집중해 한비를 조명했다. 한비는 글을 읽어야 이해할 수 있으며 그의 사상을 조망할 수 있다, 는게 사마천의 태도로 보이는데 당연한 말인가? 그의 글에는 한비 개인의 이야기, 생활모습 따위는 들어가 있지 않다. 우리가 읽는 『한비자』는 개인 저술가 한비가 쓴 글이지만 그는 사회적인 이슈에 몰두에 한 사회를 유지하고 지속할 수 있는 원리를 발견하고자 문제의식을 첨예화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한비의 작업은 간단치 않다. 그는 원시법가라고 할 수 있는 정(鄭)나라의 오랜 전통과 한(韓)나라의 학통을 이었으며(신불해는 정나라 사람으로 한나라에서 벼슬했다.) 순자(荀子)에게서 현실감각을 익혀 당대를 보는 폭넓은 시야를 갖게 된다. 순자 문하에서 이사와 같은 대정치가가 나온 것은 순자의 현실통찰력을 보여 주지만 동시에 순자의 학술적 깊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서양에서는 순자를 아리스토텔레스에 비유해 학문의 집대성자로 일컫는다. 순자의 문하에서 가장 유명한 두 사람이 나왔으니 정치 쪽에서는 이사가 현실적인 승리를 보여주었고 학문 쪽에서 대성한 사람이 한비다. 이사가 한비보다 못하다고 여겼던 부분은 학술적인 측면을 말한 것이었다. 순자의 학문은 한편으로는 유가의 정통을 이어 통일제국 한(漢)나라의 사상과 학술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이루지만 그 전에 한비라는 걸출한 사상가를 탄생해 전국시대 마지막을 장식한다. 그는 전국시대 최후의 대사상가였다. 어떤 점이 그러할까? 

 

글_최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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