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공생모색야생여행기] 인류학, 타인의 삶이 아니라 나의 무지를 알아가는 공부

인류학, 타인의 삶이 아니라 나의 무지를 알아가는 공부

탁실라, 되찾은 인류의 기원

    레비 스트로스의 열대 우림 방문은 종결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고향으로 돌아갈 일뿐이겠지요. 그런데 『슬픈 열대』의 마지막인 제9장의 배경은 그가 출발했던 장소 파리가 아니라 아시아입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마지막 장에서 두 곳의 장소를 선택해서 자신의 여행기를 마무리하는데요, 하나는 탁실라 유적이고 다른 하나는 미얀마 챠웅의 작은 불교사원입니다. 둘 다 산업문명을 싣고 질주하는 유럽이나 석기시대의 감성의 원시부족이 살아가는 장소가 아닙니다. 더 들어가면, 사실 이 장소들은 ‘아시아’라고도 할 수 없는데요. 탁실라는 고대 문명의 유적지이고 챠웅 사원 역시 정신없는 도시생활과는 거리를 둔 한적한 수련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시아’라고 하면 떠올리게 되는 중화제국이나 유교문명과 상관있는 도시도 아닙니다. 문명도 원시도 아닌 곳으로서의 아시아, 과연 레비 스트로스가 돌아가고자 하는 장소는 어디일까요? 열대의 가장 깊은 곳까지 이르려고 했던 레비 스트로스에게 이제 남은 과제는 무엇일까요? 챠웅 사원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시 말씀드리기로 하고요, 먼저 레비 스트로스가 왜 탁실라를 여행기의 마무리 장소로 선택했는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탁실라는 현재의 파키스탄 북서부, 카슈미르 산악지대의 기슭에 위치한 라왈핀다(Rawalpindi)와 폐샤와르(Peshawar) 사이에 있는 고대 유적지입니다. 제가 언뜻 검색을 해보았는데 지금도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은 아닌 것 같았어요. 그 점은 레비 스트로스가 방문했을 무렵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탁실라가 철로로부터 수 킬로미터 떨어져있는 곳이었다고 하면서, 그곳을 방문하기 위해 기차에서 내려 버스라든가 말 등을 바꾸어 타면서 힘들게 이동해야 했다는 것을 은근슬쩍 암시합니다. 참말로! 레비 스트로스는 어디 편한 길은 결코 들어가지 않으시는 분인가 봅니다. 소들을 몰면서 늪지대와 우림과 초원 사이를 헤매고 또 헤맨 탐험길을 레비 스트로스는 자신의 일상이라고 보는 것도 같습니다. 
    문득 『슬픈 열대』를 시작하던 초반의 몇몇 장면이 떠오릅니다. 브라질에 막 도착했을 때였는데, 그때에도 레비 스트로스는 남들 다 가는 유명한 관광지를 찾아가기보다는 상파울로의 구도심처럼 켜켜이 세월이 무차별적으로 녹아있는 장소를 혼자 찾아가곤 했습니다. 말들과 소떼, 카누와 비행기,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움직이고자 했다는 점도 레비 스트로스답지만, 어딘가 오래된 장소, 수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욕망과 상황을 안고 통과한 장소. 그래서 상이한 기억들이 잠들어 있는 건물이나 골목 여기저기야말로 레비 스트로스가 좋아한 장소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고보면 레비 스트로스는 일어났다 스러지고, 나타났다 없어지며 하는 시간의 변화를 느끼고 그 안에서 사색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같습니다. 
    그런데 왜 탁실라여야 했을까요? 탁실라 유적의 기원은 기원전 5세기 무렵까지 올라갑니다. 이 무렵은 소위 ‘축의 시대’라고 불립니다. 인류사에서 화폐경제의 발달과 불교 기독교 등 보편종교가 출현한 시대이고 영적으로도 물적으로도 큰 전환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지중해의 고대 그리스 지방에서는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가 막 자연철학에 힘쓰고 있었고, 중국에서는 노자와 공자, 인도에서는 붓다가 만물의 이치에 대해 큰 가르침을 설파하고 있었습니다. 탁실라에서는 그 무렵부터 현장법사가 방문하게 되는 7세기까지 쉼 없이 인류의 고대 문명과 종교가 발흥하고 사그라져 갔습니다. 탁실라는 보통 쿠샨 왕조(A.D 78~226까지 존재한 북서 인도에서 중앙아시아에 미치는 왕조)라든가 뒤이은 굽타 왕조의 영광 때문에 불교 유적지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실은 조로아스터교의 페르시아라든가, 중앙아시아 초원문명의 기수인 파르티아인 스키타이인도 이곳을 거쳐 간 적이 있었어요. 계곡에서는 고대 그리스문화와 불교문화가, 다양한 아시아대륙의 전사들이 쉼 없이 힘을 겨루고 우정을 나누가 하는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혼합된 거대한 문명의 에너지는 이슬람의 침입을 받아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지요. 오직 기독교만이 그곳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탁실라에서 무엇을 보려고 했던 것일까요? 『슬픈 열대』의 1장부터 8장까지 레비 스트로스는 마치 마법융단을 타고 지구를 돌 듯 유럽에서부터 남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도처의 장소들을 광대하게 공간적으로 비교하는 여행을 했습니다. 반면 탁실라가 상징하는 것은 시간의 고고한 깊이입니다. 그 자리는 초목이 전무하고 온갖 문명의 발자국만 어지러이 남겨져 있었지요. 인류의 근원은 폐허의 모습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거의 텅 비어 있다시피한 탁실라를 높고 먼 곳에서 바라보며 그 위에 세워졌던 문명을 하나하나 상상해보았습니다. 모든 영화(榮華)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전 과정이 그의 마음속에서 파노라마처럼 연출되었겠지요. 그 웅장한 위용이 떠오르는만큼 그 쇠락이 주는 허무함은 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인류의 운명이겠지요. 모든 문화가 결국은 무로 돌아갑니다. 근본적으로 생각하면 어떤 탄생도 어떤 성취도 소멸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인간만의 운명이 아니라 만물의 운명이지요. 레비 스트로스는 문명사적 관점에서 인류의 유구한 세월이 갖는 의미를 이해해보려고 했습니다. 

 


만성적 고향상실증을 앓는 무함마드

    그런데 레비 스트로스는 여기서 또 하나의 이유를 덧붙입니다. 탁실라의 폐허는 단지 시간에 의한 자연스러운 영고성쇠라기보다는 이슬람교에 의해 문명의 교류가 끊긴 탓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는군요. 레비 스트로스는 열대로 들어가기 전에 이미 상이한 문명 안에서 작동되는 기본적 형식논리를 분석하고, 그 최후의 형태로서 카스트제도를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제4부 「대지와 인간」). 그가 보기에 인도의 이 완고한 신분제도는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들을 역할별로 차등하게 구별한 뒤 그 자리값 안에 영원히 붙박아두고는, 인간적 삶의 생기를 견고한 제도의 틀로 찍어내리누르는 것이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이 카스트 제도를 당시 유럽의 나치즘과 비교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첫 번째 열대 탐험 뒤에 바로 학자로서 자리를 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나치즘이 광포하게 맹위를 떨치게 되자 유대인이었던 그는 유럽에서 목숨을 부지하기조차 힘들었어요. 미국으로 쫓겨가야 했던 그는 나치즘을 통해 전개되는 독일민족주의의 끔찍한 배타성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치즘의 추종자들은 우월하고 순정한 독일 문명을 재건하고자 불순한 존재들을 색출 박멸하는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독일문명이라고 하는 정체성을 구축하는 일은 끔찍한 타민족 혐오로 즉각 이어졌고 그 결정판이 바로 아우슈비츠였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탁실라에서 나치즘이 보여준 광포한 자민족중심주의를 다시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2차 세계대전 전의 나치나 과거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나무라기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4부 「대지와 인간」에서 카스트로 부패해가는 인도를 자본주의를 절대화하는 유럽문명의 최후로 읽었던 것처럼, 레비 스트로스가 탁실라에서 보는 것은 동시대 유럽 특히 프랑스의 자문화중심주의입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나치즘이 지나간 후임에도 또 다른 얼굴을 한 자기 우월적 집단의식이 싹튼다고 생각했습니다. ‘프랑스 문화’라는 이름으로 프랑스적인 고상함을 옹호하는 파리의 지식인들, 예술가들 때문입니다. 어떤 외연을 갖더라도 ‘내-문화’의 자명함과 절대성을 확신하는 순간, 그러한 태도는 ‘타-문화’를 나의 것보다 불확실하고 열등한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곧바로 작동시키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레비 스트로스는 바로 그런 태도가 자기 안에 있음도 정면으로 직시합니다. ‘서적 편중적인 태도’, ‘공상적이고 이상주의적 사고법’, ‘문제를 책상 위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단순한 낙관성과 완고함’. 앞서 레비 스트로스는 ‘열대’를 다르게 정의했었지요. 레비 스트로스에게 ‘열대’란 남아메리카 아마존의 원시림이 아니라 인류가 근원적으로 마주한 창발하는 생명력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랬던 것처럼 레비 스트로스는 ‘이슬람’이라는 말도 다시 정의하기를 시도합니다. 여기서 ‘이슬람’이란 마호메트를 믿는 특정한 종교라기보다는 ‘자기’를 절대시하기에 급급한 완고하고도 자폐적인 자기중심주의를 지칭하는 말이 됩니다. 
    이런 ‘이슬람’의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은 그들의 조형예술 거부입니다. 이슬람교도들은 거의 경멸에 가깝게 조형예술을 비난하곤 합니다. 왜냐하면 조형은 종교적 교리를 단순한 우상으로 전락시키기 때문입니다.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에 가면 종종 마호메트를 비롯한 교단의 성인들 이력이 그려진 성화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얼굴을 다 가리고 있다고 하지요. 이슬람은 이런 우상숭배를 철저히 배격하면서 교단의 가르침을 절대적으로 실천하려고 한다지요. 그러나 레비 스트로스가 보기에 그것은 지역주의였습니다. 바꾸어말하면 가문중심주의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자기들끼리만 어울리고자, 자기가 갖고 있는 것만 보호하고자, 푸르다(purdah)라고 하는 여성격리 관습을 고수하면서 자기 집 울타리만을 고집하고 외부와의 소통을 거절하는 태도입니다. 

 


    『슬픈 열대』를 조금 벗어난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런 지역중심주의의 정도와 수준을 잘 보여주는 예가 바로 살만 루슈디(1947~)에게 가해졌던 파트와(fatwa)입니다. 살만 루슈디는 영국계 아랍 작가입니다. 그가 1988년에 발표한 『악마의 시』에는 무함마드를 성인이 아니라 세속적인 사람처럼 묘사한 대목이 나옵니다. 이슬람 시아파의 수장 호메이니가 이것을 무함마드에 대한 모욕이라고 보았지요. 그래서 전세계 무슬림들에게 신성을 모독한 자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자신들만큼 무함마드를 공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가 믿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는 다는 이유로, 다른 가치를 믿는 한 사람의 예술가를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다니요? 파트와 때문에 살만 루슈디는 그 이후 십 여 년을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조지프 앤턴이라는 이름으로 숨어 지나게 됩니다(살만 루슈디,『조지프 앤턴』(문학동네)참고). 레비 스트로스는 이처럼 ‘남을 남인 채로 두는 공존의 기술’이 전무한 이슬람을 비판합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이렇게 ‘남을 남인 채로 두는 공존의 기술’이 전무한 사람들에게 별명 하나를 붙여줍니다. 아니, 병명(病名)을 하나 붙여줍니다. 그들은 ‘만성적인 고향상실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지요. 이 지점에서 우리는 레비 스트로스가 왜 고향인 프랑스를 보여주는 것으로 『슬픈 열대』를 끝맺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기원을 특정한 장소, 특정한 역사와 연결시키면서 출신을 향수하려는 사람들은 아픈 것입니다.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같은 고향을 갖지 않은 자와 자신을 차별적으로 분리하려는 편집증자가 되니까요.  
    레비 스트로스는 『친족의 기본구조』(1949)라는 책을 발표하고 나서 현실의 원시부족을 탐방하고 그들의 습속을 정리해서 발표하는 인류학 연구는 더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의 대상을 누구나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이해시킬 수 있는 수단이 인간에게는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정체성을 밝히고 정리한들 아마존 인디언 부족들의 삶도 다른 모든 문명과 마찬가지로 스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스러지지 않더라도 정체성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문화적 의식구조는 반드시 타자를 내치는 실천을 필요로 합니다. 탁실라의 폐허는 고정된 것, 확실한 것, 모든 자명해 보이는 것들의 무참한 운명을 잘 보여준 셈입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인간이 물질적으로 구축한 문명의 여러 산물을 정리하는 작업에는 회의적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대신에 인류의 사고방식에 어떤 공통적 작동논리가 있는지를 탐구하기로 했던 것이죠. 모든 문명의 기본적 구축과정, 모든 인간이 자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쓰는 사고의 형태, 바로 ‘야생의 사고’말입니다. 
 


숲에서 만난 붓다

    이제 레비 스트로스가 『슬픈 열대』를 마무리하는 두 번째 장소로 이동하겠습니다. 미얀마 국경의 시골 챠웅의 작은 절입니다. 이 절은 검소하고 정갈하게 승려들이 정진하는 장소입니다. 역시, 누구나 알만한 거대한 불교 유적지가 아닙니다. 레비 스트로스가 챠웅으로 이동한 것은 ‘이슬람’식 고향상실증을 넘어설 길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레비 스트로스가 모스크를 어떻게 묘사하는지 읽어보겠습니다.  

 

타지마할에 대해서 사람들은 ‘대리석의 꿈’이라고 평하고 있다. 이 베데커(Baedecker) 안내서의 표현은 매우 깊은 어떤 진실을 감추고 있다. 무굴인은 자기들의 예술을 꿈꾸었으며, 또 문자 그대로 ‘꿈의 궁전’을 창조한 것이다. 그들은 건조한 것이 아니라 꿈을 그대로 베껴 옮긴 것이다. 그 결과 이들 기념 건조물은 그 서정성에서나, 트럼프놀이 카드나 조개껍질로 만든 성과 같은 가운데가 빈 모양으로 말미암아 보는 이들로 하여금 동요케 만드는 것이다. 대지에 묵직하게 고정된 궁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 드물고 견고한 재료의 덕분으로 존재에 도달하려고 헛되이 애쓰는 모형 같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735)   


    모스크는 공허한 망상의 궁전이군요. 그렇다면 챠웅은 어떤 모습일까요? 레비 스트로스는 모스크에 대해서는 외양을 간단히 설명하면서 그 전체적인 인상이 주는 위화감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챠웅에 대해서는 다르죠. 챠웅은 그가 발바닥으로 걷고 손으로 더듬으면서 온몸으로 호흡하는 성소입니다. 지나치게 화려한 모스크에 비하면 더없이 간소한 것이 또 챠웅이고요. 간소하지만 그곳에는 많은 화상이 있었습니다. 모스크에서 화상은 우상숭배 때문에 금지됩니다. 그러나 불교 사원에서는 화상(畫像)이 우상을 대체하면서 그 수를 한없이 늘릴 수 있습니다. 화상 하나하나가 붓다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붓다의 말씀이 구석구석 음미되겠지요. 무엇보다 레비 스트로스는 챠웅의 승려에게 오래 눈길을 줍니다. 

 

마룻바닥은 굵은 대를 세로로 켜서 엮은 것이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맨발로 계속 지나다닌 까닭에 반들반들해져서, 일종의 카펫보다도 부드러운 촉감을 주고 있었다. 그곳은 또 조용한 헛간 같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으며, 건초냄새가 났다. 그 단순하고 넓은 방은 내버려진 어떤 건초창고였는지도 모른다. 침상에 깔린 짚으로 된 매트 곁에 서 있던 두 사람의 승려가 보여주었던 예의바른 태도, 제식에 필요한 모든 장식물들을 조립하거나 제조하는 데 쏟던 감동적인 헌신과 주의, 이 모든 것들이 나로 하여금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하나의 장소에 대한 어떤 개념을 정확하게 지닐 수 있도록 해주었다.[737] 


    두 종교 사원은 왜 이렇게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하나는 한낱 대리석의 꿈에 지나지 않는, 사방이 꽉 막혀있는 차갑고 거대한 빈 방입니다. 다른 하나에는 작은 방방마다 불상이며 탱화가 가득하고, 간소하기 이를 데 없는 제구를 다루는 정성스런 손길이 거의 헛간이나 다를 바 없는 공간을 성스러운 온기로 채웁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결정적 차이를 두 종교 성인의 모습으로 다시 비교합니다. 둘 사이에는 단 하나의 공통점밖에 없었습니다. 둘 다 신은 아니었지요. 마호메트는 네 명의 부인을 둔 호전적이고 힘이 센 남자였습니다. 반면 붓다는 순결했고 어딘가 여성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지요. 그들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호메트를 추종하는 자들은 아내를 두꺼운 천으로 꽁꽁 감싸고 가족이 아닌 자들은 만질 수도 볼 수도 없게 만들지요. 아내를 얻으려는 사나이는 그녀의 아버지의 집에 침입자로 들어갈 수밖에 없고, 그가 가정을 꾸린다면 이제는 어떤 침입자도 막아야 하는 억지를 부려야 합니다.   
    붓다의 제자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머리를 깎고 가족 없이 정진합니다. 불교의 승려는 세속의 여성과 마찬가지의 일을 합니다. 스님들은 사원의 마루를, 거의 헛간이나 다름없이 간소한 공간에 대단치 않게 놓여 있었을 온갖 제식 도구를 최고의 정성을 기울여 닦고 마련하며 부처님에게 경배를 드립니다. 그들의 기도는 과연 누구를 위한, 인류의 어떤 성취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한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기식자, 수인으로서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 성인 듯 보이니까요. 레비 스트로스는 경배하는 승려들의 성스러운 태도를 보면서, 여성과의 융합, 인류와의 융합, 어머니에 대한 감사와 사랑으로 돌아갈 길을 닦는 불교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 승려들의 스승인 붓다가 진정으로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이 지난한 여행의 의미도 천천히 음미해보게 되지요. 8장의 초반에 여행이 어서 마무리되기를 바라면서 권태와 답답함을 토로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로 말입니다.  

 

결국 내가 경청하였던 대가들로부터, 그 사상을 읽어보았던 철학자들로부터, 조사해보았던 사회들로부터, 그리고 서구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과학으로부터 나는 무엇을 배워왔던가? 내가 배웠던 것은 만약 그것들의 끝과 끝을 연결시켜본다면, 현자(賢者)의 나무 아래에서 그 현자의 명상들을 재구성하는 한두 개의 단편적인 교훈에 불과하다.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애착을 지닌 대상을 파괴하고, 그 대상을 전혀 성질이 다른 대상과 대치시킨다. 그 다른 대상 또한 파괴되어버리고, 우리로 하여금 세 번째 대상을 필요로 하게 만든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우리는 그 유일한 영속적 실재에 도달하게 되며, 이 실재 가운데서는 ‘의미’와 ‘의미의 부재’ 간의 모든 구별이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이었다.[738] 

 

    탁실라가 보여주듯이 결국 무너지고 말 문명, 끝내 사라지고 말 이 모든 시도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레비 스트로스는 붓다가 강조한 ‘무지’를 음미해보았습니다. 무지에 관해 설파했던 이 위대한 종교는 모든 것의 무의미를 주장했던 것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하지 않음, 지(知)와 무지(無知)의 사이를 가르는 구별 자체를 넘어갈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불교는 무지를 부정하지도 않지요. 의미와 무의미를 가르는 분별에 대한 부정은 보다 작은 의미로부터 보다 큰 의미로 나아가는 일련의 단계들 가운데 맨 마지막에 위치하는데, 우리는 그 각각의 단계들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레비 스트로스가 인류학자가 된 것은 이기적이고 퇴폐적인 유럽 문명에 신물이 난다며 ‘다르고 새로운 것’을 만나기 위해 열대에 발을 내딛었을 때부터였습니다. 그러나 그 암흑의 핵심 한 가운데에서 찾은 것은 숲을 마주한 한 사람의 인간 즉 인류의 한 존재로서의 자기였습니다. 유럽인이라는 것도 열대인이라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창발하는 문제들 속에서 자기 번뇌를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 가야 하는 가련한 인간에 불과한 것이지요.  우리는 단지 자신의 해결방법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어리석었는지를 계속 보고갈 뿐입니다. 내가 시도하고 얻은 성취와 실패는 결과적으로 나의 무지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인류학자에게 의미 있는 대상은 저 밖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남의 타-문화가 아니라, 다른 삶을 바라보며 자기 삶의 어리석음을 깨달아가고 있는 자기여야 하는 것이지요. 인간에게는 겨우 그것밖에 알지 못했던 자신의 유한한 경험을 계속 넘어가는 것, 무지한 자신을 계속 깨 나가면서 최후의 깨달음에 이르는 것 외에 다른 운명은 없습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레비 스트로스는 비로소 편안하고 깊은 한 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지금에 이르게 한 그 모든 사람들, 사건들, 어떤 것도 부정할 필요가 없었거든요. 그는 무지를 깨 나가는 긴 여정 속에 자신이 이미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챠웅 사원을 나오면서 자신이 만물과, 온 인간들과 같은 운명의 수레바퀴 속에서 함께 부딪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새롭게 느꼈습니다. 최고로 훌륭한 인간도, 그러한 인간들의 문명도 없다. 다만 우리는 최후의 무를 향해 함께 걸어가는 중이다! 숲의 인간은 무수한 타자들과 공생의 지혜를 발휘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공생의 첫걸음은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글_오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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