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공생모색야생여행기] 레비 스트로스 『슬픈 열대』- 열대의 깊이 포식의 넓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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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의 깊이 포식의 넓이 


1. 열대는 깊어

레비 스트로스는 카두베오족과의 만남을 뒤로 하고 좀 더 깊은 열대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잠깐, ‘깊다’가 무슨 뜻일까요? 위에서부터 바닥 혹은 바깥에서부터 안까지의 거리를 의미할 수도 있고요. 은유적인 의미로 생각이 신중하거나 그 내용이 갖는 중요함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레비 스트로스에게는 이 깊이가 좀 다른 의미로 체험된 것 같습니다. 레비 스트로스에게 ‘깊어짐’이란 문명이라고 하는 높이에 이르지 못하는 야만의 저 낮은 상태로 내려간다는 뜻이라기보다는 한 존재가 경험할 수 있는 관계의 광대무변(廣大無邊)함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레비 스트로스가 말하는 관계의 엄청남에 대해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레비 스트로스가 탐방하는 두 번째 부족은 보로로족입니다. 남비콰라족과 헤어진 뒤에 그는 보로로족을 만나기 위해 볼리비아와 맞닿은 도시 코룸바에 먼저 들어섭니다. 코룸바로부터 쿠이아바는 일직선으로는 겨우 400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았지요. 그런데 1935년 무렵에 비행기를 이용하기는 어려워서요 강이 유일한 교통수단이 되고 있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도 강으로 이동합니다. 제가 구글맵으로 이동 시간을 따져보니 현대에도 비행기 이용은 어려워보였습니다. 자동차로는 14시간 56분이 걸린다고 합니다. 와! 멉니다! 그런데 지도를 언뜻 보니 레비 스트로스가 언급하는 코렌테스 강이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조금 확대를 해보았습니다. 헉! 어머니들의 빠마한 머리카락처럼 꼬불꼬불한 물길이 코룸바로부터 길게 쿠이아바 쪽으로 뻗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와! 이러니 더 멀지요! @.@  
    

배를 타고 어떻게 이 할머니 허리길을 오르락내리락 할 수 있을까요? 레비 스트로스에 의하면 이 강을 통과하려면 ‘에스티롱이스(지그재그)를 멋지게 헤쳐 나가는 기술’[『슬픈 열대』, 386쪽]이 꼭 필요했다는데요, 물길이 얼마나 꼬여 있는지 아무리 능수능란하게 에스티롱이스를 해도 저녁 무렵에 살펴보면 겨우 아침 출발지로부터 몇 미터 거리에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식이라면 배를 탄 것이 아니라 소를 탄 것처럼 천천히 갈 수밖에 없겠지요. 목적지는 참으로 멀었을 것이고 그래서 사람들은 강 둑의 자카레(사람을 헤치지 않는 악어)를 카빈총으로 쏘아 죽이며 심심함을 달래기도 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에도 곧 흥미를 잃었고요. 멀리서는 굽이굽이 흥미진진해 보이지만, 도착할 곳이 따로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루해서 속 터지는 물길이었을 겁니다.  
    그럼 우리의 레비 스트로스는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그는 모두가 열대의 속도에 지쳐가는 와중에 혼자 눈을 크게 뜨고 바쁘게 주변을 관찰합니다. “이 배를 타고 한 항해여행은 정말 멋졌다” 라면서요[385쪽] ^^ 역시 레비 스트로스입니다. 그럼 뭐가 그렇게 재미있었을까요?  

“또한 배는 강 양편의 언덕 위에 있는 숲 속의 나뭇가지들이 수면 위로 뻗어 내리고 있는 사이르 ㄹ헤쳐 나가기도 하였는데, 그런 경우 배의 엔진 소리에 수많은 새들이 놀란다.
  
아라라 앵무새들의 청색·적색·황금색이 번쩍거리는 비상(飛翔), 기다란 목 때문에 마치 날개 달린 뱀과 같은 가마우지, 인간의 울음소리와 매우 닮은 소리를 내는 앵무새와 잉꼬. [중략] 피라냐 낚기는 보다 흥미로운 것이었다. 강변 어느 곳에, 일종의 교수대처럼 생긴 것에 고기가 걸려 있는 커다란 살레데이루(건어장)가 있었다. 나무로 된 선반 아래에는 뼛조각이 땅바닥에 흩어져 있었는데, 자줏빛을 띤 이 뼛조각 위로 독수리들이 맴돌았다. 이 도살장 아래의 100여 미터까지의 강물이 붉게 얼룩져 있었다. 갑판 위에서 낚시줄을 던지기만 하면, 미끼를 달지도 않은 낚시가 수면에 채 닿기도 전에 피라냐떼들이 황금빛 몸체를 번쩍이며 낚시에 달려들었다. 그러나 낚시꾼들은 이 피라냐를 다루는 데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왜냐하면 피라냐에게 한 번 물리기만 해도 손가락이 잘려 나가기 때문이다.[『슬픈 열대』, 386~387쪽]


어떠세요? 흥미진진하신가요? 저는 하나도 재미가 없더라구요. 가마우지, 앵무새. 독수리. 피라냐? 결국 ‘새’ 그리고 ‘물고기’ 아닙니까? 게다가 신선한 사건이라고 해야 고작 낚시입니다. 이러니 아마 저는 레비 스트로스와 같은 배에 타고 있었다고 해도 『슬픈 열대』같은 여행기는 쓸 수 없을 테지요. ‘새란 나는 동물’인 것으로 충분하니까 말입니다.  
    

즐거운 레비 스트로스와 지루한 저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타고난 호기심의 차이? 동식물에 대한 관심의 차이?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문득 레비 스트로스가 남긴 이 모든 문장들이 어쩌면 더 많은 느낌과 정서를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슬픈 열대』는 한국어 번역으로 700쪽이나 되는 대단히 두꺼운 여행기입니다. 이 모든 페이지를 채우는 것은 실로 엄청나게 다양한 명사들입니다. 레비 스트로스에게 ‘새’라는 말은 단지 날개를 단 짐승이 아니라, 먹이와 포식자와의 관계 속에서 제각각 다르게 살아감을 표현하는 존재들을 의미했습니다. 물 속 사냥꾼인 가마우지의 강이 언덕의 싱어 송 라이터인 앵무새의 강과 같겠습니까? 레비 스트로스가 그토록 많은 생명체들을 언급하고 나아가 열대에 둥지를 튼 사람들의 다양한 습속에 주의를 둘 수 있었던 것은 생명은 각자 고유한 방식으로 숲을 겪고 있다는 점을 통찰해서였습니다. 레비 스트로스가 그토록 디테일하게 열대의 구석구석을 포착할 수 있었던 것은 탐욕스럽게 열대의 정보를 긁어모으려 해서가 아니었어요. 그는 열대의 창발하는 생명력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사건의 맥락을 파악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저에게는 바로 그런 통찰력이 없으니 풍경의 세부를 읽어내지를 못하는 것이지요. 흑! 
 

2. 열대, 수많은 나들(selves)이 창발하는 곳 

열대가 깊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여기까지 왔군요. 레비 스트로스는 드디어 쿠이아바에 도착합니다. 남아메리카 최대의 습지 판타날은 어느새 끝나 있었지요. 쿠아이바는 한때 금밭이었던 탓에 백인들이 일찌감치 쓸어버린 도시입니다. 레비 스트로스가 방문했을 당시에는 예전 번창했던 시절로부터는 한참 멀어진 뒤였지만 그래도 영광의 흔적을 도처에서 볼 수가 있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마을 사람들을 관찰하기 위해 선교사나 지사와의 의례를 대충 해치우고 날마다 투르쿠스(브라질에서는 터키인이라는 뜻의 투르쿠스가 아랍인, 레바논인, 시리아인 등의 통칭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슬픈 열대』, 390)라고 하는 레바논 상인의 밀실에 들어갑니다. 거기서 쿠아이바의 은밀한 거래가 이뤄지고 있었지요. 상인이 도매업자이기도 하고 고리대금업자이기도 한 덕분에 레비 스트로스는 주변의 온갖 시시콜콜한 사람살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또 레비 스트로스는 시간을 좀 더 내어 화물 트럭을 타고 부이아바 일대를 횡단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로로족을 향해서, 더 깊은 열대로 들어갈 모든 물품이 마련되자 쿠아이바를 떠납니다. 
    

여기서부터 레비 스트로스는 정말 즐겁다고는 딱 말 못할 온갖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흥미진진한 것들을 쓰기 바빴던 그가, 황당하고 곤란한 일들 앞에서는 어떤 태도를 보일까요? 어제의 길바닥이 오늘 아침에는 홍수로 늪지대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부터 탐사 일행은 진흙탕 위에서 화물 트럭을 몰기 위해 차 두 배 길이만큼씩 통나무 통로를 계속 만들면서 이동해야 했습니다. 모랫바닥이 나타나면 나뭇가지나 나뭇잎을 깔아서 지면을 더욱 다져놔야 했고요, 흔들흔들하는 다리 위에서는 실었던 짐을 모두 내리고 이동한 뒤 다리 건너 편에서 다시 싣기도 했습니다.트럭이 움직일 길을 진흙탕 위에서 깔아가면서 이동하다니! 무지막지한 곤란입니다. @.@!!
    

 

레비 스트로스는 이런 어려움을 통과하며 이번에는 운전사를 관찰합니다. 열대의 운전사들은 이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초조해하는 법이 없었어요. 가장 복잡한 수선도 해낼 수 있었고, 즉석에서 통행로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발이 묶일 때에도 낯선 덤불숲에서 몇 주일씩이나 버틸 수 있었고요. 운전사 중에는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다니는 이도 있었어요. 아무도 그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았는데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지요. 그가 자신의 생명을 매일매일 모험하면서 자유롭게 쓰고 있다는 것을요. 레비 스트로스는 열대의 무자비한 압력 앞에서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는 인간의 놀라운 재치와 인내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레비 스트로스는 저라면 ‘열대’라는 한 단어로 끝냈을 그 시공간의 사소한 변화에도 주의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우리 앞에 전개되었다. 우윳빛이 도는 초록색의 거친 풀들도 땅속의 사암(砂巖)들이 표면에서 와해되어 생겨난 흰색·분홍색, 또는 붉은색의 모래들을 완전히 뒤덮고 있지는 못했다. 이곳의 식물군은 두꺼운 껍질, 천연색으로 광택이 나는 잎, 그리고 가시에 의해서 건기를 견디어내며 1년의 7개월 동안을 지탱하는, 마디가 많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몇 그루의 관목들뿐이었다. 그러나 며칠 동안 비가 내리기만 하면 이 황량한 초원지대는 하나의 정원으로 바뀔 수 있었다. 풀들은 밝은 초록색으로 변하고, 나무는 즉시 흰색이나 자주색의 꽃들로 뒤덮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받는 주된 인상은 하나의 광대무변함이었다.”[『슬픈 열대』, 395쪽]    


이런 변화를 느낄 수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을 글로 쓸 수 있음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레비 스트로스는 방관자가 아니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저 희고 붉은 모래들, 몇 그루 관목들, 흰색이나 자주색의 꽃들이 펼쳐진 새로운 세계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는 광대무변한 풍경의 세부가 주는 감각들을 향해 활짝 자신을 열면서 그들과 얽혀 들어갑니다. 
    

레비 스트로스에게 ‘깊다’라는 것은 열대로 들어갈수록 더 변화무쌍해지는 하늘과 바람, 숲의 기운들과 하나가 되는 일이 아니었을까요? 숲에는 ‘나’와 나를 인정해주어야 할 ‘너’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스치는 수많은 나 아닌 것들이 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그 타자들이 자신의 온 감각을 향해 달려오도록 내버려 두며, 그들 쪽으로 더 다가가지 못해 속상해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열대의 ‘깊이’란 나와 타자 사이에 가능한 광대무변한 관계 전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3. 포식, 얽힘의 총체적 형식

‘우리 관계에 대해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아’ 라고 하는 멘트는 멜로 드라마에 잘 나옵니다. 한 쪽의 연인이 헤어지자고 하는 말이죠. 레비 스트로스를 따라가다 보면 주로 이런 용법으로 쓰이는 ‘관계’라는 말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해보게 됩니다. 위의 용법을 갖고 풀어보자면 관계란 두 사람 사이에 맺은 합의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너와 내가 어떤 좋은 의도를 갖고 평화롭게 사랑이나 우정 등을 나누는 모습이 떠오르지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볼까요? 이번 도쿄 올림픽 경기 종목으로 서핑이 채택되어서 처음으로 파도를 타는 사람들을 화면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우선 파도타기를 평가할 잣대가 있고 경쟁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다른 수상 경기는 모두 인공풀에서 진행되지 않습니까. 제가 주목한 점은 ‘파도를 탄다’고 하지만 과연 사람이 ‘탄다’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서퍼가 아무리 파도를 타고 싶어도 파도의 크기와 세기가 그것을 허락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파도에게 어떤 의도가 있을 수 없고, 파도의 모양을 좌우하는 것은 정말 어마무시한 변수들일 텐데요. 달과 지구의 거리, 바닷속 모래의 점성과 밀도, 대기의 압력과 바람의 방향, 그리고 서퍼의 컨디션 등. 한 번도 같은 모습일 수 없는 파도를 ‘타기’란 서퍼에게 어떤 일일까요? 서퍼가 타는 것은 과연 파도일까요? 서퍼가 보드 위에서 파도와 관계를 맺는다고 할 때 그것은 파도와 서퍼 2자 관계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바다와 보드, 그리고 서퍼가 잘 합의한다고 해서 되는 일은 아닌 것이죠.  
    

서핑 하면 여름이니 겨울로 한번 가보겠습니다. 세종시에는 큰 호수 공원이 있습니다. 겨울 내내 나뭇가지 마다마다에 연이 걸려 있었지요. 연을 날린다고 할 때 ‘날리는’ 이는 누구일까요? 내가 연을 날린다고 연이 날아갈까요? 우선 바람이 맞아야 합니다. 좋은 바람을 맞아 기운차게 쭉쭉 연줄을 뽑아 올릴 때 내 손가락 끝까지 뭔가 묵직하고 짜릿한 긴장감이 전해오지요. 더 높이 더 멀리 가고자 하는 저 연에게도 ‘의지’라고 할 만한 것이 있을까요? 그리고 연줄을 통해 전해오는 이 기운은 바람과 연 중 누가 만든 것일까요? 서퍼도 연 날리는 사람도 파도를 타며 연을 날리며 더는 인간 그 자체로는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다시 열대로 돌아가겠습니다. 열대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는 ‘포식’입니다. 열대의 포식에 얽힌 드라마를 따라가다 보면 관계란 절대로 ‘좋을 수만은 없음’을 확실히 알게 됩니다. 관계란 서로가 등가적으로 애정이나 업무를 교환하는 일이 아닙니다.  
    

열대에서는 서로 먹고 먹히는 사이로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외부에서 에너지를 공급받아야지만 신체를 유지할 수 있는 생명체이기에, 존재는 어쩔 수 없이 타자들을 먹어가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각자는 반드시 너에게 의존하게 됩니다. 전세계적으로 인간과 동물이 결혼을 하는 신화가 많이 발견되지요. 곰과 인간이 결혼하는 식인 이런 옛이야기들은 말해줍니다. ‘곰아, 네가 잡아 먹으려는 이 인간은 한때 너의 남편이었단다. 인간아, 네가 잡아 먹으려는 이 곰은 한때 너의 자식이었단다.’ 이런 이야기는 혈연관계로 포식 관계를 감싸 안음으로써 자기가 먹는 것이 결국 자신의 가족이라는 점을 놓치지 않습니다. 자연이라는 먹고 먹힘의 거대한 연쇄 속에서 서로는 피로써 피를 갚는 부채 관계임을 명심하지요. 그래서 동물에게 먹히는 것은 빚을 갚는 일이(한때 내가 너희를 먹었으니), 동물을 잡는 것은 부채가 탕감되는 일이(그때 진 빚을 값기 위해 나에게 왔구나) 됩니다. 이렇게 피의 채무 관계 속에서 서로는 깊이 의존하는 가족이 됩니다.
    

에두아르도 콘(Eduardo Kohn)이라는 인류학자는 이 ‘포식’의 개념을 통해 어떻게 우리가 타자를 경유하면서 자아를 만들어가는지를 설명합니다. 콘의 연구무대도 아마존 숲입니다. 레비 스트로스의 ‘열대’지요. 콘은 아마존 늪지에 사는 재규어들과 그들과 함께 사는 루나 족의 독특한 사냥습관을 분석했습니다. 루나 족은 숲에서 예상치 못하게 재규어를 맞닥뜨리게 되면 반드시 녀석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고 봅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루나 족은 이것을 재규어가 되는 일로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재규어의 눈에 재규어로 비춰져야 하니까요, 만약 재규어가 그를 ‘재규어가 아닌 것’ 예를 들면 한낱 인간으로 본다면 먹어도 될 것으로 이해해버린다는 거지요. 
    

콘은 포식의 회로를 좀 더 크게 그려봅니다. 재규어와 눈빛 교환에 성공한 인디언은 아마 그 국면에서 살아남게 될 겁니다. 그런데 어쩌다 다른 날 숲에서 재규어를 잡을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게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그는 한때 자신이었던 재규어를 죽어야 합니다. 나였던 나를 죽임으로써 나를 살린다? 콘은 우리 각자가 ‘나’라고 하는 독립된 주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나의 혼돈과 나의 소멸이야말로 나라고 하는 것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 양식입니다. 내가 재규어의 관점과 나의 관점을 혼동할 수 있어야 살 수도 있고 사냥에 성공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나로서 붙들어 매주는 ‘고정점’이란 없지요.    
    

그레고리 베이트슨이라는 인류학자는 이렇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자기’를 시작하는가? 어디서부터 자기라고 할 수 있는가? 베이트슨이 들고 있는 예는 지팡이를 쥔 오이디푸스였습니다(『마음의 생태학』). 서퍼에서 보드를, 연 날리는 이에게 연을 분리할 수 있을까요? 관계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이 ‘나’가 고정될 수도 없고 확정될 수도 없다면 관계란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할까요? 콘은 나(자기, self)를 수많은 타자들과의 얽힘이라고 합니다. 관계란 얽혀가는 일이고, 그 함께로서 공생하는 전체로서의 숲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보드이고 파도이고 바람이고 하늘이다에까지 마음이 미치는 것이 얽힘의 최종 형식이 됩니다.  
     

에두아르도 콘의 책 제목은 ‘숲은 생각한다’입니다. 이 제목이 은유가 아니라고 콘은 몇 번이나 말합니다. ‘내’가 ‘타자’와 ‘맺는’ 관계란 없습니다. 내가 타자이고 타자가 나이고 그러한 얽힘과 혼동 속에서 생존의 드라마가 펼쳐질 뿐입니다. 더 오래 더 잘 산다는 것은 이 얽힘의 수준이 높다는 말이 되겠지요. 레비 스트로스 식으로 바꿔 말하자면 더 많이 얽히는 것이 곧 깊어지는 일이 됩니다.     
     

하나 더! 에두아르도 콘이 아주 중요하게 지적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다른 자기들을 알아볼 수 없고 또 그것들과 관계할 수도 없는 무능력이야말로 “모나드적 유아론이라는 고립된 상태”[에두아르도 콘,『숲은 생각한다』, 204쪽]라 할 수 있는데, 이 지경이 되면 숲 속의 악귀가 된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먹힐 수도 누군가를 먹을 수도 없는 고립, ‘나’라고 하는 개체적 고집에만 머무르는 존재들을 숲은 가장 두려워한다지요.  

    

 

레비 스트로스는 기원에 큰 관심이 없는 인류학자입니다. 그는 왜 하필 아프리카에서 현생인류가 출현했을까? 왜 하필 보로로족은 그런 문화를 갖게 되었을까? 등을 질문하지 않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신화학』이라는 책을 시작하면서 인류 신화의 모범으로 보로로족의 신화 ‘새 잡는 사람 이야기’를 다루는데요, 이때에도 굳이 이 신화로 시작할 이유는 따로 없다고 합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호모 사피엔스인 이 인류의 의식 저층에서 일어나는 사고작용에 관심을 둡니다. 보로로족의 옛이야기는 그런 원형적 사고 작용의 한 변용태일 뿐입니다. 
    

그런 레비 스트로스가 왜 자신의 기행문에 ‘슬픈 열대’라는 이름을 붙였을까요? 레비 스트로스에게 ‘열대’는 아마존으로 대표되는 지도상의 장소라기보다는 인류의 근원적 삶의 떠올리게 하는 말입니다. 레비 스트로스가 야생과 문명을 가르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으로 보는 것은 ‘인구수’입니다. 인구수가 증가하면 인류는 직접적으로 타자와 만나는 길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레비 스트로스, ‘다양성의 최적 상태’,「서구 문화 패권의 종말」,『인류학 강의』; 53~59쪽 참고). 레비 스트로스가 보기에 다양성의 최적 상태를 모색해야만 하는 인류에게 인구수가 계속 늘어나는 것은 치명적이지요. 전염병을 비롯한 온갖 문제가 과밀한 인구에 따른 다양성의 최적해 모색의 실패로부터 따라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수렵의 열대에서는 인구를 많이 늘릴 수도 없고 해서 가족의 규모는 작게 만들어질 테고요, 대신 부족이라고 하는 생존 단위가 보다 중요해지게 됩니다. 무엇보다 숲 속의 수많은 동식물들과 직접적으로 먹고 먹히면서 살아야 하다 보니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외부’의 차원이 다채로워집니다. 그러니 ‘열대’란 창발하는 온 관계들의 깊이를 의미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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