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북드라망리뷰대회 당선작] 각자의 완성을 위하여

『낭송 장자』

각자의 완성을 위하여


- 3등 구혜원

 

 

“나는 장자가 버거워!”
“나는 장자가 싫어!” 
(『낭송 장자』, 13쪽)

『낭송 장자』 해제를 읽다가 ‘빵 터진’ 부분이다. 정말 공감되는 반응이기 때문이다. 『장자』는 분명 재밌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나를 홀리는데, 그 다음에 나오는 논리들로 정신을 쏙 빼놓는다.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가는 어린애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홀려 들어갔기에 배신감도 만만찮다. 색깔도 이상하고, 판형도 크고, 본문보다 거기 붙은 해석이 더 어려운 『장자』를 읽으며 얼마나 헤맸던가. 그에 비해 이 『낭송 장자』는 어떤가. 아주 쉽게 『장자』를 읽을 수 있게 번역하고, 익히 알려진 편명 순서에 관계없이 이야기를 배치했으니 그런 ‘배신감’을 느끼는 일은 없겠지! 예상대로, 호쾌하게 “가난한 것이지 고달픈 것이 아닙니다.”(『낭송 장자』, 22쪽)라고 말하는 장자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낭송 장자』는 어떻게 보면 ‘장자’라는 주인공을 소개하고 그가 하는 일대기를 따라가는 것 같아서 처음에는 술술 읽혔다. 하지만 결국 ‘그 지점’이 오고야 말았다. 5부의 제목, “만물은 하나다”. 책장을 넘겨보니 「제물론」 모음이었다. 그래도 번역이 친절하니 손쉽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역시 그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말의 나열들을 나왔다. 결국 나는 별 수 없이 ‘그 말’을 했다. “나는 장자가 버거워!”


환상적인 이야기의 모음처럼 보이는 『장자』는 막상 읽고 나면 왜 이렇게 어렵고 머리가 아플까? 특히 「제물론」은 왜 이럴까? 사실 「제물론」에는 어려운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다. 『장자』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인 ‘장자의 꿈, 나비의 꿈(호접몽胡蝶夢)’이 수록된 편도 「제물론」이다. 알쏭달쏭한 꿈 이야기는 얼마나 생각할 거리를 많이 제공하는가. 다만, 이 환상적인 이야기도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 꿈은 결국 “모른다”는 말로 끝나기 때문이다. 장자가 나비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었는지 누구도 모른다. 이 “모른다”는 말은 이 책에 반복적으로 나온다. 뭘 물어도 『장자』는 “모른다”라고 말한다. 알고 있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을 과연 알고 있는지는 모른다. 누가 ‘옳다’고 판단할 수 있겠는가. 모두가 각자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는 『장자』의 세계에서는 논쟁이나 논증이 무용하다. 

“시시비비의 소리는 대립하는 것 같지만 사실 대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자연의 무한한 경계 속에서 화합시켜 무한한 변화 속으로 뻗어나가게 합니다. 시시비비를 자연의 무한한 경계 속에서 화합시킨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옳다, 옳지 않다 혹은 그렇다, 그렇지 않다와 관련하여, 옳다는 것이 정말로 옳다면, 그것이 옳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논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는 것이 정말 그러한 것이라면, 그것이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논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는 것이 정말 그러한 것이라면,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논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생사도 잊고, 시비도 잊고 경계 없는 세상으로 뻗어나가, 그곳에서 머물도록 하십시오.” (『낭송 장자』, 171쪽). 

이 논쟁 무용론은 처음에 읽었을 때는 멋있었다. 모두를 어둠에 빠뜨리는 논쟁을 멈춰라, 모든 판단에 기댈만한 고정적인 기반은 없다. 모든 사물은 변화하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무엇인가를 판단한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시험 삼아 그럴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곧 ‘버거워’졌다. 장자는 논쟁할 건 어디에도 없다고 하면서, 시험 삼아서라도 계속 말하기 때문이다. 『장자』는 곧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 경지에 대해 말한다. 그게 뭔데? 어떻게 하는 건데? 정작 『장자』 읽기는 논쟁의 피곤함에서 해방되기보다는 『장자』를 그저 상대주의 텍스트로 놓고 싶은 나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피곤한 논쟁을 무화시키는 장자가 더 이해하기 쉬우니까. 그냥, 우리 말 그대로 논쟁도 논증도 없는 상태를 계속 말하면 안 될까? 제발!

어느 날 장자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였습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날아다니다 보니 자기가 장자라는 것도 몰랐습니다. 퍼뜩 깨어 보니 놀랍게도 다시 장자였습니다. 장자가 꿈을 꾸어 나비가 되었는지, 나비가 꿈을 꾸어 장자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장자와 나비는 반드시 구별이 있습니다. 이것을 일러, ‘만물의 변화[物化]’라 합니다. (『낭송 장자』, 173쪽)

하지만 호접몽의 나비는 “마음 내키는 대로 날아다니다” 어느 순간 “퍼뜩 깨어” 난다. 너무나 편안해서 있는지도 몰랐던 자신의 의지처가 갑자기 어색해지고 낯설어 “퍼뜩” 놀라는 지경. 장자는 그것이 “만물의 변화[物化]”라고 했다. 사물이 변화한다는 것은 그저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알게 되거나 긍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대주의는 사물이 계속해서 변화하며 영원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은연중에 ‘장자는 장자, 나비는 나비’라고 확실하게 구분지어 생각하기에 가능한 사고방식이다. 상대주의 안에서 장자와 나비는 분명한 구분이 있고 이런 구분이 있는 차원에서는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퍼뜩” 놀라는 순간, 이것이 다 꿈이 아닐까 하는 순간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나비와 장자 모두 변하게 되는 것이다.

 

이 순간이 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그림자의 그림자[罔兩]”(『낭송 장자』, 172쪽)일 뿐이다. 망량은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실체 그림자에게 그만 좀 오락가락하라고 하는데 사실 그림자 또한 의지하는 것이 있다. 즉 자신이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은 또 다른 것을 의지하고 있는 가변적인 것이라는 우화이다. 망량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 따지고 있는 것. 그런데 만약 자신의 의지처가 사실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나비처럼 “퍼뜩” 깨는 순간이 온다면? 장자의 물화(物化)는 단지 진위,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말로 끝낼 문제는 아닐 것이다. 사물이 변화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은 치열한 실천을 동반하는 문제가 아닐까?


『장자』는 나비의 “퍼뜩” 깨는 순간이 오면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한다. 절대적인 의지처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자만이 거기에 매달리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낭송 장자』의 마지막 챕터 제목에도 ‘자유’가 들어간다. 『장자』를 읽고 있으면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알게 된다. 『장자』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기대고 있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고 그것을 떠나오는 것이다. 그건 ‘꿈’과 같은 의식일 수도 있고 ‘앎’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자유’에 대해 말하는 7부 대부분을 차지한 「응제왕」편에는 그 앎에서 떠나 기뻐하는 사람의 모습이 나온다. 바로 설결이다.


설결이라는 사람이 왕예를 찾아가 네 번 질문해도 전부 대답을 듣지 못했다. 설결은 대답하지 않는 왕예를 보며 마치 원하던 대답을 들은 것처럼 깡총깡총 뛰면서 기뻐한다. 또 여기서도 “모른다”이다. 여기서 설결이 ‘알게 된 것’을 질문하게 되면 나는 결국 『장자』에서 말하는 인위적 구속의 상징인 ‘앎’을 상정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설결이 좋아하며 자기가 겪은 일을 말하자 포의자는 그에게 ‘이제 알았니?’ 라며 핀잔을 준다. 그러면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역대 제왕들의 이야기다. 드디어 「응제왕」에 제왕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제왕에 적합한’ 이라는 제목을 단 편에서 하는 말 치고는 아리송한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다 듣다보면 ‘제왕에 적합한’ 이는 결국 우리가 ‘제왕’이라는 말에서 기대하는 지배자의 모습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너는 이제야 그것을 알았느냐? 그 점에서는 순임금도 태씨에 미치지 못하였다. 순임금은 인(仁)으로 사람들을 다스리니 인심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비를 따지는 데서 벗어나지 못했다. 태씨는 잠들면 편안하고 깨면 무심하여, 다른 사람이 말이라 하면 자기를 말이라 여기고, 다른 사람이 소라 하면 자기를 소라 여겼다. 그러나 그 지혜는 실로 믿음직스럽고, 그 덕은 매우 참되었으니 시비 따위에 빠진 적이 없다.” (『낭송 장자』, 212쪽)


「응제왕」의 ‘응(應)’은 ‘제왕’에 ‘적합하다’는 뜻이기도 하면서 어디에나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자연스럽게 따르며 ‘응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둘 다 말이 되는 것 같다. 자기 자신만 고집하기에 천하는 너무나 거대하므로,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오히려 만물이 그러한 대로 자연스럽게 따르는 자가 적합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장자』에서는 이런 제왕의 풍모를 지닌 자만이 자유롭다고 본다.


아마 우리가 생각하는 ‘적합한 제왕’ 즉 훌륭한 지도자의 모습은 순임금에 가까울 것이다. 그는 인(仁)이라는 훌륭한 가치를 세워 천하를 평안하게 만든 인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장자』는 인(仁)이라는 가치를 품은 인물을 가장 경계한다. 군주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솔선해서 어떤 가치를 내세우고 그것을 사람들이 지키게끔 하는 것은, 접여의 말을 따르면 “바다를 걸어서 건너고 강을 손으로 파내며 모기에게 산을 짊어지게 하는” 꼴이다(『낭송 장자』, 215쪽). 이 두 가지는 불가능할뿐더러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장자』에는 이러한 사람들을 주로 맑은 물에 비유한다. 맑은 거울은 사물이 다가오면 그것을 더 흐릿하게 비추거나 아니면 더 환하게 비추거나 하지 않는다. 요즘 카메라 앱처럼 알아서 자동 보정하는 기능은 조금도 없다. 즉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거나 하는 평가 없이 그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것이다. 『장자』의 성인은 조금의 기준도 없이 세상을 대한다는 것일까? 그런 사람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이 가능할까? 이런 정치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정치와 매우 다른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대선 토론이 있다면 저들이 무슨 비전을 제시하는지 보고, 그가 대통령이 되면 어떻게 나라가 변할지, 어떤 방향으로 가게 될지 생각하니 말이다. 이때의 다스림이란 눈에 보이는 엄연한 변화, 장자가 본다면 인위적으로 억지로 사람들을 몰아가는 “거짓된 덕(德)”(『낭송 장자』, 215쪽)일 것이다.


그럼 『장자』에 나오는 제왕이 한 자리 차지하면 되는 문제일까? 그러니까 태씨가 그랬던 것처럼 소나 말처럼 있으며, 열자가 그랬던 것처럼 돼지에게도 사람 대하듯 밥을 먹이고, 세상사에 초연하면서 자연스럽게 세상이 흘러가도록 하는 ‘적합한 제왕’이 자리면 차지하면 되는 것일까? 하지만 장자는 이런 생각 자체가 명철하지 못한 것임을 혼돈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준다.

남쪽 바다 임금은 숙이고, 북쪽 바다 임금은 홀이며, 중앙의 임금은 혼돈입니다. 숙과 홀은 자주 혼돈의 땅에서 만났습니다. 혼돈은 그들을 잘 대접하였습니다. 숙과 홀은 혼돈의 은덕을 갚을 방법을 의논했습니다. “사람에게는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지요. 이 구멍으로 보고 듣고 먹고 숨을 쉬는데 혼돈에게만 이 구멍이 없으니 이제 이 구멍을 뚫어 줍시다.” 하루에 한 구멍씩 뚫었습니다. 이레가 되자 혼돈은 그만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낭송 장자』, 249쪽)


혼돈의 일곱 구멍 이야기는 『장자』에서 가장 유명한 중 하나일 것이다. 혼돈이 숙과 홀에게 잘 대접을 해주었고, 숙과 홀은 감동을 받아 그에게 보답하기 위해 인간이 그러한 것처럼 보고 듣고 숨 쉴 수 있도록 일곱 개의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리고 혼돈은 혼돈이 아니게 되어 죽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나에게 좋은 것이 꼭 그에게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교훈을 준다. 하지만 이 으스스한 이야기가 자유로움에 대해 논하는 『낭송 장자』 마지막 챕터 마지막 장이라는 사실이 단순히 상대주의적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일곱 구멍이 뚫리기 전의 정황을 보면, 숙과 홀이 그에게 구멍을 뚫은 이유는 혼돈이 대접을 “잘”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혼돈은 숙과 홀이라는 서로 다른 개체가 모두 만족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 아닐까? 이런 면은 『장자』 최고의 매력남 애태타를 떠올리게 한다. 천하의 추남인 그는 누가 오든 순하게 따르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모습으로 만나는 남녀 모두를 포로로 만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혼돈에게 돌아온 보답이 혼돈이 혼돈 아닌 자기와 동일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선의를 가진 두 존재가 혼돈에게 일곱 날에 걸쳐 일곱 개의 구멍을 하나하나 뚫었다는 구절을 상상해보면 상당히 끔찍하다. 


유가에게는 올바른 군주가 자리에 올라 그의 덕이 사해에 흘러넘치게 하면 백성들은 저절로 교화될 것이라는 이상적인 구도가 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것 같다. 그래서 무슨 선거만 있으면 과정상 조금이라도 오점이 있지 않은지 눈에 불을 켜는 것이 아닌가. 맹자는 군주가 덕이 있다면 백성들이 목을 길게 빼고 그쪽을 향하며 도시락을 싸들고 환영하러 나갈 것이라고 했다. 맹자의 입장에서 보면 아름다운 이야기다. 하지만 장자로 가지고 오면 그런 행렬은 덕이 충만한 군주에게 하루하루 구멍을 뚫어 자기와 같아지게 만들려는 무서운 움직임처럼 보일 것이다. 장자는 유가처럼 낙관적이지 않다. 즉 그는 유가와는 다른, 또 하나의 군주 유형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군주가 ‘좀 더 무위자연’ 한다고 해결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그런 비교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앞에서 『장자』 읽기가 어려운 이유는 기대고 있는 것에서 자꾸 떠나라고 등을 떠밀기 때문이라고 했다. 왜 굳이 꿈에서 깨어나야 하고, 인간이기를 포기하며 소나 말이 되는 것에 순응해야 하는가. 안 그래도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장자』에서 절대적인 기준을 버릴 것을 종용하는 이유는 거기에 계속 기대어 사는 것 자체가 말 그대로 위험하기 때문이다. 혼돈에게 뚫린 일곱 개의 구멍은 세상을 그렇게 느끼는 ‘내’가 있게 하여 살게 하고 또 근본을 놓치게 하기도 한다. 숙과 홀의 선의는 누구에게나 매력적이었던 혼돈이 이제 감각하고, 구별 짓고, 숙과 홀이 그러하듯 남과 나를 비교하게 만들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장자는 확실하게 알려준다. 세속의 어떤 훌륭한 가치도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 내가 맞서야 하는 것은 정치의 타락이나 환경의 열악함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집착과 얽매임이라는 것. ‘나’는 어차피 ‘너’에 상대해 존재하고, 그렇다는 건 ‘나’는 어디까지나 ‘너’에 대한 비교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장자』에서는 제대로 살려면 “자기를 바르게 한 후 행동하고 오직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을 할 뿐”(『낭송 장자』, 216쪽)이라고 한다. 자유로움에 대한 묘사 치고 다소 심심하지만 결국 이게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남이 뭘 하는지 신경 쓰지 않으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는 건 얼마나 어려운가. 하지만 이 개미지옥 같은 비교에서 벗어나는 것이 마른 샘에서 “서로 물기를 뿜어 주고 거품으로 적셔” 주며(『낭송 장자』, 181쪽) 서로를 끊임없이 의식하는 물고기 신세보다 단연 낫다. 그래서 장자는 제자를 사이비 점쟁이에게서 구한 호정의 말을 빌려 “세상에 맞서 너를 드러내려” 하지 말라고 했다(『낭송 장자』, 222쪽). 진정한 자유는 결국 내면의 자유를 각자 완성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장자』, 버겁지만, 읽어보자. 각자의 완성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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