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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드라망리뷰대회 당선작] 도전은 『낭송 열하일기』를 싣고

by 북드라망 2021. 11. 24.

도전은 『낭송 열하일기』를 싣고


- 3등 안보나

 


정말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나는 요즈음 한창 ‘인문세(인문 공간 세종)’에서 책 읽기, 글쓰기를 하면서 삶의 지혜를 배우는 중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 글은 다른 선생님들의 글에 비해 너무 부족해 보였다. 나는 책 내용도 이해 못 하는데, 다른 분들은 글을 척척 잘 써내시니 선생님들이 마냥 부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북드라망의 ‘북꼼 리뷰대회’ 소식을 듣게 되었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지만, 글쓰기 실력을 올릴 수 있는 좋은 기회 같아서 나는 인문세 선생님들 몇 분과 함께 리뷰대회에 참가하기로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낭송 Q 시리즈 중 『낭송 열하일기』를 선택했다. 막상 글을 쓰려니 연암 박지원과 『열하일기』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막막해졌고,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평소에도 걱정이 많아서 탈이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새로운 것을 시작조차 못 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새롭고 낯선 도전에는 늘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런 나에게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새로운 여행에 도전했다는 ‘자유인 박지원과 종횡무진 글쓰기’라는 설명은 몹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것이 아마도 많은 책 가운데 『낭송 열하일기』를 택한 이유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자네 길을 아는가?”『낭송, 열하일기』는 첫 시작을 이렇게 연다.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요, 그 길을 몰라서 마구 헤매는 중입니다. 어쩌다 대회에 참가한다고 해서는…….’ 또다시 밀려오는 걱정에 바로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동안 공부하다가 내용이 너무 어려울 때도 과연 제대로 이해하며 읽고 있는 건지?, 글쓰기는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지? 등의 생각들로 마음이 복잡해지곤 했었다. 일상은 또 어떠한가? 매일매일 벌어지는 수많은 문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발생하는 일에 나는 너무 쉽게 흔들렸고, 심지어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도 막연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숙제는 이렇게 해야 맞는 것인지?’에서 시작한 고민은 ‘나는 지금 과연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에 이르기까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런 고민 속에 만난 『낭송 열하일기』의 첫 글귀는 많은 울림을 주었고, 일단 조금씩 읽어보자는 생각으로 천천히 낭송해보았다. 그러다 보니 점차 마음이 진정되며 새로운 질문들이 떠올랐다. ‘도대체 리뷰가 뭐지? 낭송은?’, ‘연암 박지원은 누구지?’, ‘열하는 어디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그는 열하에 어떻게 가게 되었고, 이 글을 쓰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책을 꼼꼼하게 읽고,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아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열하일기』는 부도 명예도 없는 울울한 40세 중반의 연암이 1780년, 청나라의 실상을 체험하고 길 위의 모험을 기록한 기행문이다. 그동안 박지원은 미리 청나라를 체험하고 앞선 문물을 받아들여 배우자는 홍대용, 박제가 등의 친구들로부터 청나라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호기심을 키워왔었다. 그러던 중 건륭 황제의 만수절(70세 생일)의 축하사절단인 팔촌 형 박명원의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그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처음에 사절단의 목적지는 연경(지금의 북경)이었는데, 청 황제의 요구로 갑자기 황제의 피서지가 있는 열하(중국 허베이성 청도 지역)로 목적지가 변경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우연한 사건들을 오히려 행운으로 여기며 6개월에 걸쳐 긴 여정을 이어갔다. 그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보고 겪은 것을 오직 붓, 벼루, 공책을 가지고 일기와 필담 형식으로 생생하게 기록했다. 그 후 조선으로 돌아와 3년의 시간을 들여 『열하일기』를 완성했다. 그는 6개월의 힘든 긴 여정에서도 우연히 벌어지는 사건들을 오히려 행운이라 여기며 청나라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기록했다. 나도 연암의 용기에 힘입어, 이것이 리뷰인지? 아닌지 모를 글쓰기를 일단 시작해 본다. 호기롭게 ‘도전’을 외쳤으나 정작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몰라 고민하는 자가 바라본 『낭송 열하일기』, 연암 박지원, 그리고 낭송. 그 첫 만남과 좌충우돌 분투기를 조금 더 기술해 보겠다.

 


왜 낭송인가?


이 책의 제목은 『낭송 열하일기』다. 그냥 『열하일기』도 아닌, 『낭송 열하일기』. 그럼 우리가 알고 있는 『열하일기』를 읽는 것과 『낭송 열하일기』를 낭송하는 것은 무엇이 다를까? 책의 앞장을 열어보면 우선 낭송 Q 시리즈 『낭송 열하일기』 사용설명서가 친절하게 언급되어 있다. 설명서에서 낭송 Q 시리즈는 ‘낭송’을 위한 책이라고 한다. 그럼 낭송은 무엇일까? 언뜻 생각하기에는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닌 소리를 내어 읽는 것 정도로 이해되었다. 사전을 찾아보니 둘 다 소리를 내어 읽음은 같으나 낭독이 그냥 소리 내어 읽음이라면, 낭송은 소리 내어 읽고 암송하기까지를 목표로 한다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 낭송 Q 시리즈란 또 무엇일까? 낭송 Q는 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의 약자로 큐라스(curas)는 케어(care)의 어원인 라틴어로 배려, 보살핌, 집필, 치유 등의 뜻이 있다고 한다. 호모 큐라스는 고전평론가 고미숙 선생님이 만든 조어로, 자신의 욕망과 호흡의 불균형을 조절하는 능력을 지닌 낭송의 달인을 말한다. 고전을 낭송함으로써 내 몸과 우주가 감응하게 하는 것이 최고의 양생법이자, 자기 배려이기 때문에 낭송의 달인은 호모 큐라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머리와 입이 하나가 되어 책이 없어도 내 몸에서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으로 우주 만물과의 감응이 가능하고 자신을 배려하는 양생법이라고 하니 신기했다. 

 


또한 낭송은 소리의 울림이 호흡을 고르게 하고, 몸과 마음이 평온해지는 최고의 휴식이라고한다. 이 책은 낭송을 잘하면 자신과 우주와의 감응을 얻어 최고의 휴식을 취할 수 있고, 실패해도 낭송과 『열하일기』라는 새로운 세계와 만나는 경험을 쌓는 것일 테니, 마땅히 ‘못 먹어도 고!’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네 길을 아는가?

 

‘자네 길(道)을 아는가?’ 음미하고 낭송할수록 점점 새롭게 다가오는 강렬한 문장이다. 인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토록 찾고 있는 것이 바로 길(道) 아니겠는가? 이 길 하나를 찾기 위해서 지금도 각지에서 많은 사람이 다양한 방법으로 공부하고 있고, 나도 바로 이 질문 때문에 인문학 공부를 시작했고, 『낭송 열하일기』를 새로운 공부의 책으로 선택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열하일기』에서 말하는 길이란 무엇일까? 이 책을 풀어 읽고 『낭송 열하일기』를 쓰신 길진숙 선생님은 소제목에서 ‘길은 이것과 저것 사이에 있다!’라고 말씀하셨고,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 「도강록」 편에서 수역(통역 관리 우두머리) 홍명복에게 길은 알기 어려운 게 아니며, 바로 저편 언덕에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선 길은 이것과 저것 사이에 있으며, 저편 언덕에 있다는 것일까? 글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이 강은 바로 저들과 우리 사이에 경계를 만드는 곳일세.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이란 말이지, 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 또한 저 물가 언덕과 같네.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니라 바로 이 사이에 있는 것이다.”(박지원 지음, 길진숙 풀어 읽음, 고미숙 기획, 『낭송 열하일기』 (북드라망), 24쪽) 


일단 강은 저들과 우리 사이의 경계를 만드는 곳, 언덕 아니면 물, 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도 저 물가 언덕, 길이란 이 사이에 있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그동안의 배움으로 길을 생각해보면, 여행의 시작에서 목적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고, ‘생과 사’ 사이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겠다. 연암과 홍명복은 본격적인 여행을 앞두고 강을 건너며 눈앞에 언덕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우선 눈앞에 흐르는 강을 건너 저 물가 언덕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강물 위에 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길이란 도달해야 할 저 언덕(목적지)이 아니라 지금 자신의 자리와 언덕 사이에서 건너고 있는 이 강 위가 될 것이다. 이것이 연암의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니라 바로 이 사이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길(道)’은 저펀 언덕?

 

앞에서 길은 시작과 끝, 그 사이를 걸어가는 것이라 설명했다. 그런데 연암은 홍명복에게 ‘길이란 알기 어려운 게 아니라 바로 저편 언덕에 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여 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 또한 저 물가 언덕과 같다고 했다. 저편 언덕? 그것은 또 무엇일까? 언뜻 보기에 그것은 마치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진리, 배움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바로 그것, 동양철학에서 도(道)라고 말하기도 하는 그것, 참된 앎, 높은 경지의 깨달음, 논어에서 말하는 군자에 이르는 길, 니체의 초인에 이르는 길……그리고 내가 혼란스러움을 떨치기 위해 공부에 실력이 쌓이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기대하는 그 어느 지점 말이다. 이것과 저것의 사이에 대한 사유의 고비를 겨우 넘겼는데, 바로 앞에서 진리라는 더 높은 고비를 만난 기분이었다.


여기서 잠시, 글의 시작에서 언급된 ‘자네 길(道)을 아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천천히 음미해보았다. 연암은 길을 도(道)라고 하였다. 18세기 문장가인 연암의 『열하일기』 원문은 아마도 한자로 쓰였을 것이고, 그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도(道)를 아느냐고 물어봤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번역하신 분이 한글로 풀어쓰실 때 길이라고 옮기셨을 것이다. 실제로 이 책에서도 ‘길(道)’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도‘道’라는 소리를 가진 한자는 뜻이 ‘길’이므로 이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같은 의미라고 말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다만 우리가 길과 도’를 마치 다른 것이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그 진리, ‘道’라는 것은 다름 아닌 길 위, 시작도 끝도 아닌 그 과정 자체, 길을 걸어감이 아닐까? 내가 우연히 『낭송 열하일기』를 만났고, 리뷰 쓰기를 위해 책을 읽고, 낭송하며, 다시 논해보려고 애쓰는 행위 자체 말이다. 사람들은 흔히 ‘사람의 윤리, 만물의 법칙’은 저 언덕 위에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여기’와 그것을 행하는 존재 자체를 긍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의 윤리, 만물의 법칙은 바로 자신이 걸어가는 이 길 위에 있다. 이러한 생각은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가려져 드러나지 않는 법이지.’라는 말도 다르게 다가오게 해주었다. 우리는 이미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다만 그것이 사람의 어지러운 마음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아, 그토록 헤매며 길을 찾고 있던 셈이었다. 


우리는 삶을 예측할 수도 없고, 인간의 마음은 너무 쉽게 유혹에 흔들리고 위태롭다. 한 마디로 카오스 그 자체다. 그럼 인간은 이런 나약함을 가지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변화무쌍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이 두려움 때문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를 회피하거나 구원을 바라며 진리 그 자체에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아마도 도심은 점점 더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우주는 지금도 제각기 다른 차이를 가진 새로운 미지의 세상과의 만남으로 매 순간 생멸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가 타자를 만나는 순간에야 비로소 나 자신을 볼 수 있다는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자기 자신만을 고집하면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없다. 우리는 마음이 위태로울수록 만물과 접속해야 한다. 이 세상의 일부인 자신만을 고집하지 않고 나와 관계한 만물을 배우고 살아가려면, 얼마나 열린 마음으로 보고 들어야 하는 것인지? 각자에게 주어진 과제를 해나가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긍정하며 살아가라는 니체의 ‘아모르 파티’(Amor fati)가 책을 읽는 내내 많이 떠올랐다. 
 


훌륭한 울음터로다


‘나는 오늘에야 알았다. 인생이란 본시 어디에도 의탁할 데 없이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떠돌 뿐이라는 사실을,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이렇게 외쳤다.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 (앞의 책, 24쪽) 
연암은 넓게 탁 트인 요동벌을 바라보며 인생이란 어떤 커다란 목표가 있고 그것이 이루어져야만 가치 있는 것이 아닌,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살아가면서 슬프면 울고, 즐거우면 웃고, 아프면 아프다고 느끼며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태어나 그것을 크게 한 번쯤 통곡해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더욱이 사람들은 칠정(七情) 가운데 오직 슬플 때만 우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우리는 기쁘고 즐거울 때, 너무 화가 나거나 욕심에 사무칠 때, 사랑함이 사무쳤을 때도 울게 된다. 그는 근심으로 답답한 걸 풀어 버리는 데에는 소리보다 더 효과가 빠른 게 없으므로 근심, 걱정에 마음이 답답하면 한번 크게 울어보라고 했다. 인생이란 본래 하늘 아래 사람으로 태어나 땅을 밟으며 여기저기로 걸어가고, 이런저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니, 미리 두려워만 말고 슬플 때 마음껏 울고, 기쁠 때 마음껏 울고 웃고 자유롭게 살아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공부를 시작하고 조금 더 차갑게 글쓰기를 하고 싶어 노력하고 있는 데도, 기존의 습관대로 쓰게 되어 고민이었다. ‘갓난아기의 꾸밈없는 울음소리를 본받아 손도 펴 보고 발도 펴 보면서 소리를 내어 자기 마음을 크게 펼쳐 보라.’는 구절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세상의 모든 것을 향해 눈과 귀와 마음을 열고 시원하게 말해 보라는 응원의 소리로 들려왔다. 어쩌면 연암도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여행을 통해 만나는 모든 것에 눈과 귀와 마음을 열고 접속했고,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하고, 감격에 겨웠을 때는 한껏 감동하고, 통곡해야 할 때는 맘껏 울음을 터뜨리고, 좋은 것은 좋다, 웃긴 것은 웃긴다고 표현’(앞의 책, 20쪽) 한 것은 아닐까?


연암의 이런 열린 마음은 그가 여정에서 만난 모든 것과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그들의 모습을 그대로 바라보게 했고, 책의 곳곳에 그런 모습이 그려졌다. 이 당시 조선은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으며 청나라에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라고 여기며 조선보다 미개하다고 생각해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중국은 조선에 비해 이미 군사력뿐 아니라 학문, 문화, 제도까지 크게 발전해 있었다. 이에 연암은 청나라의 문물제도를 모두 수용하고 배워야 하며, 크고 훌륭한 문물과 제도를 바꾸려면 작은 습속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의 온돌 구조, 수레, 밭 갈기, 그릇 굽기부터 공업, 상업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배우기 위해 자신이 만난 모든 것을 세세하게 관찰하고 기록했다.


그는 중국을 경유하며 본 성지, 궁실, 사찰, 광막한 벌판, 아스라한 안개 숲만이 장관이 아니라 천하에 쓸모없는 깨어진 기와 조각 하나, 아주 더러운 똥오줌이 오히려 중국 제일의 장관이라고 말했다. 아무리 작고 변변치 못한 것이라도 필요한 곳곳에 고루 활용되어, 깨진 기와로 천하의 무늬를 만들고 똥오줌이 거름으로 쓰였다면 이것이 오히려 더 귀한 것일 수 있음을 말해준 것이다. 그의 이런 행보는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로 공부를 해나가는 과정과 인생을 살아가는 한 걸음, 한걸음의 소중함을 알게 해주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긍정할 수 있는 용기를 배우게 되니 삶의 무게가 가벼워졌다. ‘두려움, 너와 함께 크게 한번 울어보리라!’

 

 

이것은 리뷰인가? 울음터인가? 


『낭송 열하일기』는 나에게 다시 이렇게 묻는다.
“자네, 길(道)을 아는가?”
‘아니요, 저는 아직도 그 길을 잘 모르겠습니다. 무엇이 펼쳐질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냥 그 길을 천천히 가보려고 합니다.’


신축년 10월의 어느 가을날, 나는 우연히 북꼼 리뷰대회를 만났다. 그것을 시작으로 낭송, 『열하일기』, 연암 박지원을 차례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만남은 다시 열하일기를 낭송하면서 조금씩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는 낯선 나와 각자의 숙제로 고민하는 친구들도 만나게 해주었다. ‘그래! 일단 만나보자. 그리고 천천히 걸어 가보자!’ 무엇이 펼쳐질지 모른다는 것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또 다른 세계로 안내해 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 길을 걷다 보면 우리가 궁금해하던 질문에 대한 답과 ‘우리는 함께 걸어가고 있음’의 이야기를 넌지시 들려줄지도 모르겠다. 『낭송 열하일기』는 나에게 연암 박지원의 생생한 이야기로 한번,  낭송으로 한 번 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 당신도 혹시 이러한 미지의 세계와 조우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일단 『낭송 열하일기』를 펴고, 마음이 닿는 한 구절을 낭랑하게 낭송해보자. 그 길을 선택한 당신이 고미숙 선생님이 기획하신 대로 “고전에 담긴 소리를 통해 내가 자연 속으로, 천지가 내게로 오는 ‘천인감응’의 파노라마를 즐길 수”(고미숙, 『호모 큐라스』 (북드라망), 11쪽) 있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한 세계가 궁금하다면, 우선 그 문을 두드려 봐야 하지 않겠는가? 당신의 마음속엔 지금 어떤 소리가 들리는가? 그리고 당신은 어떤 말을 하고 싶은가?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그 길 위에서 무엇을 만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시작함과 나아감의 중요성, 그리고 우리가 이미 그 길을 걸어가고 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낭송 열하일기』를 낭랑하게 낭송하고, 길에서 만난 또 한 분의 새로운 스승 연암처럼 곳곳에 촉수를 내밀고 더듬거리며 그 만남을 기록해보고 있다. 북꼼 리뷰대회의 도전은 『낭송 열하일기』을 타고, 『열하일기』와 연암 박지원, 낭송의 세계로 나를 이끌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 글을 읽게 되는 누군가에게 나의 세계를 조금 열어주는 일일 수도 있겠다.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어쩌면 그 길을 걸어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새로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 겪고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다인 것은 아닐까? 그것이 이번에는 다만 ‘북꼼 리뷰대회’의 이름을 가지고 나에게 우연히 다가왔을 뿐이고 말이다. 마음속에서는 이런 소리가 들려온다. ‘그래, 너는 너의 길을 가고 있구나!’ 그리고 지금 나는 리뷰를 쓰느라 여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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