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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리뷰대회 당선작

[북드라망리뷰대회 당선작] 충만함이 복을 불러오다

by 북드라망 2021. 11. 25.

『낭송 흥보전』
충만함이 복을 불러오다


- 3등 이흥선


『흥보전』에서 놀보는 부자였고, 흥보는 가난했다. 하지만 놀보는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갖기를 바라는 사람이었다. 더 많은 것을 바라기 때문에 채워도 채울 수가 없었다. 놀보는 채워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놀보는 자신의 삶을 결핍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놀보는 가진 것이 많은 가난뱅이다. 우리의 삶도 놀보와 너무나 닮아 있다. 더 많이 갖기를 바라고, 가진 것에 감사 할 줄 모른다. 그래서 충만한 삶을 모른다. 가지 것을 나눈 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남이야 어찌 되든 채우려고만 한다. 채우고 싶은 마음은 결핍만을 낳을 뿐이다.  


반면 흥보는 한 달에 아홉 끼니밖에 먹지 못하는 삼순구식을 하고, 차림새만 봐도 불쌍하기 그지없는 지질이도 가난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가난하면 마음도 가난 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흥보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 누구든 어려운 일을 당하면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즉시 도와주는 행동파다. 굶기를 밥 먹듯 하고, 헐벗어서 추위에 떠는 사람이 자기 것을 선뜻 내어주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배도 부르고 등이 따뜻해야 남을 도울 생각이 든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괜한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흥보는 다르다. 굶기를 밥 먹듯 했기 때문에 굶주림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추위에 떨어 봤기 때문에 추위의 고통 또한 잘 안다. 그래서 나눠 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흥보는 가난하지만 진짜 부자다. 


이번 리뷰를 쓰면서 『낭송 흥보전』을 읽고 새롭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놀보는 마이너스 손이라는 것과 흥보는 마이더스 손이라는 것이다. 놀보 손에 들어가면 채우고 채우려는 욕심 때문에 화를 불러들였다. 무엇을 채우려 해도 줄어들고, 어떤 것이든 망가지고, 생명은 죽었다. 반면 흥보 손에 들어온 것은 남을 도우려는 마음이 복을 불러들였다. 아픔은 치유되고, 부족한 것은 채워지고 있었다. 


마이너스 손, 놀보

놀보 집에 날아든 제비는 여섯 개의 알을 낳았다. 놀보는 빨리 박씨를 얻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조급한 마음에 자꾸자꾸 알을 만지고 확인한다. 이렇게 놀부의 욕심은 조바심을 만든다. 그런 조바심이 다섯 개의 알을 썩게 하고, 단 한 개의 알만 남겼다. 빨리 얻으려는 욕심 에 조물딱 조물떡 너무 자주 만져서 죽이고 말았다. 놀보 손에 들어오면 죽거나, 다치거나, 손해를 본다. 그래서 놀보는 마이너스 손이다.  

“마음 급한 놀보 놈이 시시때때 만져보아 다섯은 곪고, 하나는 까서 날기를 공부하니, 이 흉한 놀보 맘에 구렁이가 찾아와야 쫓아 줄 수 있을 텐데 축문 지어 제사해도 구렁이가 아니 와. 대발 틈에 발이 끼어야 다리 부러질 터인데 밤낮없이 빌어 봐도 떨어지지 아니해. …… 절로 다리 부러지길 기다리면 놓칠까 봐.. 제비집에 손을 넣어 제비새끼 집어내어 그 약한 두 다리를 무릎에 대고 자끈 꺾어 마룻바닥에 선뜻 놓고.”(구윤숙 풀어 읽음,『낭송 흥보전』(북드라망), 125-126쪽) 

욕심은 놀보에게 빨리 얻으려는 조바심으로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게 했다. 제비의 고통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다. 박씨를 얻으려고 자기가 원하는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구렁이를 불러들이려고 축문까지 써서 제사를 지낸다. 구렁이가 와서 제비 다리를 부러뜨려야 자기를 부자로 만들어 줄 박씨을 얻을 수 있다. 놀부는 이런 식으로 남의 불행까지도 불러들인다. 그러다 마음먹은 대로 안 되니까 이제 제 손으로 멀쩡한 제비 다리를 부러뜨렸다. 제비가 고통을 당하거나 말거나 자기 욕심만 채우면 그만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놀부는 흥보보다 더 부자가 되고 싶은 욕심만 가득하다. 그렇게 갖은 악행을 저질러서 얻은 박씨를 심었다.
   
“덩굴이 자라나서 어디에 가 턱 걸치면 모두 무너지네. 사당에 걸쳤더니 사당이 무너져서 신주가 깨어지고, 곳간에 걸쳤더니 곳간이 무너지고, 알지도 못한 새에 온 동네 집집마다 쭉쭉 뻗어 턱 걸치면 값을 물고, 그럭저럭 보상한 게 삼사천 냥 넘었으니 놀보가 박의 해를 입는 구나”(구윤숙 풀어 읽음,『낭송 흥보전』(북드라망),132쪽)  

그래서 그런지 놀부가 심은 박도 닿기만 하면 사당이든, 곳간이든 모두 부숴버린다. 박을 타기도 전에 놀보의 재산을 축내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은 정신 차리라는 신호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놀보는 욕심에 눈이 멀어서 아무것도 느낄 수도, 볼 수도 없었다. 집집마다 삼사천을 보상해줘도 손해가 아니다. 박만 타면 더 많은 재물이 나와서 충분히 보상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더 좋아질 것이라는 미래에 대하 부푼 희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놀보의 허망한 희망이었다. 박에서 나오는 것마다 놀보의 재산을 빼앗아 가고, 할아버지가 종살이를 했었다는 근본까지 다 털렸다. 박에서 나온 것 중에 놀보의 욕심과 쌍둥이처럼 똑같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하늘을 능멸하면 재산을 빼앗아 가는 주머니 ‘능천랑’이다. 이 주머니는 무엇이든 넣으려고 하면 주둥이를 쫙 벌리고 받아들인다. 그런데 아무리 넣고 넣어도, 심지어는 산을 덩어리째 넣어도 오므리면 아무것도 넣지 않은 예전과 똑같은 모습이다. 


놀보가 제비에게 저지른 행동이 바로 하늘의 뜻을 능멸한 것이다. 억지로 자기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멀쩡한 제비다리를 부러뜨렸다. 이것이 하늘을 능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놀보는 제비에게 고통을 주면서까지 자기 욕심을 채웠다. 더 많이 갖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욕심은 남의 고통 따위에 관심이 없도록 만든다. 놀보의 욕심과 능천낭은 정말 똑 같이 닮았다. 


마이더스 손, 흥보

흥보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가난한 자기 집에 날아든 제비가 반갑기만 하다. 제비는 여섯 개의 알을 낳았지만, 구렁이의 습격으로 하나만 남는다. 하나 남은 제비가 날기 연습하다가 대발 틈에 발이 빠져서 거의 죽게 된 것을 흥보가 살려낸다. 흥보는 그런 사람이다. 흥보는 죽어가는 것도 살려내는 마이더스 손이다.

“네 목숨 가엾구나. 큰 뱀 만나 살았기에 명이 긴 줄 알았거늘 다리가 부러지는 이 환란은 웬일이냐....칠산에서 잡은 조기껍질 잘 벗겨서 양다리를 돌돌 말고, 오색실로 찬찬 감아 제 집에 넣었더니 십여 일이 지난 후에 양다리가 다 나아서 날아갔다 날아오며 노는 거동 보기 좋다.” (구윤숙 풀어 읽음, 『낭송 흥보전』, 북드라망, 68쪽)

큰 뱀을 만나서 환란을 겪은 제비를 안타까워하는 흥보의 마음이 듬뿍 느껴진다. 흥보는 다리가 부러져서 다 죽게 된 제비에게 덕담을 한다. 죽을 고비를 넘겼으니 명이 길 것이라고 제비를 살리고 싶은 흥보의 진실 된 마음이 전해진다. 흥보는 제비의 고통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즉시 치료에 들어간다.


굶어 죽을 지경인데도 제비의 치료가 우선이다. 배고픔을 잊으려면 먹어도 시원찮은 조기껍질로 제비를 치료해 주었다. 이것은 상대의 아픔에 깊게 공감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흥보는 제비의 아픔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고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제비가 다 낳아서 날아다니는 것만 보고도 흥보는 너무나 좋아 한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귀하고 귀하다. 어느 하나 소홀히 대하지 않기 때문에 흥보에게 복이 굴러들어왔다. 제비를 살리려는 마음이 복으로 이어진 것이다. 고마운 흥보에게 제비는 박씨를 물어다 줬다. 그 박씨를 심었더니 박 넝쿨이 구멍 뚫린 지붕위로 올라갔다.

“살랑바람 단비까지 시절이 좋은 지라 밤낮으로 자라나서, 삿갓 같은 넓은 잎이 온 집을 덮었으니 비가와도 걱정 없고, 닻줄 같은 큰 넝쿨이 온 집을 얽었으니 큰 바람도 걱정 없어 흥보가 벌써부터 박의 덕을 입는구나. (같은 책, 77쪽)


이제 구멍 뚫린 지붕, 언제 무너질지 모르던 허술한 집도 끄떡없다. 박을 타지도 않았는데 박이 벌써 도움을 준다. 제비를 한 번의 치료해준 것이 엄청난 복을 불러들였다. 박 하나에 보물이 하나씩만 나오는 게 아니었다. 세상에 좋은 것이란 좋은 것은 다 따라 나왔다. 『낭송 흥보전』을 처음 읽었을 때는 쌀이 가장 먼저 나온 줄 알았다. 배고픔을 가장 먼저 해결해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 리뷰를 쓰기위해 책을 꼼꼼히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첫 번째 선물은 명약들이었다. “홍보씨의 지극한 덕 금수까지 미쳤으니 그저 잊지 못하리라. 하여 온갖 명약을 보내셨소.” 죽어가는 사람은 살려내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벙어리가 말하게 하고, 귀머거리 귀를 여는 약들이다. 고통 받는 존재들의 아픔을 최우선으로 돕고 보는 흥보의 마음과 똑 같다. 명약들이야 말로 누군가를 살리는 기운을 가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흥보에게 오는 모든 존재를 다 건강하고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


놀보의 결핍, 화를 불러들이다 

『낭송 흥보전』은 읽으면서 놀라웠다. 전후 맥락 없고, 뜬금없이 놀보의 심술 타령과 흥보의 착안 마음씨 타령이 첫 대목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놀보는 심술이 많고 나쁜 사람이고, 흥보는 남을 도와주는 착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이 읽어보니 놀보와 흥보 사람 됨됨이가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심술타령을 읽다보면 놀보가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면서 즐기는 것 같다. 자기만족이 없기 때문에 남을 괴롭히는 것 같다. 그런 놀보에게 결핍이 느껴졌다. 채워도 채울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보고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채운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보의 심술은 황당하고 기가 막혀서 상상을 초월한다. 종류도 어찌나 다양한 지 무려 세 페이지나 된다. 놀부의 심술 타령을 듣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혀를 끌끌 차다가도 헛웃음이 나기도 한다. 

“길가는 과객양반 재워줄 듯 붙잡다가 해가 지면 쫓아내기.…… 사소한 씨앗 싸움 살벌하게 부풀리기.……배 앓는 놈 살구 주고, 잠자는 놈 뜸질하기.…… 상주 잡고 춤추기와 여승 보면 겁탈하기, ……지관 보면 나침반 뺏고, 의원 보면 침 도둑질.……목공장이 대패 뺏고, 초라니 패 떨잠 훔치기, 옹기 지게 받쳐 놓은 작대기 걷어차기.(같은 책, 21-22쪽) 


놀보는 짓궂게 남을 괴롭히고 남 잘 되는 걸 보면 시기하는 못된 마음을 가졌다. 이것이 놀보의 심술이다. 놀보는 상대를 곤란에 빠뜨리고 쩔쩔 매게 하고 그 보습을 즐긴다. 기가 막히고 환장할 노릇이 아닌가? 놀보는 사람들의 돈벌이 수단이 되는 도구를 감추고, 깨뜨려서 생계를 완전히 막아 버리기도 한다. 지관의 나침반을 감추고, 의원의 침을 도둑질하기도 하고, 옹기를 받쳐 놓은 지게 작대기를 걷어차기도 한다. 사람들의 생계수단을 막는다는 것은 굶어 죽으라는 것과 진배없다. 심술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심지어는 자라는 생명을 방해하고, 죽이는 짓도 한다. 임산부의 배를 차질 않나, 어린 아이 불알을 말총으로 매놓기도 한다. 혼사를 방해하고 새로 시작하는 사람들의 앞길도 막는다. 다른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고, 생계를 막고,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의 길을 막는 사람이 바로 놀보다. 그래서 놀부에게 오는 모든 생명은 살아가기 어렵다. 이런 행동은 자연의 흐름을 막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른 사람의 삶을 가로막고 심술을 부리며 더 갖기를 바라라는 놀보야말로 결핍덩어리다. 그 결핍을 채우려고 놀보는 흥보보다 더 많은 재산을 얻으려다 화를 불러들였다. 마지막에는 그 화를 막으려 해도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타지도  않은 박이 저절로 타져서 장비가 나왔다. 그리곤 이제까지 저질렀던 놀보의 악행을 꾸짖는다. 박을 타던 몇 사람도 밟혀 죽었다. 그 많은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흥보집에 얹혀사는 신세로 전락시켰다.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이 얼마나 큰 화를 자초하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다. 


흥보의 충만함, 복을 부르다 

흥보의 착한 마음씨 타령은 놀부의 심술타령보다 짧다. 사람을 놀려먹는 심술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데 반해 왜 착한 마음씨 타령은 적은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사람에게 심술이 더 많아서 그런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짧다고 우습게 볼일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어떤 조건에서도 도움이 필요한 상대에게 즉각 도움을 주는 따뜻한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었다. 흥보에게는 모든 존재가 소중하다. 누구라도 필요한 사람에게는 도움을 주는 사람이 흥보다. 이런 흥보의 마음에서 충만함이 느껴진다.  

“길에 흘린 보물 보면 지켜 섰다 주인 찾아 주기.…… 길 잃은 어린아이 제 부모 찾아주고,…… 주막에서 병든 사람 본가에 기별하기. 경칩부터 경계하여 산 동물은 죽이지 않고, 어린 나무 꺾지 않기”(같은 책, 24쪽)

 

흥보는 굶는 날이 밥 먹는 날보다 많은 사람이다. 길에서 보물을 보면 냉큼 집어다 배를 채울 수도 있건만 욕심내지 않는다. 오히려 지키고 서서 주인은 기다린다. 자신의 배고픔 보다 보물을 잃어버린 사람의 마음을 헤아림이 더 큰 사람이다. 길 잃은 어린 아이부모를 찾아주는 일 만큼 고마운 일이 또 있을까. 부모를 찾는 아이의 심정과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마음이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그 두려움을 알기 때문에 아이의 부모를 찾아준다. 흥보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 겪는 고통처럼 느끼는 공감의 신체를 가졌다. 그래서 모든 생명을 아끼고 존중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진짜 사람이다.


이런 흥보의 마음은 사람에서 동물, 식물에 이르기까지 전달된다. 봄에는 동물도 나무도 죽이거나 함부로 꺾지 않는다. 경칩에 깨어난 동물들은 알을 낳고, 어린 나무는 자라서 아름드리 큰 나무가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 시작되는 봄기운에는 생명을 죽이지도 꺾지도 않는 것이, 바로 자연의 거스르지 않는 삶이다. 그렇기 때문에 흥보는 살아있는 모든 존재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기를 비롯해서 자기와 관계하고 있는 것은 어느 것 하나 소홀이 대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어떤 계산도 없다.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행동에 옮길 수 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돕고 본다. 흥보는 역지사지가 가능한 사람이다. 자기가 귀한 만큼 남도 귀하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마음이 충만하다. 이런 충만함이 복을 불러들였다. 

“건너 마을 건너가서 네 백부님 오시라 해라. 경사를 보았으니 형제 불러 볼란다.……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 박홍보를 찾아오오. 나도 이제 내일부터 자네들을 먹일 테오.…… 여보시오 부자님들, 부자라고 유세 말고 간난타고 타박마소. 어제께까지 박홍보가 문전걸식 일삼더니, 오늘날 부자 되니.”(같은 책, 93쪽)


흥보는 박속에서 무수히 많은 보물들이 쏟아져 나와서 부자가 되었다. 그런데 많은 재물을 혼자 독식하지 않는다. 자신을 그렇게도 구박하고 내쫓기까지 한 형 놀보를 불러들여 나눠준다. 그뿐이 아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모든 사람들을 자기의 집으로 불러들여 먹이고자 한다. 그리고 당부의 말도 전한다. 부자라고 유세 말고 가난하다고 타박 말란다. 문전걸식하던 사람이 언제 부자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이 말 참으로 절묘하다. 부자도 가난도 뒤바뀔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부자도 영원한 가난도 없다. 그래서 흥보가 얻어먹고 살아도 기죽지 않고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존재하는 모든 것을 소중하니까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만 있을 뿐이다.

흥보는 얻어먹어야 하는 할 때는 기꺼이 얻어먹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더 이상 얻어먹고만 살 수 없다는 것이 느껴졌을 때는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매품팔이라도 해서 먹고 살기로 마음먹는다. 거기에는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하거나 초라하게 생각하는 마음은 없었다. 단지 먹고 살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렇게 흥보는 자신의 조건을 온전히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흥보는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 ‘한 끼 밥 말고는 바라는 것 없이 충만하게 살았다. 흥보는 충만하기 때문에 나눌 수도 있다. 나눌 줄 아는 사람이 진짜 부자다. 제비 덕에 부자가 된 흥보는 가난하고 굶주린 백성들 다 오라고 한다. 자기가 가진 것을 남에게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다. 이런 마음이기 때문에 흥보는 얻어먹고 살아도 창피하거나 결핍으로 생각지 않았다. 그것은 삶의 조건일 뿐이었다. 조건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사람은 결핍을 느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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