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북드라망리뷰대회 당선작] 나의 글, 인생 문제 풀이집

『낭송 이옥』
나의 글, 인생 문제 풀이집

 


- 3등 이은희

 


나는 공동체에서 책을 읽고 일 년에 서너 차례 글을 쓴다. 글쓰기는 늘 고역이다. 책을 읽을 때는 좋은데 그걸로 뭘 써내라고 하면 고개부터 절레절레 젓는다. 우선 쓰기가 어렵다고 핑계를 대는데 그 속내는 솔직히 쓰는 건 귀찮고 싫다는 마음이다. 매번 ‘안 쓰면 안되나?’라고 소심하게 생각만 한다. 어렵게 쓰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면 그다음 고민은 뭘 쓸지 정하는 거다. 책은 재밌었고 새로운 걸 알게 됐고 평소의 내 생각과 다른 생각을 하게 되어 기뻤다고 하면서도 막상 쓰려면 글감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책이 좋다고 떠들어놓고도 쓸 게 없다? 사는 게 힘들다고 징징대면서 쓸 게 없다?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일이란 말인가. 친구들이 자기 일상으로 말과 글을 엮어내는 걸 보면 샘이 난다. 하지만 막상 내 얘길 쓰려고 하면 글감으로 삼기에 사건들은 너무 찌질한 것 같고 이런 걸 써도 되나 하는 마음이 든다. 그래서 찾는다. 좀 더 그럴듯한 사건을. 난 이렇게 늘 끌려가듯 글을 쓴다. 자발적으로 글을 쓴 적은 한번도 없다. 책에서 읽어서 알고, 들어서 안다. 읽었으면 써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글쓰기를 배워보려고 얼마 전 도서관 문화프로그램에서 운영하는 글쓰기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말과 글, 읽기와 쓰기에 관한 이반 일리치의 책을 읽고 한 장 분량의 짧은 글을 써내는 거였다. 역시 글감을 잡느라 가장 많은 시간을 썼다. 그때 내가 썼던 건 왜 나는 내 말이 없이 상투적인 말, 책에서 읽은 말, 관념적인 말에 쌓여 사는가였다. 내 입에서 나가니 내 말이라고 안 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내 말 같지도 않은 말과 글을 쓰며 늘 찜찜함이 남을까 생각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약속된 시간이 다 되어 도서관 프로그램이 끝나며 그 문제에 대한 내 글쓰기는 끝났지만 이번에도 이 문제를 제대로 파고 들어가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찜찜함이 남아 있던 차 북드라망 리뷰쓰기 공고를 만났다. 물론 이것도 자발은 아니었다. 누군가(?) 쓰자고 했고 난 써야 했다. 난 망설임 없이 『낭송 이옥』을 골랐다. 몇 년 전 한 친구가 이 책으로 리뷰를 썼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취해서 쓴다”라는 말이 그 순간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첫 장부터 읽기를 취하는 것이라고 하고 쓰기를 토하는 것이라며 어찌 쓰지 않을 수 있겠냐는 이옥의 말에 그의 글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곧 이상했다. 이걸 왜 썼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글들이 속속 등장했기 때문이다. 대의를 담고 있는 것도 아니고 가르침도 의미도 없어 보이는 내용과 글들, 그리고 그것들을 그림을 보여주듯 지나치게 자세하게 나열하는 이옥의 글에 당황했다. 책을 잘못 선택한 것 같았다. 하지만 곧 다시 궁금해졌다. 이옥은 왜 이런 글을 썼을까. 도대체 이옥에게 글은 무엇이기에 과거도 관직도 다 버리면서까지 자신의 글을 쓰고자 했는지 말이다. 이옥에겐 만나는 모든 것, 보이는 모든 것이 글이 된다. 반면 나는 내 일상을 글로 담아내지 못한다. 이걸 써보고 싶어졌다. 나는 왜 일상을 쓰지 못하는지, 어떻게 그것은 글이 되는지, 나는 어떤 글을 쓸 것인지. 『낭송 이옥』을 읽으며 생각해보고 싶었다. 

 

 
고집쟁이들의 충돌
  

나는 이옥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 그저 『낭송 이옥』이 있다 정도이고 그것도 공동체 책장에 꽂혀있는 걸 보고 알았을 정도랄까? 몇 년 전 친구가 이옥으로 리뷰를 쓰는 바람에 이옥이 남자인 줄 그제야 알았다. 포털로 검색을 해도 이옥에 대한 정보는 많이 없다. 조선시대 선비로 직접 쓴 글이 책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람치고 이렇게 정보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본관 미상, 초년의 성장 과정도 전혀 알 수 없는 선비 이옥. 그의 글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도 사후에 친구에 의해 모아져서 전해지는 것이라니 이옥, 그는 그냥 쓰기만 한 선비인 게다. 낭송 28수 중에서도 아마 『낭송 이옥』이 인지도가 가장 낮지 않을까? ^^
  

쓰기만 한 선비 이옥의 행적(?)을 그나마 알 수 있는 사건이 바로 “문체반정”이다. 18세기 정조가 기존에 쓰이던 고문과 다른 문체의 글이 유행하자 고문을 바로 잡겠다며 시행했던 정책이 “문체반정”이다. 『낭송 이옥』의 저자 채운님에 따르면 “정조의 사상통제 프로젝트”. 한마디로 “문체반정”은 당시 과거시험을 위해 형식이 갖춰져 있던 글과 다른 자유로운 내용과 문체의 글, 즉 소품문에 브레이크를 건 사건이다. 그 중심도 아닌 주변에 이옥이 있었다. 성균관 유생으로 과거를 준비하던 이옥은 대과의 답안을 소품문으로 작성해 벌을 당하고도 소품체의 글을 포기하지 않았다. 정조 또한 일개 선비의 글을 그대로 봐줄 수 없어 그의 글을 계속 문제 삼았고 결국 이옥은 과거를 포기하고 고향에 내려가 평생 자기의 글을 쓰다 생을 마감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뭐라고. 성균관에 들어가서 과거시험을 준비할 정도라면 그의 목표도 입신양명이 아니었겠는가. 그 우수한 성적(2등)으로 합격할 정도라면 그냥 대과 답안지는 고문으로 쓰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은 그냥 혼자 써도 되지 않나? 선비의 인생이 달린 과거시험에서 끝까지 자기 문체를 고집한 이유가 뭔가 싶은 거다. 한편 정조도 그렇다. 이미 당대에는 그런 문체가 유행하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던 터. 굳이 그렇게 빡빡하게 문체를 강요했어야 했을까. 정조는 왜 그렇게 고문을 고집했단 말인가. 이 두 사람에게 글은 무엇이었기에? 

 


나는 그저 쓸 뿐

 

“사상은 글이요 글은 사상이니, 삿된 생각에 빠진 젊은 지식인들을 경계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문체를 단속해야 한다….”(채운 풀어 읽음,『낭송 이옥』,?북드라망, 12쪽)    

정조가 지켜야 했던 건 사상이고 그것은 나라였다. 글이 나라에 위협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정조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동양 역사상 많은 왕들이 나라의 기강을 세우고 잡는데에 도서를 관리했다는 점에서 한 나라의 왕으로서 정조가 문체를 바로잡으려 했던 건 조선이라는 존재이지 않았을까. 우리나라 80년대에도 검열이라는 것이 있어 책이며 노래까지 다 심의를 통과해야 대중들을 만날 수 있던 시기가 있었다. 당시 검열의 명분은 저속하고 시대에 반하는 책이나 노래는 풍속을 어지럽힌다는 이유였다. 통제하고 다스리는 데에 장애가 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였을 것이다. 삿된 문체는 삿된 생각을 하게 하고 이는 나라 존재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는 정조의 생각이 문체반정을 했던 이유였던 것이다. 

“누군가 물었다. 
“그대의 이언(민간의 속된 말)은 무엇 때문에 지은 것인가? 그대는 어찌하여 국풍이나 악부, 사곡 같은 전통을 따라 짓지 않고 하필 이런 이언을 지은 것인가?”
내가 대답했다.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재자가 그리 하도록 시킨 것이다. … 짓는 자가 어찌 감히 짓겠는가? 그것을 짓도록 만드는 자가 짓는 자로 하여금 짓게 하는 것이다. 그가 누구인가? 바로 천지만물이다.”” (같은 책, 31~32쪽)    

한편 이옥의 입장에서 자신의 문체를 버린다는 것 역시 자신의 존재를 버리는 일과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쓰는 건 내가 지은 것이 아니라는 이옥. 자신은 천지만물이 낳아 그리 살게 했기 때문에 자신은 그리 쓰지 않을 수 없다고 당당히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나라는 존재는 천지만물의 산물이므로 내가 내 문체를 버리는 것은 천지만물의 이치를 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게 이옥의 생각이다. 그럼 이옥이 자신의 문체를 버릴 수 없었던 이유도 문체와 글이 자신의 존재라는 말이 된다. 문체반정은 왕과 미천한 선비의 충돌로 선비가 관직을 포기했다는 점에서 왕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신분과 위계를 떠나 정조와 이옥이 지키고 싶은 것은 같았다. 정조도 이옥도 자신의 존재를 건 충돌이었으므로 이 충돌에서 누가 승자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나를 쓴다

당시 이옥의 선택을 잘했다고 응원하는 이가 있었을까? 그럼에도 이옥은 자신의 길을 선택했고 계속 글을 썼다. 내 좁은 소견으로 이옥이라고 세상에 대한 원망이 없을 수 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글에는 어떤 원망도 세상은 이래야 한다는 외침도 없다. 과거를 준비했던 선비이고 과거 성적만 봐도 문장 실력이 출중했을 터. 소품체 전문가(?)로서 얼마든지 다양하고 신박한 글쓰기로 검열을 피하며 세상에 대한 비판과 원망을 표현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무색해졌다. 벌레, 잡초, 꽃, 돌, 시장풍경, 사랑에 울고 웃는 여인들 심지어 요리 레시피까지가 이옥 글의 글감이다. 처음 이 책 전체를 한 번 읽었을 때는 “이옥의 문장이여 참으로 맛있구나!”라고 하는 풀어 읽은 이의 머리말 제목에 ‘뭐가 맛있다는 거야?’라는 삿된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백운은 본래 궁벽한 곳인 데다 여름날은 지루하기만 하다. 궁벽하므로 사람이 없고, 지루하니 할 일이 없다. 일도 없고 사람도 없으니 어찌해야 이 궁벽한 곳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겠는가 … 그렇다면 나는 이제 이곳에서 무엇을 하며 이 날들을 즐길 것인가 … 그렇다면 나는 이제 어떤 이야기를 하며 붓을 놀려야 하는가. 형세상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그만이겠으나, 이야기를 한다면 새를 이야기하고, 물고기를 이야기하고, … 풀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백운필』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요, 어쩔 수 없으므로 이런 것들을 이야기했다.” (같은 책, 22~24쪽)

 

이옥은 말한다. 여름날은 긴데 외진 곳에 있어 지루해도 만날 사람이 없고, 돌아다니려고 해도 더워서 다닐 수가 없고, 소리 내서 책을 읽으려니 읽자마자 목구멍이 아파서 못 읽겠고, 책을 보려니 졸려서 못 보겠단다. 그러니 나는 쓸 수밖에 없다고. 내가 배우고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쓸 수 없으니 내가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내 옆의 새, 풀, 물고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고 말이다. 처음 이걸 읽고는 ‘이게 뭐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리뷰를 쓰려니 뭐라도 찾아보려고 읽고 읽다가 생각이 달라졌다. 백운사에서 썼으니 어쩔 수 없이 『백운필』이라고 이름할 수밖에 없다는 이옥의 말에 결국 항복하게 됐다. ‘나는 이런 사람이고 내 일상과 조건은 이러하니 이런 걸 쓸 수밖에 없는 거 아니냐, 이게 당연한 거 아니냐?’라고 나에게 묻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소소한 일상에 내 인생이 걸린 거 아니겠냐고, 그러니 그것을 쓰는 것 말고 달리 무엇이 더 있느냐고 말이다. 

“나비가 날아서 국화꽃을 지나가다가 그것이 차갑게 야윈 것을 보고는 물었다. ‘그대는 어째서 매화의 흰색, 모란의 붉은 색, 복사꽃과 자두꽃의 반홍반백색과 같은 빛깔을 띠지 않고 하필 노란 색인가?’ 국화꽃이 말했다. ‘그것이 어찌 내가 한 것이겠는가? 때가 그러한 것이니, 내가 때를 어쩌겠는가?’ 그대는 어찌 내게 나비처럼 묻는 것인가?” (같은 책, 35쪽)


누군가는 과거를 포기하고 시골에서 글만 쓰는 그를 무능력하다고, 또 누군가는 가진 것도 없으면서 고집만 센 괴짜 선비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이옥의 글에는 속된 말로 “너 왜 그렇게 사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쓴 글이 꽤 여러 편 있다. 그때 이옥은 오히려 되묻는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느냐고. 왜 꼭 그렇게 써야 하는 거냐고.

 


과감하게 분명하게

 

『낭송 이옥』을 여러 번 읽으며 내 글쓰기에 대해서, 나는 왜 내 일상을 쓰지 못하지라는 내 질문에 대해 다시 생각해봤다. 내가 책을 읽고 글쓰기를 하려 했던 이유는 좀 다르게 살고 싶어서였다. 몇 년째 책을 읽고 글쓰기를 하고 있지만(물론 억지로지만^^) 얼마나 달라지고 있는지 솔직히 모르겠다. 오히려 어떤 때는 내가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들이 나를 더 옥죄는 것 같아 불편할 때도 있다. 알기는 알겠는데 그렇게는 살지 않는 나와의 괴리감에 괴로울 때면 차라리 몰랐더라면 안 그랬을까 생각한다. 이옥이 관직을 포기하고 자신의 문체를 포기하지 않고 평생 시골에서 글쓰는 선비로 살기로 했던 결정이 이해되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 같다. 이옥은 현실의 그 괴리감을 견딜 수 없었고 그래서 과감히 삶의 방향을 틀었다. 기꺼이 편안함을 버렸다. 

 

“임금이 세상을 다스림에 있어서도 어진 자에게 일을 맡기고 재능 있는 자를 부리는데, 역량을 헤아려 관직을 제수하니, 위로는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종을 치는자, 옥경을 이고 있는자, 장대로 재주를 부리는 자, 등불을 잡는 자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필요 없는 자가 없다. 그러나 세상과 맞지 않아 우울하고 무기력한 듯이 살면서 언덕과 못에서 밭을 갈고 낚시를 하며 세상에 쓰이기를 원치 않는 자도 있으니, 세상에는 이처럼 버림받은 백성도 있는 것이다. 버림받은 자는 진실로 운명이 박한 것이지만 오히려 스스로 한가로이 지낼 수 있으니, 스스로를 버리는 것이 버림받지 않은 것보다 현명하다 하겠다.” (같은 책, 111쪽)

 

이번에 이옥의 글을 읽으며 나는 지금까지 공부하면서 내 “존재”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생겼다. 나에게 일어나는 사건과 현상 앞에서 쩔쩔매며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는지 괴로워하기만 했다. 막연히 달라지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지금의 세상과 내가 방향을 달리하는 것에 과감하지 못했고 편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옥이 자신의 문체를 버릴 수 없었던 것은 글은 나를 표현하는 것이고 나 자체이고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 자신의 글을 쓰지 못한다는 것은 살아도 산 사람이 아니라는 것과 다름없었던 것 아닐까.   
  

 

난 늘 억지로 글을 썼고 그 글에서마저도 찜찜함이 남은 적이 많았다. 딱히 뭐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뭔가 뻔한 결말인 것 같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인 것 같은 결론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친구들과 글쓰기 합평을 할 때면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뭐냐는 질문을 꼭 받는다. 도서관 글쓰기프로그램에서도 내 글에 대한 멘토의 코멘트는 생각을 조금 더 밀고 나가면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을 것 같다는 평이었다. 이건 비단 글쓰기만의 일이 아니다.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의 말을 빌려 오자면 나에 대한 평가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다. 괜찮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한편 속은 잘 모르겠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이 말이 의미하는바 나는 뭔가 분명히 표현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않은가. 이번에 이옥을 만나고 알게 됐다. 그저 공부하고 글쓰는 것으로 요만큼 괜찮아 보이는 인생이라는 타이틀을 지킨 채 정작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존재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는 것을. 그래서 난 분명히 말하고 쓸 수 없었다는 것을. 

 


드러냄의 진실함

 

이옥은 세상의 진리는 사서삼경 같은 고매한 책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듯이 작은 미물부터 은밀한 남녀의 정 이야기까지 모두 쓴다. 읽기 지루하리만치 세세하고 자세하게. 이옥이 보기에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다르다. 같은 불상이라도 생김이 다르고, 벌레도, 사람도, 우리의 삶도 다 다르다. 그래서 어느 것도 생략해서 쓸 수 없었다. 저마다 다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무엇도 귀하고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이다. 
  

글을 쓰기 전엔 떠오르는 생각들을 다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막상 쓰기 시작하면 생각만큼 정리가 되지 않는다는 걸 쓸 때마다 느낀다. 지금 내 상태가 어떤지 기발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머릿속에서 얼마나 파편처럼 흩어져있고 엉켜있는지 확인하게 되고 현타가 온다. 그래서일까 나는 글을 쓸 때 자기검열이 심한 편이다. 머릿속으로 이게 그럴듯한 결론으로 마무리 할 수 있을지 그야말로 각이 나와야 글쓰기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내 일상을 글감으로 가져오는 경우에도 어느 정도 결론이 나온 일을 쓰게 된다. 지금 당장 막막하고 괴로운 문제를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옥이라면 나한테 뭐라고 했을까? 먼저 모두 꺼내 놓으라고 하지 않을까? 머리로 계산하지 말고 우선 쓰라고. 수학 문제를 풀 듯 문제를 쓰고 글로 쓰면서 풀어내라고 말이다. 『낭송 이옥』을 다 읽은 지금 다시 생각한다. 나는 글감을 짜내서라도 써야 될 것 같다는 것을, 가장 감추고 싶은 부분까지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아니 가장 덮고 싶은 것부터 써야 한다는 것을. 나에게 글쓰기는 내 인생 문제 풀이가 되어야 될 것 같다. 이옥이 벌레 한 마리를 묘사하듯 찌질한 내 일상을 다 꺼내어 쓸 수 있을 때 나는 그때야 내 존재와 제대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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