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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리뷰대회 당선작

[북드라망리뷰대회 당선작] 지금 어떤 씨앗을 뿌리고 있는가?

by 북드라망 2021. 11. 23.

『낭송 흥보전』

지금 어떤 씨앗을 뿌리고 있는가?


- 2등 강평옥

 

오늘의 놀보들에게

북꼼 리뷰대회 공지를 보고 도전을 위해 책 리스트를 보다가 직관적으로 『낭송 흥보전』을 골랐다. 나는 요사이 못된 놀보들에게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에, 혹은 그렇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놀보의 나쁜 심보를 알아보면 어떨까하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놀보하면 두 손에 떡 들고 가난뱅이 등치는 못된 심보가 떠오른다. 놀보의 못된 심보를 손가락질하면서도 놀보가 누리는 부와 권력은 부럽기도 하다. 흥보는 가난해도 미물인 제비를 돕고 부자가 되도 자신을 핍박했던 놀보를 돕는다. 나는 한결같이 착한 흥보 캐릭터가 비현실적인 인물로 느껴졌다. 대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부와 권력을 추구하는 놀보들은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상대를 놀보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많지만 자신이 놀보라고 비난받는 것을 아는 놀보들은 많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놀보와 흥보의 운명을 드라마틱하게 가른 것은 제비가 물고 온 박씨였다. 제비 박씨 사건은 그 날 그 제비가 하필 그 곳을 지나가서 생긴 우연처럼 보인다. 하지만 박씨는 도화선에 불과하다. 흥보는 그 전부터 수많은 유사 제비들을 살리고, 놀보는 죽였다. 흔히 누구 하나를 살리는 것은 어려워도 잘못되게 하는 것은 쉽다는 말을 한다. 실제로 잘못되게 하지 않더라도 잘못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상대방을 제압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반면 살린다는 것은 곤경에 빠진 누군가에 대한 관찰과 공감이 필요하고, 시간과 정성이 소요되는 일이다. 현실에서는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것이 힘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것이 훨씬 강한 힘인 것 같다. 형제는 기다림의 자세도 달랐다. 씨를 뿌리면 수확하는 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기다림이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흥보는 자기소임을 다하며 묵묵히 때를 기다린다. 반면 놀보는 기다리지 못하고 무리하게 때를 당기려고 한다. 흥보는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부유하면 부유한대로 자신이 가진 것을 주변과 나눈다. 채우면 비워서 순환시킨다. 반면 놀보는 두 손에 떡을 들고 다른 떡을 집으려 하면서, 들고 있는 떡을 놓칠까봐 두려워한다. 끝없이 축적한다.


흥보전의 스토리는 들어서 알고 있지만 흥보전을 자세히 읽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나쁜 놀보가 쪽박 차고 착한 흥보가 대박 나는 권선징악 스토리가 아니었다. 『낭송 흥보전』은 매일 어떤 씨앗을 뿌리고, 어떤 자세로 기다리는지, 그리고 수확물에 만족하고 순환시킬 수 있는지 아니면 끝없이 추구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다. 이야기 주인공을 보고 웃고 조롱하면서도 왠지 정수리가 시원해지는 것이 어째 남 이야기가 아니다.    

 


파종


흥보는 살리는 씨앗을 심는다. 제비를 살린 것이 계기가 되어 대박이 났지만 살아오는 동안 그가 살린 것은 제비만이 아니다. 흥보의 주변에 있으면 다 살아난다. 제비를 낳은 것은 제비 어미이지만, 제비의 목숨을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은 흥보다. 한 번은 뱀에게서 구하고 또 한 번은 틈에 발이 끼는 사고에서 구한다. 흥보는 아들도 자그마치 스물다섯이나 낳았다. 심지어 놀보에게 쫓겨나고 나서도 아이를 낳은 것으로 나온다. 흥보는 제비도 두 번이나 살리고 아들도 많이 낳고, 어려운 이웃들도 살린다. 심지어 자신을 내쫒고, 배가 고파서 다시 찾아갔을 때 몽둥이세례를 퍼부었던 놀보도 살린다. 이 대목에서 나는 흥보가 부처님 가운데 토막 아니면 호구인가 싶기도 했다. 흥보는 ‘굶어 죽는 사람을 보면 먹던 밥도 덜어주고, 얼어 죽는 사람 보면 입던 옷도 벗어주고, 청산에서 백골 보면 깊이 파서 묻어 주고, 경칩부터 경계하여 산 동물은 죽이지 않고, 어린 나무 꺾지 않는’ 행실을 보여준다. 그가 살린 대상은 굶어 죽어 가는 사람, 얼어 죽어 가는 사람 등 살아있는 사람에서부터 백골이 된 이미 죽은 자, 그리고 산 동물과 어린 나무, 원수가 될 수도 있었던 형 놀보까지 폭넓다. 


놀보는 죽이는 씨앗을 심는다. 놀보가 쪽박을 찬 것은 흥보가 탄 제비 로또를 자신도 타겠다고 제비 다리를 댕강 부러뜨리는,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면서부터이다. 놀보는 멀쩡한 제비 다리를 깁스 시키겠다는 요량으로 부러뜨린다. 놀보가 대박을 치자고 이번만 눈 한 번 찔끔 감고 제비다리를 부러뜨린 것은 아니다. 놀보는 초범이 아니었다. 그 전에 그의 손에 동식물, 사람 등 유사 제비들이 죽어나갔다. 놀보는 ‘귀한 땅의 나무를 베고, 삼재 든 데 중매 서고, 초상집서 노래하고, 가뭄 농사에 물 빼내고, 불붙은 데 부채질을 하는 등 남을 피눈물 나게’ 하며 이웃의 삶을 죽였다. 그러고 보면 놀보는 끝부분에, 그것도 쪽박을 찰 때 놀보 마누라가 탄식하며 ‘애 아부지’라고 한 번 부르는 것이 전부일 정도로 놀보에게는 자식도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놀보는 돈을 많이 키웠을지 모르지만 살아있는 생명체는 살릴 수 없었다. 

놀보는 계속해서 부를 키워가다가 6번 연속 터진 제비 쪽박으로 추락한다. 놀보는 부의 팽창과 상관없이 연속적으로 주변을 죽여 왔다. 자신의 이익을 위한 목적도 있지만 그런 목적 없이도 남에게 못된 짓을 한다. 그렇게 해서 이룬 놀보의 부라는 것은 삼십여 칸 줄행랑을 일자로 지어 한가운데 솟을 대문이 있고 건장한 종들이 유니폼을 입고 서있는 집에서 명품 옷을 입고 담뱃대를 물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놀보의 돈은 나오는데 놀보가 누구와 함께 돈을 쓰면서 즐거워하거나 어울리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놀보는 도둑이 무서워서 사람을 사서 경계를 강화하고 집에 철퇴, 몽둥이 등 보안 무기를 상비하고 산다. 놀보는 살아있는 것을 지키지 못하고 부를 기르고 지키는 데에 전력을 다한다. 

 


기다림


『낭송 흥보전』을 읽다가 주역 문언전 곤괘 중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적불선지가 필유여앙(積不善之家 必有餘殃)’이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선을 쌓는 집안은 반드시 남는 경사가 있고 불선을 쌓은 집안에서는 반드시 남는 재앙이 있다는 뜻이다. 이어지는 구절은 ‘신하가 그 임금을 죽이고 자식이 그 아비를 죽이는 일이 벌어진 것은 하루아침과 하루저녁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 유래는 점차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이다. 적선과 불선이 씨앗이 되어 대대로 이어져 내려와 적선과 불선을 하지 않은 후손에게 갑작스러워 보이는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흥보전과 이 구절을 연결시켜보니 여경(餘慶)과 여앙(餘殃)에서의 여(餘)는 후손 대라는 특정한 시기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씨앗을 뿌리고 난 뒤 시간의 소요 혹은 기다림을 뜻한다는 생각이 든다. 『낭송 흥보전』에서 흥보와 놀보는 자신의 생애동안 자신이 뿌린 것을 각각 대박과 쪽박으로 수확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때로 파종과 수확 사이에 아주 긴 시간이 걸려서, 자신이 뿌린 것을 자신이 거두지 못하고 후손 대까지 결과가 이연될 수 있다. 


흥보는 묵묵히 때를 기다린다. 박씨를 물어오는 제비를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제비가 박씨를 물어올 것이라고는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흥보가 기다린 제비는 그의 집을 가난한 집이라고 홀대하지 않고 찾아와줬던 고마운 제비, 갑작스런 사고로 형제를 잃고 다리를 다쳐 짠했던, 정든 제비였다. 흥보는 없는 살림에 조기 껍질과 오색 실로 제비 다리를 깁스해서 치료해준다. 다리 깁스는 다음 해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올 때 그 때 그 제비로서의 표식이 된다. 흥보에게 기다림이란 마음으로 생각하며 지켜보는 것이다. 제비가 집을 지을 때도, 제비가 강남으로 떠날 때도, 다시 돌아올 때가 되었을 때도 밖을 내다보며 때를 기다린다. 


놀보는 기다리지 못한다. 제비가 자신의 집에 둥지를 틀기를, 뱀이 와서 제비 집을 초토화시키기를, 제비가 사고를 당해 다리를 다치기를, 그리고 마침내 제비가 박씨를 물어오기를 바란다. 하지만 무슨 수로 제비에게 놀보 집에 둥지를 틀게 하고, 뱀에게 청부 살인을 시키고, 사고는 말 그대로 우연히 벌어지는 일인데 억지로 사고가 나게 할 것인가? 놀보는 여기서 무리수를 둔다. 놀보는 짚신 삼는 사람들을 동원해서 제비 집을 지어 달아놓고 제비를 찾아 나선다. 제대로 된 제비라면 사람이 지은 집에 들어갈 리 없다. 어느 운 나쁜 제비가 집을 짓기 시작하자 놀보는 또 급하게 손수 흙을 이겨서 집짓기를 돕는다. 우여곡절 끝에 제비가 알 여섯을 낳는데 급한 마음에 놀보는 시시때때로 알을 만져보아 다섯은 곯는다. 놀보는 자기 욕심을 채우려 기다리지 못하고 서둘다가 다섯 제비를 죽인다. 제비 다리가 틈에 끼게 해달라고 빌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이제 곧 제비가 날아가게 생기자 제비를 붙잡아 다리를 부러뜨리고 고친다. 놀보는 억지스런 기대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기다리거나 포기해야할 일에 창의적인 노력을 더 퍼붓는 방식으로 무리를 한다. 


『낭송 흥보전』은 모든 것은 때가 있으니 순리대로 살라고 말한다. 즉 때로는 뭔가를 보태는 노력이 아니라 묵묵히 기다리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제비가 흥보 집에 제비 집을 지은 것은 한 고승이 정해준 집터에 흥보가 집을 새로 짓고 나서이다. 그 곳은 개국을 해도 좋을 정도로 배산임수가 뛰어난 곳이었다. 그 고승은 흥보의 착한 기운과 큰 부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본 것 같다. 또 제비가 강남에 돌아가서 제비 장군의 점고를 받을 때, 제비 장군은 절뚝거리는 제비 다리를 보며 제비가 을사(乙巳)일, 뱀날에 나가지 말라는 경고를 어겼다가 뱀의 환란을 겪은 것이라고 한다. 사람이나 제비나 때에 맞게 살아야 살 수 있다. 제비가 박씨를 물고 올 수 있었던 것은 철에 따라 강남과 흥보네를 이동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흥보는 제비 전에도 순리대로 살고 많은 선행을 베풀었지만 계속 가난하게 살았다. 놀보도 수많은 무리수와 악행에도 불구하고 응징 받지 않고 부자로 살았다. 아직 씨앗을 뿌린 것이 결실을 맺을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씨앗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땅 속에서 계속 자라고 있었다. 
 


수확, 그리고 다시 파종


흥보와 놀보는 형제다. 그들이 씨를 뿌린 곳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토양이다. 글의 후반부 놀보가 터뜨린 쪽박에는 그들의 아버지가 도적질을 했다고 분노하는 옛 상전과 할아버지가 빌린 돈을 갚지 않고 줄행랑을 쳤다고 주장하는 옛 주인이 등장한다. 흥보와 놀보는 똑같은 조상의 업을 받았으나 흥보는 덕을 키워 자식을 낳고 업의 방향을 틀어 덕으로 바꾸었다. 물려받은 업의 양이 컸으니 그 양을 줄이고 방향까지 틀려면 엄청난 선행이 필요했을 것 같다. 반면 놀보는 조상의 업보를 더욱 키워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흥보의 인생은 두 번의 변곡점을 지난다. 한 번은 넉넉한 형편에 있다가 형 놀보에게 하루아침에 쫓겨나 굶어죽을 처지로 떨어진 지점이다. 또 한 번은 굶어 죽기 직전에 제비가 물어온 박씨를 심은 것이 대박 나서 상한가를 칠 때이다. 변곡점 전후로 흥보의 먹고 사는 형편은 급격하게 달라졌지만 마음 씀씀이는 한결같다. 형에게 쫓겨나기 전에도 굶어 죽거나 얼어 죽는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형편이 어려워지면 마음이 변할 수도 있겠지만, 제비를 구하고 다리를 고쳐준 것은 흥보가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일 때였다. 그 때는 흥보가 삼순구식(三旬九食) 즉, 삼십 일에 아홉 번 밥을 먹는 수준으로 굶고, 온갖 남의 집 품을 팔고, 하다하다 매품팔이를 자처하기도 하고, 아내마저 생활고로 목을 매려고 시도한 시기였다. 이 상황에서 제비가 먹이로 보이지 않은 것이 신기할 지경이다. 더 놀라운 것은 대박이 나고 나서 그동안 자신을 내쫒고, 몽둥이로 다시 내쫒던 형 놀보에게 돈이 화수분처럼 계속 나오는 궤짝을 주고, 제비 대박 비법도 전수해주고, 이후 그러고도 쪽박을 찬 놀보에게 재산을 반분해준 대목이다. 흥보는 놀보에게 원한 감정도 없었나보다. 흥보는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 모두 수확한 것을 이웃과 나눴다. 대박 속에서 나온 화수분 돈 궤짝처럼 자신도 쓰고, 이웃에게도 나눠야만 화수분의 내용물은 채워진다. 흥보는 수확한 것을 축적하지 않고 나누고 비워서 순환시켰고, 그 땅에 다시 살리는 씨앗을 뿌렸다.   


놀보는 더 큰 부자를 꿈꾸는 삶을 살았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많았고 흥보를 내쫓고 나서 집이 더 의리의리해졌다는 내용으로 추측컨대 계속해서 더 큰 부자가 되었던 것 같다. 굳이 흥보의 비법을 따라하지 않아도 이미 부자인데 왜 흥보를 따라 해서 더 큰 부자가 되려고 했을까? 부자가 되려는 이유가 자신이 누리고 남에게도 베풀기 위해서일 수도 있는데 놀보는 부의 축적 그 자체에 더 중점을 둔 것 같다. 어쩌면 놀보는 늘 누군가를 따라하는 투자 전략으로 부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늘 하던 방식대로 투자를 했을 수 있다. 단지 이번에는 따라하는 대상이 흥보로 바뀌었고, 이번만은 그 방식이 통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마치 도박판에서 잃어야 도박이 끝나는 것처럼 말이다. 놀보는 쪽박을 차기는 했지만 쪽박은 총 6개였기 때문에 하다가 멈췄다면 그나마 손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놀보는 손절할 수 없었다. 손해를 보고 싶지 않아서 계속해서 물 타기를 해대는 주식투자자처럼 욕심 때문에 계속해서 늪으로 들어갔다. 결국 6번째 박은 터뜨리지 않았는데도 자동으로 열려서 그나마 있던 것을 모두 쓸어간다. 놀보는 수확한 것을 모두 축적하고 끌어안으려다 그동안 수확한 전부를 잃게 된다. 
제비나 제비 박씨 사건이 문제가 아니었다. 흥보도, 놀보도 늘 하던 대로 했을 뿐이다. 흥보는 제비에게 투자를 한 것이 아니고 늘 하던 대로 한 일이 복이 되어 돌아왔다. 계획이나 목적이 없었다. 늘 하던 대로 했는데 그 때 제비가 지나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반면 놀보는 분명한 의도로 철저한 계획 하에 제비 로또에 투자했다. 손실이 났을 때는 손절대신 더블 베팅으로 손해를 만회하려했다. 제비 로또가 그들의 운명을 갈랐지만 제비 로또는 도화선이 되었을 뿐 사건 전말의 주요 원인이 아니다. 매일 뿌리는 씨앗, 기다림의 자세, 결과물에 대한 태도라는 일상의 습관이 단지 대박과 쪽박으로 드러났을 뿐이다.     



오늘의 씨앗


『낭송 흥보전』은 흥보가 주변을 살리는 씨앗을 뿌리고 묵묵히 기다리다가 복을 받고, 놀보가 주변을 죽이는 씨앗을 뿌리고 기다리지 못하고 서둘다가 벌을 받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만약 그 둘에게 대박, 쪽박이라는 드라마틱한 사건이 없었다면 어떨까? 물론 그렇다면 구전되어 오늘까지 이어지지도 못할 밋밋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늘 좋은 일을 하고 묵묵하게 기다리다가 손해만 보는 것처럼 보이는 흥보들이 있다. 천벌을 받아 마땅할 것 같은데도 떵떵거리고 사는 것만 같은 놀보들도 많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 흔한 현실처럼 선행과 보상, 악행과 응징이라는 인과가 연결되지 않는다면 이 이야기는 어떻게 읽힐 수 있을까? 


대박과 쪽박이 없는 흥보와 놀부의 하루를 상상해본다. 흥보는 늘 배가 고프지만 주위를 돕는 일상을 산다. 분수를 모르는 오지랖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늘 자신의 조건 내에서 돕는다. 다친 제비 다리도 가지고 있던 조기껍질과 오색실을 이용해서 동여매주고 고승이 탁발을 왔을 때는 정중하게 자신의 형편을 설명하고 죄송하다고 말한다. 흥보는 기다릴 줄 알고 세상이 자신의 선행을 알아주지 않아도 한결같고 자신에게 불이익을 준 사람에 대한 원한을 갖지 않는다. 급할 것도 초조할 것도 없다. 반면 놀보는 비단 옷에 궁궐 같은 집에 살지만 늘 누군가를 눌러야 직성이 풀린다. 더 많은 부를 위한 구체적 구상, 그 구상이 빗나간 뒤 찾아오는 조급함, 누군가 자신의 부를 훔쳐갈 것 같은 두려움으로 눈 뜨면 초조하고, 눈 감으면 밤잠을 설친다. 그런 면에서 흥보와 놀보는 각기 대박과 쪽박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이미 하루하루의 일상에서 각각 상과 벌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시대에는 놀보들이 많다. 그들은 경쟁력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고, 노력이라는 이름으로 기다리지 않고,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놀보인지 여부는 놀보의 부라는 결과물이 아니라 놀보의 심보라는 씨앗의 문제이다. 흥보가 하루아침에 대박이 난 것도, 놀보가 하루저녁에 쪽박을 찬 것도 아니다. 모두 점차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낭송 흥보전』은 선은 대박, 악은 쪽박을 불러오는 인과가 아니라 하루아침, 하루저녁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즉, 지금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낭송 흥보전』은 이 세상 놀보들에게 말을 건넨다. 지금 주변을 살리고 있는가, 죽이고 있는가? 기다리는가, 노력의 이름으로 기다리지 못하는가? 느긋한가, 초조한가? 채우면 비우는 순환을 하는가, 끝없이 축적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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