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북드라망리뷰대회 당선작] 놀이와 일을 넘어서는 생(生)의 즐거움

『낭송 장자 』
놀이와 일을 넘어서는 생(生)의 즐거움    


- 2등 곽은남

 


노는 걸 고민하며

만화 주인공 뽀로로는 “노는 게 제일 좋아”라며 노래 부른다. 나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노는 게 제일 좋으면 일은 언제하고 공부는 언제하냐’며 혀를 끌끌 찼다. 맨날 놀고 있는 애들을 보면 “제발 숙제 좀 하고 놀아라”고 잔소리를 했다. 사람들에게 노는 것은 어떤 조건을 충족해야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수험생인 학생들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놀 수 있을 거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돈과 시간, 건강이 있어야 놀 수 있을 거라 한다. 놀이는 유예가 되고 지금은 숙제를 하거나 돈을 벌어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다르게 노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쟁 같은 아침 출근이 놀이터 같다는 직장인,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게 가장 즐거운 놀이라는 인문 공부방 선생님이 있었다. 노는 게 다 같은 놀이가 아니었다. 누구는 매일 출근 시간이 지옥인데, 누구는 놀이터라니 놀이에도 무슨 능력이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노는 능력을 고민하다가 『낭송 장자』를 만났다. 『낭송 장자』 책 뒤표지의 홍보 문구가 딱 눈길을 사로잡는 게 아닌가. 거기엔 ‘장자가 보기에 만물이 하나라는 것은 관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운명이라도 사랑하면서 운명을 껴안고 한바탕 노는 능력의 문제’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장자가 ‘지금 네가 있는 곳이 놀이터가 되게 하려면 그건 노는 능력에 달렸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노는 능력이라고 하면 취미개발 밖에 떠오르지 않았는데, 『낭송 장자』는 절대 자유의 삶!이라는 타이틀로 노는 능력을 선전하고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노는 능력의 문제가 어떤 결과를 위하여 지금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을 깨우는 각성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장자 하면 누군가? 장자는 어슬렁거리며 유유자적하게 노니는 ‘소요유(逍遙遊)’로 유명했다. 장자는 놀이의 고수, 놀이의 달인처럼 보였다. 장자에 나오는 달인들은 어떤 목적이나 결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몰입하여 하나가 된 사람들이었다. 장자 또한 자신의 인생을 ‘도道’와 하나가 되려는 삶을 살았다. 달인들을 보며 놀이란 지금을 사랑하는 어떤 태도라고 읽혔다. 그래서 본문의 내용도 장자가 자신의 시대와 자신의 인생을 어떤 태도로 살았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낭송 장자』는 장자 본인의 저작이라는 내편 7편과 장자 후학들에 의해 쓰인 외편 15편, 잡편 11편 총 33편의 방대한 분량을 ‘절대 자유의 삶을 보여주는 방식’이라는 주제로 일곱 단락으로 ‘맥락화’ 책이다. 나는 그중에서 장자의 놀이(遊)를 생각하며 낭송했다. 장자가 살아왔던 태도 즉 장자가 노는 방식은 세상의 상식을 비틀고, 주어진 가치와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끝없이 변신하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장자의 놀이판에 뛰어들어 보자.  

  
장자 - 세상의 상식을 비틀어 각성하게 하다

세상의 상식이란 세상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생각을 말한다. 세상에 상식이 없으면 사람이 살아가기 불편하지만, 한편으로 상식이 갖는 획일적인 기준이나 관습적인 사고 때문에 사람을 얽매이게도 한다. 그런 상식 중에 모든 사람들이 비슷하게 여기는 것은 돈과 명예와 죽음에 대한 생각일 것이다. 우리가 노는 걸 유예하고 아등바등 사는 것도 실은 돈과 명예 때문이 아닌가. 가난하면 장자를 빼놓을 수 없다. 장자가 얼마나 가난했는지 “비좁고 더러운 골목에서 살면서, 짚신이나 삼아 겨우 입에 풀칠하고, 야윌 대로 야위어서 얼굴이 누렇게 뜬 채로 산다.”고 묘사된다. 그러나 장자는 왕과 신하가 싫어하는 가난에 자신을 옭아매지 않았다. 오히려 가난을 재해석함으로써 진짜 가난이 어떤 것인지 알려 주었다. 하루는 장자가 누덕누덕 기운 거친 베옷을 입고, 삼끈으로 동여맨 신발을 신은 채 위(魏)나라 왕 앞을 지나갔다. 왕이 “선생은 어찌 이리 고달픈 모습입니까?” 라고 묻자 장자가 대답했다.

“가난한 것이지 고달픈 것이 아닙니다. 선비가 타고난 덕德과 도道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고달픈 것입니다. 옷이 해지고 신발에 구멍이 난 것은 가난한 것이지 고달픈 것이 아닙니다. 단지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일 뿐이지요.” 

장자는 전국(戰國)시기 중엽 잔인하고 포악한 송나라 왕인 언(偃, BC 369~286)이 다스리던 시대에 살았다. 송 왕 언은 잔인하기로 악명이 높아 폭군의 대명사인 하나라 걸(桀)왕을 빗대어 ‘송나라의 걸왕’이라는 ‘걸송(桀宋)’으로 불렀다. 걸송의 나라는 밖으로는 사방에 적을 만들어 강대국들의 먹잇감이 되었으며, 안으로는 백성들을 잔인하게 학대하고 착취했다. 이런 시대에 벼슬을 한다는 것은 백성의 현실에 눈감는 것으로 장자에겐 모욕이었을 것이다. 그런 장자에게 왕이 ‘어찌 그리 병들고 피곤한 모습이냐’고 묻고 있다. 그러자 장자는 가난할지언정 무기력하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진짜 병들고 무기력한 사람들은 ‘지금같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가운데 부자가 된 왕과 신하들이었다. 그 신하 중에 조상(曺商)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장자는 조상의 재산 축적을 왕의 피부에 난 고름이 가득한 종기를 치료하는 것으로 비유한다. 조상의 재산은 진나라 왕의 항문에 고름 가득한 종기를 빨아서 얻은 치욕스러운 것이었다. 장자의 태도에서 가난이란 재물의 적음 아니라, 자신을 치욕스럽게 만들고 자신의 삶을 무기력하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쫓는 권력이나 명예도 마찬가지였다. 장자의 친구인 혜시가 양(梁)나라의 재상으로 있을 때, 장자가 혜시의 재상 자리를 노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장자는 재상 자리를 빼앗길까 전전긍긍하던 혜시에게 이렇게 말한다. 

“남쪽에 원추라는 이름의 새가 있지. ……(원추는)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달고 맑은 샘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네. 그런데 썩은 쥐 한 마리를 갖고 있던 솔개가 원추가 지나는 것을 올려다보고 깜짝 놀라 ‘꺅’하고 소리를 질렀다네. 지금 자네는 양나라 재상 자리를 가지고 나에게 ‘꺅’하고 소리를 지르는 겐가?”    


장자에게 재상 자리는 ‘썩은 쥐’였고, 명예란 ‘죽어서 뼈만 남아 귀해지고자 했던 거북’처럼 생명을 빼앗는 일이었다. 장자는 살았을 적엔 진흙탕에서 뒹굴고 살기를 원했고, 죽음은 축제가 되기를 바랐다. 장자의 아내가 죽었는데, 남편이란 사람이 울지는 못할망정 장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으니 장례식에 이런 축제가 없었다. 장자는 기(氣)가 모이면 변하여 생명이 되었다가, 다시 저절로 기(氣)가 흩어지면 죽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며, 마치 태어나고 죽는 것이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변화와 같은 것’이라고 들려준다. 장자에겐 죽은 아내는 ‘천지라는 큰 집에 편안히 쉬고 있는 것’이어서 슬퍼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장자는 우리의 생각에 대해서도 묻는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즐겨 먹는[正味] 것이 풀을 먹는 사슴이나 쥐를 즐겨 먹는 올빼미에게도 맛있다고 할 것이며, 사람들이 미인[正色]이라고 하는 여인이 물고기나 새에게도 미인으로 보일 것이며, 사람들에게 올바른 거처[正處]가 습한 데서 사는 미꾸라지에게도 올바른 거처냐고 묻는다. 장자가 보기에 이 세계는 하나의 공통된 표준으로 재단할 수 없다. 공통된 표준이 없으니 공통의 옳음이나 그름도 없다. 물론 따라야 할 공통된 가치도 없다. 이러한 세계의 진실한 실정을 바로 아는 것이 ‘밝은 지혜[明]’다. 장자는 ‘명(明)’으로 혜시에게 ‘꺅’ 소리를 지른 것이며, 우리도 그 소리에 놀란다. 낭송으로 읽어보면 더욱 실감하게 된다. 혜시는 자신이 썩은 쥐 한 마리에 목숨을 거는 솔개였음을 절감하고, ‘나도 창공을 나는 저 자유롭고 고귀한 원추가 되리라’고 각성하지 않았을까. 나에게도 놀람은 ‘썩은 쥐’를 먹기보다 ‘달고 맑은 샘물’을 마시고픈 욕망을 일깨웠다.  


장자 -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즐거움을 말하다

세상의 상식을 비트는 장자의 모습에서 누군가는 장자는 돈도 명예도 버리고, 주어진 목숨대로 살며, 어떤 가치도 갖지 말라고 하는 것이냐는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장자에서 ‘막고야 산의 신선’이니 ‘구름 위에서 해와 달을 타고 세상 밖에까지 가서 노니는 지인’이니 하는 이야기를 읽으면, 장자가 ‘비루한 일상을 초월하는 피세(避世)의 이미지’로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장자는 결코 초월적으로 세상을 피하기[避世]가 아니었다. 장자에게 세상은 “태어난 이상 부모자식 관계는 끊을 수 없고, 군주 없는 곳 역시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였다. 인간은 생명을 받아 태어난 순간 부자, 부부, 형제, 친구, 군신이라는 사회관계에 묶이고 “이 세상 모든 것과 연루되어 있는” 존재다. 장자는 세상을 피하기는커녕 자신이 세상 속의 사람임을 분명하게 의식했다. 장자의 문제의식은 ‘여기 세속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기’다. 


장자가 세상으로부터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 곧 적극적으로 세상에 뛰어들어 그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장자의 문제의식은 피할 수 없는 세상에 태어난 이상 어떻게 하면 ‘자연의 필연적 법칙대로 편안하게 살 것인가[安命]’와 ‘절대적인 자유에 이를 것인가[逍遙遊]’였다. 따라서 장자의 고민은 ‘무엇이 우리를 타고난 수명대로 살지 못하게 하고 삶을 위태롭게 만드는가’ 였다. 장자에게 세상 속에서 산다는 것은 주어진 가치를 묻고 가치와 전투를 벌이는 것이었다. 사마천이라는 고대 중국의 역사가가 지은 『사기』(史記)라는 역사서가 있다. 『사기』에 장자는 ‘10여 만자나 되는 저서를 남겼으며, 세상일과 인간의 마음을 살피고 이에 어울리는 비유를 들어 유가와 묵가를 공격하여 비록 당대의 대학자 하더라도 그의 공격을 피할 길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자가 살던 시대는 유가와 묵가가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장자는 특히 유가를 공격했다. 유가가 성인들을 숭상하고 인재를 중시하는 바람에 사람들을 경쟁에 몰아넣고, ‘인의(仁義)’라는 가치를 내세워 사람들로 하여금 ‘땅에 금 긋고 그 길로만 가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장자는 ‘인위(人爲)’라 하여 기를 소모하여 일부러 의식해서 해야 하는 인위적인 것이라며 비판했다. 장자가 주류의 가치를 따져 물었던 것은 ‘그들의 분별적 지식과 명분이 사람을 살게 하느냐’ 였다. 공자는 어지러운 위나라에 가서 세상을 바로 잡으려는 안회에게 한마디로 말한다. 

“아! 그곳에 가면 너는 죽게 될 것이다. 도(道)란 번잡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어찌 안회만의 이야기일 것인가. 우리에게도 태어날 때부터 학습이나 관습에 의해 여러 가지 명분이나 가치가 주어진다. 좋은 학교를 나와 인재가 되어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고, 좋은 취직자리가 성공한 인생을 보장한다는 등등. 장자는 주어진 가치를 의심하지 않고 살다 보면 결국은 죽게 될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돈이나 명예, 어떤 가치를 추구하지 말라가 아니라 그것이 너의 생명력을 기르게 하느냐, 너를 무기력하게 하지는 않느냐를 보라는 것이다.

“들꿩은 열 걸음 걸어야 모이 한 번 쪼고 백 걸음 걸어야 물 한 모금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새장에서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먹이를 찾는 수고로움이야 없겠지만 자유롭게 살려는 본성에는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들꿩이 먹이를 찾는 일은 고생스럽고 힘들다. 꿩이 새장 속에 있으면 먹고 마시는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아주 좋은 음식을 먹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렇게 사는 게 행복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들꿩은 어디에서 펄떡이는 활력을 느낄 것인가? 장자는 초나라 왕이 재상의 자리에 초빙한 것을 거절하기도 하여 들꿩처럼 백 걸음에 한 번 물을 마시는 힘든 생활을 했지만, 그는 무기력하지 않았다. 우리는 스스로 새장 속의 새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닌지, 들꿩의 생명력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장자 - 변신의 즐거움으로 함께 노닐게 하다

『낭송 장자』를 소리 내어 읽다 보면 어떤 즐거움이 느껴진다. 장자의 글은 장자답게 당시 쓰인 문체와 다르다. 『논어』가 공자님의 말씀에 관한 어록 모음이라면, 『맹자』는 왕에게 설득하는 논증과 제자와의 논쟁이 주였으며, 『노자』는 격언의 색채를 띠고 있다. 반면 『장자』는 전설 속의 괴담인가, 동물우화인가, 대화인가, 논쟁인가 할 정도로 다채롭다. 『장자』는 내편의 첫 편 「소요유」에서 북해라는 바다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편인 「응제왕」에서 남해와 북해의 바다에서 막을 내렸다. 장자의 글은 깊은 바다라는 무대에서 시작하여, “사람의 소리, 땅의 소리, 하늘의 소리”라는 음악을 연주하며 한 편의 연극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연극의 등장인물은 또 얼마나 다양한지 장자의 글은 사람뿐 아니라 동식물부터 해, 달, 구름, 바람까지 우주 전체를 망라한다. 무엇보다 장자의 글이 자연백과사전인가 싶을 정도로 사람보다 더 많은 동식물들이 등장한다. 『낭송 장자』 1부 「나는 장자다」 몇 편만 보더라도 ‘나무를 타고 다니는 원숭이, 수레바퀴 자국 안에 붕어, 원추라는 새, 솔개, 썩은 쥐 한 마리, 파리날개, 제물로 바쳐지는 소, 신령스러운 거북, 까마귀, 땅강아지, 개미’가 나오는데, 나머지 편에서 동식물을 나열하라고 하면 족히 한 장은 써야 할 정도다. 동물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어떤 것은 ‘수레바퀴 앞에서 까부는 사마귀’(당랑거철, 螳螂拒轍)처럼 코믹스럽고, 어떤 것은 ‘날개를 펴면 하늘을 뒤덮은 구름’ 같다는 전설속의 큰 새인 대붕(大鵬)처럼 웅장하다. 장자는 마치 자기가 동물이 된 것처럼 상황에 꼭 맞는 묘사와 감정을 표현하여 상대방에게 들려주고 있다. 이런 글쓰기를 우언(寓言)이라고 하는데, 우언은 상대에게 직접적인 비판을 가하지 않으면서도 상대를 콕 찌르게 한다. 즉 우언의 글쓰기는 상대와 나의 대립은 사라지게 하고, 연극에 참여하는 모두를 ‘도(道)’의 세계로 하나가 되게끔 이끈다. 장자는 연극판에 끝없이 등장하는 동물 주인공처럼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여 우리로 하여금 놀이를 체험하게 한다. 우리가 놀이를 체험할 때 열광하는 것은 놀이판에 많은 변수가 끼어들고 변수를 직접 겪기 때문이다. 장자의 글이 경쾌한 것도 많은 동식물 친구들이 동원되어 예기치 않게 우리의 정신을 일깨우기 때문인데, 이것이 ‘도(道)’와 하나 되는 체험이기도 하다. 그 체험이란 자연의 무궁한 생성 속에서 차이를 느끼며 활기찬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서두에서 말한 다르게 노는 사람이란 자신의 일에 늘 변수가 개입되는 것을 알고 그 변화를 겪으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직장인의 사연이 소개되었다. 그 직장인은 출근 시간에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창밖의 계절이 변하는 것이 눈에 들어오고, 사람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와 출근 시간을 매일 사진 찍는 기분처럼 다닌다고 하였다. 인문 공부방 선생님은 어려운 책들과 씨름하는데 힘들지만 즐거운 표정이다. 아마도 글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보니, 책을 읽는 것이 달라지고 세상에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어떤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이리라. 일과 놀이, 공부와 놀이는 따로따로가 아니었으며 장자의 말대로 도(道)는 어디에도 있었다. 장자는 “도가 있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땅강아지와 개미에게도, 돌피와 피에도, 기왓장과 벽돌에도, 똥과 오줌에도 있소’라고 했다. 장자는 도(道)가 무엇이며 도(道)가 어디에 있냐고 도(道)를 꼭 집어서 말하지 않으면 도(道)는 어떤 사물에서도 떠나지 않을 거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놀이가 무엇이냐고 일에서 놀이를 꼭 집어서 말하지 않으면 놀이의 즐거움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놀이라고 할 만한 하루 일과가 따로 있거나, 하루 일과가 놀이가 되는 그런 놀이는 없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놀이와 일이라는 구별을 넘어서 매일, 매 순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어떤 일의 성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기(氣)가 통하고 있음을 느끼는 차원이다. 기(氣)라는 것은 만물을 태어나게도 죽이게도 하는 것으로, 모든 사물은 변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장자는 변화에 몸을 맡겨 지금과 하나가 되는 것이 지극한 즐거움이라 하고 있다. 


우주를 놀이터로

장자에는 지인(至人)이나 신인(神人)이라는 상상 속의 인물들을 묘사하는 장면이 후렴구처럼 반복된다. 지인은 홍수가 나도 물에 빠져 죽지 않고, 땅과 산이 타들어가도 불에 타서 죽지 않으며, 높은 곳에서도 두렵지 않으며, 결코 외부 사물에 의해 손상되지 않는다. 달에 처음 착륙한 우주인의 이야기를 읽다가 무중력 상태는 지구와 전혀 다른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주 무중력 공간에서는 위아래 높이와 방향이 없으며, 물을 쏟아도 물방울로 떠다니며, 불이 붙을 수가 없었다. 지인을 묘사한 상황은 우주 무중력에 들어맞았고, 이것이 장자가 우주 속에 노닐었다는 증거로 보였다. 장자를 우주인이라고 하면 어떨까? 장자가 말하는 「소요유」의 ‘아무것도 없는 곳’(무하유지향, 無何有之鄕)은 시공간의 개념이 없는 우주 공간이며, 장자는 세상 무엇에도 심지어 바람조차 의지하지 않고(무대, 無待)  천지의 기운을 타고 우주에서 노닐었던 사람이다. 세속에서 살면서 우주까지 왕복하기! 그 어떤 즐거움에 비할까 싶었다.

 


10월 한 달 『낭송 장자』 리뷰를 쓰는 시간은 우주를 노니는 것 같은 즐거움을 주었다. 장자를 이렇게 저렇게 해석해 보려는 의지가 활력을 불어넣었다. 우리에게 어쩌면 뱁새나 두더지처럼 많은 소유가 필요 없을지 모른다. 뱁새가 둥지를 트는데 숲 속 전체를 소유하지 않고 나뭇가지 하나만 필요하듯, 두더지가 큰 강물에서 물을 마실 때 작은 배를 채우는 양이면 충분하듯이 말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들꿩 같은 생명력을 잃지 않으며 지금을 활기차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이 글을 읽은 독자라면 『낭송 장자』를 소리 내어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도(道)와 하나 되어 기(氣)가 통하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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