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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드라망리뷰대회 당선작] 자연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여라

by 북드라망 2021. 11. 23.

『낭송 열자』

자연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여라

 

 

- 2등 조혜영

 

 

어느 쾌락주의자의 ‘좋은 삶’을 위한 조언

 

 

최근에 작고 귀여운 낭송시리즈 책을 선물 받았다. 그중에 『낭송 열자』는 낯선 제목이었다. 호기심에 열어보니 책의 소개글이 <어느 쾌락주의자의 ‘좋은 삶’을 위한 조언>이었다. 좋은 삶은 요즘 내가 관심 있는 분야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겪은 후로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며 또 어떻게 죽는 것이 잘 죽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늘었다. 나뿐만 아니라 몇 년 전 웰빙 바람이 분 뒤로 웰다잉까지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지 않았던가. 게다가 쾌락주의자가 조언하는 좋은 삶이라니 더욱 구미가 당겼다. 쾌락주의자란 자신의 욕망대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책머리 설명에 열자가 강조한 근본이 ‘무위’란다. 무위라면 잘은 몰라도 아무것도 없음인 것 같은데. 욕망대로 살라는 쾌락주의자가 아무것도 없는 비움를 추구했다니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열자라는 사람과는 초면이었지만 ‘좋은 삶’과 ‘무위’라는 키워드가 나를 끌어당겨 망설임 없이 책을 펼쳤다. 

 

열자는 전국시대 사람으로 노자, 장자와 함께 도가 사상가로 분류된다. 노자와 장자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고 남겨진 문헌도 별로 없다. 그런데 왜 이 책은 좋은 삶을 찾으려면 『낭송 열자』를 읽으라고 한 것일까? 열자의 시대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지만 다양한 철학이 꽃피운 시기였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도 크고 작은 분쟁이 일어난다. 작게는 가족과의 갈등이나 직장에서의 권력 다툼부터 크게는 강대국 간 분쟁도 있다. 중국의 전국시대와 같지는 않지만 각자의 삶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시대임은 틀림없다. 더불어 각자의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개인 철학의 시대다. 『낭송 열자』는 짧은 이야기로 구성되어 가볍게 읽고 낭송하면서 일상에서 철학을 만날 수 있게 해준다. 더구나 이 책은 노인, 거지, 하급 관리 등 그 시대 비주류의 이야기를 주로 담고 있다.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의 도가 아니라 각자의 삶을 다스리는 개인의 도를 생각하게 함으로써 철학의 문턱을 낮췄다. 하지만 나처럼 열자도 처음이고 동양철학도 처음인 초심자에게는 어리둥절한 부분도 있다. 자동판매기처럼 동전을 넣으면 바로 결과가 나오는 책이 아니고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그래도 작은 것들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열자가 말하는 좋은 삶에 접근하고 싶다면 간편한 사이즈의 『낭송 열자』로 시작해 보기를 권한다. 

 

열자는 사람들이 상식적 판단이라고 믿는 분별력을 비웃는다. 세상에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며 고정된 가치 기준에 따른 분별을 버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조언한다. 열자가 지향하는 삶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사는 삶이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본성을 따르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안에는 삶과 죽음도 포함되어 있다. 어차피 다가올 죽음을 미루거나 막으려 애쓰지 말고 사는 동안을 충분히 누리라는 것이다. 열자는 세속적인 쾌락을 위해 흥청망청하지 않았다. 지극한 즐거움을 찾는 쾌락주의자였다. 옳고 그름을 가리려는 집착을 버리고 자기 안에 머물러 고요함을 얻으라고 말한다. 열자의 가르침을 따라 내 욕망을 다스리며 잘 사는 것은 어떤 것인지 함께 들어가 보자.

 

 

옳고 그름의 기준 버리기

 

열자는 분별의 기준을 버리라고 말한다. 이를 분별력이 없는 어리석음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익숙한 기준을 뒤집어 생각하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옳은 것과 그른 것으로 나누거나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으로 가르는 기준은 자신이 속한 사회나 시대의 흐름에 의한 것일 뿐인데 절대적 가치인 것처럼 거기에 연연하지 말라는 것이다. 철학자 니체는 태어나면서부터 길들여진 도덕의 기준에 관해 끊임없이 의심하라고 주문한다.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을 없애라는 열자의 말도 그런 뜻이 아닐까? 기준을 정해두고 나누다 보면 옳은 것은 좋고 그른 것은 나쁘다는 생각 속에서 점점 세상의 이분법적 가치에 갇혀버리게 된다. 사회가 정한 도덕이라는 것이 항상 옳을 수만은 없는데 우리는 의심 없이 그것에 복종하다가 개인의 삶을 도둑맞는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이 옳다고 강요하는 사회나 회사의 이익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는 시스템에게 말이다. 다수에게 옳은 것이 모든 개인에게도 옳지는 않다. 터럭 하나를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세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않았으니 옳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람에 따라 자신보다 천하를 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이 절대적 진리는 아니다. 섣불리 옳음과 그름의 기준을 세워 선과 악으로 갈라서는 안 된다. 

 

 

열자는 네가 생각하는 좋음은 너의 좋음일 뿐 다른 이에게도 좋은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낭송 열자』에는 봄 햇살의 따뜻함은 알지만 천하에 넓은 집과 따뜻한 방과 고급스러운 옷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농부 이야기가 나온다. 자신이 아는 것, 자신에게 행복인 봄 햇살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행복이 되리라 생각한다. 따뜻한 방과 두꺼운 옷을 가진 사람에게 봄 햇살은 그리 큰 행복이 아닐 것이다. 반대로 다른 이에게 좋은 것도 나에게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 종일 땀 흘려 일하는 것이 즐거운 농부에게 임금처럼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따뜻한 옷을 입혀 일하지 못하게 하면 오히려 고통스러울 것이다. 농부의 본성을 가진 사람은 임금의 삶을 준다고 해도 거북할 수 있다. 남이 가진 것이 좋아 보이고 남의 삶이 멋있어 보인다고 무작정 남을 기준 삼으면 자꾸만 불행해진다. 남의 옷을 입은 듯 불편한데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불안과 괴로움 속에 살게 된다. 책에서는 극단적으로 임금과 농사꾼을 대비하고 있지만 지금은 그 시대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삶의 모습이 있다. 기준이 많아질수록 비교는 늘어나고 고통은 배가 된다.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분별하는 기준을 없앤다면 삶은 훨씬 즐거워진다.

 

열자는 심지어 사는 것과 죽는 것도 좋고 나쁜 것으로 여기지 말라고 한다. 태어난 것이 죽는 것은 천지 만물의 이치이며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그렇다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사는 것은 좋은 것이고 죽는 것은 나쁜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길들여진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멀리하려고만 한다. 누구나 한번은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도 인정하기 싫어 잊어버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삶을 낭비하지 않는 방법은 우리의 유한한 삶을 매일 되새기는 것이다. 오래 살지 못할까봐 걱정하거나 병에 걸릴까봐 전전긍긍하는 것보다 병도 죽음도 자연스럽게 오는 것으로 생각하면 한결 마음 편해진다. 

 

 

지극한 즐거움을 찾아 자기 안에 머물기

 

열자는 노니는 것을 좋아했다. 노닌다는 것은 한가하게 왔다 갔다 하며 노는 것을 말한다. 바깥에서 노닐며 변화를 관찰하기 좋아했던 열자는 바깥의 변화만 알고 자신의 변화는 모르느냐는 스승의 나무람을 듣고 평생 집 안에 머물렀다. 자기 안에 고요히 머물면서 거기서 만족을 얻었다. 자기 안에 머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자신의 틀 안에 갇혀 있다는 말일까? 자신 안에 갇혀있는 것과 자신에게 머무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머무는 것은 능동적인 행위지만 갇혀 있는 것은 수동적 상태이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상황을 알지 못한 채로 일어나기도 한다. 내 안에 머무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하다가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나를 떠올렸다. 나는 상대가 하는 말이 내 의견과 다를 때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 하는 마음이 든다. 상대의 말을 내 마음대로 해석하다 급기야 화가 나면 단단한 방어막을 치고 상대가 내게 보내는 말이나 신호를 모두 튕겨내 버린다. 이때 나는 자신에게 갇혀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내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당시에 화가 났던 나를 돌아보고 무엇이 나를 화나게 했는지 찾는 일일 것이다. 상대방의 말이 맞든 틀리든 상관없이 어떤 것이 나를 자극했는지 내 안에 머물러 천천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안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 변화하는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 열자의 지극한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열자는 가르침을 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던 윤생에게 자신이 수련했던 이야기를 해준다. 열자가 공부한 지 삼 년 후 마음에서 시비를 가리지 않고 입으로는 이로움과 해로움을 말하지 않았다. 오 년 후에는 다시 시비를 가렸는데 이는 없애려는 노력 없이 자연스러운 단계가 되었음을 말한다. 칠 년이 지나자 마음이 생각하는 대로 따라도 시비에 휘말리지 않았는데 옳고 그른 것에 대한 생각이 마음속에서 완전히 떠난 것이었다. 구 년이 지나서는 모든 것의 경계가 사라졌다. 이는 자기 마음과 감정, 자기 존재까지 잊게 되어 텅 빈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렇게 비움으로써 사람도 바람을 타고 마음대로 다닐 수 있다고 했다. 열자가 말하는 비움이란 옳고 그름의 분별을 없애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에 관한 생각 자체를 버리고 마음속을 어지럽히는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었다. 경계가 사라져 자신까지 잊게 되기까지 얼마나 오래 수련을 해야 할까? 겨우 몇 달을 버티던 윤생은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워했다. 평생을 바쳐도 부족할 지극한 경지에 이르는 것 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주 작은 괴로움부터 떨쳐내는 것이다. 스승이 가르침을 줄 것이라 믿고 기다린 윤생은 바깥에서 해답을 찾으려 했지만 결국 자신 안에서 찾으라는 답을 들었다. 자기 안에 머무르며 스승을 원망하던 마음부터 사라져야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본성에 따라 살며 운명을 받아들이기

 

『낭송 열자』에 의하면 천지에 내 것은 없으며 내 몸도 내 것이 아니다. 천지가 맡긴 몸이니 아껴야 하고 타고난 본성은 따라야 한다. 본성에 따라 산다는 것은 불편함이나 고통스러움이 없는 자연스러운 상태를 말한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일부러 하려고 하거나 억지로 하는 일이 없는 것을 말한다. 이를 ‘무위’라 할 수 있는데 열자가 강조한 비움과도 통한다. 왕의 짐승을 기르던 양앙이란 사람에게 들짐승을 잘 다루는 방법을 물으니 마음에 거스름도 따름도 없는 것이라 답한다. 짐승의 본성에 거스르거나 따르지 않으면 같은 무리로 여겨 싸움이 나지 않는 자연스러운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비움의 상태가 바로 고요하고 평화로운 자연의 삶이고 본성에 따라 사는 것이다.

고사성어 ‘기우’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까봐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는 뜻으로 주로 쓰인다. 열자는 천지가 무너진다 말하는 것도 천지가 무너지지 않는다 말하는 것도 잘못이라 한다. 어느 쪽도 반드시 일어난다고 할 수 없다. 일어나든 안 일어나든 결국 마찬가지이고 우리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일어나는 일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다.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죽지 않는 것이 아니고 삶을 귀중히 여긴다고 사는 것도 아니다. 사는 것과 죽는 것 모두 운명에 속한 것이고 걱정한다고 달라질 것이 없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죽음을 피하고 싶어 건강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하지만 죽음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병에 걸리는 것도 죽음이 오는 것도 노력으로 막을 수 없는 운명이며 자연의 이치다. 마치 무엇을 잘못해서 병에 걸리는 것처럼 생각하며 불안할 필요가 없다. 운동을 열심히 하고 건강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사람의 운명이 잘 타고난 것일 뿐이다. 건강하다고 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삶이 죽음을 맞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무섭다고 피하려 하기 보다는 좋은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오히려 좋은 삶으로 연결된다. 사는 동안 후회 없이 산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니까. 

 

『낭송 열자』에 자주 등장하는 양주는 사람들이 쉬지 못하는 것은 수명, 명예, 지위, 재물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귀신도 사람도 세상도 두려워하며 자연의 이치로부터 도망가려는 자를 ‘둔인’이라 불렀다. 그에 반해 ‘순민’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운명을 거스르지 않으니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다고 했다. 둔인은 자신의 운명을 제어하는 것이 밖에 있다고 여기지만 순민은 운명을 다루는 것이 자기에게 있다고 여긴다. 열자처럼 자기 안에 머물러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 바로 순민일 것이다. 물질의 가치에 집착하면 삶은 거기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둔인처럼 자신의 바깥에 있는 것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운명에 끌려 다니지 말고 순민처럼 본성에 따라 살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운명에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 사람의 일생을 백년 남짓이라 해도 실제로 즐겁게 만족하며 사는 때는 한순간뿐이다. 삶과 죽음이 모두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짧은 생의 순간을 억지로 참으며 보내지 않는다. 지금 좋아하는 것을 즐기면서 산다면 명예나 수명의 길고 짧음도 아무 상관없을 것이다. 만물이 서로 다른 것은 삶이요 서로 같은 것은 죽음이다. 모든 삶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니 다만 지금 살아있음을 누려야 한다. 죽은 뒤를 걱정할 겨를이 없다.

 

 

자신의 변화를 인정하기

 

누군가 열자에게 비움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를 물었다. 열자는 ‘비우면 귀하게 여기는 것도 없다’고 답한다. 고요하게 비우며 살아간다면 사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라고. 열자의 비움은 경계가 없는 것이고 자연스러움이고 운명에 따르는 것이다. 비우고 사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좋은 것과 나쁜 것 가리지 않고 바라보는 것이고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든 어떤 사건에 의한 변화든 자신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인정하는 것이다. 세상 만물은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뿐이다. 태어나 죽는 것은 정해진 이치이고 죽을 때까지 변하는 것은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다. 나이 들어 늙고 병든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기 싫어 의학의 힘을 빌어서라도 막아보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아 괴롭다. 아무리 노력해도 삶은 결국 죽음을 향해 걷는다. 물거품이 될 노력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나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 마음속에 요동치는 모든 것들을 고요히 바라보는 것이 비움이고 잘 사는 방법이다.

 

나는 책 소개에서부터 ‘쾌락주의자’와 ‘좋은 삶’에 꽂혀서 그것에만 집중해서 읽었다. 이제껏 살아온 방식대로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내 생각이 ‘맞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책을 모두 읽고 나니 열자는 나에게 묻는다. 네가 알고 싶던 좋은 삶을 찾았느냐고. 나는 『낭송 열자』로 열자라는 사람을 처음 만났고 이 책을 읽고 난 뒤에야 장자와 비슷한 계열의 사상가라는 것을 알았다. 몰라서 용감했다. 이 작은 책에서 삶의 정답을 찾으려 했다니. 책은 손쉽게 답을 주지 않는다. 하기야 삶에 쉬운 정답 같은 것이 있다면 그 많은 철학이 나올 이유도 없었겠지. 이 책도 입으로 읊조리며 오래 곱씹어야 그 뜻을 조금 알게 된다. 삶에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으니 그에 연연하지 말고 물 흐르듯 살라는 가르침은 말로 하자면 쉬운데 그렇게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책은 남들이 세워놓은 기준에 따라 살다가는 자신의 본성을 잊게 된다고, 자기 것은 잃어버리고 남의 인생 기웃거리다 보면 어느새 죽음 앞에 서게 된다고, 사는 동안 매일 즐거움을 찾아 누린다면 죽음도 두렵지 않게 될 것이라고 차근차근 풀어 놓는다. 좋은 삶, 가치 있는 삶이란 결국 남의 욕망을 따라 스스로가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나는 양주가 말했던 둔인이었다. 둔인은 세상의 가치에 휘둘려 자신을 남과 비교하고 좌절감을 맛보며 좋은 삶이 어디에 있는지 바깥에서 찾아 헤매는 사람이다. 나는 이제 열자처럼 자신 안에 머무는 사람이고 싶다. 경계가 없는 완전한 비움에 이르기까지는 어렵겠지만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나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것이 내 삶에 녹아들면 어떨지 궁금해졌다. 변해가는 나를 제대로 바라보면 즐거운 일은 더 많이 생길 것이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늘어가는 주름으로 절망하던 시간에 좋아하는 일을 하나라도 더 해보는 것, 건강이 나빠질까봐 걱정하던 시간에 재미있는 일을 하나 더 만들어 보는 것이 잘 사는 것이고 그것이 잘 죽는 것이다. 나에게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변화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쾌락주의자의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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