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대중지성, 홍루몽과 만나다』 밑줄긋기

사실 인생에는 ‘번영’이라는 사건도 없고 ‘몰락’이라는 사건도 없다. ‘지극한 사랑’의 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의 소멸’도 한순간에 오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시간들은 매일 똑같은 것 같지만, 그런 매일이 모이고 쌓여서 흥망성쇠의 굴곡과 애절한 러브스토리를 만든다. 조설근처럼 미세한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면, 번영과 몰락이라는 이미지는 사라지고 수많은 사건이 교차하는 현재만 남는다. 그리하여 그 하늘과 땅처럼 넓었던 간극은 평범한 날들로 채워지고, 삶의 모순은 수많은 사건들의 필연적인 연결이 되는 것이다. 십수 년의 시간 동안, 그의 글쓰기는 단순히 과거를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찰하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그의 기록은 그가 장담한 대로 우리에게 새로운 안목을 선사한다. 똑같은 것 같은 매일이 인생의 드라마를 만들고 있으며, 우리 삶의 매 순간엔 인생의 변화와 역설이 모두 담겨 있다는 사실 말이다.(25쪽) 

『대중지성, 홍루몽과 만나다』는 중국의 고전 『홍루몽』을 지금 여기의 시선으로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책, 혹은 다시 읽는 고전의 맛을 알려준다. 저자는 우리에겐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지만, 유명한 고전인 홍루몽을, 왜 여기에서 지금 보아야 하는지는 ‘마음’으로 읽어준다. 그래서 저자의 말이 인상 깊다. “어떤 사건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매일의 시간이 모여서 스토리가 되어 갑니다. 『홍루몽』은 집요하게 일상의 현장만을 묘사하거든요. 아마 우리 인생도 그렇겠죠? 인생이 어디로 갈지 아무것도 모른 채, 하루하루, 순간순간만을 살 수 있을 뿐입니다. 중요한 건 그 순간에 주변의 것들과 연결되어 일렁이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있는 곳에 삶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 『홍루몽』에 담겨 있는 인생이 아닐까 합니다.” 이처럼, 홍루몽을 통해 인생의 ‘다른’ 의미를 찾아보면 어떨까 한다. 

 

원앙의 혼백을 맞이하러 온 선녀는 그녀에게 태허환경에서 치정사(癡情司)를 맡아보는 일을 부탁한다. 이 임무는 풍월로 빚어진 채무를 맡아 보는 일로서 세상에서 제일가는 정인(情人)이었던 진가경이 하던 일이다. 원앙은 “저는 누구보다도 무정한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을 어떻게 유정한 사람으로 치시는 거예요?”라고 되물으며, 생전에 정을 느끼지 않았던 자신이 할 일이 아니라고 여긴다.(110~111쪽)  
『홍루몽』에선 정의 정의가 여러 번 나와도 모두 알 듯, 말 듯 하나, 여기서 추론해 볼 수 있는 것은 정은 인간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마음이라는 바탕 자체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오묘하게도 지극한 정의 극대치와 발하기 전의 무정함이 마치 정의 시작과 끝처럼 만나고 있다. 인간세상에서야 이런 사랑, 저런 사랑이 구분되고, 또 어떤 사랑은 용납되지 못하기도 하고, 또는 지탄을 받기도 하지만, 실은 다 우리가 구획지어 규정하는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보라!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던 자들이 저승에 가면, 누구보다도 무정했던 치정사(癡情司)가 사랑의 계산 장부를 들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112쪽)  

정이 넘실대는 책, 『홍루몽』에 무정한 여인이 있어 눈길을 끈다. 원앙은 독신주의자다. 정실부인도 싫소, 첩도 싫소. 내 인생에 결혼은 없다며 선언하는 그녀. 그녀의 독신주의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생각만 해도 머릿속에서 비상 사이렌이 울리고, 냄새만 맡아도 위장이 먼저 달려 나와 격렬하게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졌을 뿐이다. 그리하여 원앙은 외칠 수밖에 없다. 독신이 아니라면 죽음을 달라! 독신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결국 자살하는 그녀.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다. 혼백이 되어 간 곳에서 그녀는 남녀 간의 치정 문제를 관장해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연유를 묻는 원앙에게 선녀는 말한다. 무정함과 유정함은 다르지 않다고. 『대중지성, 홍루몽과 만나다』의 저자는 말한다. 사랑에 목숨 건 인간의 정이나, 독신에 목숨 건 인간의 정이나, 그저 한 종류의 정이라고. 듣는 순간, 그 아이러니함에 감탄이 나온다. 읽을수록 알 듯 말 듯한 정의 세계로 빠져드는 기분이다. 

 

조설근은 앞으로 펼쳐질 규중의 여인들과 보옥이의 이야기가 ‘속된 말’로 꾸며 낸 것이라 밝히고 있다. … 책 제목 속 ‘홍루’(紅樓) 역시도 홍진세계의 화려한 누각으로, 홍진이란 먼지처럼 덧없이 사라질 속세를 일컬으니 홍루가 의미하는 것은 가짜에 불과한 화려한 현실세계다. 그러나 조설근의 시선은 숨겨진 진실이 아니라 남겨진 거짓에 꽂혀 있다. 안 보이는 진실을 찾아 헤매는 게 아니라 홍진에 불과한 세계를 촉촉한 시선으로 관찰한다. … 언어는 세상을 다 담을 수 없고 진실인 것도 아니지만, 모든 존재는 언어를 통해서만 명명되고 기록된다. 마치 어떤 사건을 눈앞의 현실태로 만드는 이중 슬릿 장치의 관측자처럼 말이다. 그래서 ‘규중의 일을 세상에 밝히’고 거기에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얘기하고픈 조설근의 진심은 이렇게 ‘가짜 이야기’(假語)를 통해서만 전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두번째 역설이다. 그러니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일까. (185~186쪽)

부처님은 유언으로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으니 용맹정진하라!”라고 하십니다. 동양철학의 태두라 할 수 있는 노자는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즉 “도를 도라고 할 수 있으면 항상된 도가 아니고, 이름에 이름을 붙일 수 있으면 항상된 이름이 아니다”라고 하셨고요. 이렇게 큰 사상가들이 ‘지금-여기의 세상은 무상하고, 무너지고 있으며, 가상에 불과하다는 것’, 바로 이것이 바로 ‘진리’이고 ‘도’라는 것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세계 속에서 부처님은 ‘굳이’ 용맹정진!하라고 하십니다. 노자는 훌쩍 신선 세계로 떠나면 될 것을, '굳이' 속세에서 글자와 개념으로 ‘도’에 대해 설명하려고 애쓰고 있지요. 『홍루몽』의 저자 조설근이 ‘가짜 이야기’를 통해서만 진심을 전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렇게 ‘도’와 ‘진리’로 가는 길은 저 너머에 대한 고아한 상상이 아니라, 바로 여기 ‘붉은 먼지’ 날리고, 때로는 ‘촉촉’하기도 하고 때로는 ‘축축’하기도 한 세상 속에 펼쳐져 있다는 것, 이것이 번화하고도 쓸쓸한 『홍루몽』에 담겨 있는 이야기입니다.

 

 

무상성에 대한 보옥의 질문들은 그를 아프게 하는 괴로움들이었다. 하지만 그 괴로움이 있었기에 비로소 깨달음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그래서 『홍루몽』의 다른 이름이었던 『정승록』(情僧錄)은 색(色)으로 인하여 공(空)을 본다는 색즉시공의 세계이자, 보옥이의 깨달음의 여정을 말해 주는 제목이었을 것이다.
중이 보옥이에게 던진 질문을 내게도 던져 보았다. — ‘너는 어디서 왔어? 네 아이는 어디서 왔지?’ 아끼고 사랑하는 대상과 그 마음들이 사라지는 것만을 절감하는 무상성은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게 하지 못했지만, 우리가 어디서 생겨나서 이렇게 살고 있는가를 감히 통찰할 수 있다면 그 괴로움의 전제는 사라져 버릴 것이다. 본래 없던 것이니 사라질 것이 없지 않은가.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져가는 것이니 잃은 것이 없지 않은가. 보옥이를 따라가며 배운 깨달음의 한 걸음이자 놓치지 말아야 할 새로운 질문이다. (260~261쪽)

'무상'(無常)함'은 '덧없음'이지만, '무상'에는 '일정하지 않고 늘 변함'이라는 뜻이 함께 있다. '덧없음'의 사전적 정의는 '알지 못하는 가운데 지나가는 시간이 매우 빠름'이다. 과연 세월은 무상하다. 하지만 그 무상함이 그저 '허무'로만 치환될 수 없는 것은, 붙들려 있지 않은 시간이 우리를 살게 하고 사라지게 하고, 그렇게 우주를 움직이기 때문일 것이다. 얼핏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목표나 사랑의 대상 같지만, 우리를 둘러싼 시간이 늘 흐르고, 공간이 늘 변하고 있기에 살 수 있는 것이다. 이 지극한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를 『대중지성, 홍루몽과 만나다』와 함께 만나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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