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반 일리치는 (도구를) ‘누가 소유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도구의 성격 자체가 어느 시점을 지나면 삶의 편의성을 증대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것으로 변한다는 겁니다. 전통적인 좌파의 시각에서 보는 노동의 소외, 우울, 착취, 이런 문제들이 생산수단의 소유 문제보다는 생산수단, 곧 도구의 성격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거죠. 이런 점에서 일리치는 기존의 사고 방식들과 많이 달랐습니다.(39-40쪽)
우리 시대는 (일리치의 관점이 아니더라도) ‘도구 과잉’의 시대다. 가령 예를 들면, 나에겐 두 대의 유선 키보드와 세 대의 무선 키보드가 있다. 쓰다가 고장이 난 것을 그대로 두어서이기도 하고, 막상 고치려고 해도 딱히 ‘사용자’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치는 것보다 새로 사는 게 훨씬 싸다. 덕분에 책상 서랍 한 칸이 키보드로 채워지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것은 ‘도구’가 넘쳐나는 시대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데 그렇다고 모든 도구를 거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미 생활 깊숙이, 아니 신체의 한 부분으로까지 들어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그것들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을까!? 여기서 내 삶의 딜레마가 생겨난다. ‘도구 과잉’과 ‘도구 거부’의 사이를 어떻게 매울 것인가? 이 책(『이반 일리치 강의』)을 다 읽고, 사놓고서는 아직 그리고 여전히 읽지 않은 이반 일리치 전집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1970~80년대로 넘어가면서 이반 일리치가 도서관의 다른 측면을 보게 되는데요. 사람들이 도서관 역시 학교처럼 이용하는 것을 보게 된 거죠. 도서관이 공생적 도구로 더 많은 지역에서 만들어지고, 그렇게 이용되면 좋을 텐데, 도서관 이용자들이 어느새 도서관을 서비스의 제공자처럼 여기고 자신들은 서비스의 수혜자처럼 생각을 한다는 거예요. 그런 걸 보면서 일리치는 ‘학교냐 도서관이냐’의 문제가 아니구나, 이런 식으로 자율적인 배움의 도구를 구분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 제가 생각하기에 70년대 이반 일리치가 제도적 서비스의 제한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80년대에는 우리의 실존양식을 바꾸는 데 더 초점을 맞추는 것 같아요. 주체가 바뀌지 않으면 어떤 것도 바뀔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게 아닐까요?(90~91쪽)
이반 일리치는 『학교 없는 사회』에서 학교 대신 도서관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학교가 삶을 위한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어 삶의 물리적 측면뿐만 아니라 욕망까지도 ‘조작’하게 되었다고 분석하면서, 도서관이야말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체계적으로 사람을 탈락시키는 구조가 아닌 ‘공생적’ 도구에 가깝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주체의 가치관이나 실존양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제도와 도구도 기존의 삶의 질서에 휘말려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휘말림은 ‘혼자’일 때 더 강력하게 작동하고요. 그래서 책의 저자인 이희경 선생님은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함께 공부할 때, 서로 의존하고 살펴주면서 이런 휘말림을 피해나갈 길을 더 잘 모색할 수 있겠지요. 코로나로 인해 모니터 앞에 앉아 공부하는 시간이 늘고, 공부를 하지 않을 때도 모든 정보를 친구나 사회가 아니라 유튜브에서 습득하는 지금, 꼭 되새겨야 할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현대사회는 삶의 과정인 고통과 질병과 죽음을 의학적이고 기술적으로 처리하는 사회라는 거예요. 그래서 통증은 없애고, 질병은 치료를 통해 물리치고, 그리고 죽음은 연명을 통해 늦춰져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의학에서는 통증은 더 이상 참을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의학적으로 치료가 가능한 것이고, 통증을 참는 것은 어리석은 것처럼 여겨지고 있고요. (121쪽)
‘고통을 겪어 내는 것’을 일리치는 ‘Suffering’이라는 영어 단어를 써서 표현합니다. 고통, 그리고 질병과 죽음은 닥쳐오는 것이고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걸 우리가 신도 아닌데 어떻게 예측하거나 피하겠어요. 그런데 의료 유토피아나 기술 합리성은 그런 것들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혹 그런 일이 닥쳐와도 기술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우리에게 메시지를 준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다가오는 건 운명이에요. 겪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중요한 건 그걸 겪어 낼 수 있는 다양한 기술들인 겁니다. (122쪽)
그런데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체계가 있다면 ‘이런 일이 왜 닥쳤지?’를 고민하고 해결책을 스스로 모색하게 된다는 겁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 것도, 자기에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답을 찾고 싶은 거죠. 암이나 교통사고 같은 것이 나에게 온 걸 어떻게 이해할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처음에는 좌절하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하고 하겠지만, 점점 이런 것들을 사유하고 공부하면서 지평이 넓어지기도 합니다. (123쪽)
『이반 일리치 강의』는 학교와 병원이라는 큰 낱말로 그의 사상과 실천적 성찰을 친절하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상황에서 특히, 질병, 고통, 병원에 대한 성찰이 왜 필요한 가를 (일리치의 사유를 통해) 주의 깊게 보게 됩니다. ‘고통은 겪어내는 것’, 이 자체가 삶이라는 말처럼, 고통 자체에 대해, 질병에 대해서 자기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에 대한 답은 의학적 지식만으로 찾아지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질병이 주는 고통을 사유의 과정에서 성찰한다면 그야말로 그 자체가 건강한 삶일 것 같습니다. 노, 병, 사는 겪을 수밖에 없는 것, 운명인데, 그래서 중요한 건 그걸 겪어 낼 수 있는 앎의 지평(해석하고, 완화하는 방법)을 다양하게 넓히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슬로건을 말씀드리면서 강의를 좀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건강에서 양생으로! 자기계발에서 자기 돌봄으로!”
앞의 슬로건 ‘건강에서 양생으로’는 건강에 대한 오늘의 관점을 좀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서 말씀드린 슬로건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건강에 대한 관심이 약간 페티시처럼 되었어요. 페티시는 ‘물신’이라는 뜻이잖아요. 건강이 마치 ‘신’처럼 되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중세의 ‘신’ 대신에 ‘과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신이 등장했죠. 그런데 이 새로운 물신인 ‘과학’의 다른 말이 ‘의료 기술’입니다. 그래서 대학에서도 최근에는 생명공학, 바이오 공학이 인기가 많죠.
그런데 건강이 어떤 상태인지는 사실 객관적으로 규명하기가 쉽지 않아요. 다른 사람 눈에는 매일 비실비실 살아가는 것 같아도 본인은 ‘나는 참 건강한 편이야’라고 생각할 수 있고, 반대로 건장한 체격에 넘치는 에너지를 가진 사람처럼 보여도 막상 자기 자신은 “요즘 내 생활이 건강하지 않은 것 같아”라고 말할 수도 있는 거니까요.(128~129쪽)
정보가 폭발적으로 넘쳐 나는 시대라 누구나 '건강' 관련한 정보 역시 마음만 먹으면 전문가(?) 수준으로 알 수 있다. 다이어트도 얼마나 '과학적'으로 하며, 운동도 얼마나 '과학적'으로 하는지, 옆에서 지켜보면 입이 벌어져 다물어지질 않는다. 각 영양소가 미치는 영향을 읊는 정도는 애교 수준이랄까. 그런데, 그래서 '과학적'인 정보들만큼 자기 몸이 어떤지도 더 잘 알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에는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건강'은 어떤 것일까. "병과 더불어 더 성숙한 삶을 살기"는 어떻게 가능할까. 『이반 일리치 강의』는 이 질문들에 다가가는 우리가 처음 읽어야 할 책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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