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열대』 9화_산 자와 죽은 자
자유의지는 없어 공생의 지혜만 있지!
불태워야 할 의지는 도대체 어디에 있나?
입추였던 토요일 저녁, 기온이 조금 내려간 것 같아 둥순이 둥자와 호수를 산책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둥순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엄마 나 게임에 중독됐나봐. 모든 것이 게임처럼 보여.” 정말 큰일 날 소리입니다. 저도 과거 테트리스에 빠져 눈만 감으면 하늘에서 벽돌이 내려오는 통에 고생을 했는데요, 초4에게 벌써 이런 일이? @.@ 저는 걸음을 멈추고 다그치기 시작했습니다. “너! 그러면 안 되잖니? 왜 게임을 그만 두지를 못하니, 엉?” 등등. 아, 둥순이는 의지가 너무 약한 것일까요?
의지? 그런데 게임중독이 둥순이 의지의 문제일까, 갑자기 의문이 들었습니다. 정말 둥순이는 게임을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었을까요? 둥순의 선택을 좌지우지 한 그 의지는 왜 하필 그렇게밖에 발휘되지 않았던 걸까요? 그렇다면 둥순에게는 자기 의지를 조절해주는 또 다른 장치가 있다는 말이 되는데요. 이렇게 따져 들어 가다보니 ‘의지’가 절대로 무에서는 나올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밤늦도록 켜져 있는 텔레비전, 심심하면 휴대폰을 보고 있는 부모,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학교 수업, 코로나로 갈 수도 없는 놀이터, 밖에서는 만날 수도 없는 친구. 거대한 온라인 네트워크가 우리를 이미 둘러싸고 있고 집 바깥에서 놀 길은 점점 막혀 가는데, 저는 둥순이더러 의지를 발휘하여 그 바깥으로 나가라고 독촉했던 것입니다.
줄리언 제인스라는 인류학자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남긴 여러 가지 기록물들을 검토하다가 호메로스를 비롯해서 그 어떤 시인들도 ‘의지’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줄리언 제인스,『의식의 기원』참고). 한나 아렌트라는 철학자도 같은 맥락의 말을 한 적이 있다지요. 아렌트는 의지라는 개념은 결코 보편적이라고 할 수 없다며, ‘의지’ 개념의 기원을 정확히 꼽기는 어렵지만 그 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기독교라고 했다 합니다.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리스도교 안에서 의지를 주체의 선택과 책임의 문제로 연결시키는 개념이 발달했다고요(고쿠분 고이치로,『はじめてのSpinoza』참고).
어떤 일을 바라볼 때, 그것을 한 개인의 의도나 의지 문제로 돌리면 사건의 성패나 과오를 판단하기가 쉽습니다. 의지를 잘 발휘하지 못한 사람에게 사건의 책임을 지우기도 좋지요. 그러나 문제는 그 누구도 혼자 나서 크고 살아가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레비 스트로스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열대의 ‘자아관’을 살펴보겠습니다. 인디언들은 누구도 자신을 ‘의지’를 발휘해야 하는 독아적인 주체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럼 어떻게? @.@
네 위치를 알라! : 보로로족 지면배열의 비밀
『슬픈 열대』22장, 23장입니다. 죽을똥 살똥 고생해서 레비 스트로스 일행은 겨우 보로로족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들을 낮밤으로 환영해주었지요. 탐험대의 도착 소식을 이야기하며 웃고 북새통을 벌이기를 며칠이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감탄하면서 바라봅니다. ‘타자를 향해 사심 없이 두 팔 뻗을 수 있는 이 개방적이고 소탈한 마음은 어떤 우주관으로부터 나온 것일까?’
보로로족은 카두베오족보다 훨씬 더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변변한 가재도구도 옷가지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물론 서양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보일 거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레비 스트로스 선생님은 조금 다른 것을 보시지요. 남자들은 대단히 장식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얼굴은 귀 밑부분까지를 모두 붉은색 염료로 칠하고 있었고요. 걸친 것은 단지 성기 덮개뿐이었는데 이 덮개의 무늬가 저마다 다르고 개성이 있었습니다. 이마나 양쪽 뺨, 입 언저리에는 말굽 모양의 그림이 그려져 있기도 했고 몸에는 진주조개 가루가 섞인 분말이 여기저기에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비해 여자들은 조금 소박한 차림이었지요. 그녀들은 허리에는 나무껍질로 된 허리띠를 차고 가슴과 어깨 위에는 무명을 이중으로 엮은 천을 둘렀습니다. 아래로는 우루쿠라는 그 붉은 염료에 적신 무명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남성들이 훨씬 더 화려하고 개성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마을의 인간관계는 어떤 방식으로 조작되어 있을까요?’ 레비 스트로스는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단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의 지세를 전체적으로 읽으면서 지물(地物)들의 배치를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마을을 한번 휘 돌아보았지요.
레비 스트로스는 마을의 오두막 배치에서 어떤 규칙성을 발견했습니다. 마을은 우리라면 배산임수(背山臨水)라고 할 조건에서 가옥을 배치하고 있었습니다. 한쪽으로는 강이 흐르고 있었고 다른 쪽은 숲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죠. 전체 오두막은 모두 스물 여섯 채였는데요, 둥글게 원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중심에는 길이가 20미터 폭이 8미터 정도 되는 큰 오두막이 있었습니다. 이 오두막은 남자들의 집으로 ‘바이테만나제오’라고 불리고 있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미혼의 남자들은 모두 이곳에서 잠을 잔다는 것을 즉각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냥 및 고기잡이 혹은 어떤 의례가 있는 때를 제외하고 보통 때에도 마을의 성인 남자들이 낮에 모두 이곳에 모여 시간을 보낸다는 것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마을의 테두리 역할을 하는 오두막들은 모두가 가족들이 거주하는 곳이고 또한 여성들의 집이었습니다. 기혼한 남자들은 바이테만나제오와 아내의 집을 왔다갔다하면서 지내는 셈입니다.
이 지면배열은 다시 상하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부족은 두 개의 반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요 이를 위와 아래로 나누어 배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이테만나제오에는 두 부족 출신의 미혼남들이 섞여 있는 셈이지요. 상과 하로 나뉘어진 반족은 다시 ‘상중하’로 분화되어 있었습니다. 여자들의 집은 이 분화의 선분을 따라 계층적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럼 지면 배열의 논리를 알아보겠습니다. 레비 스트로스가 머문 이 마을에서는 북쪽 사람들은 ‘세라’라고 하고 남쪽 사람들은 ‘투가레’라고 했습니다. 세라족은 ‘약한’을 뜻하고 투가레는 ‘강한’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강해서 좋고 약해서 나쁘다라고 하는 어떤 가치 판단된 개념은 아니었습니다. 이 마을에서 각각의 개인들은 그의 어머니가 따르는 집단에 영구히 소속됩니다. 아들은 결혼을 해도 어머니에게 속합니다. 결혼은 반드시 족외혼이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각 부족 사람들은 예를 들면 세라 족의 상층 남성은 투가레족의 상층 여성과만 결혼할 수 있게 됩니다. 나의 어머니가 세라라면 나는 죽을 때까지 세라이고 아내는 투가레여야 합니다. 집은 여자들에게서 여자들로 상속됩니다. 보로로족 남성은 결혼과 동시에 아내의 집으로 건너가지만 그곳에서는 절대로 ‘집에 있다’는 감정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가 친밀함을 느끼는 그의’ 집은 어머니가 계신 곳 그러니까 누이의 남편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의 남자 형제들이 집에 찾아오기라도 하는 날에 그는 좀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아내의 집은 아내의 남자 형제들을 위한 곳이기도 하거든요. 그럴 때 남편은 잠깐 자기 집에 다녀오면 됩니다.
레비 스트로스의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보로로족 사람들은 그 누구도 홀로, 개인으로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부족이 살아가는 지면배열의 엄격한 규칙에 따라 자기 위치에 맞게 살아갑니다. 각자는 지면 배열에 따른 위치값에 의거해 성격, 재주, 능력을 결정받습니다. 혼자 무슨 의지를 발휘하고 말고 할 수가 없습니다. 악! 너무 갑갑할까요?
호혜, 차이를 바라보는 공생의 세계관
지면배열에 따른 존재 구속은 철저했습니다. 그럼 이런 조직 관계도에 주박된 개인에게 자신의 의지대로, 개성대로, 사회 속 역할과 위치를 가져갈 자유란 없는 것일까요? 네, 없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더욱 더 깊숙이 이들을 관찰해 들어갔습니다. 이들은 분명 지면 배열에 따른 위치를 자기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지면 배열에 구성의 원칙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첫째, 모든 위치는 중복을 피하도록 조정되고 있었습니다. 둘째, 이렇게 배열된 위치들은 상보적 합치를 목표로 서로 의존했습니다.
보로로 마을 속으로 다시 들어가 보겠습니다. 사회 전체는 일단 남성과 여성으로 분화됩니다. 중심에 있는 ‘바이테만나제오’는 남성의 공간이고 그것을 둘러싼 가족의 집은 여성 공간이니까요. 장례와 같은 부족의 의례는 모두 바이테만나제오에서 준비되고, 여성은 의례의 방관자가 되어 그저 바라보는 역할만 하게 됩니다. 그 다음 각 남성들의 사회와 각 여성들의 사회가 반족에 의해 기능분화되어 있습니다. 대지와의 관계에서 약한 세라족은 부족의 인간적 문제에 더 깊이 개입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치적 종교적 의례 기능을 주로 담당합니다. 반면 강한 투가레족은 물리적 우주에 보다 밀착해있는 까닭에 영적인 임무를 훨씬 더 적극적으로 맡습니다.
부족 안에서의 결혼이 반드시 족외혼이어야 한다는 것은 이들이 제각각의 위치값 간의 상보적 관계를 삶의 목표로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여성에게는 자궁만 있고 남성에게는 정자만 있다, 세라족에게는 문화를 관장할 능력만 있고 투가레족에게는 숲과의 친밀한 관계만 있다. 그러니 어떻겠습니까? 각자의 능력은 각자의 한계이기도 하기 때문에 서로는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그래서 출산과 장례는 서로의 손을 빌리지 않을 수 없는 방식으로 의례화되어 있습니다. 세라 족 일원이 죽는다면 장례는 반드시 투가레 족에서 주관한다는 방식으로 말이지요.
이 부족에서 각자는 절대로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위치값으로서 부족원들에게 받아들여집니다. 저는 상상해봅니다. 이것은 분명 마을 앞길의 잡초를 뽑는 일도 아무나 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관계의 배치일 겁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나 하나 멈추면 마을 전체가 돌아가지 않게 되어 있겠지요. 누군가 하루쯤 몸이 안 좋아 자기 할 일을 못했다면 마을 안에서는 금방 표시가 날 것입니다. 부모 역할을 비유로 가지고 와 보겠습니다. 누군가의 엄마가 되면 아파도 멈출 수 없는 일이 있지요. 어린 새끼의 밥을 마련해야 하고 당장 내일 입을거리를 갖춰 놔야 합니다. 보로로 족 구성원들은 거의 이 정도로 관계에 대한 의무를 느끼지 않았을까요? 보로로족 안에서 성인이 된다는 것은 위치를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거의 유령처럼 취급받기도 하지요.
하나 더.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것은 남녀 차별이 아닌가? 싶은 대목도 있긴 합니다. 이 부분도 레비 스트로스를 따라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 확실히 남자들에 의해 보로로족 사회의 모든 주요한 일들이 결정되기는 합니다. 부족의 샤먼도 오직 남자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남성중심적 차별 사회라고 진단하려면 그 문화 안에서 작동하는 ‘통치자’ 권력의 성격과 위상을 따져보아야 합니다.
한 성이 차별받는다고 할 때에는 반대편 성이 문화의 척도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상보적 호혜의 사회 안에서는 두 성 모두 서로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차별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보로로족의 장례식 때 바이테만나제오에서 화려하게 죽은 자처럼 차려입고 의례를 주도하는 자는 분명 남자입니다. 반면 여자들은 오두막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고 그 모든 의례를 관망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여성을 의례로부터 배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성을 생명 즉 삶이라고 보고 남자를 그에 대비되는 문화라고 보는 상징적 이분법 때문입니다. ‘생명은 죽음을 둘러싼 사건들에 개입하지 않는다, 생명은 그것을 관망하며 그 자체로 활기를 보존한다!’입니다. 산 자는 죽은 자가 오고가는 일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는 확고한 우주관에 따른 의례적 배제인 셈입니다.
이반 일리치의 연구에 따르면 중세의 농업 문화 안에서도 성차(gender)는 중요한 삶의 구분선이었다고 합니다. ‘베기는 남자가 줍기는 여자’가 라는 식으로 모든 노동은 성차적으로 이분화되어 있었습니다. 남성이나 여성은 다시 나이에 따른 역할 구분을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남자나 한 사람의 여자는 일생 동안 그 마을 안에서 주어진 여러 역할을 통과하면서 늙어가게 됩니다. 사춘기 소녀만 만질 수 있는 바늘이 있고, 할머니만 다룰 수 있는 베틀이 있다 이런 식인 겁니다. 그런 배치 안에서 사람은 늙어가면서 자기 역할을 바꿉니다. 그는 마을 안에서 관계 맺는 항들을 달리하면서 점점 더 넓은 인연의 그물 속으로 얽혀 들어가게 됩니다(이반 일리치,『젠더』).
이반 일리치는 여기서 ‘호혜’의 개념을 봅니다. 호혜란 ‘각자가 가진 고유한 능력의 한계 때문에 삶의 복잡한 국면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서로 상보할 수밖에 없다’라는 개념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남아돌아서 누군가에게 뭔가를 시혜하는 식의 원조와는 확실히 구별됩니다. 레비 스트로스가 본 보로로족의 지면 배열은 바로 이런 호혜의 공생 관계를 가시적으로 표현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호혜’라고 하는 장치가 이토록 강하게 걸려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레비 스트로스는 보로로족의 문화 안에도 충분히 ‘적대’라고 할만한 요소가 있음을 간파합니다. 마을의 각 반족들은 자존심이 대단해서 경우에 따라서 상대편 반족을 극렬히 질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 질투는 같은 능력을 가진 자들이 벌이는 성취에 대한 비교는 아니었습니다. 보로로족은 자기 관대함의 과시를 자랑하지 못해 안달이기는 했지요. 그런데 그것은 ‘나는 네가 나 없이는 삶을 꾸려나갈 수 없다는 것을 이 정도까지 보여줄 수 있다!’ 였습니다. 옴마나~ 자기가 얼마나 많은 의무를 질 수 있는지, 자기가 얼마나 많은 관계 속에 얽혀 있는지, 그것이 최고의 자랑이 되는 곳이 바로 보로로 마을이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가 보로로족 사람들로부터 그토록 극진히 환대를 받았던 것도 따지고 보면 마을 사람들이 착해서라기보다 도대체 뭘 가지고 들어올지 모르는 이 낯선 자를 온갖 물건과 애정으로 감싸 길들이려 해서가 아닐까요? 지면 배열이 이토록 중요한 사회에 이방인이 들어온다는 사실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 되겠지요. 그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마을의 질서에 변화가 따라오게 될 테니까요. 결국 레비 스트로스는 샤먼의 집에 머무르게 됩니다. 샤먼은 그 역할이 ‘삶과 죽음 경계에 서 있다’거든요. 나그네인 레비 스트로스의 위치는 ‘경계값’이었습니다.
글 오선민(인문공간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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