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의 사고, 차이를 욕망하는 우주론
원시는 없다
레비 스트로스가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열대의 원주민들은 카두베오족입니다. 카두베오족은 대부분은 파라과이 강 좌측의 낮은 지역에 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빈한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지, 레비 스트로스를 카두베오족에게 안내했던 백인은 이들이 게으르고 술주정뱅이들이라며 굳이 찾아갈 필요가 없을 거라고 말리기도 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도 몇 가지 점에서는 당황한 모양입니다.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인상을 소개합니다.
한 가족이 막 도살한 ‘제베루(송아지)’ 곁에 몰려들어 고기를 베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벌거벗은 아이 두서너 명이 죽어가는 짐승의 피를 묻히며 그 위를 기어오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아이들은 동물의 도살과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만약 파리의 백인들이 보았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일이었지요. 순진한 아이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장면을 마구 보여주는 셈이니 말입니다. 백인들 입장에서는 아동학대나 다름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카두베오족의 집은 더욱 보잘 것 없었지요. 길고 좁은 헛간 같은 곳에 여섯 가족이 이리저리 모여 살기도 했습니다. 그 안에는 긴 무명천이라든가 호리병박, 짚으로 만든 바구니 따위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어요. 그 사이로 사람들은 널빤지로 만든 칸막이 판자 위에 드러눕거나 앉아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재산에 대한 애착도 없고 미래를 향한 진취적인 목표도 없고. 역시, 입신출세에 허덕이는 유럽 백인들이 본다면 하루하루 닥치는 대로 사는 미개한 삶일 수도 있겠지요.
한편, 이들의 고유한 삶이 지극히 소박하다는 점 외에도 뭔가 일이 잘못되어간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카두베오족 사람들은 자기 부족의 성물인 동물상을 아이의 놀잇감으로 던져주기도 했고요. 전통의상을 입고 백인들에게 어서 사진을 찍어 돈을 내놓으라며 떼를 쓰기도 했습니다. 자기 부족의 전통을 하찮게 여기면서 돈벌이에나 이용하는 그들의 모습은 언뜻 보면 자존심 다 내려놓은 타락한 문화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레비 스트로스는 침착하게 그들의 삶을 관찰합니다. “이 보잘것없는 규모의 집에서도 의미 있는 점들을 발견할 수가 있다.”[『슬픈열대』, 347쪽] 레비 스트로스는 좋은 삶, 나쁜 삶을 선판단하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깊이 바라본 끝에 여전히 그들 삶을 지배하는 어떤 사고방식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깜짝 놀라지요. 남아메리카가 식민화된 지 이미 400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열대의 인디언들은 자기들 관습의 중핵을 끝까지 붙들고 있었지요. 도대체 유럽 문명이 인디언들의 사고방식이나 생활태도의 어떤 부분을 바꾸었는지, 레비 스트로스는 오히려 이 완고한 사람들의 고집에 놀라고 말았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다시 주의를 둘러 보았지요. 카두베오족 사람들은 술에 취하면 잘 우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에도 인간이기에 생의 희노애락을 피할 수 없는 것이죠. 한 사나이가 술에 취해 흥분했습니다. 그는 펄떡 뛰다가 침묵하다가 마지막에는 울고 말았어요. 그러자 그의 곁에 조금 덜 취한 사람이 나타나 그의 팔을 잡고 이리저리 거닐면서 위로와 우애의 말을 해주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한 부족이 무엇을 소유했느냐, 한 인간이 어떤 지위에 있느냐에 눈길을 두기보다는 그들이 무엇에 기뻐하고 무엇에 슬퍼하는지를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왠지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지요.
당시에 레비 스트로스와 같은 인류학자들은 원시문화가 쇠락하는 것을 무척 안타까워했습니다. 선한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그들을 타락시켰다며 죄책감에 몸서리치기도 했지요. 레비 스트로스는 그런 학자들을 향해 반문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원시적’인가? 인류의 미개와 타락을 논하는 당신의 근거는 무엇인가? 당신이 다른 인간의 삶을 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의미의 논리
레비 스트로스는 카두베오족을 관찰하면서 이런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어떤 인간 사회도 고유한 사고의 형식 논리를 갖는다. 열대의 인디언도, 유럽의 파리지앵도.
“한 종족이 지닌 관습들의 전체적 집결에는 언제나 어떤 특정한 양식이 존재한다. 관습들이 체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체계들이 수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또 개별적인 인간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사회도 – 그들의 놀이와 꿈 또는 정신착란의 상태에서 – 결코 절대적인 방식을 창조해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인간사회란 재구성이 가능한 관념의 저장고로부터 어떤 결합을 선택해낸다. 신화, 어린이와 어른들의 놀이, 건강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의 꿈, 또는 심리학적‧병리학적 행위 가운데 표현되어 있는 것과 같은 모든 관찰된 관습들의 목록을 장성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화학원소의 주기표와 유사한 일종의 주기표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현실적인 것이든 또는 단지 가능할 뿐이든 모든 관습들이 이 주기표 내에서 가족으로서 집단을 이루게 되고, 우리들은 사회가 실제로 어떤 것을 채택하느냐를 단지 식별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슬픈 열대』, 354]
레비 스트로스가 파악하는 사회 조작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레비 스트로스는 한 인간이든 한 사회든 체계 없이 살아갈 수는 없다고 봅니다. 즉흥적으로, 그저 한번 놀아볼 심산으로 사회를 구성하는 집단은 없다는 것이죠. 온몸에 피를 뚝뚝 흘리며 죽어가는 송아지 위를 타고 노는 아이를 지켜보는 문화에도 그것을 용인할 만한 사고의 틀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 사고의 체계는 ‘A’에서 ‘가’ 체계로 단순 대체되지 않습니다. 하나의 문화를 지탱하는 사고의 틀은 그 사회 속 한 사람 한 사람에 의해 매번 갱신되기 때문에 어느날 갑자기 집단 전체가 사고의 틀을 바꾸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이 작업은 화학원소의 주기표를 가지고 하는 작업과도 같다고 합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이 대목을 여러번 강조합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인간의 정신은 관념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관념들의 조합에 의해 이런 혹은 저런 사고의 형태가 출현한다고 봅니다. 호모 사피엔스인 이상 인류로서 가질 수 있는 관념은 양이나 사자가 가질 수 있는 정신의 관념과는 다를 것이며, 바로 그러한 수준에서 관념의 범위나 질, 양이 정해집니다. 그렇다면 열대 사람도 유럽 사람도 제 나름으로 관념의 조합을 계속 하는 중일뿐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차등도 있을 수 없지요. 우리는 모두 호모 사피엔스이까요.
레비 스트로스는 인간의 정신은 관념을 조합하기를 멈추지 않으며, 그 조합 방식에 따라 세계관과 살아가는 방식 그리고 윤리를 구성해간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대단히 독특한 하나의 예를 소개합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위와 같은 관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족으로 파라과이의 토바족(Toba)과 팔라가족(Pilaga), 브라질의 카두베오족과 므바야 과이쿠루족(Mbaya-Guaicuru)을 꼽습니다. 그리고 므바야족이 그중 으뜸이라며 이야기합니다.
므바야족은 카스트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첫째, 귀족들이 그들 가문(家紋)에 대등한 문신(文身)이나 형판(型板)을 몸에 채색하면서 그 서열을 표시한다는 점인데, 특히 안면도식(顔面圖式)에 대단한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둘째는 영아살해의 관습입니다. 이들은 출산에 대한 혐오가 너무 심했는데요. 우리들이 흔히 자연적이라고 여기는 감정에 적대적이었습니다. 놀라셨지요? 세상에는 자식 죽이기를 서슴지 않는 부모들로 이루어진 부족도 있는 겁니다.
그럼 부족은 어떻게 영속할까요? 어린애들을 아예 낳지 않을까요? 당연히 아이는 낳습니다. 하지만 태어나더라도 친부모가 키우는 경우는 없고요 양친은 아주 가끔만 찾아갑니다. 아이들은 열네 살이 될 때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칠을 하고 있어야 하고요. 입문식(入門式) 때라야 비로소 자신의 살갗을 내보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거의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한다고 할 수 있지요. 어린이는 왕이라는 요새 사람 말을 들으면 이들은 놀라 자빠질 겁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이들의 영아살해 관습을 문신 관습과 연결시킵니다. 이들이게는 독특한 이분법의 진화론적 사용이 있었습니다. ‘자연에서 문화로, 무정신의 동물로부터 문명화된 인간으로’. 이들은 인간이라면 자연의 다른 종들처럼 자식을 마냥 예뻐할 수는 없다고 본 것이죠. ‘오리도 늑대도 자식을 예뻐하는데 인간인 내가 어찌 자식을 예뻐하겠느냐?’ 그들에게 안면도식은 자신들을 자연종 중의 으뜸으로 만들어줄, 인류관과 문명관을 온몸으로 새기는 행위였습니다. 안면도식이란 “자연에서 문화로, 무정신의 동물로부터 문명화된 인간으로의 이행을 나타내는 경계선”이었지요.
므야바족에게 문신이란 우주론 자체이기에, 그들은 얼굴 어느 구석에서나 그림을 시작할 수 있었고, 어떤 머뭇거림도 없이 지우지도 수정하지도 않고 곧바로 전체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안면문신 장면을 더 보고 싶어 속상해하다가 우연히 종이를 그들에게 내밀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입체가 아닌 평면에도 순식간에 도식을 그려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우주 안에서 차지하는 고상한 그 위치를 의심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세계관을 자랑스러워하며 온갖 표면에 새기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므바야족의 자존심이 열대 최고였던 것은 당연했습니다. 자연의 그 어떤 종들보다, 열대의 그 어떤 부족들보다 자신들의 존재가 고귀함을 그들은 온몸으로 표현했으니까요. 처음 스페인 제국주의자들이 열대에 들어왔을 때 백인 부인들은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지요. 므야바족이라면 감히 백인 따위와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을 테니까요. 어떤 스페인 총통은 부족의 한 아가씨에게 식사 초대를 보냈는데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처녀는 이렇게 생각했지요. 자신을 본다면 그 총통이 청혼을 하지 않을 수 없을 테고, 자신은 그런 하류의 인종과는 도저히 결혼을 할 수 없으니 좋은 말로 초대를 거절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고 말입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그 어떤 인종주의자보다도 자존심이 센 이들 부족을 감탄하면서 바라보았습니다.
야생의 사고, 비적대적 모순의 종합
레비 스트로스는 므바야족과 카두베오족을 관찰하면서 이들의 문화가 정교한 이분법들의 연쇄와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때의 관찰을 발전시켜서 몇 년 뒤 ‘야생의 사고’라고 하는 어마무시한 사유의 폭탄을 만들게 됩니다. 므바야족과 카두베오족은 남자와 여자, 조각과 회화, 추상과 표상, 각과 곡선, 기하학적 모양과 아라베스크 모양, 목과 몸통, 대칭과 비대칭, 선과 면, 형체와 배경이라고 하는 다양한 수준의 이분법을 사용해서 이부족의 생활 윤리를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 부족들에서 남자는 조각에만 몰두하고 여자는 회화에만 몰두합니다. 안면 도식을 그리는 방식도 남자와 여자가 다릅니다. 여기에 추상과 표상을 쓰는 기술이 그의 나이라든가 조건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배치됩니다.
“카두베오족의 양식은 우리에게 일련의 복잡성을 제시한다. 첫째로, 하나의 수준 또는 여러 수준에서 마치 거울로 된 넓은 방처럼 이원주의가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남자와 여자는 각각 조각과 회화, 추상과 표상, 각과 곡선, 기하학적 모양과 아라베스크 문양, 목 부분과 몸통 부분, 대칭과 비대칭, 선과 면, 형체와 배경에 전념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대치는 이 창조적 작업 과정의 끝부분에 가서야 비로소 인식될 수 있는 정태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주제가 착상되어 실천에 옮겨지는 이 예술의 동태적 측면은 모든 수준에서 이 기본적인 이원주의를 나타내고 있다.”[『슬픈 열대』, 374쪽]
그럼 여기서 열대의 사고가 어떻게, 그리고 왜 이분법을 중심으로 전개되는지를 레비 스트로스의 다른 저작 『야생의 사고』로 설명을 드려보겠습니다. 『야생의 사고』에서 레비 스트로스는 열대인들뿐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라면 모두 이러한 관념들의 이분법적 조작에 의해 사고한다고 결론 내립니다.
a. 야생의 사고는 구분의 논리다
간단히 말해 레비 스트로스가 말하는 ‘야생의 사고’란 사고의 근원적 기술입니다. 그것이 곧 이분법의 활용이구요. 레비 스트로스는 그런 사고가 점진적으로 거대한 형식을 구축해나가는 것을 토테미즘이라고 합니다. 레비 스트로스가 말하는 토테미즘은 동식물을 토템으로 삼는 부분에 주목하는 여느 인류학자들의 토템론과 그 출발이 같습니다. 그런데 레비 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 안에서 ‘토템’이 실체적인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곰을 토템으로 삼는 부족이 있다 해도 그들에게 곰 그 자체가 별로 중요하지는 않았을 거라고요.
야생의 사고의 핵심은 사람들이 자기들 문화의 논리를 동물종을 기호로 삼아서 꾸민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점은 동화를 잘 생각해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화 속에서 인간은 마녀와 사냥꾼과 늑대와 함께 문제를 겪고 해결합니다. 이때 인간, 마녀, 사냥꾼, 늑대는 「빨간모자」라는 이야기의 차원 안에서 소분류로서 동등한 지위를 부여받습니다. 인간, 개구리, 마녀, 늑대는 일차적으로는 우주 안 다양한 존재들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기호가 됩니다.
이렇게 동물종을 통해 우주 안에서 활약하고 있는 대상들을 구분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선 우주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포착해서 판별하기 위해 인간은 그들 각자의 생태와 역할에 주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연 안에서 곰과 개구리가 있는 것은 곰과 개구리의 다름이 필요해서이겠지요. 우주는 그러한 종적 차이들이 좋게 혹은 나쁘게 합치를 이루는 매번의 모습들로 전개됩니다. 차이 나는 항들의 복합적 조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종적 차이로 동등하게 하위 분류할 수 있다는 말은 이들 전체를 묶어주는 상위 분류가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즉 이 모든 종적 차이를 존재케하는 초월적 범주가 있다는 것이죠. 레비 스트로스는 그것을 자연 또는 우주라고 봅니다. 다음의 표를 보면 종적 차이화는 결국 추상적인 수준에서 거대한 우주론의 일부가 됩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이렇게 파악되는 우주를 “잇따른 대립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연속체”(레비 스트로스,『야생의 사고』, 218쪽)라고 합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열대를 비롯 전세계의 신화를 분석해서 차이 나는 동물종들의 배치를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대강 위와 같은 예시표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자 어떻습니까? 전체적으로는 공간과 시간의 이분화, 여름과 겨울의 이분화, 그 안에서 방위의 이분화, 또 그 안에서 색의 이분화, 식물종의 이분화가 나타납니다. 관념들은 이러한 축들 안에서 다시 정교하게 계속 배분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거대한 종합을 향해 움직이지요.
b. 이분법은 모순을 긍정한다
이분법을 통한 거대한 종합? 저 고매한 서양의 문명관도 모순을 지양하는 이분법적 변증의 논리에 바탕을 두지 않았나요? @.@
변증법의 기본 논리는 정반합입니다. 들뢰즈의 설명에 따르면 이 논리는 나와 나 아닌 것의 이항대립에서 출발합니다(들뢰즈,「제1장 비극」,『니체와 철학』참고). ‘나’(정)는 늘 ‘나 아닌 것’(반)에 의해 정의됩니다. 변증법은 이항대립을 모순의 극복도구로 사용합니다. 즉 항의 차이는 극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모순을 해결시켜 줄 어떤 지평이 필요합니다. 변증법적 사고가 가장 큰 활약을 한 것은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배에서였지요. 유럽을 문명이라고 하는 ‘정’으로 하고 그 유럽과 반대되는 시공간으로서 야만인 ‘반’이 논리적으로 도출되었습니다. 이때 아프리카와 중남미와 같은 다른 문명권의 모든 상식과 통념이 유럽의 ‘정’을 기준으로 설명되었습니다. 이 ‘정’은 그 자체로 긍정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반을 지양함으로써 즉 ‘정’의 부정적 요소인 반을 제거함으로써 합으로의 길을 닦는 의미를 부여받습니다. 19세기와 20세기의 제국주의는 문명화의 이름으로 유럽식 자본주의를 합으로 가는 ‘정’으로 삼았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이와는 다릅니다. 그는 브라질 원주민들의 이분법적 구분 논리에서 전혀 다른 논리형식을 읽습니다. 원주민들에게는 우선 나와 아닌 것은 부정적으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같은 저수지에 사는 개구리와 연꽃은 서로 생김과 능력이 다릅니다. 비교의 공통 척도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둘 사이에서 지양되어야 할 공통항은 없습니다. 이런 차이가 때로는 적대적 대립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갑자기 개구리가 늘어난 습지에 연꽃인들 건강하게 만발할 리가 없지요. 자기 생명력을 과도히 내뿜는 것은 다른 생명력을 잠식하는 일이 됩니다. 순식간에 이런 일은 일어나지요.
레비 스트로스는 열대의 이분법은 바로 이런 조건에서 출발한 사고라고 봅니다. 우선 나와 나 아닌 것이라고 하는 구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내가 먹을 대상인지(합치를 이룰 수 있을지), 내가 먹힐 대상인지(불합치를 이루게 될지)는 구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디언들의 시야는 확실히 광대했지요. 자연 안에는 이자 관계만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내가 곰을 잡아먹은 덕분에 포식자에게 덜 시달리게 된 다람쥐 부족에게는 잠시의 여유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또 나는 죽지만 그 몸은 썩어 다시 곰의 먹이를 낳을 대지의 양분이 되기도 합니다. 거대한 생멸의 순환 아래서 모든 관계는 상호의존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정과 반이라는 단순한 대립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국면에서 적대적으로 전개되더라고 해도 시야를 넓혀보면 결국 순환의 리듬을 만들게 되니까요.
인디언들은 이 점에 주목해서 이항대립적 관계들을 다차원적으로 중첩시키면서 한 인간이 우주 안에서 얼마나 많은 동식물과 관계 맺으며 사는지를 보려고 했습니다. 같은 이항대립에서 출발한다지만 열대를 정복한 문명인들의 이분법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란 결국 우주적 차원의 관계성을 통찰하려는 시도라고 봅니다. 나와 다른 것들에 끊임없는 주의를 두면서 어떻게 그것들과 생기로운 순환적 관계를 이룰 것인가? 여기에 야생의 사고가 갖는 위력이 있다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우리, 므야바족을 잠깐 다시 방문해볼까요? 므야바족에게는 하나의 신화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우월함과 강대함을 설명해주는 신화인데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지상(至上)의 존재인 고노엔호디가 인류를 창조하기로 결정하였을 때, 구아나족이 맨 처음 지상(地上)에 출현하도록 되어 있었고, 그 다음에 다른 종족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농경은 구아나족에게, 수렵은 다른 종족에게 할당되었다. 그런데 인디언족들의 신들 가운데 하나인 사기꾼 신은 므바야족이 구멍 밑바닥에 잊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들을 밖으로 나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남겨진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그들은 오직 다른 모든 종족을 억압하고 약탈하는 짓밖에 할 수 없었다. 이보다 더 심오한 사회계약이 있었겠는가?”[『슬픈 열대』, 361]
자, 어떠세요? 정말 무시무시한 사회계약론입니다. 우주가 자신들에게 그러한 역할을 허락했으니 힘껏 그 본분에 충실하겠다!입니다. 선악을 완전히 넘어서 있습니다. 자연 안에는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고,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다른 이를 억압하고 약탈하게 됩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비참한 강탈자의 운명을 타고난 므야바족을 동정하지 않습니다. 상호의존적 관계가 중요한 열대이니, 므야바족 사람들은 자신들의 억압과 약탈이 반드시 호의와 선물로 상쇄되어야 함을 알았을 테니까요.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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