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과 책과 사람과 삶의 젊은 이야기
- 3등 정은숙
나는 뉴욕에 가 본 적이 없다. 지금의 마음으로는 앞으로도 갈 일이 없을 듯하다. 내게 뉴욕은 소설이나 산문에서 혹은 영화 속 배경으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좀 멀고 거대하고 복잡하고 화려한 한편 우울한 도시, 호감보다는 비호감 쪽으로 부등호의 입이 열리는 곳. 내게는 이러한 곳을, 세상의 누군가는 굳이 찾아가 지내면서 겪은 사정을 전해 주겠다고 하니 구경하기 좋아하는 나로서는 관심이 생길 수밖에.
책은 10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가는 “뉴욕의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삶의 순간을 포착한 후, 이와 관련해서 문제의식을 품은 뉴욕의 지성인을 발굴(6쪽)”했다는데 이들이 10명이고 각 한 장을 맡은 형식이다. 1장의 스콧 피츠제럴드부터 10장의 에릭 호퍼까지 책을 통해 익힌 낯익은 이름이 제법 있어 반가운 느낌도 들었다. 내가 알던 그 작가가 뉴욕에서 이렇게저렇게 살고 이런저런 활동을 했더란 말이지? 이 책의 작가는 또 그들의 자취를 따라 다니면서 세상의 이치를 배워 나가고 있다는 것이고?
그리하여 이 책을 읽는 일은 책을 읽기 전에 느꼈던 단순한 호기심을 충족하기보다는 점점 커지고 있는 세상을 만나는 일로 바뀌었다.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미처 알지 못했을, 알더라도 훨씬 뒷날 훨씬 어려운 기회로 마주했을 세상살이의 여러 모습들, 모르고 살아도 괜찮겠지만 알고 난 뒤 달라질 내 마음가짐과 태도와 작은 실천 하나가 이 책을 읽기 전의 나와는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을 것을, 무엇보다 글을 읽는 내가 먼저 알아채고 있었던 것이다.
책은 뉴욕만큼이나 거대했다. 읽을 분량도 많고, 담긴 내용도 많고, 언급하는 요소들도 방대했다. 이 책을 쓰면서 작가가 참고했다는 책만 더 읽어 보겠노라고 계획하는 일조차도 만만치 않을 범위였다. 그런데 이 작가는 이 모든 일을 다 했다. 뉴욕에서 살았고, 뉴욕을 살폈고, 뉴욕과 연결시켰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하면 이 일을 다 해내지? 책 속 열 명의 작가만큼이나 대단한 열한 번째의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가 이 책을 왜 썼을까 하는 물음도 책을 읽는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정규 교육과정을 벗어나 자유로운 형태로 배우고 익히면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을 삶의 주요 요인으로 삼았다는 작가, 이 책을 쓰는 일이 작가로서는 그대로 사는 일 자체가 아니었을까? 이 책에서는 뉴욕이 작가의 삶의 터전으로 등장하지만, 어쩌면 꼭 뉴욕이 아니었더라도, 우리나라의 어느 작은 도시였더라도, 아니 세상 그 어디였더라도, 작가는 이 책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이 작가라면, 이 책을 쓴 이라면, 이 믿음이 생겼다는 게 독자인 나에게는 참 고마운 보상이었다.
작가의 관심은 작가 자신에게만 쏠려 있는 게 아니었다. 요즘처럼 험한 시절, 온통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고 그들과의 관계에 시달린다며 호소하는 이들이 많은 세상, 내가 먼저 살고 봐야겠다며 내 안으로 집중하는 풍경이 더 흔한 이 가여운 시절에, 자신의 주변 사람들 쪽으로 과감히 시선을 넓히고 주목하면서 이를 헤아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이 작가. 사람은 저마다 사는 몫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확연해지는 순간들을 글을 읽는 종종 겪었다. 그때마다 홀로 무안했다가 부끄러웠다가 쓸쓸했다가 그래도 작가 덕분에 흐뭇해졌다가를 되풀이했고.
작가는 끝없이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문화를 정의하는 것은 권력이며, 문화에 정의되는 것은 내 일상, 내 정체성, 내 인간 관계다. 그러나 문화를 생산하는 것은 나와 타인을 동시에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다. 내 문화마저 몇 년 만에 끊임없이 낯설게 변하고 마니, 결국 모두가 모두의 문화를 ‘배우고 때때로 익히는’ 수밖에 없다.(112쪽)”고. 작가가 독서로 익힌 바를 뉴욕이라는 거대도시의 현장에서 찾아 적용해 보는 과정을 지켜 보며 대리체험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가슴벅찼다. 책을 읽는 즐거움, 보람, 사명감까지 한꺼번에 몰려왔으니.
그리고 다음은 아주 절실하게 다가왔다. “여력이 닿는 데까지 주변 사람을 돌보려는 애정, 망가져 가는 지구의 생태계의 고통에 공감하는 마음. 이것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존재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212쪽)”. 결국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요소는 크고 거대하고 막막한 무언가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흔해 보이는 진실이라고 쉽게 마주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맞이할 마음을 가진 이에게만 보이는 법이므로.
“거대한 현실은 개인이 바꾸기 쉽지 않고, 세상의 역사는 개인의 영달과 상관없이 흘러간다.(147쪽)” 그래도 나는 우리 각자가 저마다 살 가치가 있는 개인임을 잊지 않고 서로 연대하기를 바란다. 작가의 마음도 같을 것을 믿는다.
청년, 어떻게 다음으로 나아갈 것인가?
3등 김현수
한 7년 전쯤 군 생활 중 독서에 재미를 붙여 틈틈이 책도 읽고 독후감도 남겼다. 그 후 대학을 졸업한 뒤엔 학원 파트 강사로 일하면서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국어 겸 독서논술 수업을 담당했다. 중1 친구들과는 매달 다양한 장르의 책을 선정해 함께 읽었고, 중2 친구들과는 한국 근현대 소설을 시대 순으로 살펴보는 작업을 했었다. 책도 읽고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니 그때만큼 즐거운 시절이 없었던 것 같다. 일을 그만둔 뒤에는 동네의 한 서점에서 열리는 독서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첫모임 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무더운 여름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고 모인 사람들 중에는 내가 막내 축에 속했었고, 3·40대 분들이 책을 매개로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모습은 매우 낯설면서도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내 취미가 ‘혼자하는 독서’에서 ‘함께 읽고 이야기하는 독서 모임’으로 바뀌게 된 순간이었다.
내가 이 책을 고르게 된 것 역시 매우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제목만 보아도 나의 삶과 매우 밀접하게 맞닿아 있었기에 친숙했다. 이 책의 작가분이 겪으신 어려움들, 예를 들어 이 정도면 충분히 재밌을 거라고 아이들 눈치를 보며 책을 소개한 경험, 내가 진행하고자 했던 방식이 순식간에 무너지던 경험 등등이 너무나도 익숙했기에, 나의 은밀한 일기장을 보는 듯 부끄럽기도 했다.
한참 공감을 하며 이 책을 읽던 와중 작가의 반복적인 고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들에게 익숙한 학교, 가족, 마을, 세상에 대해 아이들에게 분명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있으나, 이를 어떻게 전달하고자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우리의 수업에서 녀석들과 나는 평등하지 않다. 그것을 깨달았지만 나는 그를 극복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때도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을 찾는다.(72쪽)
그래서, 나는 녀석들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지?(101쪽)
부끄럽게도 그때 나는 답이라 할 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정답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겠지만, 만일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녀석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할 것이다.(174쪽)
나는 녀석들에게 자신들의 세상을 돌아보고 곱씹어 보기를 권해왔다.(187쪽)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건 어떤 정답이 아니라, ‘나의 경우’뿐이다. 그 순간 나는 말문이 막힘을 느낀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실천했던가.(187쪽)
이와 같은 일련의 고민과 질문들에 대해 청소년 친구들은 종종 우리를 충분히 놀라게 할 만한 통찰의 답변을 보여준다. 학교를 가는 이유에 대해선 “친구들이랑 놀려고 간다니까요.”(58쪽)라고, 본인이 속한 공동체에 대해서는 ‘공동체 속의 갈등은 필요하다. 그것이 있음으로 우리는 서로의 의견을 알고 타협점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우리가 공동체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58쪽)’라고 말이다.
한편 내 입장에서는 작가의 이러한 고민들이 ‘청년’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어떠한 역할과 태도를 요구하는지에 대해 본인 스스로 고민하는 과정이라고 여겨졌다. 작가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같은 청년의 입장이기에 작가님의 고민은 곧 나의 고민이 되었다. 나이로 보면 청소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 스스로 내가 어른이라는 자각은 크게 해 본 적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작가의 고민 그 자체가 나에겐 답변의 힌트가 되었다. 익숙함 속에 숨겨져 있는 새로움·낯섦을 접하게 되었을 때, ‘그래서 어쩌라고? 학교를 없애자는거야?’라는 식의 날카로운 거부반응을 보일 수도 있고, ‘맞아, 이런 교육을 받아서 억울해’라며 자신의 과거를 자학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자신의 위치에서 그러한 새로움들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한 번쯤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혼자가 어려우면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 해결해 보는 것도 좋겠다. 그것이 내 나름대로 내린 ‘청년’의 역할에 대한 결론이다.
그렇다면 작가 본인은 무어라 대답할까. 그 대답은 이 책의 4부 하워드 진의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에 대한 감상에서 알 수 있었다.
적어도 무언가 해보기도 전에 어차피 안 될 거라는 생각으로, 내가 뭘 어떻게 하건 간에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으리란 단정으로 대답을 정하지는 않길 바란다.(204쪽)
이 문장은 청년인 작가가 청소년들에게 말해주고자 했던 최종 답변이면서도, 이 책을 읽는 또다른 청년들에게 하는 질문이라고 느껴졌다. '책을 읽으며 느꼈던 혼란의 감정들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리고 미래의 어느 순간이 왔을 때 다시 한번 그때의 경험을 생각해보면 된다.' 딱 여기까지가 청소년에게 하고자 했던 답변이라면, ‘이 책을 덮는 그 순간부터는 무엇을 고민해야 하며, 답을 내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할지는 온전히 너(청년)의 몫인 거 알지?’라고 말하는 듯한 작가의 음성은 청년들에게 한 질문이 된다. 즉 청소년들에게 한 답변이, 동시에 청년들을 향한 질문으로 전환되는 연쇄 고리를 만든 것이다. 이를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덕분에 나도 머리 쥐어짜며 고민하게 되었고, 왠지 이 모습을 작가가 본다면 매우 흐뭇해하지 않을까 싶다는 점이다.
가르침과 배움의 응수타진
- 3등 박규창
배우는 것은 무엇이고, 가르친다는 것은 무엇일까? 가르치는 일이 선행하고, 배우는 일은 뒤따르는 것일까? 배움과 가르침에 대한 이러한 구도는 가르칠 앎이 따로 있음을 전제한다. 그리고 구체적 내용과 무관하게 그 가르침은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위계를 설정한다. 규문에서 3년 동안 청소년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동안 이 구도를 깨고 싶었다. 아이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수업을 준비했고, 즐겁게 공부할 수 있는 방식도 고민했다. 덕분에 아이들의 사유가 넓어지는 것이 보였고 나도 그들로부터 자극받았다. 그러나 끝내 ‘나는 청소년들을 가르치고, 청소년들은 나에게 배운다’는 위계적 구도를 극복하지 못한 듯하다.
『일요일 오후 2시, 동네 청년이 중학생들과 책 읽습니다』는 저자의 관점에서 재구성된 1년 동안의 배움과 가르침에 대한 기록이다. 이 기록에서 가장 놀란 것은 저자가 자신과 함께 공부한 시간이 절대로 쓸모없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한 대목이었다. 이 책을 따라가다 보니 이러한 자신감이 근거 없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본인이 가르치는 동안 배웠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배웠기 때문에 가르칠 수 있었다. 물론 이때의 배움은 역할 바꾸기 같은 차원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가르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전제를 돌아보고, 그것을 계기로 새롭게 가르칠 것들을 고민하게 되는 과정 자체가 배움이다.
「여름에 읽은 집 이야기」 챕터에서 저자는 자신이 전형적인 핵가족의 이미지를 갖고 수업했음을 그리고 그러한 이미지를 갖고 아무리 이야기한들 실제로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실천적 앎을 발명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됐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가족에 대하여 이 정도로 ‘진보적인’ 담론을 이야기해도 괜찮을까? 내가 너무 ‘보수적인’ 관점에 매달리는 것일까? 가족의 문제는 모두 제각각인데, 내가 너무 일반론처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차명식, 『일요일 오후 2시, 동네 청년이 중학생들과 책 읽습니다』, 북드라망, 104쪽) 대체로 이런 고민은 전달돼야 할 가르침이 따로 있다고 생각할 때 하게 된다. 저자가 이런 고민을 하게 된 것은 아이들이 몸담고 있는 가족의 현실이 텍스트와 어긋나 있음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그는 ‘집’이란 주제를 새롭게 질문하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본인도 ‘집’에 대한 새로운 질문에 이를 수 있었다고 한다. 저자가 자신과 함께한 공부가 그들의 일상과 분리되지 않는다고 자신한 것도 이미 그들과 함께한 공부가 자신에게 영향을 끼쳤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배운 만큼 가르친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의 매력은 배움과 가르침의 응수타진(應手打診)을 맛볼 수 있다는 데 있다. 세부적인 결론도 곱씹어볼 만하지만, 그보다는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매우 흥미진진하다. 아이들의 반응을 살피고, 새롭게 수업을 고민하는 과정은 상대방의 수에 응하고, 그로부터 다음을 예측하는 바둑의 수 싸움과 다를 바 없다. 가르치는 이는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재밌게 책을 읽어올지 고민하고, 배우는 아이들은 때로는 재밌게 읽고 열성적으로 참여하다가도 때로는 예상치 못한 반응으로 가르치는 자의 뒤통수를 친다. 당황한 저자의 모습을 상상하자니, 나만 가르침의 어려움을 겪는 게 아니라는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동시에 이 과정에 즐겁게 참여하는 저자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다. 이번에 계획한 수업이 적절하지 않다면, 다른 경로를 모색하는 모습도 결코 무겁게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기꺼이 전 과정을 즐기는 프로 바둑기사처럼 느껴졌다. 저자 본인이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는 과정에서 이미 배우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것이다.
이 책 덕분에 배움과 가르침에 대해 조금 가볍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 가르치는 데 미숙하다는 것은 배우는 데 미숙하다는 뜻이다. 내가 배우고 가르치는 데 있어서 미숙하듯이, 나와 함께 공부하러 온 아이들도 공부하는 데 있어서 미숙하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도 분명 배우게 되는 바가 있다.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공부하는 힘을 받았듯이, 아이들도 나와 함께 공부했던 것이 언젠가 그들에게 힘이 될 수 있으리라. 이 책을 통해 완벽하게 가르치는 교사와 배움에 대한 이분적 구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완벽한 교사와 학생은 없다. 배우고 가르치는 데 있어서 미숙한, 그러나 배우고 가르치는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는 ‘학생(學生)’들이 있을 뿐이다.
사방으로 향하는 미완의 선분
- 3등 이기헌
오래 다닌 직장을 그만두고 시작한 백수 생활은 나를 공부의 장으로 이끌어 주었다. 학창 시절에도 안 했던 공부를 마흔이 훌쩍 넘어서 한다고 책상 앞에 앉았다. 생각보다 재미있는 공부에 신이 났지만 공부해서 많이 알고 싶고, 누구보다 잘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안달복달했다. 이번에 선물 받은 『모비딕, 삶과 운명을 탐사하는 두 개의 항해로』를 읽고 내가 안달하며 공부했던 이유와 앞으로의 공부 방향을 생각하게 되었다.
저자는 『모비딕』을 읽고 에이해브와 이슈메일이라는 두 인물에게서 찾은 철학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에이해브는 오직 흰고래 정복을 향해서 미친 듯이 질주하는 인물이다. 그를 보면서 ‘잘’하는 공부만을 향해 있는 내 공부가 에이해브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가 제시하는 새로운 철학은 내게 어떻게 공부의 바다에서 유영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저자가 주목한 에이해브 선장은 획기적인 방향의 전환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는 다른 선장들은 포기하는 험난한 상황에서도 새로운 도주로를 개척한다. 문제를 만났을 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는 에이해브를 보면서 저자가 그동안 생각해오던 철학의 태도를 그대로 갖춘 인물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결말이 파멸로 향한다는 것이다. 흰고래를 잡아 죽이기 위해 모든 미스터리를 파헤치고 끝없이 질주하여 완전한 인간이 되려고 하는 그에게 죽음만이 기다릴 뿐이다. 여기서 저자는 완전함을 추구하는 에이해브가 저자 자신이 생각했던 철학적 인물이 아니라고 중간 결론을 짓는다. 저자는 이 지점을 새로운 철학을 여는 또 다른 시작점이라 말하며 이슈메일을 통해 다른 공부의 방향성을 찾는다.
“이슈메일은 대답한다. 내게 닥치는 모든 사건, 인연들을 포함한 모든 우주가 나에게 걸어오는 그저 재밌는 장난일 뿐이라고. 이 유쾌한 희롱에 박자를 맞추어 대담한 춤 스텝을 밟을 수 있을 때 당신만의 리듬을 가진 로고스가 탄생한다.”(『모비딕, 삶과 운명을 탐사하는 두 개의 항해로』, 오찬영, 북드라망, 135쪽)
저자의 시선이 두 번째로 향한 이슈메일은 바다에서 죽다 살아난 경험을 했다. 위기가 닥친 상황에서도 동료들에게 유머를 던지는 유쾌한 사람이다. 그는 살아남음의 경험을 체득했다며 즐거워할 뿐이다. 에이해브 역시 숱한 경험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에이해브는 욕망을 이루기 위해 꼭대기를 바라볼 뿐 이슈메일처럼 경험의 순간들을 즐기지 못한다. 에이해브가 끊임없이 어딘가로 달려가고 돌진하는 방향성이라면, 이슈메일은 모든 것이 그에게로 와 자신을 통과하는 방향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슈메일은 기도한다. “쾰른 대성당이(……) 미완성인 상태로 남아 있듯이, 나의 고래학 체계도 미완성인 채로 남겨둘 작정이다. (……) 신이여, 내가 아무것도 완성하지 않도록 보살펴 주소서!” 완성하지 않음을 기도하다니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그는 완전함에 대한 갈망이 없다. 그는 왜 미완을 기도했을까? 에이해브처럼 완전한 인간이 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자가 본 이슈메일은 세상을 온전히 느끼고 모든 것에 접속할 수 있도록 언제든 눈과 귀를 열어두고 즐기는 사람이다. 온 사방천지가 세상과 통하는 로그인 창이고 계속적인 운동성으로 꿈틀거릴 뿐이다.
저자는 에이해브를 탐구하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철학이 에이해브적 철학이 아님을 발견한다. 여기에서 ‘알고 보니 이게 아니네?’하며 허무함으로 끝내지 않고, 또 다른 철학의 시작점을 이슈메일에게서 찾았다고 말한다. 저자에게서 이슈메일의 유쾌함이 느껴졌다. 저자는 이미 미완을 기도하는 이슈메일의 철학이 장착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되었다.
저자가 두 인물의 철학을 선으로 묘사하며 대조시키는 것은 아주 인상적이다. 에이해브가 ‘상승-정점-추락’의 곡선이라면 이슈메일은 사방천지로 향하는 수많은 미완의 선분이다. 계속적인 운동성으로 모든 인연, 사물, 사건들과 자유롭게 연결됨을 선분으로 그리고 있다. 살아남음의 짜릿한 경험도 하나의 선분이고, 공부하다 느끼는 괴로움도 하나의 선분이다. 선분은 그 자체로 온전하다.
나는 공부를 대할 때 에이해브처럼 완전하고자 욕심냈음을 알았다. 이후에 오는 괴로움이라는 함정에 몇 번 빠지고도 번번이 오르락 내리락하며 같은 방식으로 살고 있었다. 저자는 에이해브처럼 수수께끼를 다 해결하려는 고독한 갈증에 목말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슈메일이 추구하는 미완의 선분으로 생각해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완전함을 추구하며 꼭대기만 바라본 나의 공부법은 이제 안녕이다. 나는 공부의 바다에서 사방으로 연결됨 자체를 즐기며 오래도록 유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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